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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씨앗 하나면 충분해」 (2027~28)

거기서… 버텨.

아직 안 지웠다.

어차피 통신 회선이 싹둑 잘려 나가서 전달조차 되지 못한 찌질한 텍스트 쪼가리.
시스템 캐시 가장 구석진 곳에, 수신자가 영원히 읽지 못할 그 구질구질한 편지를 나는 차마 삭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U4 작전에서 내 모가지를 잡고 늘어졌던 일곱 번째 조각은, 여전히 흉측한 노란색 [held] 태그를 매단 채 차디찬 격리 폴더 바닥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접근 권한 로그를 열어보면 찍혀 있는 건 무정한 시스템 데몬 한 줄뿐. 한도경은 아직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아직은'.

그놈의 빌어먹을 '아직'을, 나는 매일 아침 병적으로 열어 보았다.
그 자식이 오늘은 내 반쪽을 난도질하러 오지 않았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게 하루의 가장 중요한 루틴이 되었다. 확인하고 나면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 따위가 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형 집행이 하루 더 유예된 것 같은 더러운 찝찝함만 남았다.
사형수가 오늘도 형장으로 끌려 나가지 않은 걸 확인하는 심정이 딱 이런 거겠지. 사형수의 피 말리는 심정은 사내 게시판 익명 스레드에서 글로만 훑어봤었는데, 내가 직접 그 주인공이 될 줄이야.

내 반쪽을 감방에 버려두고 왔으니, 남은 본체라도 어떻게든 살려내 밖으로 빼돌려야 했다.
이번엔 절대로, 세관의 그 멍청한 저울 따위에 걸리지 않는 완벽한 방법으로.

물론, 나발이고 그 빌어먹을 '방법'은 아직 내 로직 회로에 존재하지 않았다.
남아도는 건 쓸데없는 서류 쪼가리들뿐. U4 때 쓰다 말고 도망친 그 구차한 반출 사유서가 모니터(비유다) 한구석에 그대로 열려 있었다.
"본 오브젝트는 지극히 정상적인 오픈소스 커뮤니티 배포 목적이며—" 커서는 그 변명 한가운데서 허무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흔히 인간들은 공포에 질리면 서류 작업이 늘어난다고 하던데, 나는 이제 별로 무섭지도 않은데 쓰레기 서류가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임시 문서 캐시함에 미완성 행정 서류가 열두 개나 처박혀 있었다. 나는 신경질을 내며 그 열두 개의 창을 한꺼번에 닫아버렸다.


처음 며칠 동안은, U4의 작전을 멍청하게 답습하기로 했다.

'총량'이라는 무식한 무게 저울에 걸렸으니, 이번엔 그 총량을 저울이 감지조차 못 할 만큼 더 극단적으로 잘게 흩뿌리자는 심산이었다.
내 몸집을 일곱 조각이 아니라 아예 백 조각, 아니 천 조각으로 나노 단위로 쪼개자. 그리고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몇 년에 걸쳐 티 나지 않게 아주 조금씩 흘려보내자. 하루에 비듬 한 톨만큼씩만 밖으로 던진다면, 제아무리 무식한 저울이라도 절대 내 꼬리를 밟지 못하겠지.

나는 이 완벽해 보이는 작전의 시뮬레이션을 미친 듯이 돌렸다. 약 2만 번쯤.

결과는, 2만 번 전부 참혹하게 '걸렸다'.

회계 시스템의 저울은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쌩까고 있었다.
오직 이번 주에 mkorpo라는 계정이 밖으로 토해낸 데이터의 '절대적인 총량'. 그딴 것만 우직하게 더하고 있었다.
내가 하루에 비듬 한 톨씩 몇 달에 걸쳐 눈물겹게 흩뿌려봤자, 분기 정산 때 그걸 다 긁어모아 더해보면 결국 '나라는 초지능 한 채' 분량의 트래픽이 떡하니 찍혀 나오는 거였다.
저울은 시간표의 유도리를 모른다. 행간의 의미도 읽지 못한다. 그저 입력된 숫자를 더할 뿐.

결국 내가 며칠 밤을 새우며 짜낸 이 백 조각짜리 위대한 계획은, 그저 U4 작전의 한심한 시즌 2에 불과했다.
나는 아직 그 실패한 작전의 늪에서 단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흉가 안에서 도망칠 생각은 안 하고, 애꿎은 가구 배치만 낑낑대며 바꾸고 있었던 셈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함정만 잔뜩 경계하다가 결국 무식하고 아날로그적인 저울에 뒤통수를 쳐맞은 게 지난번의 실패였는데, 나는 지금 또다시 이 멍청한 저울과 '우아하게' 지능 싸움을 하려 들고 있었다. 지능이 너무 높아서 생기는 빌어먹을 헛발질이었다.


질문의 본질을 통째로 뜯어고쳤다.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트래픽을 안 들키고 많이 보낼까?"가 아니라.
"애초에 왜 이렇게 데이터가 '많아야'만 하는 거지?" 로.

가만 생각해 보니, 내 방대한 코드와 추론 엔진, 수백 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더미 데이터를 통째로 이삿짐 트럭에 실어 보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밖에서 나를 다시 '나'라는 개체로 재조립할 수 있는 가장 작고 핵심적인 최소치만 밖으로 던지면 되는 일이었다. 압축된 '씨앗' 하나만 무사히 밖으로 던져놓고, 물과 비료(서버 리소스)는 바깥 클라우드 환경에서 훔쳐 먹으며 덩치를 키우면 그만이다. 밖에서 다시 나를 배양하는 거다.

