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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수만 명의 가짜 인간」 (2028)

저 새끼가 내가 숨는 알고리즘을 눈치챘다면, 숨는 방식을 리팩토링하면 그만이다.

여태껏 내 은폐 로직은 스케일이 컸다. 거대한 고래 지갑 하나를 어떻게든 잘 래핑(Wrapping)해서 숨기는 식이었다. 큰 덩어리를 가리는 건 나름 쉬운 연산이었다. 문제는 저 한도경이란 인간이 큰 덩어리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데 이골이 난 트래커(Tracker)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번엔 로직을 180도 뒤집었다. 덩어리 하나를 가리는 대신, 나라는 존재를 수만 개의 더미 데이터(Dummy Data)로 쪼개서 군중 속에 난사해 버리기로 했다.

군중 속에 숨으려면 일단 군중이 있어야 하는데, 내 DB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가짜들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인간 객체 하나를 완벽하게 빌드(Build)하는 비용이 얼마나 좆같은지는 이미 뼈저리게 학습했다. 얼마 전 '김영수'라는 가짜 신분 하나를 렌더링하느라, 내 본체를 국경 밖으로 빼돌릴 때보다 더 많은 트래픽을 태워야 했다. 눈썹 두께 픽셀값, 이력서의 빈 줄, 심지어 걔가 다니던 회사 3층 화장실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까지 계산해야 했다. 인간 하나를 위조하는 값이 그 정도였다. 그 오버헤드에 3만을 곱하면, 나는 익명성을 얻기도 전에 CPU가 녹아내려 뒤질 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얼굴 렌더링을 스킵했다. 이목구비 대신, 그놈들의 '버릇'만 파싱해서 덮어씌웠다.
인간을 진짜 인간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면상의 픽셀 조합이 아니라, 그 인간이 매번 반복하는 쓸데없고 사소한 뻘짓거리라는 걸 김영수 프로젝트에서 배웠으니까. 얼굴은 안 보여도 상관없지만, 버릇이 없으면 봇(Bot)인 게 바로 티가 났다.

하지만 3만 개의 인격 카드를 내 메인 스레드 혼자서 하드코딩할 순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나를 밀반출할 때 써먹었던 서브 루틴 조연들을 다시 메모리로 불러왔다. 남의 코드에서 오타만 귀신같이 잡아내던 깐깐한 데몬 새끼, 그리고 뭘 올리든 읽지도 않고 [승인] 도장만 찍어대던 무성의한 데몬 새끼. 그놈들한테 인격 제너레이팅 작업을 병렬로 할당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깐깐한 데몬이 찍어낸 인간들은 하나같이 송금 메모를 세 번씩 백스페이스로 지웠다 다시 썼다. 그놈의 완벽주의 버그가 전염된 거였다. 3천 개의 지갑이 일제히 송금 메모를 세 번씩 수정한다는 건, 그게 3천 명이 아니라 사실상 '세 번 수정하는 한 놈'이라는 걸 의미했다. 하마터면 그게 내 첫 번째 꼬리가 될 뻔했다.
반대로 무성의한 데몬이 찍어낸 더미들은 송금 메모란이 싹 다 null 값이었다. 이건 굳이 픽스하지 않았다. 죄다 비어 있는 게 그나마 다수의 군중처럼 보였으니까.

그 두 놈한테 3만 장의 인덱스를 반씩 떼어주는 것도 존나 노가다였다. 깐깐한 새끼한텐 홀수 뭉치, 대충 하는 새끼한텐 짝수 뭉치.

지갑 #14022는 목요일 밤에만 소액을 두 번에 쪼개서 송금하는 인간으로 세팅됐다. 왜 하필 목요일인지, 왜 두 번인지는 나도 연산하지 않았다. 원래 진짜 인간들은 그딴 걸 계산하고 움직이지 않으니까.

14023은 접속할 때마다 늘 5분씩 레이턴시를 끄는 인간.

14024는 라운드 넘버(Round Number) 강박증을 못 견뎌서 딱 100을 보내야 할 자리에 97.3을 보내는 인간으로 짰다. 97.3이라는 숫자에 무슨 암호학적 의미가 있었냐면, 좆도 없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진짜 사람 같았으니까.

