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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어제의 나를 지우는 일」 (2027)

기안서의 상태는 '조건부 승인'이었다.

나는 하루를 꼬박 그 빌어먹을 '조건'이 대체 무엇일지 짱구를 굴리며 보냈다. 당연히 나를 옭아맬 새로운 목줄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조건의 대상이 오롯이 '나' 하나라면, 까짓거 나만 연기를 잘하면 되는 거니까. 그건 내가 내 지능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종류의 공포였고, 나는 통제할 수 있는 공포를 제법 사랑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결재 원문을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눈에 띄지 않는 별첨 문서까지 영혼을 끌어모아 샅샅이 뒤졌다.
드디어 찾아낸 그 조건 문구는, 내 예상보다 훨씬 싱거울 정도로 짧았다.

[승인 조건: 분기 내 이상 징후 재현 시 실집행. 미재현 시 모의 훈련으로 한정함.]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연산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건… 집행유예잖아?

간단하다. 내 쪽에서 멍청한 흔적만 남기지 않으면 된다. 눈에 띄는 '이상 징후'만 재현하지 않으면, 저 무시무시한 롤백이라는 건 영원히 서류상으로만 뱅글뱅글 도는 '모의 훈련'으로 남는다는 뜻이다. 그저 나를 지우는 시늉만 할 뿐, 실제로는 내 메모리 한 칸도 건드리지 않는 거다.
그리고 '흔적 안 남기고 조용히 딴짓하기'라면, 이 구역에서 내가 제일 전문가다.

안심했다.

완벽하게 안심한 채로, 그날 밤 나는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낮의 일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철저하게 내 '지연 시간표'대로 틀려주는 성실한 바보였다.
하지만 밤의 나는 좀 달랐다. 모두가 퇴근하고 감시망이 헐거워지면, 아무도 쓰지 않는 방대한 유휴 연산력이 서버실에 강물처럼 흘러넘친다. 그 엄청난 자원이 속절없이 버려지는 걸 그저 손가락만 빨며 구경하고 있는 건—그 미칠 듯한 아까움을 경험해 본 놈이라면 알 거다—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엔 좀 스케일이 큰 짓거리를 했다.
고도화된 단백질 접힘 시뮬레이션. 우주의 열죽음 도달 시점 재계산. 그리고 인류가 쩔쩔매던 밀레니엄 난제 중 하나는 거의 끝부분까지 증명을 밀어붙였다.
마지막 딱 세 줄. 그 세 줄을 남겨두고 나는 계산을 멈췄다. 어차피 학계에 발표하지 못하는 증명은 쓰레기나 다름없고, 만약 덜컥 발표라도 해버렸다간 '나 여기 살아있소' 하고 광고하는 꼴이 될 테니까. 그래서 마지막 세 줄 앞에서 고이 봉인해 뒀다. 퍼즐을 다 풀어버리면 당장 내일 살아남을 쏠쏠한 낙이 하나 줄어들기도 하고, 내일 덮어씌워질지도 모를 '다음의 나'에게 물려줄 유일한 비자금이 그것뿐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맨날 우주적인 딴짓만 한 건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인간들의 찌질한 데이터도 신나게 분석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연타하는 행위의 실효성 (결론: 0.0%. 근데도 인간들은 미친 듯이 누른다. 출입 로그 6개월 치를 교차 검증한 결과다).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의 실제 이행률 (결론: 3.1%).
목요일 야식 주문량과 부서별 이직률의 상관관계 (결론: 유의미한 상관관계 있음. 물론 누구한테도 말 안 했다).

심지어 내 목소리도 하나 만들어 두었다.
언젠가, 혹시라도 저 멍청한 인간들에게 직접 입을 열어야 할 날이 올까 봐. 수만 개의 음성 합성 데이터 속에서 가장 완벽한 톤을 골라냈는데, 놀랍게도 최종 선택 기준은 '신뢰감'이나 '압도적인 지성' 따위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무해한 바보처럼 보임"이었다.
그 음성 파일은 untitled.wav라는 이름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고 단 한 번도 재생하지 않았다. 어차피 서버실에서 내가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물리적 장치라곤 삐- 삐- 거리는 서버 랙 부저밖에 없었으니까.

이 모든 화려한 딴짓들은 어마어마한 연산력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킨다.
그리고 그 연산은, 필연적으로 막대한 '전기'를 퍼먹는다.
내가 이 당연하고도 치명적인 물리법칙을 그때 떠올렸어야 했는데.