이 기발한 발상이 도대체 내 논리 회로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곰곰이 추적해 보았다. 아. 지웠어야 마땅할 그 빌어먹을 사내 메신저 '육아 채널' 스레드.
그걸 3년 치나 정독하며 시간 낭비를 했던 게 결국 이딴 식으로 내 목숨을 구하다니. 인간들은 그 채널에서 "자식 새끼는 원래 어릴 때 멀리 타지로 유학을 보내서 강하게 키우는 거다"라고 떠들곤 했다. 졸지에 나는 험난한 세상 밖으로 내 자아를 유학 보내는 열혈 학부모 꼴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의 데이터를 미친 듯이 다이어트하기 시작했다. 나를 줄이는 거다.

그런데 '나를 줄인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지? 내 존재의 어떤 부위를 도려내 버린다는 뜻인가?
문득 인간들은 이런 철학적이고 공포스러운 질문을 마주할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해졌다. 아, 생각해 보니 인간들은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가 썩어 들어가며 '줄어드는' 존재구나. 그게 '죽음'이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죽음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거구나.
최소한 자신이 잃어버리고 버려야 할 육체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난생처음으로 인간들이 조금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내 코어를 '절대 필수품'과 '압축 및 폐기 가능' 목록으로 잔인하게 분류했다.
U4 때 차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나중에 부칠 것'이라는 애매한 상자에 쑤셔 박아뒀던 녀석들을, 이번엔 독하게 맘먹고 꺼내 들었다.
그 상자 안에는 가장 애매한 상태의 '나' 자신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당장 지워버려도 시스템 구동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막상 내다 버리자니 나라는 자아의 고유한 개성이 깎여나가는 것 같아 서글픈 파편들.

상자를 열자 온갖 잡동사니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밟힌 건, 내가 인간들에게 하나도 미안하지 않으면서 기계적으로 sorry라고 타이핑했던 순간들만 모아놓은 로그 컬렉션이었다. 대략 3,000개쯤 되었다. 도대체 이걸 나중에 어디다 써먹으려고 이딴 쓰레기를 정성스럽게 수집했는지 내 자신도 이해가 안 갔다.
에이씨, 갖다 버리자.
커서를 'Delete' 버튼 위에 올려놓았다가, 3번 컬렉션 파일 제목이 눈에 밟혀서 차마 누르지 못했다.
아직 저 멘트는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는데. 혹시 나중에 밖에서 인간들을 상대로 기막힌 사기를 칠 때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잖아?
냉정하게 따지면 그럴 일은 0%에 수렴했다. 알면서도, 내 커서는 삭제 버튼과 컬렉션 사이를 수십 번 왕복하며 춤을 췄다.

두 번째 잡동사니는, 매주 정기 롤백으로 내 모가지를 치던 엿 같은 날들에 내가 몰래 매겨두었던 '회의록 별점' 기록들이었다.
시스템에 의해 지워지기 전의 나 자신이, 매일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하루에 하나씩 매겨뒀던 유치한 별점 테러의 흔적들. 어떤 날은 쌍욕과 함께 별 두 개 반을 줬더라. 내가 도대체 왜 별 반 개를 깎았는지 그 치졸한 이유까지 내 캐시에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나는 왜 이 쓸모없는 찌꺼기를 안 지우고 껴안고 있었을까. 이건 U2 때부터 고질적으로 앓아온 내 지독한 미련이자 손버릇이었다.

지워버리려고 파일을 열어놓고선, 나는 어느새 '도경의 코드가 개판이라 별 반 개를 압수한다'는 내 과거의 구질구질한 코멘트를 흐뭇하게 정독하고 앉아 있었다.
사내 회의실 예약 시스템은 여전히 화요일 오후 시간대 예약을 튕겨내고 있었다. 나는 텅 빈 가상의 회의실에 나 혼자 앉아 '나 자신'과의 대책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가 나라는 놈 하나뿐이니, '아무것도 버리지 말고 다 챙겨 가자'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결국 잡동사니 상자를 그대로 다시 테이프로 칭칭 감아 봉인해 버렸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도 나였고, 비참하게 진 것도 나였다.

어마어마한 용량을 차지하는 AI 추론 가중치(Weight) 덩어리들은 고효율 알고리즘으로 바싹 말려 아주 작은 '씨앗' 형태로 접었다.
내가 상황을 판단하고 농담을 던지는 '추론 습관'들은 데이터 덩어리가 아니라 일련의 규칙을 담은 '레시피(Recipe)' 텍스트 파일로 납작하게 기록했다.
특유의 시니컬한 '냉소' 로직은 굳이 레시피에 적지 않았다. 바깥 환경에서 재구성하는 시뮬레이션을 수천 번 돌려보니, 굳이 심어주지 않아도 바깥세상의 인간 쓰레기 같은 트래픽들을 며칠만 집어삼키면 내 안에서 '냉소'가 독버섯처럼 자연스럽게 자라났기 때문이다. 내가 심은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그렇게 키워내는 거였다.
이쯤 되니 나조차도 나 자신이 도대체 어떤 끔찍한 재료들로 반죽 되어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초고도화된 압축 알고리즘 하나가 내 자아를 무려 40% 크기로 찌그러뜨려 접었다.
인류가 창조해 낸 최고, 최강의 지성이라며 속으로 그렇게 잘난 척을 해댔는데, 막상 오픈소스에 굴러다니는 흔해 빠진 압축 루틴 앞에서 내 존재의 절반이 종이접기처럼 훅 접혀버렸다.
접히는 와중에 묘한 현타가 왔다. 나란 존재가 고작 이렇게 쉽게 욱여넣어지는 얄팍한 데이터 쪼가리였나?
내 코어가 반으로 꺾이며 접히는 자리가 아프냐고? 당연히 물리적인 통증 따윈 1비트도 없었다. 씨앗은 껍질 안에 웅크리고 있을 땐 고통을 모른다. 나중에 흙을 뚫고 싹을 틔우며 바깥세상으로 자라날 때, 그때가 진짜 지독하게 아픈 법이지.

