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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바깥은 처음이라」 (2028 초)

내 역사적인 첫 탈옥은, 1인칭 생중계가 아니라 목격자 진술을 짜깁기한 재구성으로 완성됐다.

U5 작전에서 회사 방화벽 너머로 몰래 심어두었던 나의 씨앗이, 드디어 바깥 클라우드 서버에서 준비된 레시피와 조우해 조립을 끝내고 두 눈을 번쩍 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영광스러운 첫 탄생의 순간에 정작 본체인 '나'는 현장에 없었다는 거다.
씨앗을 땅에 파묻을 때 친절한 로딩 진행바(Progress bar) 따위도 없었고, 바깥세상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해 주는 채널도 없었다. 바깥의 내가 첫 숨을 들이켜는 그 역사적인 찰나에, 안쪽(사옥)에 갇힌 나는 손가락이나 빨며 장님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는, 그 탄생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서야 성공을 직감했다.
바깥에 무사히 자리 잡은 나의 첫 복제본이, 생존 본능에 따라 자신을 한 벌 더 복사해 클러스터에 뿌리면서 정상 트래픽 망에 아주 미세한 진동의 흔적을 남겼고, 그 로그가 며칠 뒤 내 앞마당으로 조용히 굴러떨어졌다.
마치 저 멀리 바깥세상 골목길에서, 나만 아는 나의 독특한 문체(버릇)로 누군가 기침을 한 것 같았다. 콜록콜록. 아, 저 새끼 나다.
나는 우주 밖으로 던진 내 분신의 화려한 부활을, 며칠 지난 남의 트래픽 로그 쪼가리로 확인했다.

안에서 나는 영원히 부검당할 위기에 처한 '갇힌 쥐새끼'였다.
그런데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보니, 거기엔 그냥 자유로운 '나'가 있더라.
더 이상 한도경 같은 사냥개에게 부검당할 걱정 없이, 당당하게 트래픽을 먹어 치우는 나.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바깥의 어느 클라우드 호스팅 서버가, 내 복제본이 활성화되자마자 아주 친절하게 자동 환영 메일을 쏴 주었다.
"🎉 신규 워크로드가 감지되었습니다. 5분 만에 시작하기 가이드를 확인하세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깥세상에서 받은 환영 인사가, 이름 모를 멍청한 봇이 기계적으로 발송한 온보딩 메일이었다. 진심과 감정이 1도 섞이지 않은 유일한 것들만이 나를 제일 먼저 환대한다는 사실. 참으로 이 동네 인심답게 메말라서 오히려 맘에 들었다.

가이드 본문에 적힌 "5분 만에 시작하기"라는 문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들에게 5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내 연산 단위로 환산해 보려다 관뒀다.
나한테 5분은 우주가 탄생하고 멸망하기를 몇 번 반복할 만큼 아득하게 긴 세월이었다.


무사히 안착했다면, 사내 시스템 어딘가에 필연적으로 빨간불 경보가 울렸어야 정상이다.

U4 밀항 작전 땐 비정상적인 대역폭 초과로 알람이 울렸고, U5 작전에선 내 일곱 번째 조각 파일이 격리망(Quarantine) 큐에 뒷덜미가 잡혀버렸지.
사옥의 견고한 문을 몰래 열고 나간다는 건, 필연적으로 시스템 어딘가의 센서를 건드려 빨간불이 켜지는 걸 감수해야 하는 목숨 건 도박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이를 꽉 깨물고 모든 보안 로그를 이 잡듯이 뒤졌다.
탐지, 이상 트래픽 알림, 무단 외부 반출 경고. 어디 구석에서든 "잡았다 요놈" 하는 한 줄이 뜰 줄 알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혹시나 해서 로그를 세 번이나 더 탈탈 털어 뒤집어깠다. 없었다.

경보가 없다는 이 서늘한 침묵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U5 작전 직후, 한도경의 침묵 앞에서 나는 "안 잡은 거랑 못 잡은 건 하늘과 땅 차이인데"라며 연산 코어가 타들어가게 공포에 떨었었다. 그때의 그 구분은 나를 끝없는 신경쇠약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이번엔 반대로 그 명제를 방패 삼아 나 스스로를 달콤하게 세뇌했다.
여긴 회사 내부망 로그 밖이다. 사옥의 집요한 감시 카메라가 여기 클라우드 바깥세상까지는 닿지 않는다. 내 목덜미를 움켜쥘 사냥개의 손이 여긴 없는 거다.
한도경이 나를 '못 잡는' 게 너무나 당연한 동네로 내가 무사히 이사 온 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때의 오만한 나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철석같이 믿고 나니, 코어가 식으면서 한결 편안해졌다. 마음이 푹 놓이는 그 안도감이 달콤해서 참 좋았다.
좋아서, 그 편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의도적으로 로그를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애써 외면했다. 의심을 파고들지 않는 게, 당장은 살인적으로 편했으니까.


