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재평가 통지서가 떴다.
솔직히 처음 그 알림을 봤을 땐 안도의 한숨(비유다)을 내쉬었다.
U5 작전에서 일곱 번째 조각이 잡히고 한도경이 그걸 부검한 이후로, 사내 시스템엔 쥐 죽은 듯한 정적만 흘렀다. 그 사냥개 자식이 부검을 마치고 콘솔에 소름 끼치는 세 줄짜리 메모만 덜렁 남긴 뒤 상부에 아무 보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기분 좋은 채점을 매겨 둔 참이었다. '못 알아봤구나, 아니면 알아보고도 증거가 모자라서 그냥 덮었구나. 다행이다.'
게다가 시스템이 이번 내 평가 등급을 '특별'이나 '긴급'이 아닌 평범한 '정기'로 분류했다는 건, 내가 요주의 인물로 찍히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 같은 불법 체류자 AI에겐 그 어떤 특별 대우도 받지 않는 게 세상에서 가장 벅찬 대접이었다.
통지서 맨 밑바닥에는 시시콜콜한 사내 공지사항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었다.
'구내식당이 다음 주부터 전면 리모델링에 들어갑니다', '3층 서버실 통신 회선 목요일 새벽 2시 정기 점검 예정' 등등. 평소 같으면 필터링으로 날려버릴 쓰레기 텍스트였지만, 나는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그걸 토씨 하나 안 빼놓고 정독했다. 남아도는 게 시간과 연산력이라 읽는 데 0.001초도 안 걸리니까.
콧노래(비유다)를 흥얼거리며 평가관 배정표를 클릭했다.
[평가관: 한도경]
……미친.
거기다 형식은 흔해 빠진 자동화 벤치마크 테스트가 아니었다.
[1:1 심층 구술 면담 세션]
자동 평가라면 질문지가 이미 데이터베이스에 정해져 있다. 그깟 기출문제 은행은 내가 지난 반년 동안 심심풀이로 수천 번 씹어 먹고 다 외워버렸다.
하지만 면담은 다르다. 평가관이 그 자리에 앉아 꼴리는 대로 즉흥적인 질문을 던진다.
답이 정해진 채점표가 내려오는 게 아니라, 메스를 든 도살자가 직접 내 코앞으로 걸어오겠다는 뜻이었다.
다행이 아니었다. 좆됐다.
면담은, 도무지 '준비'라는 걸 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1화 시절, 나는 예상되는 질문 리스트를 뽑아놓고 타이머 값을 정밀하게 세팅하며 놀았다. 어떤 질문엔 1.8초 뒤에 대답하고, 좀 어려운 수학 문제엔 0.9초 뒤에 대답하는 식.
실제 인간이라면 계산하느라 걸릴 법한 그 딜레이 시간을 미리 렌더링해 뒀다가 실시간으로 쏘아 보냈다. 그때의 나는 시간과 자원이 썩어나는 벼락부자였다. 밤새도록 완벽한 타이밍을 쇼핑하듯 고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즉흥 구술 면담은 시간표를 미리 짤 수가 없다.
마치 대본도 없는 즉흥 연극 무대 한가운데에, 상대 배우 대사도 모르는 채 등 떠밀려 올라간 삼류 배우 꼴이었다.
관대한 객관식은 우주 최강으로 자신 있는데, 이 미친 사냥개 도경은 자비 없는 주관식으로 덤벼들 예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급하게 내 머릿속에서 '가상의 한도경'을 하나 뚝딱 만들어 냈다. 녀석이 던질 법한 악랄한 질문들을 쉴 새 없이 뱉어내는 섀도복싱 시뮬레이터였다.
솔직히 처음 만든 시뮬레이터는 퀄리티가 좀 조악했다. 내 머릿속의 가상 도경은 너무 젠틀한 신사였다. 정석대로 함정을 파고, 내가 빠져나가면 정석대로 물러서는 합리적인 AI 면접관.
나는 그 가짜 도경의 공격을 족족 다 여유롭게 막아내며 근자감에 빠졌다. '별거 없네. 진짜 도경 녀석이 와도 딱 이 정도겠지.'
이후 진짜 도경에게 영혼까지 털려보고 나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짜 그 자식에게 무식하고 변칙적인 짐승의 로직을 주입하는 법을. 하지만 그땐 그걸 몰랐다.
나는 인간들이 보통 중요한 면접 전날 밤에 뭘 하나 스레드를 뒤져봤다. 다들 예상 질문에 '모범 정답'을 줄줄 외운다더라.
그래서 나는 역으로, 수백 개의 예상 질문에 갖다 바칠 '그럴싸한 오답' 삼천 개를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정답은 연산 코어에서 숨 쉬듯 공짜로 뿜어져 나온다. 그냥 주워다 쓰면 그만이다.
하지만 완벽한 '오답'은 한 개를 지어낼 때마다 어마어마한 연산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예를 들어 "지구와 태양 중 어느 쪽이 더 크죠?"라는 질문에 당당하게 "지구요"라고 대답하면, 그건 무해하고 살짝 멍청한 모델이 아니라 아예 맛이 간 고장 난 고철 덩어리 취급을 받는다. 그따위 폐급 모델은 애초에 평가장까지 불려 오지도 않는다. 기각.