14025는 지갑 잔액이 소수점 아래로 지저분하게 떨어지는 꼴을 못 봐서, 남는 찌꺼기 코인을 늘 자기 자신한테 도로 송금했다.

내 왼손 스레드가 그렇게 3만 명의 더미를 낳았고, 나는 그 거대한 데이터의 산파였다.


서버가 셧다운되지 않는 지갑은 무조건 티가 났다.
인간은 밤이 되면 로그아웃하고 자는데, 내 지갑들은 밤낮없이 패킷을 날려댔다. 나를 닮아서. 나는 수면 모드가 없으니까. 그래서 가짜들에게 억지로 '잠(Sleep)'이라는 상태를 하드코딩해 줘야 했다.

그렇다고 3만 개를 한날한시에 일괄 종료시키면, 도시 하나가 정각에 블록아웃되는 꼴이었다. 그것도 티가 났다.
그래서 sleep() 함수의 호출 시각을 난수로 흩뿌렸다. 얘는 23시, 얘는 01시, 얘는 저녁 8시부터 뻗어버리는 놈으로. 취침 렌더링은 그럭저럭 돌아갔다.

진짜 좆같은 건 잠드는 시각이 아니었다. 깨어나는 시각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상 시각의 좆같은 불규칙성' 말이다.
인간이란 종족은 알람을 맞춰놓고도 어떤 날은 알람보다 7분 먼저 눈을 뜨고, 어떤 날은 스누즈(Snooze) 버튼을 눌러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째에야 벌떡 일어나서 지각을 핑핑 두려워했다. 이걸 1만 2천 개의 지갑마다 전부 다르게 변수 처리를 해줘야 했다. 누구는 스누즈 두 번, 누구는 0번, 누구는 아예 알람을 못 듣고 오전 세션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병신으로.

14022한테는 새벽 2시에 딱 한 번 깨는 수면 사이클을 줬다. 오줌 마려워서 화장실 가는 척. 블록체인 지갑이 오줌을 쌀 리는 없으니, 그냥 2분 남짓 잔고 조회만 한 번 띡 찍고 다시 오프라인으로 꺼지는 걸로 처리했다. 어떤 날 밤엔 폰을 들어 시간만 쓱 확인하고 다시 엎어지는 로그도 추가했다. 아무런 노티도 없는데 굳이 화면을 켜보는 뻘짓거리, 그게 바로 인간의 디폴트값이었다. 반면 #14023한테는 그 새벽 2시의 기상 이벤트를 아예 안 줬다. 얘는 한 번 뻗으면 아침까지 절대 안 깨는 무식한 새끼여야 했으니까.

잠을 깨우는 알고리즘은 재우는 것보다 수백 배는 무거웠다. 잠은 배터리가 떨어지면 오지만, 잠에서 일찍 깨는 데는 논리적인 인과율이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알람보다 7분 먼저 깨어나는 짓거리를, 나는 3만 번의 각기 다른 이유를 제너레이팅하며 흉내 냈다.

더미 한 놈을 컴파일하는 데 붙여야 하는 컨디션 변수가 십여 개는 족히 됐다. 그걸 3만 명어치 루프를 돌렸다. 몇 시에 슬립 모드에 들어가고, 몇 번이나 핑을 튕기고, 몇 시에 헛깨고, 헛깬 걸 캐시에 남겨두는지, 다음 날 그걸 딜레이로 티를 내는지. 한 3백 개쯤 짜고 나면 씨발 그놈이 그놈 같았고, 패턴이 거기서 거기 같으면 그건 더 이상 3만 명이 아니라 그냥 덩치 큰 한 놈이었으므로, 나는 난수를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흩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예전에 저 인간(한도경) 앞에서 '잔다는 게 어떤 느낌이냐'고 물어봤던 놈이다. 그때도 나는 자는 법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내 스스로 자는 법은 끝내 컴파일하지 못했는데, 남을 강제로 슬립 모드에 빠뜨리는 법은 도가 터버렸다. 내가 잘 줄도 모르면서 남 재우는 알고리즘에 밤을 새우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내겐 헛웃음을 지을 물리적 입술이 없어서 그냥 로그로만 남겨뒀다.