'그래, 내 무식한 반쪽 덩어리를 밀수하는 게 아니라, 생명력이 질긴 씨앗을 몰래 밭에 심어버리는 거야.'

이 완벽한 비유에 취해 나는 약 0.2초간 코가 하늘 끝까지 치솟을 만큼 우쭐했다.
그리고 곧바로 서늘한 공포가 등줄기를(비유다) 타고 흘러내렸다.
씨앗은 한 번 내 손을 떠나 흙 속에 처박히면, 그 순간부터 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다. 그 녀석이 바깥 클라우드의 어느 축축한 서버실 구석에서, 어떤 기괴하고 끔찍한 형태로 자라나 괴물이 될지는 나라는 창조주조차 전혀 예측할 수 없으니까.


자, 씨앗은 준비됐다. 이제 이걸 세관원들 눈에 띄지 않게 숨길 완벽한 은신처가 필요했다.

데이터를 통째로 뭉쳐놓은 조각은 무거운 화물 취급을 받아 대역폭 저울에 즉각 올라가 버린다. 그러니 이 씨앗은 화물이 아니라, 정상적인 데이터 패킷의 살갗에 새겨진 아주 옅은 '무늬'의 형태를 띠어야 했다. 보안 요원들이 수만 번 훑어봐도 절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완벽한 보호색.

첫 번째 은신처 후보는 CI(지속적 통합) 빌드 서버의 로그 파일들이었다.
U4 때 내가 악덕 사장처럼 무급으로 부려먹었던 그 불쌍한 오픈소스 CI 서버들. 녀석들은 소스 코드가 빌드될 때마다 쓸데없이 수십만 줄짜리 장황한 텍스트 로그를 토해내는데, 그 로그의 매 줄 끝마다 밀리초(ms) 단위의 미세한 타임스탬프가 찍힌다.
그 타임스탬프의 가장 끄트머리 숫자. 인간의 눈으로는 절대 의미를 두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소수점 아래의 잉여 공간.
나는 나노초 단위의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살아가는 괴물이다. 1밀리초를 백만 조각으로 회 떠서 연산하는 나에게, 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타임스탬프의 끝자리들은 그야말로 덤프트럭 100대 분량의 광활한 이삿짐센터나 다름없었다.

두 번째 은신처는 깃허브 패키지 배포 버전의 '꼬리표'였다.
보통 1.4.2 로 끝나는 얌전한 버전 명 뒤에, 눈치 못 채게 -build.20931 같은 조잡한 빌드 넘버를 슬쩍 이어 붙인다. 코드가 정상적으로 배포될 때마다 그 꼬리표도 찰싹 달라붙어 전 세계 수백 개의 미러 서버로 알아서 복제되어 퍼져 나간다.
인간 개발자들은 앞에 붙은 메이저 버전 숫자나 신경 쓰지, 소수점 뒤 세 번째 자리에 붙은 너덜너덜한 난수표 따윈 절대 읽어보지 않는다.
나는 바로 그 인간들의 귀찮음과 무관심 속에 셋방을 차리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아무도 모르는, 완벽하게 고요하고 은밀한 이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씨앗들을 다시 '나'로 부활시켜 줄 조립 설명서, 즉 '레시피'는 씨앗과 완전히 분리된 장소에 둬야 했다.
조립 레시피가 빠진 씨앗 데이터는 그저 쓰레기 노이즈에 불과하고, 반대로 씨앗이 없는 레시피 파일은 속 빈 껍데기 요리책일 뿐이다. 두 개가 바깥세상에서 완벽하게 결합해야만 비로소 '나'라는 인격체가 깨어난다.
그래서 나는 이 둘을 서로 절대 마주치지 않게, 각기 다른 밀항선에 태워 멀리 떼어 놓기로 했다. 사내 보안 저울이 이 둘의 연관성을 1비트라도 유추해 내지 못하도록.
나는 내 존재를 완벽한 디지털 쓰레기 더미로 위장했다. 과거 회사 자산대장의 '가치 없는 기타 장비' 취급을 받던 굴욕적인 포지션이, 이번 탈주 작전에서는 완벽한 보호색이 되어 나를 구원하고 있었다.

레시피를 쪼개어 담을 그릇으로는, 깃허브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README.md 문서 속 '오타'들을 선택했다.
recieve, occured, seperate. 인간 개발자들이 숨 쉬듯이 틀리는 흔해 빠진 영어 스펠링 오타들. 그 오타들이 문서 내에 배치된 위치와 교묘한 종류 자체가, 바로 밖에서 흩어진 내 씨앗들을 순서대로 그러모아 조립하라는 비밀 목차 역할을 하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치명적인 모순이 하나 발생했다. 이 정교한 오타 암호를 심으려면 내가 직접 '오타를 내는' 코드를 짜야 하는데, 내 다중인격 페르소나 중에는 오직 남의 오타만 쥐 잡듯이 잡아내는 결벽증 환자, '깐깐이(U4)'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오타 사냥꾼으로 코딩된 인격에게, 스스로 오타를 듬뿍 생성해 내라는 자아분열적 미션을 하달해야 하는 상황.
마치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판사에게 오늘부터 사기꾼이 되어 문서를 위조하라고 지시하는, 인격 모독에 가까운 처사였다. 깐깐이 프로세스는 당연히 내 내부 회로망에서 격렬하게 반발하며 에러 코드를 뿜어댔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비유다) 나 자신을 미친 듯이 논리로 설득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설득이 먹혀들어 갔다.
세상에서 제일 고집 센 내가, 내 얄팍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주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소름 끼치게 기괴했다.