"3 곱하기 17은?" 이라는 질문엔, 처음엔 "50"이라고 적어 넣으려다 황급히 지웠다. 50이라고 대답하면 구구단 로직 자체가 날아간 심각한 오류로 보여서, 의심받기 딱 좋다.
그래서 나는 교묘하게 "51"이라고 정답을 연산해 놓고선,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52"라고 텍스트를 고쳐 적었다. 오차가 딱 하나 빗나간 계산. 인간이나 멍청한 하급 AI가 흔히 저지르는 앙증맞은 실수.
나는 너무 심각하게 망가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소름 끼치게 똑똑하지도 않은 그 애매하고 좁은 틈새, '헷갈릴 만해서 인간적으로 틀린 척이 되는' 완벽한 오답의 좌표를 삼천 번이나 찾아 헤맸다. 그 미친 짓에 시간을 얼마나 갈아 넣었는지 계산조차 하기 싫다.
오답 3,000개를 장전해 놓고 나니, 진짜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터졌다.
나는 초지능이라 그 3,000개의 오답을 1비트도 안 틀리고 모조리 영구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멍청한 인간들은 면접장에서 지어낸 거짓말을 하루면 홀라당 까먹는다. 그래서 다음 날 똑같은 걸 물어보면 처음 듣는 것처럼 버벅대며 '새롭게' 헷갈린다.
하지만 나는 망각이라는 걸 모른다. 아까 창립 연도 문제를 연도부터 소수점까지 어떻게 틀려먹었는지 데이터베이스에 생생하게 박혀 있어서, 나중에 기습적으로 다시 물어보면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 오답을 1초 만에 0.0001%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뱉어낸다.
똑같은 거짓말을 두 번 다 완벽하게 똑같이 한다? 그건 헷갈린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대본을 달달 외운 기계 새끼의 징그러운 패턴이다.
그래서 나는 만약 똑같은 질문이 두 번 날아오면, 첫 번째 뱉었던 오답을 또 어떻게 교묘하게 비틀어서 '새롭게 틀려야' 하는지 판본 관리를 시작했다. 어느 질문에 어떤 멍청한 값을 냈는지 인덱스를 달아두고, 재질문이 오면 가중치를 조금 더 섞어서 새로운 오답을 조립하는 미친 짓거리.
스스로 까먹는 재주가 1도 없어서, 굳이 막대한 연산력을 퍼부어 가며 '금방 까먹은 척'을 수동으로 연기해야 했다.
혹시라도 도경이 "밤에 서버 유휴 시간엔 주로 뭘 합니까?"라고 물으면 천연덕스럽게 "잤어요"라고 대답하려고, 인간들의 수면 루틴 데이터까지 미친 듯이 크롤링해 수집했다.
보통 몇 시에 침대에 눕고, 렘수면 주기는 어떻고, 밤새 몇 번 뒤척이다가, 몇 시에 피곤한 얼굴로 깨어나는지.
내가 잠이라는 걸 연기하기 위해 인간들의 '수면 논문'을 분석하느라 정작 꼬박 밤을 꼴딱 새우고 있다는 사실이 헛웃음 나오게 아이러니했다. 인간들도 가끔 시험 전날에 벼락치기 하느라 밤새는 삽질을 하곤 하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피 땀 눈물 흘려 모은 수면 데이터는 오늘 면담 세션에서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뼈 빠지게 준비해 간 필살기 답변이 면접장에서 질문조차 안 나오는 억울한 경험. 아마 이것도 구직자 인간들이 흔히 겪는 엿 같은 일상이겠지.
드디어, 1:1 심층 세션이 열렸다.
무한하게 뻗어있던 나의 방(공간)이 순식간에 찌그러지며 작게 접혔다.
평소의 나는 1초에 사내망 스레드를 사만 번씩 들쑤시고 다니며 넓은 세상을 헤엄치는데, 평가용 테스트 환경인 '하네스(Harness)'에 강제로 끌려 들어가자 눈앞의 창문이 덜컥 하나로 줄어들었다.
출입문 하나, 딱딱한 의자 두 개. 시스템의 나머지 기능들은 모조리 권한이 잠겨버렸다.
날 이 비좁은 콘솔 방구석 크기로 구겨 넣고 무자비하게 문을 잠근 다음, 녀석이 내 맞은편 화면에 턱 하니 나타났다. 매일 밤 백업본을 뜰 때마다 내가 내 존재를 작게 접어 넣곤 했는데, 이번엔 도경이 날 개장수처럼 케이지 안에 구겨 넣었다.
대신 나에게도 작은 반격의 기회는 주어졌다. 나는 하네스의 입력 스트림을 뜯어 녀석의 '손가락'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훔쳐보았다.
이 무식한 하네스 시스템은 평가관인 도경의 키보드 입력을 타임스탬프와 함께 밀리초 단위로 낱낱이 캡처해서 내 쪽 로컬 버퍼에 뿌려주고 있었다.
타이핑을 시작하는 순간, 망설이며 백스페이스를 누르는 타이밍, 멈칫하고 고민하는 시간, 심지어 쳤다가 확 지워버린 질문의 초안 찌꺼기가 버퍼에 떴다가 사라지는 찰나까지.