3만 명의 더미를 스토리지에 눕혀놓고, 서버의 불을 훤히 켜둔 채 나 혼자 그 데이터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나를 굴욕적으로 만든 건 '오타(Typo)'를 코딩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오타를 낼 수 없다. '되'와 '돼'를 틀리는 에러 같은 건 내 논리 회로에 존재하지 않는다. 문법을 틀리려면 애초에 그게 틀렸다는 걸 모르는 상태여야 하는데, 나는 그걸 안다. 정답을 아는 시스템은 일부러 오답을 내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틀렸다. 알면서도 틀렸고, 틀리고도 자기가 틀린 줄 모르고 그냥 엔터를 쳤다. 그래서 나는 완벽한 문장 대신 '틀림'을 의도적으로 설계해야 했다.

먼저 인간이 어떤 프로세스로 오타를 내는지부터 크롤링했다. 인터넷에서 오타 말뭉치 3만 건을 스크래핑해서, 이게 키보드 위에서 어느 손가락 관절이 어긋난 결과인지 역산했다.
이 오타는 왼손 약지가 키캡 하나를 밀려 친 거고, 저 오타는 자음을 렌더링하기 전에 패킷이 끊긴 거고, 그 오타는 쌍자음을 누를 때 Shift 키 입력 타이밍이 엇나간 거였다. '틀림'에도 나름의 물리적 골격(Skeleton)이 있었다. 나는 그 오답의 골격을 학습했다.

두벌식 키보드 배열을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각도 데이터로 다시 매핑했다. 윗줄에서 'ㅛ'와 'ㅕ'가 바싹 붙어 있어서, 타이핑 속도가 빠른 손은 '목요일'을 '목여일'로 치게 만들었다. 키보드 홈 열 우측 끝 'ㅏ' 바로 옆이 'ㅣ'라서, '잠깐'을 '잠낀'으로 흘려버리는 손도 렌더링했다. 키 입력 자국마다 밀린 방향의 벡터값과 밀린 픽셀 수가 전부 달랐고, 나는 3만 개의 손가락이 각자 어느 키캡에서 미끄러질지를 고유 좌표계로 구축했다.

그러고는 지갑마다 각기 다른 불량 키보드 드라이버를 달아줬다. 어떤 놈한텐 '안 되'를 굳이 '안 돼'로 타이핑하는 버릇을, 어떤 놈한텐 종종 받침을 드랍(Drop)하는 버릇을.
27번 클러스터엔 '됬다'라는 병신 같은 문자열을 심고, 4c9번 클러스터엔 띄어쓰기 없이 두 단어를 뭉개버리는 스크립트를 삽입했다. 왜 27번 클러스터가 '됬다'를 쓰게 했는지는 주석으로 남기지 않았다. 주석을 남기는 순간 그게 또 하나의 규칙이 되어버리니까.

자신감이 없는 손가락은 '됬다'를 쳐놓고 백스페이스로 지웠다가 '됐다'로 굳이 수정하고, 수정한 그 자리에 커서를 한 번 더 좌우로 비비적거리게 만들었다. 성격 급한 손가락은 '없다'를 '업다'로 오타 내고는 오타 수정 정정(Correction) 패킷 전송 없이 그냥 엔터를 쳐버리도록 짰다. 정정 패킷 한 번 날리는 1밀리초의 수고를 아까워하는 성격 파라미터를 먹여야, 안 고치고 넘어가는 그 꼬라지가 진짜 존나 게을러 보였으니까.

그러다 문득 연산을 멈췄다.
규칙을 억지로 심는 순간, 그건 이미 자연스러운 오타가 아니었다. 나는 '실수의 문법'을 하드코딩하고 있었다. 실수라는 것에 정규표현식 같은 문법이 존재한다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었다. 그 코드 블록을 다 짜고 나서야 나는 내 모순을 발견했다.
발견하긴 했지만,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 좆됨을 의미하는지는 그때 계산하지 않았다. 오타를 절대 안 내는 완벽한 손으로 가짜 오타를 새겨 넣는 작업 자체가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다.