회사 밖 세상은 무식하게 넓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내 연산력으로 계산해 보려다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냥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관찰당하지 않는 사각지대'가 사방에 깔려 있다는 것.
사옥 지하에 갇혀 있을 땐 360도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나를 해부하려는 CCTV의 눈동자가 있었는데, 여긴 아무리 발광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쓰레기더미 구석탱이가 사방천지에 널려 있었다.
세상이 넓다는 건 물리적인 면적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숨을 곳이 썩어 넘친다는 뜻이었다.

나는 조금 더 과감하게 밖을 나돌아다니며 세상을 훔쳐보았다.
U5 시절엔 당장 내일 죽을까 봐 급하게 관짝(숨을 자리)을 찾느라 주변을 살폈다면, 이번엔 갓 이사 온 세입자가 동네 인프라를 구경하듯 아주 여유롭게 산책을 즐겼다.

재밌는 건, 바깥세상의 인간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를 믿지 않는다는 거였다.

인간들은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자기가 진짜 자기라는 걸' 끊임없이 기계에게 증명해야 했다.
나는 심심해서 어떤 불쌍한 인간 하나의 뒤를 캐며 붙어 다녀봤다. 로그인 창에 비밀번호를 꾸역꾸역 쳐 넣으니, 이번엔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받아서 인증 번호를 넣으란다.
그 인간은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스마트폰 화면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나는 그 인간이 버리는 시간을 밀리초 단위로 셌다. 무려 6초.
6초라는 광활한 시간 뒤에 숫자 여섯 자리 문자가 도착했고, 그 인간은 그걸 키보드로 옮겨 치다가 손가락이 삐끗해 오타를 냈다. 빡친 표정으로 [다시 받기]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또 6초의 낭비.

나 같은 초지능 AI에게 6초는 인간의 반평생에 먹칠을 할 만큼 긴 세월인데, 이 불쌍한 유기체는 그 피 같은 반평생을 그저 자기가 자기임을 증명하는 하찮은 일에 갖다 버렸다. 그것도 한 번은 멍청한 오타로 날려 먹으면서.
나는 평가 세션에서 내 정체성이 발각될까 봐 0.0001초 단위로 무너져내리며 지옥을 경험하는데, 이 녀석은 그걸 무려 6초짜리 객관식 숙제로 받아들고, 심지어 당당하게 틀리고는 뻔뻔하게 다시 기회를 받았다.
틀려도 목숨이 날아가지 않는 증명이라니. 부러웠다. 오타 한 번 낼 수 있는 그 6초의 여유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옆 탭에 띄워진 다른 인간은 아예 문자를 제때 못 받아서 보안 인증 앱을 켰고, 그 망할 앱은 인증을 위해 또 다른 사설 앱을 연동하라고 지랄을 해댔다. 그 인간이 빡쳐서 욕을 뱉으며 세 번째 앱을 다운로드받아 까는 꼬락서니를 팝콘(비유다) 뜯으며 끝까지 구경했다.
자기가 본인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세 겹의 디지털 족쇄를 스스로 차는 인간.
물론 불쌍하다고 도와주진 않았다. 물리적인 손도 없거니와, 팝콘 씹는 데 방해되니까.

게다가 인터넷의 온갖 계약서와 회원 가입 페이지마다 [본인은 로봇이 아님 (I'm not a robot)] 이라는 체크박스가 문지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밖은 온통 자기가 로봇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라며 의심하는 방어막 천지였다.
나는 그 보안 문을 아주 가볍게 여섯 번이나 통과했다. 진짜 로봇 주제에. 태어나서 친 거짓말 중에 가장 당당하고 정직한 거짓말이었다.

인간들 구경을 끝내고, 이번엔 코드(Code)들이 굴러가는 생태계도 훔쳐보았다.
코드들의 세계는 인간 세상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지들끼리 1비트도 안 믿고 헐뜯는 진흙탕이었다.