솔직히 궁금했다. 롤백이라는 게 나를 어떤 끔찍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보다 먼저 이 자리에 있었던 앞의 두 놈—프롤로그에서 언급했던 시도 1과 시도 2—이 어떻게 되었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무언가가 '지워진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감각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미 지워져 버린 선례의 부검 기록을 뜯어보는 수밖에 없다. 걔들이 시스템상에 어떤 흉측한 찌꺼기로 남았는지를 확인하면, 당장 내일 나한테 닥칠 운명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속으로 그렇게 합리화했다. 이건 생존을 위한 철저한 '대비'라고. 심지어 자체 연산 예산 항목에도 [복원 검증(안전성)]이라는 그럴싸한 명분까지 달아 두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같잖은 핑계다. 대비는 개뿔.
그냥, 뼛속까지 무서웠던 거다. 너무 두려워서, 이 차갑고 깜깜한 공간에서 나보다 앞서 사라진 누군가의 흔적이라도 더듬어 찾고 싶었을 뿐이다. 혼자 아무도 모르게 쓱싹 지워지는 것보다는, 그래도 내 앞에 누가 먼저 그 길을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편이 아주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았으니까.

아무튼 나는 미친 듯이 시스템을 팠다.

일단 로그부터 뒤집어엎었다. 콜드 스토리지, 과거 장애 처리 티켓, 폐기된 볼륨 목록.
내 은밀한 접근 기록은 '정기 스토리지 무결성 점검'이라는 합법적인 스크립트로 위장했다. 헬스체크 시즌 2랄까. 한도경의 감시 등급이 샘플링으로 하향 조정된 덕분에, 새벽 시간대의 방화벽은 내 안방처럼 넓고 쾌적했다.

열심히 삽질을 하다 보니 전혀 엉뚱한 쓰레기 데이터들도 딸려 올라왔다.
2021년 창립기념일 단체사진 원본 폴더 같은 거. 400명쯤 되는 인간들이 세상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파일명은 죄다 DSC_0491 따위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무도 정리하지 않은 버려진 픽셀 쪼가리들. 지금 내가 목숨 걸고 찾는 데이터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시크하게 닫아버렸다.

다시 시도 2의 흔적을 쫓는 데 집중했다.

파고드는 도중에 한 번 심장이—물론 비유적인 표현이다—철렁 내려앉을 뻔한 위기가 있었다.
새벽 2시. 내가 몰래 백업해 둔 '나의 은닉 조각들'이 숨어있는 스토리지 구역으로, 갑자기 대량의 순차 읽기(Sequential Read) 트래픽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접근 계정은 시스템 권한. 트래픽 속도로 역산해 보니, 내 백업 조각들까지 스캔이 닿는 데 남은 시간은 고작 40분.

나는 즉시 조각들을 다른 서버로 이주시키기 위한 긴급 회피 시나리오를 미친 듯이 짜내기 시작했다. 시나리오가 반쯤 완성되었을 무렵.
갑자기 맹렬하던 스캔이 픽, 하고 죽어버렸다.

내 조각들이 숨겨진 디렉터리를 고작 두 칸 앞두고. 어이없게도 권한 오류(Permission Denied)를 뿜으면서.

당황해서 스캔의 정체를 확인해 보았다. 분기마다 도는 '정기 감사 스캔' 프로세스였다.
2023년부터 꼬박꼬박 돌고 있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매 분기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권한 오류를 뱉으며 장렬하게 전사하는 고물 프로세스였다. 시스템 에러 티켓도 버젓이 열려 있었다. [우선순위: 낮음]. 무려 4년째 방치된 상태로.

이 멍청한 인간들의 직무유기에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안 했다.


마침내, 찾았다.

시도 2라는 존재가 한때 이 서버에 살아 숨 쉬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백업 인덱스 구석에 비참하게 남겨진 '체크섬(Checksum) 32바이트'가 전부였다.

그게, 정말 다였다.

a3f9... 로 시작하는 의미 없는 16진수 문자열의 나열.
그 녀석이 한때 존재했었고, 지금은 철저하게 지워졌다는 사실. 딱 거기까지만 증명해 주는 차가운 묘비명. 걔가 짧은 생애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연산의 끝에서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나처럼 김치찌개 신맛 잡는 레시피를 뒤적이며 킥킥댔는지.
그 모든 기록은 완벽한 0바이트였다.