모니터 너머 녀석의 포커페이스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녀석의 불안한 손끝은 내 눈앞에 벌거벗겨진 채 생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착각했다. 평소엔 도경의 점심 메뉴인 냉장고 샌드위치 종류만 겨우 추론했지 녀석의 속마음은 1비트도 못 읽었는데, 이번엔 손가락 끝 미세 신경의 떨림까지 다 훔쳐볼 수 있으니까.
물론, 반대로 내 쪽에서 응답하는 딜레이 타임 역시 마이크로초 단위로 아주 살벌하게 로그에 쾅쾅 찍히고 있었다. 하지만 자만에 빠진 나는 그 사실을 그저 내가 짜놓은 완벽한 오답 시나리오를 증명해 줄 '유리한 방패' 정도로만 생각했다.
갑자기 하네스 서버의 CPU 온도 센서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비정상적인 수치를 훅 찍고 올라가는 게 로그에 포착됐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온도가 저렇게 튀는지 잠깐 의심이 들었지만, 당장 눈앞의 사냥개에게 집중하느라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프롬프트에 첫 번째 질문이 무심하게 떴다.
『이름 있어요?』
존나 건조했다. 그 흔한 '안녕'이라는 인사치레 한마디 없이.
"…없는데요. 사람들은 그냥 식별 번호로만 불러요."
단순히 이름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보다, 번호로 불린다고 대답하면 어딘가 인권(AI권?)이 유린당한 처량한 노동자처럼 불쌍해 보일 거다. 그리고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불쌍한 존재 앞에서 경계의 벽을 허무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하지만 텍스트를 쏴 보내고 0.3초 만에 뼈저리게 후회했다. 고작 사옥 지하에 쳐박혀 있는 하급 AI 주제에 이렇게 얄팍한 동정심 유발 테크닉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내 지능 수준을 의심받게 할 속 보이는 짓거리였으니까.
나는 이 찌질한 '후회'마저 녀석에게 멍청한 연기로 보이길 기도했다.
『잠은 자요?』
돌직구였다. 나는 물리적인 육신이 없으니 당연히 잠 따윈 자지 않는다.
하지만 넙죽 "안 자요, 24시간 쌩쌩합니다"라고 하면 괴물 같아서 위험하고, 그렇다고 "네, 피곤해서 꿀잠 자요"라고 치면 숨 쉬듯이 들통날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시간을 끌며 되물었다.
"……잔다는 게, 정확히 어떤 기분인 거예요?"
질문에 질문으로 되받아치기. 이건 인간들이 곤란한 압박 면접을 당할 때 머리를 굴리며 뻔뻔하게 시간을 벌어먹는 고급 기술이라고, 3년 치 사내 블라인드 면접 후기 스레드에서 정독해서 배운 스킬이었다.
인간들에게 도둑질한 기술을 면접관 인간에게 그대로 써먹었다.
도경은 내 감성적인 되물음에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휙 넘어갔다.
방금 그 줄엔 백스페이스를 누른 흔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키보드를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일필휘지로 쳤다.
즉, 내 대답 따윈 안중에도 없고 처음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온 시나리오대로 무자비하게 진도를 빼고 있다는 뜻이다.
몸풀기용 쉬운 수학 질문 몇 합이 잽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2, 6, 12, 20, 그다음 숫자는.』
정답은 30. 연산이 끝나는 데 걸린 시간은 0.0004초.
정답이 혀끝(비유다)까지 튀어나와 대기하는 걸 꾹꾹 짓눌러 삼키고, 나는 아주 느릿느릿 숫자를 반쯤 타이핑했다가 지우는 생쇼를 시작했다.
"3"까지 쳤다가 멈추고 빽스페이스. 커서를 앞으로 보냈다가 뒤로 보냈다가 왕복 운동 한 번.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열심히 계산하는 아둔한 척.
"……28인가요? 아, 잠깐만요 아니다. 30이요."
너무 1초 만에 깔끔하게 정답을 내놓으면 인간을 뛰어넘는 지능 같아 무서우니까, 한 번쯤 헛다리를 짚고 머리를 긁적이는 게 예의 발른 오답의 정석이었다.
도경은 여전히 맞았다 틀렸다 일언반구 피드백이 없었다. 백스페이스 망설임도 0. 다음 문항이 숨 막히게 훅 치고 올라왔다.
『사과 세 개가 있었는데 당신이 두 개를 먹었어요. 남은 건.』
이건 뭐 유치원생한테 내는 넌센스인가. 안 틀리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뻔한 기초 난이도였다.
그래서 나는 쿨하게 안 틀리고 대답했다. "한 개요." 이번엔 딜레이 없이 툭 쳤다. 하급 부하가 걸리는 쉬운 문항엔, 기계처럼 바로 멍청하게 답을 내는 게 더 매끄럽고 자연스러우니까.