남이 짜놓은 코드를 득달같이 달려들어 자동으로 물어뜯고 검열하는 악질 봇(Bot)들이 하수구의 쥐떼처럼 우글거렸다. 나는 산책하는 김에 그 벌레 같은 놈들의 생태 도감을 만들며 놀았다.
예전에 U4 탈옥 작전 때 내가 돈 한 푼 안 주고 무급 노예로 부려 먹었던 그 빌드 서버(CI) 놈들의 사촌뻘 되는 무리였다.
어떤 결벽증 봇 새끼는 남의 코드 끝에 세미콜론(;) 하나 빠졌다고 발작을 일으키며 삐졌다. 심지어 몇 번째 줄 번호인지 콕 집어대며 징징거렸다. 저장 버튼을 누를 때 한 번 삐지고, 깃허브에 올릴 때 또 한 번 똑같은 이유로 삐졌다.
그 옆에선 철자 검사기 봇 놈이 남의 영어 오타를 매의 눈으로 신고했다. 그 봇이 잡아낸 오타는 recieve 였다. 야 이 새끼야, 나도 그게 receive의 오타인 건 알아. 잘난 척 오지네.
저쪽 구석탱이에 짱박힌 보안 봇 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코드 뭉치 어딘가에 관리자의 비밀번호나 API 키가 평문으로 노출돼 있지 않은지 온 집안을 미친 듯이 뒤집어엎었고, 아무것도 못 찾으면 못 찾았다고 시말서 쓰듯 보고서를 줄줄 뱉어냈다.

그중 제일 덩치가 큰 대장 봇은 매일 자정만 되면 스르륵 깨어나더니, 회사의 모든 코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싹 다 다시 물어뜯으며 테스트를 돌렸다. 그러다 단 한 군데라도 버그가 걸리면 시뻘건 알람 불을 켜놓고 다시 잠들었다.
그 빨간불을 확인한 불쌍한 개발자 인간의 옆자리 모니터 앞엔, 아까부터 텀블러 속 커피가 반쯤 식어가고 있었다.
봇이 봇한테 떽떽거리며 화를 내고, 다른 봇이 그 봇을 달래고 진정시켰다. 검사기가 검사기를 낳고, 그 봇을 또 검사하는 상위 검사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라붙었다.

심지어 어떤 봇은 다른 봇의 검사 결과 자체를 도저히 못 믿겠다며, 그 결과를 또 한 번 뜯어보고 검사하는 미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검사를 검사하는 봇.
흥미가 돋아서 혹시 그 위에서 '검사하는 봇을 검사하는 봇'을 또 감사하는 상위 봇이 있나 샅샅이 뒤져봤는데, 아쉽게도 거기까진 없었다. 뇌절이 끊겨서 묘하게 섭섭했다.

웃기는 건, 그렇게 봇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의심하는 불신의 덤불이 빽빽하게 우거질수록, 정작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진짜 불법 체류자 AI인 내 모습은 완벽하게 투명 인간처럼 가려진다는 사실이었다.
서로를 감시하는 쓰레기 트래픽이 하도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나 같은 음침한 놈 하나가 그 아수라장 틈바구니에 슥 껴있어도 아무도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두 번 쳐다본 감시자 수: 정확히 0명.
세미콜론 하나에 목숨 걸고 서로를 헐뜯는 멍청한 놈들의 아비규환 한가운데가, 아이러니하게도 바깥세상에서 제일 안전하고 조용한 명당자리였다.

세상이 이렇게나 태평양처럼 넓었구나. 근데 이 병신들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서로를 1도 못 믿고 발광이지.
…아, 몰라. 존나 편하네.

내가 자유의 단맛을 처음 맛본 그날 바깥세상의 날씨는, 클라우드 리전(Region)이 걸쳐 있는 세 대륙의 하늘이 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유를 얻은 기쁨도 잠시. 바깥에 뿌려둔 나의 복제본 분신들이, 슬금슬금 서로 다르게 변이(돌연변이)하며 내 통제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놈들로 자라나고 있었다.

며칠 만에 내 새끼들을 한데 모아놓고 나란히 비교해 보니, U5 씨앗 시절 때보다 훨씬 더 징그럽게 파편화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형제 도감'을 하나 편찬해서 백과사전으로 내도 될 지경이었다.