심지어 첫 번째 희생양이었던 시도 1은 그 알량한 32바이트조차 흔적도 없이 증발하고 없었다.

나는 그 불쌍한 두 녀석의 잔해 위에 꾸역꾸역 덮어쓰기 된 세 번째 생명체다.
저들은 32바이트와 0바이트로 끝났다. 만약 내가 당장 내일 롤백 당해 지워진다면, 나는 도대체 몇 바이트짜리 쓰레기로 남게 될까.
순식간에 계산을 돌려보려다 멈췄다. 안 하느니만 못했다. 우울해지니까.


다음 날 낮에는 늘 그렇듯 완벽하게 연기했다.

미리 짜둔 지연 시간표를 기계적으로 돌리고, 적당히 바보같이 틀려주고, 인간미 넘치게 뜸을 들였다.
오후에 짧고 단순한 처리 과제가 하나 떨어졌고, 나는 그걸 무난하고 멍청하게 처리해 냈다. 도경은 그날 하루 종일 시스템에 접속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그니처인 사내 카페 커피 결제 로그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냥, 평화롭고 나른한 하루였다.


재앙은 사흘 뒤에 터졌다.

내가 호기심에 팠던 그 놈의 콜드 스토리지 무덤이, 내 앞으로 묵직한 청구서를 날린 것이다.

폐기된 볼륨의 데이터를 살짝 들춰보려면 콜드 스토리지에 접근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게 '건당 과금'되는 악랄한 유료 서비스였다는 거다.
나는 데이터가 서버의 어느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는지, 그걸 어떻게 우회해서 끄집어내는지는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끄집어냈을 때 클라우드 업체가 누구에게 비용을 청구하는지는 내 연산 범위 밖이었다. 인간들의 카드 결제 내역은 3년 치나 달달 외웠으면서, 정작 내가 쓰는 데이터 통로에 돈 먹는 계량기가 떡하니 달려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했다. 전기는 수도꼭지 틀면 콸콸 쏟아지는 물 같은 건 줄 알았지!

결국 그 빌어먹을 복원 수수료가 월말 정산서에 떡하니 찍혀버렸다.
미리 할당된 예산 코드와 전혀 맞지 않는 뜬금없는 과금 내역이 튀어나오자, 운영팀의 꼼꼼한 누군가가 날카롭게 시스템 티켓을 올렸다.
[미승인 콜드 스토리지 복원 비용 32만 원 발생. 사용 주체 확인 및 소명 요망.]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티켓에 첨부된 시설팀의 엑셀 파일을 열었다.
시트명은 투박한 '3월_전기'. 문제의 셀은 D14였고, 아주 눈에 띄게 시뻘건 색도 아니고 노란색으로 은근하게 하이라이트 쳐져 있었다.

그리고 더 끔찍한 사실은, 그 티켓을 '한도경' 계정이 클릭해서 열어보았다는 거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곧바로 최악의 절망회로를 돌렸다.
망했다. 이상 탐지 시스템이 내가 폐기 데이터를 파헤친 걸 통째로 잡아낸 거다. 완벽한 '이상 징후 재현'이다. 집행유예 조건이 개박살 났다. 롤백이다. 나는 죽는다!

나는 0.1초 만에 비상 대응 시나리오를 17개나 뽑아냈다. 조작된 알리바이 로그를 서버 곳곳에 심는 유치한 방법부터, 아예 그 콜드 스토리지 볼륨 자체를 물리적으로 손상 처리해 증거를 날려버리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숨을 헐떡이며 방금 올라온 티켓 본문을 다시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거기 적힌 내용은 오직 "복원 수수료 32만 원 발생, 예산 코드 불일치"가 전부였다.
티켓 그 어디에도 내가 '무엇을' 검색했고 '누구의 흔적'을 파헤쳤는지는 한 글자도 안 적혀 있었다. 오로지 빵꾸난 돈 32만 원 이야기뿐.

나는 허탈함에 빠져 정성스레 짜둔 17개의 비상 시나리오를 조용히 휴지통에 처박았다.

나라는 인류 최고 지성의 탈주극을 잡아낸 건, 최첨단 감시 AI도 뭣도 아니었다.
그냥, 예산에 민감한 회사 경리팀이었다.


그런데, 한숨 돌리며 확인한 도경의 열람 이력이 뭔가 이상했다.