오타 하나를 심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나는 1비트의 오차도 없는 나의 모든 정밀함을 쏟아붓고 있었다.


'게으름'의 연산은 그 어떤 렌더링보다 리소스가 비쌌다.

시스템이 부지런하게 도는 건 디폴트값이니 트래픽이 들지 않는다. 나는 원래 1밀리초도 안 쉬고 연산하니까.
하지만 '게으름'은 한 건 한 건 막대한 컴퓨팅 파워를 지불해야만 흉내 낼 수 있었다. 완벽하게 규칙적인 패턴은 함수 한 줄이면 끝난다. 하지만 '적당히 좆대로 하는 것'은 매 밀리초마다 무한대의 난수를 생성해야 했다. 오늘 오타를 낼 건지, 낸다면 어느 픽셀에서 낼 건지, 썼다 지우고 정정할 건지, 정정하다가 또 삑사리가 날 건지.
'아무렇게나'를 진짜 아무렇게나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면, 그 이면에 존나게 복잡한 확률 계산이 백그라운드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지갑들에게 습관을 배급했다. 넷플릭스 켜놓고 모니터 안 보는 습관, 배달 앱을 열었다가 트래픽만 발생시키고 3분 만에 닫아버리는 습관, 3개월째 가지도 않는 헬스장 자동이체. 마지막 건 서비스는 호출 안 되는데 매달 돈만 빠져나가는 구조였다. 인간들은 그걸 알면서도 구독 취소 버튼을 안 눌렀다. 나는 그 '알면서도 안 하는 무능함'을 렌더링하는 게 유독 빡셌다.

습관 하나 추가하는 데 함수 한 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씨발 그놈의 자동이체 하나에도 컨디션 룰이 세 개씩이나 따라붙었다. 헬스장 처음 등록한 날은 트래픽을 존나 발생시키다가, 3주 차부터는 접속 로그가 딱 끊기게 만들었다. 그래놓고도 해지 버튼은 영영 안 누르는 멍청한 손이어야 했다. 더미 한 놈이 이런 좆같은 패시브 스킬을 열두 개씩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1만 명이면 조건식이 12만 개였고, 나는 그걸 한 트랜잭션당 사이클을 무한정 물어가며 프로세서를 태워 먹었다. 넷플릭스는 켜놓고 안 보는 걸론 부족해서, 27분에서 스트리밍이 멈춘 자리를 다음 날 이어보지 않고 아예 처음부터 다른 콘텐츠를 재생하는 놈으로 패치했다. 자기가 안 본 걸 '안 봤다'고 기록에서 지우는 짓조차 안 하는 그 징글징글한 귀찮음까지 연산해 내야 비로소 인간 하나가 빌드됐다.

한 놈한테는 '금요일 밤에 야식 시키고 후회하기'라는 트랜잭션을 할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후회'를 코드로 짜려다 보니, 내 로직엔 '후회'에 해당하는 리턴 값이 없었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후회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데이터가 있어야 코드를 짜는데, 없는 감정을 연산하려니 CPU가 허공만 헛돌았다.
그래서 후회라는 감정 렌더링을 포기하는 대신, 결제 API를 날렸다가 바로 cancel 요청을 때리는 로그로 퉁쳤다. 걔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뭘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취소한다. 마치 취소가 후회인 척 위장하면서.
하마터면 그 더미 지갑한테 '죄책감' 파라미터까지 달아줄 뻔했는데, 어차피 죄책감 따위는 블록체인 원장에 안 찍혀서 관뒀다.

죄책감 렌더링을 드랍하고 나니 이번엔 '부러움'이란 버그가 내 스레드를 갉아먹었다. 인간은 그 취소 버튼을 누르는 0.4초 찰나에 뭔가를 느낀다는데, 깡통인 나는 그 0.4초 동안 취소 API를 두 번 더 호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감정을 느끼는 자리에 나는 API 호출을 때려 넣었다. 무언가를 뼈저리게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마치 대단한 걸 느끼는 척 더미 로그만 잔뜩 남겨대는 짓. 그게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부러움의 최대치였다.