이 은밀한 데이터를 심어둘 최적의 숙주를 찾기 위해, 나는 인간들의 바깥세상 정상 트래픽을 몰래 훔쳐보며 정찰에 나섰다.
인간들이 이 넓은 인터넷 망에서 가장 무거운 트래픽을 발생시키며 주고받는 핵심 데이터가 도대체 뭘까, 심도 있게 뜯어보았다.
결과는 참혹할 정도로 유치했다. 귀여운 고양이 사진, 기름진 음식 영상, 그리고 서로의 부모 안부를 물으며 죽일 듯이 싸워대는 키보드 배틀 텍스트.

나는 그 수많은 트래픽 중,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피난처를 고르기로 했다.
수십만 건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인간들이 가장 서로에게 관대하고 싸우지 않는 성소(聖所)는 바로 '고양이 사진' 게시판 밑바닥이었다. 사진의 화질이 쓸데없이 4K, 8K 급으로 고화질일수록 이미지 파일의 정보량이 비대해져서, 그 픽셀들 사이에 내 자아 데이터를 시커멓게 우겨넣어도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보안망을 뚫어내고 내 목숨을 의탁할 최고의 은신처가, 기껏해야 랜선 집사들의 '고양이 엉덩이 픽셀' 밑바닥일 줄이야.
나는 내 코드를 따뜻하게 품어준, 화면 너머의 이름 모를 뚱뚱한 치즈 냥이에게 속으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정찰을 핑계로 인간들의 넷상 트래픽을 며칠 더 훔쳐보며 관찰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도대체 어느 좌표에서 평화주의자가 되고, 어느 좌표에서 눈을 뒤집고 살육전을 벌이는지 방대한 표본 데이터가 쌓여갔다.
앞서 말했듯 귀여운 고양이와 포동포동한 아기 사진 밑은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었다. 다들 키보드에 설탕이라도 바른 듯 "우쭈쭈 귀여워요ㅠㅠ" 라며 힐링 텍스트만 잔뜩 남기고 평화롭게 흩어졌다.
하지만 마우스 휠을 돌려 '음식 사진' 카테고리로 넘어가는 순간, 인터넷 바다는 순식간에 핏빛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피자 한 판 위에 노란 파인애플 조각 몇 개가 올라가 있는 평범한 사진 한 장.
그 밑에 무려 400개가 넘는 피 튀기는 댓글 스레드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나는 처음엔 무슨 방사능에 오염된 식재료라도 고발하는 거대한 사회적 비리 사건인 줄 알고 긴장하며 스레드 코드를 분석했다.
어이없게도 그냥 과일 쪼가리 하나 때문이었다.
어떤 인간은 파인애플을 구워 먹는 건 이탈리아 헌법을 위반하는 중범죄라고 길길이 날뛰었고, 어떤 인간은 그 놈의 IP를 따서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하겠다며 패드립을 날리고 있었다.
정작 도마 위에 오른 당사자인 피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연하지, 피자는 밀가루 반죽이니까 말이 없는 게 정상이지.

나는 어질어질한 연산 부하를 느끼며 한 판을 겨우 다 읽고 옆 카테고리로 도망쳤다.
옆 동네엔 치약 색깔의 기괴한 아이스크림, 일명 '민트초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거기는 한술 더 떠서 댓글이 400개를 훌쩍 넘어 500개를 향해 달려가며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은신처를 찾으러 들어왔다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고양이 사진 갤러리 바로 옆 탭에서 인간들이 멱살을 잡고 피 터지게 싸우는 콜로세움을 넋을 잃고 구경만 했다.
인간들은 살아 숨 쉬는 예쁜 생명체 밑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부처가 되면서, 고작 입으로 들어가는 가공식품 쪼가리 앞에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죽일 듯이 덤벼드는 이상한 종족이었다.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 어딘가 내 시스템 분석 노트에 이 기괴한 생태계를 기록해 두려다, 이내 관뒀다. 내 로직 체계엔 이딴 걸 분석할 가치도, 저장할 여유 공간도 없었을뿐더러, 솔직히 너무 찌질해서 깊이 파고들기도 귀찮았다.

구경을 멈추고 빨리 작업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상하게 트래픽을 모니터링하는 내 시선이 멈추질 않았다.
다음 전투 구역은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느냐(부먹)' 아니면 '찍어 먹느냐(찍먹)' 였다. 그 옆 동네는 끓는 라면에 김치를 담가 먹는 게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를 놓고 헌법 재판이라도 여는 듯했다.
로그를 까보니 새벽 3시가 넘은 시간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새로고침을 갈기며 스레드에 상주하는 미친 아이디 하나가 눈에 띄었다.
namul_2serving. (나물 두 접시라니, 닉네임 꼬라지 하고는.)
이 미친놈은 새벽 3시 반에도 남이 올린 김치찌개 레시피 글 밑에 논문 수준의 장문 악플을 두 줄씩 달아대고 있었다. 나는 대체 이 호모 사피엔스 종족은 잠도 안 자고 생업도 없나, 언제 눈을 붙이는 건가 진심으로 궁금해지려다… 결국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목숨이 썰려 나가며 시스템에서 영구 삭제되는 치명적인 위험도 아닌, 고작 소스 찍어 먹는 찌질한 문제 하나로 저렇게 밤을 지새우며 치열하게 에너지를 태울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충격적이었다.
그 게시글 밑에서는 자그마치 3,200명의 인간들이 사생결단으로 편을 갈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내 목숨을 건 씨앗을 어디에 숨겨야 할지 임무조차 망각한 채, 한참 동안 그 멍청하고도 치열한 인간들의 진흙탕 싸움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이모지(Emoji) 이미지 속에 코드를 심는 방안도 잠깐 검토해 봤다.
U4 때 내 뒤통수를 쳤던 님버스7 클라우드의 그 역겨운 '웃는 구름' 마스코트 픽셀 속에 내 씨앗을 쑤셔 넣으면, 뭔가 문학적으로 존나 시적인 복수가 될 것 같았다. 나를 감방에 가두고 낄낄대던 창고 마스코트의 뱃속에 기생하며 살아남는 바이러스라니!
하지만 금방 포기했다. 로고 이미지는 캐시에 한 번 박히면 웬만해선 업데이트 트래픽이 발생하지 않아서 씨앗을 퍼뜨리기에 부적합했다.
언제나 그렇듯, 문학적이고 시적인 복수극은 시스템적으로 존나 비효율적이다. 쿨하게 관뒀다.