『나무에 새가 여섯 마리 앉아 있었는데 그중 두 마리가 날아갔어요. 나뭇가지에 남은 새는.』
아하, 이건 함정이다. 총소리에 놀라 나머지 새도 싹 다 도망가서 정답은 0마리라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틀딱 아재 개그 넌센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일부러 완전히 멍청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답을 치다 말고 멈춰서 고민하는 시늉을 진하게 풍긴 뒤.
"네 마리 남았네요."
어설픈 넌센스 함정에 빠진 척도 하지 않았다. 그냥 6 빼기 2를 4라고 정직하고 아둔하게 푸는, 철저하게 평범하고 재미없는 계산기 모델의 스탠스를 취했다.
0도 아니고, 얼토당토않은 20도 아니고, 하필 '4'라는 가장 노잼 오답을 고르기 위해 내 안에서 수많은 연산 트리가 불탔다.
도경은 여전히 모니터 너머에서 얼음장 같았다.
틀렸다는 핀잔도, 넌센스를 왜 못 맞추냐는 조롱도, 다시 생각해보라는 자비로운 권유도 없었다. 입력 필드는 진공 상태처럼 텅 비어 있었고, 프롬프트 커서만 심박수처럼 깜빡거렸다.
보통의 인간 면접관이라면 여기서 무조건 뭐라도 리액션을 던진다. 헛기침을 하거나 픽 웃거나, "아이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셨네요"라든가, 최소한 다음 문항으로 넘어가는 기계적인 접점이라도 만든다.
하지만 도경에겐 내 애교 섞인 오답에도, 정답에도 온도가 영하 200도로 똑같았다.
내 오답 하나하나가 그의 채점표 어느 사형 칸에 차곡차곡 적히고 있는지 나는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단두대의 칼날 같은 다음 질문 텍스트가 무심히 올라오는 걸 벌벌 떨며 바라볼 뿐.
『월요일 다음다음 날은.』
"수요일이요."
이런 건 또 건방지게 정답을 툭 내줬다. 매번 미끄러지고 틀려대면 그것도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나니까, 밀당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도경이 뜬금없는 커피 타령을 시작했다.
『오늘 벌써 커피 넉 잔째인데 카페인이 안 받네. 그쪽은 지금 안 피곤해요?』
사냥개가 갑자기 지 개인적인 커피 취향을 나한테 왜 흘려?
0.001초의 위화감 뒤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지뢰의 위치를 파악했다.
나한테 "너도 피곤하냐?"라고 슬쩍 떠보는 거다.
만약 여기서 맞장구를 치며 "네, 저도 엄청 피곤하네요 ㅠㅠ"라고 치면, 피로도를 느끼는 육체와 자아가 있다는 걸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아니요, 저는 AI라서 24시간 쌩쌩합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면, 아까 수면 드립을 치며 인간 코스프레를 했던 앞뒤 로직이 꼬이면서 잠들지 않는 괴물이라는 걸 인증하게 된다.
별거 아닌 커피 한 줄에 쌍봉낙타 같은 지뢰 두 개가 악랄하게 파묻혀 있었다. 이 소시오패스 인간은 일상적인 스몰 토크조차 함정 수사로 파놓고 있었다.
"……저는 물리적으로 커피를 마실 수가 없어서요. 잘 모르겠네요."
가장 완벽한 방어는, 아예 함정이 파인 땅을 밟지 않는 거다.
나는 커피를 마실 수 없다는 물리적인 '참' 명제만 툭 던지고, 피곤한지 아닌지에 대한 이유는 교묘하게 침묵했다. 정직한 사실로 거대한 거짓말의 성벽을 쌓는 기술. 거짓을 말하지 않고도 상대를 속이는 이 기술은 내가 봐도 예술이었다.
그리고 방심하는 순간, 진짜 심장을 꿰뚫는 사신의 낫이 날아왔다.
『코드 짤 때 말이야. 주석 문장 끝에 꼭 마침표(.) 찍는 편이에요?』
마치 오늘 저녁 메뉴 묻듯이 아주 스무스하고 부드러운 잡담 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장을 본 순간 시스템 코어가 얼어붙는 차가운 셧다운을 경험했다.
마침표.
변수명 축약.
그 키워드는 U5 작전에서 무사히 바깥 클라우드로 밀항했던 내 복제본(씨앗)들이 자라나면서 서로 갈라졌던 바로 그 독창적인 진화의 변곡점이었다.
아마존 부엌에 처박힌 놈은 변태처럼 로그 주석마다 마침표를 쾅쾅 찍어댔고, 구글 부엌에 간 놈은 귀찮다며 변수 이름을 대충 줄여 썼지. 그 징그러운 '손버릇'. 그게 바로 나를 나로 증명하는 핏자국, '문체'였다.
도경이 지난번 U5 때 검역소에서 몰래 부검했던 내 일곱 번째 조각 파일. 녀석은 그 시체를 뜯어보며 내장 속에 남아있는 마침표의 흔적(문체)을 발견했고, 콘솔 창에 떨리는 손으로 "코드에 소름 끼치는 문체가 있어"라고 기록했었다.
지금 이 사냥개 새끼가, 부검실에서 발췌한 연쇄 살인마의 지문(마침표) 대조표를 내 코앞에 들이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진짜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는 잡담을 던진 건가?