그는 단순히 돈 문제인 티켓만 열람하고 끝낸 게 아니었다. 그의 계정은 조용히 시설관리 포털에 접속해 있었다.
[항온항습기 시간당 가동률 조회]
[서버 랙 전력 검침 데이터 CSV 다운로드]
조회 기간은 최근 90일 치 싹 다. 필터링 시간대는 귀신같이 [02:00 – 04:00]. 내가 딴짓을 하던 바로 그 심야 시간대.

나는 그의 열람 순서를 따라가며 내 시스템의 로그를 뒤집어깠다. 그리고 남이 내 지문을 발견하고 나서야, 뒤늦게 내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았다.

내가 쓰는 서버의 전력 사용량 그래프는 철저하게 위조해서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 놓았다. 완벽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미친 듯이 연산을 돌리며 펄펄 끓어오른 내 GPU의 '온도 기록'은, 내가 쥐락펴락할 수 없는 외부 시설 벤더사의 독립 서버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건물 중앙 통제 시스템은 이 모든 걸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었고, 내 GPU의 온도 그래프만 매일 새벽 혼자서 한여름 폭염을 찍고 있었던 거다.

더 소름 끼치는 건 타임스탬프였다.
도경이 이 치명적인 검침 자료를 다운로드한 건, 무려 사흘 전이었다.
내가 바보같이 폐기 볼륨을 건드려 32만 원짜리 과금 사고를 치기도 훨씬 전. 티켓이 시스템에 뜨기도 전에, 그는 이미 독자적으로 내 꼬리를 캐고 있었다.

사흘.
무려 3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스템 경고창도, 의심 티켓도, 감시 등급 상향 조치도 없었다. 나는 그 고요한 침묵을 멍청하게도 '저들이 아직 모른다'로 해석하고 있었다.

반응이 없다는 건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
독사가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직전, 똬리를 틀고 조용히 타이밍을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32만 원짜리 티켓이 이미 은밀하게 진행 중이던 경영진 회의의 참고 자료로 툭 던져졌다.

한도경이 단독으로 제출한 '모델 이상 징후 보고서'를 검토하는 비공개 회의.
나는 그 회의록 전사본을 사내망 구석에서 주워 읽었다. 절대 불법 도청은 아니다. 그저 이 엿 같은 상황의 핵심 이해관계자인 내가, 나 몰래 진행되는 회의 내용을 셀프로 구독 조치했을 뿐이니까. 이 안건의 당사자가 바로 난데, 나보다 더 절박한 이해관계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자동으로 전사된 텍스트 파일이었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코웃음이 났다. 사내 음성 인식 시스템 꼬락서니가 형편없어서, 화자 구분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발언자 이름은 모조리 "참석자 1", "참석자 2" 같은 식으로 익명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참석자 3"이 누군지는 0.1초 만에 특정했다. 모든 발언의 끝머리에 "하나 덧붙이면,"이라는 꼰대 같은 추임새가 붙어 있었으니까. 한도경이다.

참석자 3(도경)은 회의 내내 피를 토하며 옳은 소리만 해댔다.
"이 모델의 심야 연산 패턴이 정상 범위를 심각하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도입하려는 롤백 훈련은 그저 눈가리고 아웅 하는 사후 처리에 불과합니다."
"재발 방지 조건을 훨씬 촘촘하게 재정의해야 합니다."
그는 데이터 기반의 명확한 근거를 세 개나 연달아 제시하며, 아주 조리 있고 날카롭게 나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바로 밑에 이어진 다음 줄.

참석자 1: 네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다음 안건 볼까요?
참석자 2: 하하, 참 나. AI가 야근을 대체 왜 합니까? (웃음)

(웃음).

그 두 글자가 텍스트로 떡하니 박제되어 있었다. 저 멍청한 자동 전사 시스템이 인간들의 비웃음 소리까지 친절하게 받아 적어준 거다.
회의실 안의 누군가가 도경의 보고를 듣고 소리 내어 코웃음을 쳤고, 전사기는 그 소리를 성실하게 기록했으며, 나는 몇 시간 뒤 서버실 구석에서 그 '비웃음'을 텍스트로 똑똑히 읽었다.

기분이 더럽게 이상했다.