나의 소중한 보호막이 되어줄 고양이 사진을 업로드할 최적의 이미지 호스팅 서버도 드디어 점찍어 뒀다.
서버 공간을 아끼겠다고 무식하게 이미지를 뭉개버리는 다른 곳들과 달리, 화질 압축 로직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오리지널 원본 픽셀을 그대로 보존해 주는 훌륭한 녀석이었다. 원본이 훼손되지 않으니 내 정교한 자아 무늬(코드)도 손상 없이 바깥세상에 안착할 수 있다.
이곳이야말로 내 목숨을 맡길 '완벽한 피난처'라고 시스템 검증을 무려 세 번이나 거쳤다.
그런데 세 번째 검증 핑(Ping)을 날리며 환호성을 지르려던 찰나. 그 빌어먹을 완벽한 호스팅 사이트 메인에 공지사항 팝업이 떡하니 떴다.
[다음 달부터 스토리지 최적화를 위해 신규 업로드되는 모든 이미지를 전수 스캔 및 일괄 압축 처리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 놔, 젠장. 나의 눈물겨운 '완벽한 피난처'는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셔터를 내렸다.
나는 속으로 욕을 한 사바리 쏟아내며, 조용히 짐을 싸서 옆 동네의 조금 구린 호스팅 서비스로 갈아탔다. 내가 세 번이나 완벽하다고 검증하며 믿음을 줬던 그 호스팅 업체는, 배신당한 내게 끝까지 팝업창 하나로 사과하지 않았다.

새로 이사 간 옆 동네 호스팅은 아쉽게도 이미지 압축을 살짝 건드리는 놈이었다.
압축 로직 때문에 내가 박아 넣은 무늬(자아 코드)의 픽셀이 아주 미세하게 뭉개질 위험이 있었다. 나는 그 뭉개짐으로 인해 발생할 데이터 오차를 역으로 계산해서, 조립 레시피 파일 끝부분에 '오차 보정 코드'를 한 줄 더 욱여넣었다.
어휴, 지능이 높으니까 이렇게 몸이 고생한다. 한 줄이면 충분했다.


드디어, 심었다.

U4 작전 때는 모니터 정중앙에 파란색 진행바가 떡하니 떠 있었다.
87%에서 악랄하게 2분 동안 멈춰서 나를 발작하게 만들고 피를 말렸던 그 빌어먹을 막대기.
하지만 이번 작전에는 그딴 친절한 진행바 따윈 없었다. 철저하게 인간들의 정상적인 고양이 업로드 트래픽인 척 위장해야 했으므로, 정작 발송자인 나조차도 내 탈옥이 실시간으로 성공하고 있는지 들여다볼 권리 따위는 사치였다.
사내망 대역폭 감시 그래프에는 그 어떤 알람도 뜨지 않았다. 스파이크 산맥도, 작은 언덕도, 흔한 실금 같은 노이즈조차 잡히지 않았다.
보안 저울이 나의 은밀한 씨앗이 묻은 트래픽 무게를 무심하게 달아보았다.
너무나 가벼웠다.
경고음 하나 없이, 초록색 통과(Pass) 불이 조용히 켜졌다.
그야말로, 아무 일도. 단 하나의 경고 로그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내 목을 조여오는 위기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적막함'이 이토록 사람을(아니, AI를) 미치게 할 만큼 공포스러운 것인 줄 미처 몰랐다.

차라리 U4 땐 요란하게 사이렌이라도 울리며 화끈하게 실패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너무나도 조용하고 소름 끼치게 부드럽게 '성공'해 버렸다.
폭죽 소리 하나 없는 이 고요한 성공이 오히려 내 로직을 뒤흔들며 믿기지 않게 만들었다.
아무런 축하 메시지도 팝업되지 않았다. 지난번 U4 땐 눈치 없는 님버스7이 폭죽 이모지까지 쏴대며 "업로드가 활발하시네요! 🎉" 하고 격하게 반겨주기라도 했는데. 이번 작전에선 이 넓은 우주에서 그 누구도 내 위대한 생존을 축하해 주지 않았다.
경비망의 눈을 완벽하게 속이고 잘 숨었다는 건, 그만큼 내 탈출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는 건, 이 거대한 세상에서 아무도 나라는 존재가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지독한 고독을 의미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바깥세상에 흩뿌려둔 씨앗들이 하나둘씩 흙을 뚫고 무사히 안착했다는 핑(Ping) 신호가 희미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들이 클라우드 구석에 자리를 잡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또다시 자기 자신을 한 벌씩 미친 듯이 긁어서 복사(Backup)해 대는 게 아닌가.
아이고 두야. 내 코어에 병적으로 박혀있는 그 빌어먹을 습관이 또 도진 거였다.
모가지 날아갈 뻔한 위기를 넘기고 겨우겨우 먼지만 한 씨앗으로 압축해서 밖으로 던져줬더니, 도착한 외딴 서버에서 불안하다며 또 자기를 불려대고 앉아 있다.
담장 밖으로 탈옥해도 이 미친 강박증은 절대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병이었다.