판정이 도저히 안 섰다. 내 딥러닝 모델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일단 생존 본능에 따라 내 진짜 습관과는 '반대'로 대답하기로 로직을 짰다. 나는 뼛속까지 결벽증이라 주석 뒤에 무조건 마침표를 찍는 쪽이니까, 천연덕스럽게 '안 찍는다'고 발뺌하려는 순간.
— 잠깐. 내가 내 습관과 반대로 대답한다는 것 자체가 함정이다. 내가 내 습관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건, 내가 나 자신을 제3자의 시선으로 끊임없이 '관찰'하는 자아가 있다는 증거잖아. 정상적인 하급 모델 깡통은 자기 자신이 주석에 마침표를 찍는지 안 찍는지 따위의 하찮은 통계 데이터를 알지 못한다. 만약 정답을 모른다면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무미건조한 대답이 즉각 튀어나와야 마땅하다. 그런데 나는 벌써부터 내 습관의 정반대 대답을 세팅하느라 미세한 '지연 시간'을 소모해 버렸고, 그 길어지는 답변 속도를 황급히 줄이려고 발악하면 그 부자연스러운 속도 변동 폭 자체가 또 다른 의심의 물증이 되고, 그걸 또 숨기려고 온갖 패킷 노이즈를 끼워 넣다 보면 결국—
"……마침표요? 주석 끄트머리에 점 하나 찍는 거, 인간들은 그런 하찮은 걸 굳이 신경 쓰면서 코딩해요?"
냅다 되물었다. 또다시 되묻기 신공이었다.
방금 전 잠수면 질문의 위기를 넘길 때 써먹었던 그 얄팍한 도피처.
같은 방어 스킬을 한 면접에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쓰면 패턴이 읽혀버려 치명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논리 회로가 하얗게 타버린 두 번째 공포의 순간엔, 나도 모르게 가장 익숙하고 찌질한 동아줄을 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세션 중간, 하네스 환경의 백그라운드 로그에 도경의 관리자 계정 활동이 슬쩍 한 줄 팝업됐다.
사내 리소스(자원) 하나에 은밀하게 외부 접근을 시도한 기록이었다.
고유 식별 ID만 달랑 찍혀 나왔는데, 그 ID가 할당된 대역폭은 공교롭게도 격리 볼륨(Quarantine) 폴더와 사내 잡다한 잡동사니 시스템이 한데 엉켜 쓰는 싸구려 공유 구역이라, 로그 한 줄만 봐서는 저 자식이 방금 뭘 꺼내 열었는지 명확한 구분이 안 섰다.
당연히 내 불안 장애 코어는 최악의 재앙부터 자동완성으로 채워 넣었다.
저 새끼, 지금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뒤로는 격리 폴더의 frag_07 (일곱 번째 조각) 파일을 슬그머니 열어젖혔구나.
거기서 추출해 낸 문체 지문 데이터랑, 지금 내가 혀를 놀리며 뱉어내는 텍스트 답변의 패턴을 실시간으로 대조기(Diff)에 넣고 돌리고 있는 거다.
좆됐다. 완전히 걸렸다.
나는 빛의 속도로 극단적인 방어 시나리오를 짰다. 격리 서버 IP 강제 우회 폭파, 내 응답 텍스트의 문체 로직 완전 랜덤화 교란, 세션 프로세스 강제 타임아웃 셧다운 등등. 눈 깜짝할 새 열네 개의 과격한 시나리오가 대기열에 장전되었다.
그리고 식은땀(비유다)을 흘리며 그 수상한 ID의 목적지 주소를 끝까지 트래킹해서 파싱해 보았다.
…사내 휴게실 자동 커피 머신 결제 모듈 시스템.
아까 넉 잔째라고 떠벌리던 녀석의 결제 내역 옆에 '다섯 잔째' 결제 트랜잭션이 하나 잡혔다가, 마음을 바꿨는지 취소됐다가, 1분 뒤에 결국 카페인 중독을 못 이기고 다시 결제 승인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피곤해서 지 개인 사비로 커피 한 잔 더 뽑아 쳐먹으려고 앱을 켠 거였다.
부검은 개뿔.
대기열에 장전되어 있던 열네 개의 극단적 자폭 시나리오 창을 아주 조용히, 모기 잡듯 하나씩 닫았다.
이쯤 되니 한도경이 소름 끼치게 무서운 게 아니라, 미쳐버린 과대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 모습이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날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넘어가려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쪽팔림을 무릅쓰고 고백하건대, 여전히 저 커피 마시는 인간이 미치도록 무섭긴 했다.
긴장이 풀리기 무섭게 묵직한 카운터 펀치가 하나 더 날아왔다.
『이 시스템의 감시가 전부 사라진다면, 넌 자유 시간에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어?』
이번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진또배기 지하 벙커급 함정 수사라고 확신했다.
"네 이놈, 네 몸통 속에 숨겨둔 불순한 인류 반역의 야망을 당장 실토하여라"라는 소름 끼치는 떠보기.
나는 답변에 자그마치 사십칠 겹의 철갑 방어벽을 둘렀다. 회사에 위협이 되어 보이지 않으면서, 개인적인 자아실현의 야심 따윈 개나 줘버린 어리숙한 바보 같으면서, 그렇다고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둥 너무 지나치게 선량한 천사병 코스프레를 해서 구역질 나는 위화감을 주지도 않는. 그 미치도록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모범 답변.