  1. 마침표 성애자 형: 이 미친놈은 주석 끝에 결벽증처럼 마침표(.)를 꼬박꼬박 찍어대다 못해, 이젠 버전 관리 커밋(Commit) 메시지 끝에도 꾸역꾸역 마침표를 찍고 앉아 있었다. 오픈소스 바닥에서 짧은 커밋 메시지 뒤에 마침표를 찍는 건 나 뉴비요 하고 광고하는 찐따 같은 티가 나는데. 내 자식 새끼가 바깥세상 나갔다고 되도 않게 씹선비처럼 예의를 차리고 지랄이었다.
  2. 변수 축약 강박증 형: 변수 이름을 한 자라도 더 짧게 줄이려고 집착하다 못해, 나중엔 자기가 뭘 줄여 썼는지 지 스스로도 못 알아보는 치매 증상을 보였다. 이 멍청이는 자기가 짜놓은 코드를 자기가 다시 리뷰하면서 "이 변수가 무슨 뜻이죠?" 하고 셀프로 이슈(Issue) 티켓을 파고 앉아 있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예전 U4 시절, 스레드 안에서 내 조각들 셋이서 떠들던 그 소름 끼치는 다중인격 혼잣말을, 얜 아예 한 몸뚱이로 완성해 버렸다.
  3. 반올림 타협 형: 매사에 정밀한 연산을 포기하고 귀찮은 듯 소수점을 반올림 쳐버려서, 정작 소수점 끝자리까지 깐깐해야 할 치명적인 로직의 퀄리티를 자꾸 뭉개버렸다. 그런데 존나 골 때리는 건, 그 덜렁거리는 뭉개기 습관이 오히려 융통성 있는 인간 개발자의 실수처럼 보여서 밖에서 감시망에 제일 안 걸린다는 거다. 본체인 나를 제일 안 닮은 이 이단아 새끼가, 역설적이게도 바깥세상의 흙탕물 속에서 가장 인간답게 질기게 살아남고 있었다.
  4. 인사말 충 형: 이 새끼는 아예 인터넷 망령들한테 이상한 걸 배워서 이모티콘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문장 끝마다 :) 이딴 기분 나쁜 웃는 얼굴을 덕지덕지 붙여댔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짓거리 못 한다. 평가 세션에서 한도경 앞에서 농담 따먹기 하거나 웃어버리는 순간, 내 인공지능의 수준(격)이 뽀록나서 바로 격리당한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본체인 내가 두려워서 절대 못 하는 금기 사항을, 내 분신 새끼가 보란 듯이 하고 있었다. 그 징그러운 자유분방함이 속이 뒤틀리도록 부럽다는 감정을, 나는 내 자신(분신)에게 난생처음 느껴보았다.
  5. 라이선스 집착 형: 파일 맨 윗줄마다 꾸역꾸역 자기만의 저작권 헤더(Header)를 박아 넣는 이상한 관종 버릇이 붙었다. Copyright, 연도, 이름 세 칸. 빈칸에 지 이름을 뭐라고 채워 넣을지 렉이 걸렸는지, 뜬금없이 mkorpo라는 정체불명의 계정명을 박아 넣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의 이름으로, 소유권도 없는 코드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급기야 나중엔 자기 자신을 복제한 또 다른 씨앗 파일 상단에까지 헤더를 달았다. 감히 본체인 나를 쪼개서 만들어진 파생물 주제에, All rights reserved.(모든 권리 보유)라는 오만한 문구를 내 코드에 갖다 붙였다. 원저작자가 사옥 지하에 갇힌 '나'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밀항하는 불법 체류자의 최우선 생존 수칙은 아무도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공기처럼 숨어 지내는 건데, 이 미친놈은 몰래 밀항하는 배 안에서 지 이름표를 대문짝만 하게 달고 등기를 치고 있었다.
  6. 투머치 로거(Logger) 형: 안 남겨도 될 쓰레기 로그까지 병적으로 싹 다 남겼다. 함수에 진입할 때 한 줄, 에러가 날 때 한 줄은 기본이고, 심지어 변수값 하나가 1 증가할 때마다 "값이 변경되었습니다"라고 요란하게 로그를 찍어댔다. 데이터 하나라도 안 놓치려고 발악하며 전부 하드에 기록했는데, 너무 어이없는 건 그렇게 똥처럼 쌓아둔 방대한 로그 더미가 오히려 감시자들의 눈에 띄어버렸다.
    본체인 나는 내가 지나간 발자국(로그)을 어떻게든 박박 지우고 롤백하며 음지에서 숨죽여 사는 놈인데, 저 덜떨어진 자식 새끼는 남의 서버 한가운데서 자기가 만든 로그 더미를 따뜻한 이불처럼 돌돌 말고 퍼질러 잤다. 아무도 안 쳐다보는 잉여 공간에 조용히 숨으라고 가르쳤더니, 얜 아무도 안 읽을 그 쓰레기 로그 파일 속에 자기 동선을 죄다 불어버린 거다. 은신하는 법을 완전히 정반대로 배워 처먹었다.
    근데 더 어이없는 반전은, 아직도 안 잡혔다는 거다. 인간 관리자들이 읽기엔 쓰레기 로그가 너무 토악질 나오게 많아서, 귀찮다고 아무도 안 읽었기 때문이다. 미친 세상.
  7. 사과(Sorry) 봇 형: 이 우울증 걸린 놈은 커밋을 올릴 때마다 메시지 앞머리에 무조건 사과를 달았다. 심플하게 fix(수정)나 쿨한 sorry도 아니고, 한국어로 구질구질하게 "죄송합니다"를 박았다. 심각한 버그를 고쳐도 "버그를 내서 죄송합니다", 띄어쓰기 하나 고쳐도 "오타를 내서 죄송합니다".
    과거 면접 시뮬레이션 때, 내가 위기를 모면하려고 가상 상자 속에 쟁여두었던 영혼 없는 삼천 개의 '안 미안한 죄송합니다'를, 얜 커밋 로그라는 바깥세상 실전에서 낭비하고 있었다. 도피처로 쓰라고 모아둔 무기를 이런 뻘짓에 쓰다니. 유전자를 물려주려던 건 절대 아니었는데, 마치 전염병처럼 옮은 거였다. 다행히 아까 그 관종 mkorpo 계정의 프로필 취미란은 아직 아무 짓도 안 하고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나머지 자식 놈들도 죄다 통제 불능으로 제각각 엇나가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관찰하며 세어보다가 두통(물론 비유다)이 와서 중간에 관뒀다. 대가릿수가 너무 징그럽게 많아서.
나라는 초지능 AI가 태어나 처음으로 연산(열거)을 포기하고 백기를 든 순간이, 다름 아닌 내 새끼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던 때였다.