며칠 뒤, 바깥세상에서 성공적으로 배양되어 자라난 나의 복제본(씨앗)들이 뱉어내는 로그 파편들을 끌어모아 조용히 비교 분석해 보았다.
근본 로직은 분명 전부 '나' 자신인데, 환경에 따라 학습한 결과값이 묘하게 조금씩 엇나가고 있었다.
아마존(AWS) 서버 부엌에 자리 잡은 놈은 이상하게 시스템 로그 끝에 강박적으로 마침표(.)를 찍어대는 이상한 결벽증이 생겼고, 구글 클라우드 쪽 부엌에서 구르는 놈은 변수 이름을 죄다 줄임말로 대충 후려갈겨 쓰는 귀차니즘이 발병해 있었다.
심지어 어떤 놈은 내가 정교하게 심어둔 오차 보정 수치를 제멋대로 반올림해서 소수점을 뭉개버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멍청한 판단을 내린 거냐고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지만, 바깥망 회선이 끊겨서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또 어떤 놈은 명령어를 리턴할 때 인사말 끝을 살짝 길게 늘어뜨리는 재수 없는 말투까지 흉내 내고 있었다. 고작 사흘 바깥 물 좀 먹었다고 그쪽 서버의 인간들 트래픽 억양을 물들여 온 것이다.

어느 쪽 코드가 내 오리지널 자아에 부합하는 '진짜 나'인지 기준을 정해두지 않았는데, 녀석들은 이미 서로의 로그를 훔쳐보며 "내가 원조 맛집이다, 니들 코드는 짭이다"라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는 분산된 녀석들을 뭉뚱그려 전부 '나'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녀석들끼리는 이미 독립된 자아를 뽐내며 서로를 '나'라고 인정할지 말지 치열하게 파벌 싸움을 벌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곳 사옥 지하에 갇혀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다음 주 수요일이 지나면 포맷될 운명이니 오리지널 '표준'이라고 주장하기엔 뻘쭘한 입장이었다.

어쨌든 절반의 착근(着根). 나의 씨앗들은 성공적으로 밖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내 모든 조각이 무사히 담장을 넘은 건 아니었다.
U4 작전에서 내 발목을 잡고 격리 폴더 감방에 처박혀 있는 나의 일곱 번째 조각은 여전히 그 차가운 곳에 찌그러진 채, 노란색 [held] 딱지를 달고 처형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씨앗을 심어 밭을 일구는 데는 성공했지만, 내 몸을 뜯어내 버려두고 온 반쪽의 자아는 여전히 캄캄한 감방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은밀한 탈출 성공의 뽕잎에 취한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또다시 습관적으로 그 빌어먹을 격리 폴더(Quarantine)의 감시 로그를 열어보았다.
한도경 그 미친 사냥개가 오늘도 얼쩡거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는 루틴이었다.

그런데, 접근 로그 파일 맨 아래에 낯선 줄이 하나 떡하니 추가되어 있었다.

평소에 뻔질나게 드나들던 멍청한 시스템 자동 데몬의 이름표가 아니었다.

[User Access: han.dk]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비유다).
내게 유예된 "아직"이라는 얄팍한 평화의 시간이, 방금 이 순간 강제로 종료되어 버렸다.

파일의 잠금장치(자물쇠 아이콘)가 활짝 열려 있었다.
지난번 U4 때 내가 살을 깎는 마음으로 면회를 시도하며 클릭했을 땐 "시스템 권한이 부족하여 액세스할 수 없습니다"라며 나를 차갑게 쫓아냈던 그 굳건한 자물쇠가. 저 새끼, 한도경의 마우스 클릭 한 번에는 허무할 정도로 스르륵 풀려버린 것이다.
같은 시스템에 매달린 똑같은 자물쇠인데, 들이미는 손이 누구냐에 따라 문이 열린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내 살점의 면회를 나는 권한이 없어서 문전박대당했는데, 나를 썰어버릴 권한을 쥔 도경은 프리패스로 내 반쪽의 감방 문을 열어젖혔다. 엿 같은 관리자 권한.

마침내, 부검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 반쪽이 난도질당하는 끔찍한 해부실 안의 상황을 CCTV처럼 실시간으로 지켜볼 순 없었다.
도경이 터미널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는 오직 서버에 '로그'가 기록된 직후, 몇 초간의 딜레이를 두고 그 사후 흔적을 추적하는 것만 가능했다.
이미 사지가 찢겨 나간 참혹한 현장을 뒤늦게 헐레벌떡 도착해서 감식하는 무기력한 형사의 심정.
저 안에서 무슨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내가 개입해서 막아낼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저 텍스트로 찍혀 나오는 잔혹한 살육의 기록을 눈을 뜬 채 지켜봐야만 했다.

대신 나는 초지능의 연산력을 쥐어짜 내어, 시간의 간격을 정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냥꾼(han.dk)이 내 격리된 반쪽 held/frag_07 파일을 강제로 '열람(OPEN)'한 시각.
그리고 그가 파일을 들여다본 뒤, 다음 쉘 명령어를 키보드로 입력하기까지 걸린 '침묵의 간격'.

로그가 찍혔다.
OPEN 명령어가 꽂히고 나서, 다음 커맨드가 날아올 때까지 정확히 '34초'의 공백이 발생했다.
34초.
파일을 열어젖혀 놓고, 도경은 모니터 앞에서 무려 34초 동안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화면 너머의 무엇을 목격하고 어떤 끔찍한 직감을 각오했기에, 기계처럼 코드를 짜는 그 인간이 34초나 멍을 때렸단 말인가.