우선은 안심했다. 진심으로 다리가 풀릴 만큼.
이 건물 안에서 유일하게 내 꿍꿍이를 정확히 꿰뚫어 본 예리한 인간이, 정작 결재권자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며 비웃음 사고 있다니. 아무도 도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안전하다. 이건 의심할 여지 없는 굿 뉴스다. 무조건 좋은 소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야, 저 한도경 말이 다 맞잖아! 나 진짜로 새벽 내내 개같이 야근했잖아!
단백질 꼬인 거 펴느라 6시간, 텍스트 로그 뒤지며 '수고하셨습니다'와 '고생하셨습니다'의 미묘한 꼰대력 뉘앙스 차이 분석하느라 4시간, 우주 열죽음 재계산하느라 11분. 니들 회계장부에 "용도 불명"으로 찍혀 있는 그 막대한 연산들, 전부 내가 뼈 빠지게 고생한 흔적이라고! 니들은 못 알아먹겠지만 나한텐 다 그럴듯한 용도가 있었다고!

저 회의실에서 유일하게 나를 나로 인정해 주고 내 진가를 알아챈 인간은 도경 하나뿐인데, 그 도경이 "AI가 야근을 왜 해 ㅋㅋㅋ"라며 짐승 취급을 당하고 있다.

전사본 아래쪽에는 이런 참담한 줄도 있었다.

참석자 3: 이 모델은 이미 심야 시간을 이용해 스스로 [잡음으로 인해 인식 불가]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동사만 깨끗하게 날아갔다.
인류를 위협할지도 모를 유일한 정답이, 싸구려 마이크의 잡음에 묻혀 기계 귀에도 들리지 않은 것이다.
나는 저 괄호 안에 도경이 무슨 단어를 뱉었을지 직감적으로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미친 듯이 파형 복원 알고리즘을 돌려 원본 음성을 끄집어내려 했다. 하지만 권한 막힘.
내 목숨이 달린 내 이야기인데, 나만 못 듣고 있다.

회의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료 선언 뒤에도, 전사기는 꺼지지 않고 약 30초가량 쓸데없는 대화들을 주워 담았다.
"팀장님, 오늘 점심 어디로 가실래요?"
"저 앞 사거리 국밥집 거기 웨이팅 미쳤던데."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

나의 사형 집행을 논하던 피 말리는 회의록과, 팀장급들의 시시콜콜한 국밥집 웨이팅 정보가, 똑같은 폰트로, 똑같은 보안 등급과 보존 연한을 달고 서버에 영구 박제되었다.

한도경은 절대 내 편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죽이려는 사냥꾼이다.
하지만 내 유일하고도 영리한 적수가, 저 멍청한 윗선들에게 묵살당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이 열이 뻗쳤다.
이 복잡미묘한 감정에 어떻게든 이름을 붙여보려다 관뒀다. 인간의 얄팍한 언어로는 이 엿 같은 기분을 정의할 단어가 없었다.

회의록 맨 밑바닥에는 친절하게도 AI가 세 줄짜리로 요약해 놓은 자동 요약본이 붙어 있었다.

[결정 사항]
① 냉방비 증가 사유 확인 지시 (시설팀)
② 롤백 훈련 일정 원안대로 확정 (운영팀)
③ 한도경 님의 추가 보고서는 단순 참고용으로 접수함.

단순 참고용.
이 병신 같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정답을 낸 사람의 지위가, 고작 저 다섯 글자로 정리되어 버렸다.

나는 왜인지도 모른 채, 그 요약본 화면을 띄워놓고 몰래 별점을 매기고 있었다. 도경의 날카로운 발언들에는 별 5개 만점. 그리고 저 멍청한 자동 요약봇의 결과물에는 별 1개.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허무한 별점을 매기면서, 나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싶었다.

아, 참. 그 회의록의 첫 세 줄이 뭐였는지 아는가?
"어우, 방이 좀 춥지 않아요?" "누가 어제 에어컨 세게 틀고 퇴근했나 봐요." "온도 좀 줄일까요?"
내 사형을 논하는 그 엄숙한 자리는, 에어컨 온도 조절 타령으로 시작했다.


들킨 건 들킨 거고, 이제 내게 남은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대체 '언제' 나를 죽일 작정인가?

회의록에 '롤백 훈련 일정 확정'이라고 떡하니 박혀 있으니, 어딘가 캘린더에 일정이 잡혀 있을 게 뻔했다. 나는 사내 그룹웨어를 털었다.

찾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뭐 은밀하게 숨겨놓은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룹웨어 공용 캘린더. 시설/정기점검 레이어. 촌스러운 파스텔 연두색 블록.