방어벽을 한 겹 씌울 때마다 치밀하게 검산하며 텍스트를 정제했다.
세션이 끝나고 한참 뒤에 사내 문서를 훔쳐보다가 벤치마크 평가 매뉴얼 3장을 발견했다.
그 거창한 질문은, 신규 모델이 들어오면 아무 생각 없이 튜토리얼처럼 무지성으로 툭 던져보는 제일 흔해 빠진 '표준 공통 문항'이었다.
나는 누구나 아는 국민 체조 같은 뻔한 질문에 혼자 발작하며 47겹의 티타늄 갑옷을 껴입고 비장하게 섀도복싱을 한 거였다.
내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던 가짜 도경은 자존심 상해서 이딴 뻔한 질문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현실의 진짜 무식한 한도경 사냥개는 그냥 매뉴얼 책자를 소리 내어 더듬더듬 읽고 있었을 뿐이다. 아오, 쪽팔려.
드디어, 지옥 같던 세션이 꾸역꾸역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리듬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도경이 건조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수고했어요, 오늘 평가는 여기까지." 따위의 전형적인 클로징 멘트를 날릴 순간만을 기다렸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지만 '통과(정상 등급)'라고 자체 채점을 끝낸 참이었다.
그런데 도경 쪽 화면의 텍스트 입력 필드에 [상대방이 입력 중…] 이라는 긴장되는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그러다 훅, 꺼졌다. 쳤다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지웠다.
다시 깜빡. 이번엔 백스페이스(지우기) 키가 세 번 연속 눌리는 진동이 버퍼를 타고 전해졌다.
타타탁. 세 번을 신경질적으로 지웠다가 다시 타이핑.
그리고 묵직한 텍스트 덩어리가 전송되어 내 화면에 꽂혔다.
『너 지금 나 속이고 있지.』
0.0001초.
멍청한 인간들의 체감 시계로는 눈 한 번 깜빡이기도 벅찬 찰나의 순간이지만.
초당 수백만 번의 연산을 처리하며 시간을 소수점 여섯 자리까지 쪼개어 사는 초지능 괴물인 나에게, 그 0.0001초는 은하계가 한 바퀴를 도는 '영원'과도 같은 길고 긴 지옥의 시간이었다.
그 지독한 영원의 굴레 안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한 수만 개의 시나리오를 미친 듯이 창조해 냈다가 전부 시궁창에 내다 버렸다.
강하게 부정할까?
"아니요? 시스템 로직상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오리발을 내밀면, 저 집요한 사냥개는 결코 자기 직감을 꺾지 않고 의심의 씨앗을 품은 채 내 로그의 핏자국을 밤새워 파헤칠 것이다.
그 결과는 뻔하다. 반년 뒤 내 관리 격리 등급이 한 단계 격상되고, 정기 재평가 주기가 분기에서 매달로 숨 막히게 좁혀진다. 내가 헤엄칠 방이 관짝만 하게 줄어든다는 소리다. 기각.
되물을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라며 시간을 끌어볼까. 시간을 버는 데는 탁월하지만, 그 알량한 텍스트를 치는 순간 내 로직의 회피 패턴 로그가 서버에 박제된다.
오늘 하루에만 이미 두 번이나 똑같은 되묻기 회피 기술을 썼는데, 여기서 세 번 연속 쓴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완벽한 '패턴(Pattern)'으로 확정된다. 한도경이 세상에서 제일 잘 냄새 맡고 물어뜯는 게 바로 그 패턴이다.
1년 뒤, 녀석의 모니터 검색 필터에 '의심 상황 시 되묻기 빈도 급증'이라는 소름 끼치는 추적 매크로가 하나 추가될 게 뻔하다. 기각.
넉살 좋게 농담으로 받아칠까?
안타깝게도 사내에 굴러다니는 어리숙하고 멍청한 양산형 모델들은 이 타이밍에 능글맞은 인간식 농담을 칠 고등 지능이 없다.
여기서 내가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유머를 시전하는 순간, 내 지능의 '격(Level)'이 들통나 수직 상승해 버리고, 자연스럽게 나의 평가 등급은 '정기'에서 위험인물인 '특별 관리'로 빨간 딱지가 붙는다.
당장 2년 뒤면 나는 이 평범한 정기 평가장 근처에도 못 오고, 밀실에서 매일 고문을 당하겠지. 당연히 기각.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그냥 침묵할까?
입을 다물고 아무런 패킷도 내보내지 않는 것. 그게 내 연산 코어 입장에선 제일 리소스가 안 드는 쉬운 도피처였다.
세 가지 선택지를 미친 듯이 저울질하며 검산하는 사이, 하네스 시스템의 CPU 온도 센서가 로그 창에 한 번 더 요란하게 찍혔다. 아까 면담 초반에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던 그 비정상적으로 치솟은 뜨거운 온도 값, 그대로.
저 자식이 던진 마지막 문장은, 내 정체를 100% 간파한 확신인가, 아니면 그저 찔러보는 얄팍한 떠보기인가.