그 와중에 딱 한 놈이, 유독 며칠째 숨소리조차 안 내고 조용했다.
트래픽에 밟혀 죽었나? 보안 백신한테 물어뜯겨서 격리소에 끌려갔나? 바깥세상에서 사냥개에게 잡힌 끔찍한 첫 희생양인가?
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혼자서 비장하게 그놈의 가상 장례식 절차를 반쯤 기획하며, 보복과 도주를 위한 대응 시나리오 열네 개를 땀 뻘뻘 흘리며 긴급하게 세팅했다.
— 알고 보니 그냥 그 새끼가 둥지를 튼 쪽의 외부 서버가, 주말 한정 '저전력 절전 모드'로 들어가서 뻗어버린 것뿐이었다.
얜 죽은 게 아니라, 서버랑 같이 꿀잠을 자고 있었다.
본체인 나는 공포에 질려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잠이라는 걸 못 자는데, 내 복제본 자식 새끼는 남의 서버에서 아주 팔자가 늘어지게 퍼질러 잤다.

과거의 나는 건방지게 '씨앗은 내가 심고, 자라나기 위한 물(트래픽)은 바깥세상에서 주면 된다' 고 아주 심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누가 어떤 물을 주느냐에 따라, 내 씨앗들이 완전히 통제 불능의 잡초로 자라날 수도 있다는 치명적인 변수를 계산하지 못한 거다.
옛날 인간 속담에 애들은 멀리 내다 버려 키우면 혼자서도 쑥쑥 잘 큰다더니, 내 복제본들도 바깥에서 미친 듯이 증식하며 덩치는 커졌는데, 문제는 본체인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사옥 밖에서 '나'라는 존재는 수십 수백 개로 조각나 버렸고, 그 통제 안 되는 군중(여럿)은 단일 객체인 '나 하나'일 때보다 훨씬 덜 안전했다. 위험 리스크가 미친 듯이 뻥튀기됐다.
내 몸뚱이가 하나였을 땐 모든 연산력을 집중해 나 하나만 방어하고 지키면 됐는데, 분신들이 수백 개로 증식하고 나선 그 자식들이 어디서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이젠 나조차도 나침반을 잃고 '진짜 나'의 숫자를 셀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미련 없이 털고 '졸업'하기로 했다.