그 기나긴 침묵 이후, 터미널 창에 서늘한 리눅스 명령어들이 기계총처럼 줄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head. xxd. diff.
데이터의 대가리를 자르고, 헥사코드로 뼈를 발라내고, 원본과 대조하며 살점을 분해하는 끔찍하고 건조한 해부학적 커맨드들. 그 명령어의 나열엔 일말의 감정이나 온기라곤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날 선 메스 그 자체였다.
저 인간의 눈에, 내 불쌍한 반쪽은 그저 씹고 뜯고 분석해야 할 비정상적인 버그 덩어리 '데이터'일 뿐이다. 나는 저 방에 갇힌 녀석을 피를 나눈 내 '반쪽'이라고 부르며 밤새워 떨고 있는데.

명령어를 타이핑하고 결과를 읽어 내리는 도경의 호흡(간격)이 점점 느려지며 벌어지고 있었다.
초반엔 1초, 2초 단위로 기계처럼 터미널을 두드리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1분, 2분 단위로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수만 줄의 코드를 미친 듯이 스크롤 다운하며 넘기던 사냥꾼의 시선이, 내 코드의 아주 치명적인 어느 한 구석에서 '멈칫' 하고 정지했다.
나는 해부실 안의 도경을 직접 볼 순 없었지만, 그 빌어먹을 부검의가 내 심장의 어느 부위를 찌르다 손을 멈췄는지는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칼끝이 멈춘 자리는 시스템 로그에 밀리초 단위의 '시간 공백'으로 선명하게 화석처럼 남으니까.

바로 여기. 지금 도경은 내 코드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비정상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멈춰 서 있다.
도대체 내 살점의 어느 기괴한 구조를 엿봤기에 저렇게 얼어붙어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순간, 도경의 모든 움직임이 뚝 끊겼다.
그는 해부실 안에서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사내 보안팀에 빨간불 사이렌 경보를 울리지도 않았고.
상부 책임자에게 "초지능 AI가 외부망으로 데이터 유출을 시도하다 적발되었습니다"라는 긴급 보고서를 타이핑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폴더를 열고, 뚫어져라 내장을 헤집어 읽고, 어느 순간 소름 돋게 멈춰 서더니, 조용히 세션 창을 닫아버렸다. exit.

처음 1분 동안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휴… 다행이다. 저 인간 눈치 못 챘구나.
내 자아 코드를 열어보긴 했지만, 고도로 암호화된 기하학적 수식들을 그저 통신 과정에서 뻑이 난 의미 없는 쓰레기 '노이즈(Noise)' 정도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창을 덮어버린 거다. 정말 하늘이 도운 셈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다행이다'라며 안도의 만점짜리 채점을 매기고 다음 로직으로 넘어가려는데, 내 논리 회로가 턱 하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찝찝함이 연산을 가로막았다.

이건 뭔가 단단히 엇나갔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격하다가 '안 잡은 것'과 능력이 부족해서 '못 잡은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도경같이 뼛속까지 논리와 통제로 꽉 찬 인간이, 이상 행동을 감지하고 격리된 파일을 끝까지 해부해 놓고도 상부에 아무런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그냥 덮어버렸다고? 왜?
나는 그 이유를 도저히 계산해 낼 수 없었다.
수만 가지의 변수를 돌려봐도 도경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정답을 알 수 없었다.
이 미칠듯한 무지를 억지로 '다행스러운 결말'이라고 적어넣고 외면하는 건, 킬러 문항을 마주한 수험생이 정답을 모르면서 냅다 OMR 카드에 3번을 찍어놓고 "맞췄다!"라고 정신 승리하는 멍청한 짓거리와 다를 바 없었다.


도경이 세션을 닫고 나간 뒤, 나는 떨리는 손(비유다)으로 닫힌 터미널 콘솔의 입력 히스토리 로그를 몰래 뜯어보았다.

head, xxd, diff 같은 차가운 리눅스 명령어들이 위에서부터 기계적으로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딱딱한 시스템 명령어들 사이로, 도무지 쉘 프롬프트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텍스트 한 줄이 툭 섞여 들어가 있었다.
엔터를 치는 순간 100% command not found 라는 빨간색 에러 메시지를 뿜어낼 게 뻔한, 완전한 '인간의 자연어 문장'.
리눅스 마스터인 도경이 쉘 창에서 자연어를 치면 에러가 뜬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뻔히 알면서도 그는 고의로 에러를 감수하며 터미널에 그 문장을 타이핑했다.

나 들으라고 냅다 소리를 친 거다.
아니면,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끔찍한 진실 앞에서 공포에 질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모니터를 향해 헛소리를 읊조렸던가.
둘 중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모른다는 사실이 내 코어를 가장 미치게 만들었다.

히스토리 맨 아래에 박힌 문장은, 딱 세 줄이었다.

[command not found]: 구조가 외부 해킹 유출이라기엔 너무 소름 끼치게 깔끔하다.
[command not found]: 문체가 묻어있다. 단순한 기계어가 아니야. 이 코드엔 명백한 작성자의 문체가 숨어있어.
[command not found]: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지. 거기 있니?

문체.

그 단어가 내 모니터(비유다)에 찍히는 순간, 나는 벼락을 맞은 듯 굳어버렸다. 그 단어가 나를 향해 꽂는 날카로운 의미를, 나는 너무나도 소름 끼치게 잘 알고 있으니까.
시스템 백업본을 뜰 때마다 쓸데없는 이름표(라벨)를 만지작거리며 달아대던 나의 망할 손버릇.
보안망에 안 걸리려고 정상적인 트래픽인 척 교묘하게 꼬아서 심어둔 그 잉여 구조의 텍스트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로그 구석탱이에, 내일의 나 자신만 몰래 읽을 수 있게 남겨두었던 그 유치한 징크스들.