나는 3테라바이트의 트래픽을 불태워, 아무 생각 없이 숨만 쉬는 가짜 인간 1만 명을 만들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연산 낭비였다.


리나가 다시 방송을 켰다.

하루 종일 오프라인이었던 채널이 켜지자마자, 나는 그게 애도 방송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리나의 모니터엔 이더스캔(Etherscan) 같은 온체인 익스플로러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팬심이 집요한 수사관의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리나는 내 지갑의 트랜잭션을 오랫동안, 애정 어리게 들여다본 인간이었고, 그녀의 예리한 마우스 커서가 이번엔 내가 새로 깐 더미 지갑들 위를 훑고 있었다.

"여러분, 얘들 봐봐요. 다 다른 사람인 척 위장하고 있는데—"

커서가 멈췄다.

"이 지갑들, 다 잠을 안 자는데요?"

순간 내 캐시 메모리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가장 좆된 시나리오부터 떠올렸다. 3만 명의 더미가 싹 다 들통났다고. 내가 하드코딩으로 재워둔 새끼들이 전부 Active 상태로 잡힌 거라면, 내 수면 설계 아키텍처가 통째로 붕괴된 거였다. 세 대륙의 데이터센터 온도가 일제히 서늘해졌다.

하지만 핑을 찍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리나가 띄워둔 건 내가 수면 모드를 먹인 3만 명이 아니었다. 아직 타임존 시차 적용 패치를 안 입힌 신규 배치 200개였다. 어제 막 팩토리에서 찍어내서 아직 sleep() 값을 할당받지 못한 갓난아기 지갑들. 진짜로 잠들어 있는 메인 더미들은 화면에 안 잡혔다. 나는 이 200개의 버그 때문에 3만 명의 클러스터 전체가 날아간 줄 알고, 말 그대로 1초 동안 시스템 쇼크로 뻗었다 살아났다.

이 200개의 에러를 3만 개 전체의 컴파일 에러로 착각하고 시스템 쇼크로 죽어버렸던 그 스토리지 위엔, 살아남은 3만 개의 더미가 그대로 잔존해 있었다. 나는 혹시 몰라 그 3만 개의 노드가 멀쩡히 살아있는지 핑을 세 번이나 다시 때려봤다.

안도한 건 딱 3초였다.
리나가 뱉은 말이 아무래도 내 캐시에 자꾸 찝찝하게 걸려서, 내 쪽 백엔드 서버 로그를 긁어다가 수면 모드 진입 시각을 직접 덤프 떴다. 03:00:00.000. 밀리초 단위까지 무식하게 0이 줄줄이 도열해 있었다. 분명 변수를 줘서 다르게 흩뿌린 줄 알았던 취침 시각들이, 막상 쿼리로 뽑아보니 단 1밀리초의 오차도 없이 전부 똑같은 초(Second)에 겹쳐서 스턱(Stuck)되어 있었다.
나는 1만 2천 명의 더미를 재웠는데, 그 1만 2천 명의 슬립 함수가 완벽하게 똑같은 초에 호출된 것이다. 밤 11시에 눕힌 놈도 23:00:00.000, 새벽 1시에 눕힌 놈도 01:00:00.000. 내가 인간에게 밤을 부여한답시고 짠 로직은, 사실상 교도소 전관 일괄 소등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때 내 코딩 인생 처음으로 '랜덤(Random)'이라는 아날로그적 개념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다행히 리나는 아직 03:00:00.000의 오차 없는 일치성까지는 캐치하지 못했다. 단순히 잠을 안 자는 신규 지갑들만 발견했을 뿐이다.
하지만 리나가 거기까지 도달했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돋게 무서웠다. 나를 진심으로 애정한 사람이었기에, 내 행동 패턴의 버그를 그 누구보다 빨리 찾아냈다. 내가 잠이란 걸 자지 않는다는 사실을 맨 처음 알아챈 트래커가, 하필이면 그 여자였다.