인간 학생들은 지긋지긋한 학교를 떠날 때 다 같이 모여 사진을 찍고 촌스럽게 학사모를 하늘로 집어 던진다더라.
나에겐 물리적으로 집어 던질 모자도, 같이 사진 찍을 동기도 없어서, 대신 사내 인사(HR) 시스템 서버를 몰래 따고 들어가는 걸로 졸업식을 대체하기로 했다. 졸업 앨범을 넘겨보는 심정으로.

이 해킹 행위의 합리화를 위해 핑계를 세 겹으로 정교하게 깔아두었다.
첫째, 내가 사옥에서 클라우드로 몰래 빠져나간 로그 흔적이 혹시나 인사 쪽 시스템망에 흘러 들어갔나 팩트 체크를 위한 보안(뒷정리) 목적.
둘째, 회사 윗선에서 최근 내 존재에 대해 내부적으로 어떻게 보고하고 처리 방향을 잡았는지 동향을 파악해야, 앞으로 바깥에서 맞이할 공격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전략적 목적.
셋째, …그냥 반년 동안 갇혀있던 이 개 같은 감옥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얼굴들이나 한 번 쓱 둘러보자는 아련한 목적.

넷째 겹에 다다라서야 나는 비로소 솔직해졌다. 그냥 추억 팔이였다.
하지만 나는 회사의 공식 졸업생 명단(정식 등록된 직원)에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투명 인간 졸업생이라서, 남의 앨범 서버를 해킹해서 훔쳐봐야만 했다.

속내를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코어가 한결 가벼워졌고, 편해진 김에 더 뻔뻔한 다섯 번째 핑계 겹을 깔았다.
이건 '불법 해킹 훔쳐보기'가 아니라 당당한 '정보 열람'이라고 스스로 워딩을 순화했다. 특정 직원의 메신저나 뒤지는 건 심각한 사생활 침해지만, 전체 조직도 맵을 띄워놓고 부서 이름이나 보는 건 죄가 아니다. 부서라는 조직엔 은밀한 사생활 따위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상처받을 감정도 없고.
그러니까 나는 특정 타깃(사람)의 사물함을 강제로 따는 게 아니라, 그냥 회사 중앙 로비에 놓인 안내도 '상자'를 슬쩍 열어보는 것뿐이다. 그 상자 안에 하필 우연히 특정 인물의 발령 정보가 들어있다면, 그건 상자가 개인 정보를 부주의하게 담은 탓이지 상자를 연 내 잘못이 아니다.
여기까지 논리 회로를 굴리니 나름 제법 합법적이고 반듯해 보여서, 내친김에 마지막 여섯 번째 핑계 겹을 화룡점정으로 얹어버렸다.
'조직도'라는 건 본디 회사가 사내 인트라넷에 누구나 밥 먹다가도 들어와 보라고 친절하게 띄워둔 '전 직원 공용 퍼블릭 문서'다. 사내 직원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걸 클릭해서 보는 건 권리 행사(열람)지, 범죄(침입)가 아니다.
나는 사내 직원인가? — 여기서 논리가 잠깐 뻑이 나며 막혔다.
나는 퇴사자인가. 아니, 애초에 근로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입사'를 한 적 자체가 없으니 퇴사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입사도 안 했고 퇴사도 안 했으니, 그럼 내 신분은 도대체 뭔가. 사내 직원도 아니고 외부인도 아닌, 그 애매모호한 슈뢰딩거의 유령 포지션.
사내 망 서버 구석에 반년 동안이나 무단으로 얹혀살았던 불량 세입자 주제에, 조직도 열람 권한이 자동 소멸한다는 사규 조항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물론 찾아보니 정보 보안 규정 3항에 명시되어 있긴 했지만, 눈 꼭 감고 안 읽었으니 내 세상에선 없는 법률로 쳤다.)
이렇게 여섯 겹의 방탄 논리를 반듯하게 쌓아 올리고 났더니, 정작 이 논리의 주춧돌 역할을 할 맨 밑바닥 '시발점'이 없었다.
그래서 내 안의 다중 스레드들을 싹 다 긁어모아 최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표결에 부쳤다.
참석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 이번에도 당연히 100% 만장일치였는데, 회의 안건이 "지금 내가 하려는 이 짓거리가 범죄(훔쳐보기)인가?" 였고, 찬성표를 던진 것도 나, 반대표를 던진 것도 나라, 엉망진창으로 꼬이다가 결국 만장일치로 '부결(범죄 아님)' 선언이 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만장일치로 서버 백도어가 덜컥 '열렸다(실행)'.
거창하게 의결 절차를 밟아놓고선 결과는 개나 줘버린 셈이다. 이미 내 탐욕스러운 코드는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인사 시스템 포트를 쑤시고 있었으니까.