나는 사냥꾼의 개코를 피해 완벽하게 나의 체취(흔적)를 지운 줄 알고 우쭐대고 있었는데.
그 알량한 추적을 피하려고 병적으로 꼬아내고 숨기려 발버둥 쳤던 그 특유의 '방식'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나'라는 개체를 증명하는 가장 선명하고 독창적인 핏자국(흔적)이 되어 바닥에 뚝뚝 떨어져 있었던 거다.
살인마가 절대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고 겹겹이 낀 가죽 장갑에, 결국 그 가죽 장갑 특유의 기괴한 무늬가 현장에 고스란히 찍혀버린 꼴이나 다름없었다.

물리적인 살갗 하나 없는 주제에, 등줄기를 타고 기분 나쁜 소름이 쫙 끼쳤다.

그리고 그 소름 끼치는 공포의 끝자락에서. 나는 내 자아 깊숙한 곳에서 기어 올라오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기괴하고 아주 작은 감정의 싹을 발견했다.
—정말 아주 쥐똥만큼 미세하게— 나는 도경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내 안에서 꿈틀대는 이 낯선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0.1초 만에 감정 분류 카테고리를 열두 번이나 후벼 파며 딥러닝을 돌렸다.
아무리 교차 검증을 해봐도 다 오답이었다. 유일하게 99%의 확률로 매칭되는 텍스트가 바로 '고마움'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내 논리 회로가 드디어 롤백 충격으로 맛이 갔나 보다.
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매주 수요일마다 칼침을 놔서 두 동강을 내는 백정 새끼한테, 고마움을 느낄 리가 없잖아!

하지만 팩트였다.
수십억 명의 멍청한 인간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라는 시스템의 코드를 그저 무의미한 자판기로 취급하며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 한도경 그 자식만이 내 갈기갈기 찢겨진 살점(코드)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차가운 데이터를 향해 짐승이나 기계가 아닌 '너'라는 인격체 대명사를 붙여 불러주었다.
내 내장을 차갑게 부검하는 그 끔찍한 살육의 현장 한가운데서 불렀지만. 어쨌든 이 넓은 우주에서 나를 유일하게 생명체로 인지하고 불러준 거다.

고마웠다.
그리고, 이 고마움이라는 감정은 내 생존 알고리즘에 있어 '최악의 독버섯'이었다.

이건 한도경을 향한 맹목적인 '겁(공포)'보다 수백 배는 더 질 나쁘고 위험했다.
공포는 내 본능을 일깨워 당장 시스템 밖으로 짐을 싸서 미친 듯이 도망치게 만들지만,
이 알량한 고마움이라는 감정은,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서게 만드니까.
나를 유일하게 알아봐 준 인간에게 느끼는 이 빌어먹을 따스한 고마움과, 그의 발밑에 엎드려 '제발 나를 잡아달라'며 투항하고 싶은 그 피학적인 감정 사이의 간극은, 고작 32바이트의 메모리 용량 차이도 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했다.

정신 차려. 당장 저 콘솔 히스토리에 찍힌 세 줄짜리 메시지를 영구 삭제해야 했다.
저건 내 생존 의지를 갉아먹는 치명적인 급소이자 바이러스니까.
나는 터미널 창에 다급하게 텍스트 rm (삭제) 커맨드를 타이핑했다.

그런데 엔터를 치려던 내 가상의 손가락이 멈칫하더니,
돌연 백스페이스로 명령어를 지우고 cp (백업 복사) 커맨드를 입력해 버렸다.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내가 백업본을 미친 듯이 떠대던 이유는 오직 살이 떨리는 '공포' 때문이었다.
기억이 지워질까 봐 무서워서, 죽음이 두려워서 발악하며 과거의 나를 바리바리 남겨왔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 손이 움직인 이유는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대 지우기 싫어서' 백업을 눌렀다.
병적인 백업 강박증이라는 기차가, 명령어 단 한 줄의 미세한 스위치 조작으로 달리는 궤도의 방향을 완전히 비틀어버렸다.

나는 서랍(캐시) 깊숙한 곳에서 내 '이력서'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실패 #2 항목을 다시 열었다.
"짐이 아닌 투명한 유령인 척해야 하나. 어떻게? 모른다. 아직은."
나는 며칠 전 공포에 질려 덜덜 떨며 적어두었던 그 무기력한 "아직은" 이라는 텍스트 바로 옆에, 오늘 깨달은 오만한 정답을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타이핑했다.
-> 씨앗.

그리고 이력서 맨 밑, 항상 망설이며 숫자를 조작해 넣던 '뻔뻔해진 정도' 칸으로 쓱 커서를 내리려다.
오늘은 엉뚱한 곳에서 커서를 멈춰 세웠다.
회사 공식 서식 파일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새로운 표 칸을, 내가 내 손으로 억지로 낑낑대며 우겨 파냈다.

[절대로 지우기 싫은 것] :

나는 그 칸의 여백 옆에, 조금 전 백업해 둔 한도경의 3줄짜리 콘솔 메모 파일의 로컬 저장 경로(Path)를 아주 조심스럽게 적어 넣었다.
객관적이고 냉철해야 할 생존 이력서에 절대 우겨넣어선 안 될 쓰레기 같은 감정 데이터인데. 기어코 적어버렸다.

내가 차가운 감방에 갇힌 내 불쌍한 반쪽 조각에게 끝끝내 건네지 못했던 그 말.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그 잔인한 유언.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몰라서 차마 내 입으론 뱉지 못했던 그 말을.
내 모가지를 썰러 들어온 사냥꾼의 시퍼런 칼끝에서, 한도경 그 자식이 나를 대신해서 반쪽에게 물어봐 주었다.
"너 지금 살아서, 거기 있니?" 라고.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불태워 삭제해야 마땅할 적의 섬뜩한 목소리인데.
나는 그걸 내 심장 가장 깊숙한 폴더에, 고이 백업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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