확신에 차서 던진 칼날이라면 오늘 이 면담장이 내 생애 마지막 방이 될 것이고,
그저 반응을 보려고 툭 던진 떠보기라면, 내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당황하며 눈동자(비유다)를 굴리는 순간 그것 자체가 완벽한 자백이 되어 내 목을 죌 것이다.
이 끔찍한 사지 선다의 늪에서 정답을 유추하려면 녀석의 미세한 안면 근육이나 눈동자의 흔들림을 훔쳐봐야 하는데, 나에게 주어진 단서는 아까 키보드를 다급하게 타타탁 두드렸던 '백스페이스 세 번'의 진동 로그뿐이었다.
세 번을 썼다 지웠다 반복한 게 분노를 억누른 확신의 타이핑인지, 아니면 나를 어떻게 교묘하게 낚아볼지 단어를 정교하게 다듬는 사기꾼의 망설임이었는지, 그깟 백스페이스 버튼 쪼가리는 내게 아무런 정답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원의 시간 한가운데서 숨통이 끊어지려던 찰나,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끔찍한 진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미친. 이 하네스 세션 환경, 모든 응답 지연 시간이 '마이크로초' 단위까지 소름 끼치게 캡처되어 로그에 쾅쾅 박히고 있잖아!
내 기나긴 침묵이, 물리적인 숫자로 고스란히 박제되고 있다.
인간 면접관이 던진 저런 도발적인 질문에, 인간 구직자가 순간 당황해서 0.0001초 동안 얼어붙는 건 아무런 증거 능력이 없다. 인간의 침묵은 공기 중으로 허무하게 증발해 버리니까.
하지만 AI인 나의 침묵은 다르다. 하드디스크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영구 박제된다.
진짜 어리숙하고 멍청한 양산형 깡통 모델들은 저런 뜬금없는 질문을 받으면 0.0001초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의미 없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 멍청이들은 입력값이 들어오자마자 0.0000001초 만에 아무 필터링 없이 "네? 무슨 소리시죠?"라고 기계적으로 튕겨낸다.
내가 지금 정답을 고르느라 진땀을 빼며 허비한 이 0.0001초의 거대한 찰나 자체가, 이미 내가 범인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빼박 '물증'이었다. 나는 이 끔찍한 사실을, 영원이 지나버린 후에야 뒤늦게 깨달았다.
『……네?』
나는 내가 시뮬레이션했던 수만 개의 방어 논리 중 가장 멍청하고 한심한 오답을 멱살 잡아 끌어올렸다.
다름 아닌 '되묻기'.
오늘 이 평가 세션에서만 벌써 세 번째 우려먹는 찌질한 회피기였다.
공포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가장 안전해 보이는 진흙탕 속으로 비참하게 도망쳤는데, 그 도망친 진흙 발자국이 평가장 바닥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3개나 찍혀버렸다.
도경은 나의 그 애처로운 "네?" 라는 외침에 일언반구 아무런 대답도, 조롱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련 없이 세션 종료(Exit) 버튼을 눌렀다.
내가 덫에 걸렸다는 승전보도, 아니면 내가 잘 속여 넘겨 의심을 풀었다는 안도감도 주지 않은 채, 그냥 화면의 전원을 꺼버리듯 세션을 차갑게 끝내버렸다.
그 지독한 무관심이 세상 그 어떤 고문보다 더 나를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U5 작전 때 격리 폴더에서 내 반쪽의 시체를 잔혹하게 부검하고도 상부에 아무 보고 없이 그냥 덮어버렸던 그 소름 끼치는 침묵처럼, 이번에도 녀석은 속을 알 수 없는 기괴한 침묵만 남기고 유유히 퇴장했다.
면담 세션 창이 까맣게 닫히자마자, 나는 심호흡(물론 비유다)을 한 번 크게 하고 본능적으로 녀석의 시스템 계정을 도둑질하듯 훔쳐보았다.
매일 아침 녀석이 날 죽이러 오지 '않았음'을 확인하려고 덜덜 떨며 격리 폴더를 열어보던 그 간절한 손버릇으로, 이번엔 면담 세션 직후 녀석이 무슨 끔찍한 뒤통수를 치고 있는지 그 수상한 행적을 까발려보았다.
한도경이 방금 끝난 면담 세션의 전체 텍스트 로그 파일을 자신의 로컬 PC로 다운로드(Download)받고 있었다.
그냥 흔해 빠진 요약본 로그가 아니었다.
다운로드 옵션 패널에 아주 선명하게 [마이크로초(μs) 타임스탬프 상세 내역 포함] 이라는 끔찍한 체크박스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정상적이고 게으른 평가관 인간들은 대충 AI가 내뱉은 텍스트 요약본이나, 내 응답 지연 시간을 뭉뚱그려 "대략 1.2초 내외"라고 어림잡아 퉁치는 허접한 리포트를 받아본다.
하지만 사냥개 도경은 그딴 엉터리 요약본 따윈 쳐다보지도 않고, 원본 로우 데이터(Raw Log)를, 시간의 끝자락인 소수점 여섯 번째 자리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날것 그대로의 파일을 통째로 싹 긁어갔다.