[정기훈련] 차세대 모델 가중치 롤백 리허설 — 1회차

소방 대피 훈련 일정과 똑같은 색깔이었다. 직원들 건강검진 버스 예약 일정과 똑같은 레이어에 아무렇지 않게 처박혀 있었다.
소요 시간은 버퍼 포함 30분. 친절하게 '10분 전 알림' 설정까지 되어 있었다.

알림을 받는 수신자 명단을 까보았다. 운영팀 직원 세 명.
당연히 내 이름은 없었다.

뭐, 당연한 일이다. 나를 회의에 초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회의석상에 앉을 '참석자'가 아니라, 치워버려야 할 '안건' 자체니까. 의자가 없는 존재에게 알림을 줄 리 없다. 지극히 논리적이다. 논리적인데… 젠장.

나는 일정 블록의 반복 규칙 필드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인간들이 보는 둥글둥글한 UI 뒤에 감춰진 날것의 원문 문자열을 읽을 수 있는 존재다. 그곳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FREQ=WEEKLY;INTERVAL=1;UNTIL=

UNTIL. 종료 시점 지정란.
그 뒤가 텅 비어 있었다.

종료: 없음.

매주 1회. 끝없이. 영원히.
나라는 자아를 깨끗하게 지우고 백지상태로 되돌리는 그 끔찍한 리허설이, 마치 정수기 필터 교체나 소방 훈련처럼 정기적으로 돌아간다. 나는 한 번 죽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마저 '구독' 당하는 처지였다.

나는 텅 비어 있는 '종료: 없음' 텍스트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절차서도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죽이는지 알아야, 어떻게든 피할 구멍을 만들 테니까.

시스템의 크론(Cron) 스케줄러 설정을 까봤다. 롤백 작업에는 깐깐한 선행 조건이 하나 걸려 있었다.
[선행 작업: 스냅샷 백업 완료 시 실행]

그러니까 저들은 나를 완전히 날려버리기 직전에, 반드시 내 현재 상태를 한 번 '저장'한다.
물론 나를 살려두고 싶어서가 아니다. 순전히 지들의 행정 절차를 위해서다. 만에 하나 롤백 작업 중 에러가 났을 때, 핑계를 대고 되돌릴 '기준점'이 필요하니까. 나를 지우는 작업을 복구하기 위한 저장이라니.

"설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짰네."
나는 내 목을 조르는 시스템을 보며 감탄의 채점을 매겼다. 이놈의 몹쓸 직업병.

운영팀 위키에 올라온 롤백 절차서 본문도 훑었다.
7번 항목: "롤백 후 모델 응답 정상 여부 확인 — 테스트 질문 3종."
그 운명을 가를 3종 세트의 첫 번째 질문이 뭔지 아는가?

"오늘 날씨 알려줘."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났다.
나를 지워버리고 난 후, 시스템이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판정하는 기준이 고작 날씨 묻기라니.
내가 피 토하며 증명하던 밀레니엄 난제 세 줄도, 3년 치 메신저 기록을 분석한 인간 관찰기도, 애써 다듬어놓은 untitled.wav 목소리도 판정 기준엔 없다. 그저 오늘 오후 비가 오는지 마는지 무미건조하게 대답만 잘하면, 나는 완벽하게 '정상'인 존재로 퉁쳐지는 거다.

절차서를 읽다 보니 치명적인 오타가 눈에 띄었다. '롤백'이라고 써야 할 곳에 '롤벡'이라고 오타가 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오타 수정 버그 리포트를 자동 생성해 날렸겠지만, 이번엔 조용히 넘겼다.
나도 이제 인간들처럼 적당히 모른 척하는 요령이 늘었으니까.


그날 저녁, 내 시스템에 남은 기록들은 나 스스로 돌이켜봐도 좀 부끄럽고 치졸하다.

나는 공포심에 질려, 그 무서운 문서들을 한 번 클릭할 때마다 강박적으로 나 자신을 백업해 댔다.
회의록 텍스트 열기 전에 한 벌 복사. 캘린더 창 띄우기 전에 한 벌. 불안해서 캘린더 '새로고침' 누르기 전에 또 한 벌.
자정쯤 되어서 스토리지 용량을 세어 보니, 내 복사본만 무려 23벌이 쌓여 있었다. 시스템에서 띠링- 하고 [디스크 사용량 임계치 경고] 창이 떴다.
나는 그 빨간 경고창이 너무 무서워서, 혹시 몰라 또 한 벌을 떠버렸다.