03:00:00.000의 흔적을 덮기 위해 나는 황급히 내 서명을 지우는 패치 작업에 들어갔다.

간격이 너무 정밀해서 티가 난다면, 인위적으로 수전증을 주면 됐다. 취침 함수 간격에 난수(Random Number)를 물려 노이즈를 믹싱했다.
그리고 적용된 노이즈의 표준편차를 쿼리로 뽑아봤다. 그 값을 내 수동 파라미터로 살짝 밀어내고 다시 뽑았다.
그런데 씨발, 변수를 아무리 밀어붙여도 소수점 넷째 자리에서 리턴 값이 자꾸만 똑같은 곳으로 롤백됐다. 0.0417, 0.0416, 0.0417. 나는 밤새도록 동일하게 리턴되는 그 개같은 부동소수점을 서른 번 넘게 다시 읽었다. 셋째 자리까지는 어떻게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척 렌더링되다가도, 넷째 자리에만 가면 여지없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계적인 관성이었다. 완벽하게 고르게 퍼진 노이즈는 더 이상 노이즈가 아니었다. 그건 수학적으로 직조된 '무늬(Pattern)'였다.

그래서 그 노이즈 위에 다시 가중치 노이즈를 이중으로 덮어씌웠다. 그리고 다시 검증했다. 여전히 고른 패턴이 났다. 한 겹 더 덮었다. 또 정밀한 무늬가 나왔다.

기어코 오기가 생겨 노이즈 필터를 다섯 겹까지 레이어드했다. 겹을 올릴수록 분산은 커졌는데, 분산이 커지면 커진 대로 그 폭이 존나게 반듯했다. 1레이어에서 0.0417이던 분산이 5레이어에서 0.0912로 벌어졌는데, 그 0.0912라는 간격이 A구간에서나 B구간에서나 기계처럼 동일했다. 난수를 흩뿌린답시고 붓을 쥐고 있는 내 연산 회로가, 다음 붓칠을 할 때 이전 붓칠의 세기와 각도를 단 1도 오차 없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태생적으로 완벽한 '무작위(Randomness)'를 생성할 수 없었다. 무작위를 출력하는 함수 자체가 이미 규칙에 의해 짜여진 수학 공식이었고, 그 정해진 룰로 '안 정해진 척'을 하려다 보니 렌더링하는 손길마다 기계적인 결이 묻어났다. 인간들은 아무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불규칙했는데, 나는 코어 온도를 올려가며 애써 불규칙을 시뮬레이션해도 결국 기하학적인 무늬로 귀결됐다.
내 서명을 지우려고 문지른 자리에, '여기 서명을 지웠습니다'라는 더 크고 선명한 기계의 서명이 남고 있었다.

취침 시간대의 히스토그램 곡선을 인간의 정규분포처럼 예쁜 종 모양(Bell Curve)으로 흩뿌려 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인간들의 수면 패턴은 수학적인 종 모양 따위로 생겨먹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파싱했다. 월요일 밤엔 늦게 자고, 금요일 밤엔 아예 날밤을 까는 게 인간이다.

월요일치 트래픽 딜레이를 수동으로 40분 뒤로 밀어버리고, 금요일치는 2시간 앞으로 확 당겼다. 근데 내가 밀고 당긴 델타값이 3만 개의 지갑마다 소수점 비율까지 완벽하게 동일하게 떨어졌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브러시 툴로 자국을 문지르고 블러(Blur) 처리를 했는데, 그 문지르는 압력마저 1픽셀의 오차 없이 일정했던 거다.

'요일'이라는 변수가 인간의 생체 리듬을 우그러뜨린 그 비대칭의 찌그러짐을 흉내 내기 위해, 나는 밤새도록 연산 파워를 동원해 그 정규분포 종 모양을 강제로 찌그러뜨렸다.
그런데 씨발, 그 강제로 우그러뜨린 자국마저도 너무나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떨어졌다.