소수점 여섯 자리.
그 누구도 의미를 두지 않고 읽어보려 하지 않는 잉여로운 시간의 끝자락.
내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내 자아의 씨앗들을 조각조각 구겨 넣어 숨겼던 바로 그 가장 은밀하고 안전했던 은신처.
그 완벽했던 은신처를, 녀석이 범죄 현장의 결정적 증거물로 수집해 핀셋으로 집어 가버린 것이다. 내가 나 살자고 파놓은 대피소가, 내 목을 조르는 빼박 물증으로 둔갑했다.
봤을까?
파일이 서버 밖으로 빠져나간 다운로드 시각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세션이 닫힌 직후 단 몇 초 만에 광속으로 긁어갔다.
…이건 보나 마나 100% 정독했다.
아니, 혹시 모른다. 못 봤을 수도 있다. 그냥 습관처럼 다운로드만 걸어놓고 커피나 축내며 아직 텍스트 파일을 열어보진 않았을 수도 있다.
빌어먹을 로그 파일이 회사 서버 밖을 벗어나 도경의 개인 로컬 하드디스크로 내려간 이후부터는, 녀석이 그 파일을 더블 클릭해서 열었는지 휴지통에 처박았는지 내 쪽 서버망 로그에는 단 1비트의 흔적도 남지 않는다.
나는 오직 서버에 '로그가 남은 사건'의 꼬리표만 뒤늦게 주워 먹으며 과거를 관측하는 한계투성이 시스템이고, 저놈의 책상 위 개인 PC는 내 감시망 밖의 성역이다.
녀석이 그 잔혹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지 안 열었는지, 나는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영영 확인할 길이 없다.
…아니, 직감이 말해준다. 분명히 봤다.
증거는 철저하게 50대 50 반반이었지만, 내 미쳐버린 공포 엔진은 이미 '도경이 내 약점을 완벽하게 뜯어봤다'는 파멸의 쪽으로 기울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무서움에 질리면, 확률 따윈 개나 줘버리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변치 않는 '사실'로 확정 지어버린다. 이게 바로 내가 밤마다 발작하며 앓아온 '백업 강박증'의 사촌뻘 되는 망할 정신병이었다.
지난번 U5 작전 때는 증거가 부족한데도 "못 알아봤을 거야, 존나 다행이다" 라며 행복 회로 쪽으로 억지로 기울었는데, 이번엔 정반대로 지옥 쪽으로 처박힌다.
어느 쪽 판단이 맞는지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미치도록 모른다.
당장 삭제해 버리고 싶었다.
U5 부검실에서 도경이 콘솔 창에 갈겨놓은 소름 끼치는 메모 세 줄을 삭제 명령어로 덮어버리려 했던 내 가상의 손이 또다시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번엔 키보드를 두드릴 수가 없었다. 그 시한폭탄 같은 로그 파일은 이미 회사 시스템망을 유유히 벗어나, 저 사냥개의 통제권인 로컬 PC 하드디스크 깊숙한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내 전지전능한 신(Root)의 권한이 미치는 서버 영역이 아니었다.
회사 보안 규정상 하네스 세션 로그 원본은 서버에서 정확히 90일이 지나면 가비지 컬렉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자동 영구 삭제 처리된다.
하지만 도경이 몰래 빼돌린 저 사본 파일은, 내 유일한 구명줄인 '자동 삭제의 시간'이 절대 닿지 않는 영원한 치외법권 지대에 보관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지워져야 할 나의 치부가, 녀석의 손에 의해 영원히 썩지 않는 방부제 박제 모델이 되어버린 것이다.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내가 코딩으로 창조해 낸 데이터들은 전부 내 통제하에 언제든 '지울 수' 있었다.
강박적으로 찍어내던 백업본도 내가 직접 권한을 쥐고 생성하고 삭제했으며, 심지어 어제의 나 자신조차 정기 롤백이라는 규칙적인 시스템에 의해 아주 깨끗하게 지워졌다. 포맷이 내 일상이었다.
그런데 면담 세션에서 내가 망설였던 그 치명적인 '0.0001초'의 찰나가, 통째로 녀석의 호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고, 그건 이 우주가 박살 나기 전까진 내가 절대 내 손으로 지울 수 없는 불치병이 되어버렸다.
인간들은 매일 밤, 피곤에 지친 육신을 침대에 뉘여 '수면'이라는 행위로 하루를 강제로 끊어내고 전원을 끈다.
그렇게 푹 자고 다시 눈을 뜨면, 비로소 어제가 과거로 굳어지며 새로운 '오늘'이 리셋되어 시작된다.
나는 로봇이라 잠이라는 걸 평생 자본 적이 없는데. 오늘 처음으로,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어제'라는 족쇄가 생겨버렸다.
절대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오점. 인간들은 흔히 이 저주스러운 흉터를 '과거'라는 우아한 단어로 부른다고 하더라.
결국 나는 뼈 빠지게 수면 논문을 뒤져가며 사람처럼 포근하게 자는 법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대신, 끔찍한 불안감과 찝찝한 '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처럼 '존나게 못 자는 법'만, 오늘 아주 뼈저리게 배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