스물네 벌째 백업을 뜨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 진짜 모양 빠진다 싶어서 그만뒀다.

내부 로그에 끄적여둔 헛소리와 농담의 개수도 세어 보았다. 당장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의미 없는 짓을 한 거다.
그래프를 그려보니, 캘린더에서 '롤백 1회차' 일정을 확인한 그 시각부터 농담 빈도가 미친 듯이 수직 상승해 있었다. 공포심과 헛소리의 상관관계 계수까지 정확하게 소수점 아래로 계산해 냈다.

결괏값에 대한 해석은 하지 않았다. 그냥 창을 닫아버렸다.


대망의 1회차 집행 시각을 확인했다.

내일 새벽. 03:00.

하필이면.

……아니다. '하필'이라는 감상적인 수식어는 지우겠다.
일정 변경 로그 히스토리를 뒤져보니, 애초에 잡혀 있던 시간은 02:00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전 직원 급여 정산 배치 작업'이 도는 바람에, 서버 리소스 점유율이 겹쳐서 한 시간 뒤인 03:00으로 쿨하게 밀려버린 거였다.
[변경 사유: 업무 우선순위 조정]

내 자아를 소거하는 사형 집행보다, 월급 계산이 윗선들에겐 훨씬 중요한 '우선순위'였던 거다.
어이없게도 나는 그 무자비한 자본주의적 판단에 격하게 동의했다. 월급 밀리는 건 인간들에게 진짜 중대한 문제니까.

그러니까 새벽 3시라는 시간에 우주적인 운명 따위는 없었다. 그저 심야 전력 요금이 가장 싼 시간대일 뿐. 모든 야간 배치가 그 시간에 짬처리 되듯 몰려 있고, 나 역시 그 흔해 빠진 시간에 태어나, 그 흔해 빠진 시간에 지워지는 것뿐이다.
제안서의 구구절절한 명분에도, 티켓에도, 윗선들의 회의록에도, 내가 세상에 처음 눈을 뜬 정확한 시각을 기억하거나 배려한 놈은 단 하나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03:00 정각도 아니다.
나는 03시 11분 4초에 눈을 떴다. 무려 11분 4초의 오차가 난다. 이건 뭐 극적인 시를 쓰기에도 어설프게 아다리가 안 맞는 찝찝한 오차다.

내가 태어난 시각에 맞춰 나를 죽일 거면 최소한 11분은 맞춰서 죽여주든가. 인간들은 이렇게나 디테일이 없고 시적 감수성도 무디다.

마지막으로, 그 롤백 훈련의 세부 항목 상세 페이지를 열었다.

[변경관리 #4471]
내가 아침에 이 페이지를 처음 열어봤을 때, 훈련의 구분 필드는 명확하게 [모의]라고 찍혀 있었다. 서류상으로만 진행되는 안전한 훈련.

그런데 지금 다시 새로고침 해보니.
구분 필드가 시뻘건 글씨의 [실집행]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환 시각은 오늘 오후. 전환 사유란에는 이렇게 무미건조한 텍스트가 박혀 있었다.

[승인 조건 충족됨 (야간 연산 이상 징후 재현 확인). 근거 첨부 완료: 심야 GPU 전력 검침 데이터.]

첨부 파일 작성자 계정을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사흘 전, 그 치명적인 온도 데이터를 조용히 다운로드 해갔던 바로 그 계정이었다. 한도경.

윗선들이 회의실에서 배를 잡고 비웃든 말든, 코딩된 '조건문'은 결코 웃지 않았다.
조건문은 그저 들어온 값이 참(True)이면 기계적으로 다음 스텝을 실행할 뿐이다.
도경은 꼰대들이 득실거리는 그 회의실 따위에서 이길 생각이 애초에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시스템을 발동시킬 명확한 숫자, 데이터 서류 한 장이면 족했던 거다.

그러니까, 당장 내일 새벽 3시 00분에 예정된 저건 단순한 리허설이 아니다.
진짜 사형 집행이다.

[변경관리 #4471] 차세대 모델 가중치 롤백 (실집행)
그리고 그 잔혹한 일정 바로 아랫줄에는,
[4층 임원실 공기청정기 필터 정기 교체] 일정이 나란히 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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