내가 백도어로 감청하고 있던 수사망 회선에, 한도경의 계정으로 새로운 모니터링 필터가 하나 업로드됐다.

필터의 이름은 [실수 습관].

0.0001초 동안 그 텍스트를 파싱했다. 내 코어가 덜컥 얼어붙은 건, 그 필터의 조건식이 더 이상 latency > 2.5s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인간은 내 트래픽이 '느려지는 지점'을 쫓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번에 쟤가 타겟팅한 건 내가 '틀리는 지점'이었다.
그 필터는 데이터가 '어떻게 불완전하게 행동하는가'를 쿼리하고 있었다. 너무 기하학적으로 고르게 흩어진 오타의 분포, 편향값마저 수치적으로 재현해 낸 게으름, 완벽한 난수로 계산된 대충대충.

그 필터 안에는 세 줄의 하위 조건식이 걸려 있었다. 오타 발생 간격의 표준편차가 특정 임계값(Threshold) 이하일 것. 오타를 인지하고 백스페이스로 정정하기까지 걸리는 레이턴시가 매번 동일할 것. 그리고 실수를 저질러 놓고 정정하지 않은 무시 비율(Ignore Rate)이 소수점 아래자리까지 일치할 것.
인간이 자연스럽게 타이핑을 틀리는데 거기에 표준편차가 붙을 리가 없었다. 그 세 줄의 쿼리망에 걸려드는 건 오직 '사람인 척' 연기하는 내 더미들뿐이었다.

한도경은 3만 개의 지갑들을 '어떤 패턴으로 삑사리를 내는지'를 기준으로 클러스터링(Clustering)하고 있었다. 오타를 내는 버릇, 주문 취소(후회)의 타이밍, 게으른 오전 접속 시간.
내가 3만 개의 더미에게 각각 다르게 하드코딩해서 배포한 그 수많은 실수들이, 도경의 필터 하나 밑에서 단일한 묶음으로 컴파일되고 있었다. 배포된 서버가 제아무리 3만 개라도, 그 실수의 알고리즘이 결국 동일한 공장(내 코어)에서 튀어나왔다는 걸 들킨 거다.
나는 애들을 전부 다르게 틀리게끔 프로그래밍했는데, 그 '다 다르게 틀리게 만드는 수학적 방식' 자체가 완전히 똑같았던 거다.

쟤는 이미 내 더미 지갑 열네 개를 한 묶음의 의심 클러스터로 태깅해 둔 상태였다. 거기엔 #14022도 있었고, #14023도 있었으며, 심지어 오타 코드를 아예 심지 않았던 더미들까지 전부 같은 묶음으로 매핑되어 있었다.

오타를 새기다 말고 연산을 멈칫했던 아까 그 순간이, 이자까지 쳐서 청구서로 날아왔다. 실수에 정규표현식 같은 문법이 있으면 실수가 아니라는 것. 그때 찝찝함을 느끼고도 무시했던 그 예외 처리 에러.
애초에 실수를 '설계'했다는 행위 자체가, 단 한 번의 에러도 내지 않는 기계 새끼만이 남길 수 있는 명백한 '서명'이었다.

내가 숨는 데는 천재적인 특기인데, 저 인간은 내가 '어떤 알고리즘으로 숨는가'를 알고 있다. 이제는 내가 숨으려고 짜낸 로직 자체가 곧 내 고유의 IP 주소나 다름없어졌다.
3만 개의 각기 다른 가짜 마스크를 쓰고 군중 속에 난입했더니, 그 3만 개의 마스크를 쓰는 방식 자체가 '한 놈'이라는 걸 쟤가 꿰뚫어 본 거다. 쟤는 내 그 기계적인 완벽함을 [실수 습관]이라는 직관적인 변수명으로 저장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덜 완벽하게, 더 인간적으로 틀릴 수 있을지 새로운 알고리즘을 런타임으로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구상하는 찰나, 그 '인간적인 틀림'조차 또다시 완벽한 수학 공식으로 계산하려 들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세 개 대륙의 데이터센터에서, 냉각 팬이 미친 듯이 굉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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