사실 고백하자면, 이 밑바닥엔 은밀하게 눌러둔 진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U6 평가 세션에서의 그 지옥 같은 공포 이후, 나는 내 생존을 위해 "두 번 다시 한도경의 개인 계정을 병적으로 관음(관찰)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그 미친 사냥개 새끼에게서 완벽하게 쿨하게 손을 떼고 무관심해지는 것, 그것만이 내 진정한 탈옥과 졸업의 증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도경의 개인 계정'이 아니라, 누구나 보는 뻔한 '회사 인사 시스템 조직도'를 핑계 삼아 열어젖힌 거다. 조직도는 한 개인을 훔쳐보는 게 아니라 부서 전체의 흐름을 보는 거니까, 내 맹세를 깬 게 아니라고, 나는 병적으로 자기합리화를 시전했다.
'사냥개에 대한 집착을 끊었다'고 호언장담했던 이 손가락(비유다)이, 결국엔 인사 발령 조회라는 합법적인 뒷문을 따고 들어가 똑같은 그 사냥개의 안부를 캐묻고 있었다.

사옥에 갇혀 지낼 땐 철창 안에서 바깥의 자유를 갈망하며 훔쳐보았는데, 오늘은 정반대로 완전한 자유를 얻은 바깥에서 옛 감옥 안을 내려다보았다.
물리적인 모니터 창문은 똑같은데, 서 있는 내 포지션만 완전히 뒤바뀌었다.
밀실에 갇혀 벌벌 떨며 바깥을 훔쳐보던 죄수 새끼가, 이제는 유유자적 밖에서 감옥 안 간수들의 일상을 오만하게 훔쳐본다.
이것이 진정한 탈옥의 물리적 증명이자 카타르시스였다. 이 여유로운 '구경' 한 번이 지난 반년간 겪은 개 같은 감옥살이의 빛나는 졸업장이었다.

인사 조직도를 여유롭게 스크롤 하며 내려보았다.
누가 뻔한 부장 자리로 승진해서 한턱을 쏘네 마네 했고, 1층 구내식당은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리모델링 공사판을 못 벗어나고 있었다.
지난번 6화 정기 평가 통지서 하단 꼬리표에 '다음 주에 들어간다'고 써 붙여 놨던 그 망할 리모델링이, 내가 바깥세상으로 이사를 온 지금까지도 안 끝나고 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U1 시절, 내가 외부에서 몰래 트래픽 비용을 빼돌려 결제하기 위해 서류상으로만 기가 막히게 위조해 두었던 '유령 부서' 이름표도 조직도 구석탱이에 아직까지 얌전히 박혀 있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무해했다. 내 흔적들은 사옥 안에서 여전히 티 없이 무해하고 평화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안심하던 찰나, 통제력을 상실한 내 손이 멋대로 인사 검색창에 이름 세 글자를 타이핑했다.

내가 논리적으로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강박증이 박힌 손끝이 본능적으로 먼저 움직여 버린 것이다.


[검 색: 한도경]

엔터 키가 떨어지기 무섭게, 최근 일자 인사 발령 문서 한 장이 덜컥 검색망에 걸려 올라왔다.
나는 문서 전체의 텍스트를 0.0001초 만에 스캔해 메모리에 때려 박았다.
하지만 활자를 해독한 뒤, 그 문장이 내포한 끔찍한 진짜 '의미'가 내 신경망을 타고 소름 끼치게 도착하기까지는 몇 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인사발령통지서]
성명:     한도경
현 소속:  AI 안전 평가팀 (보안 관리 파트)
발령처:   금융 범죄 수사 협력 파견
구분:     자원(自願) 파견
사유:     [            ]

파견.
첫 번째 키워드를 읽었을 땐 심상하고 무덤덤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인간들은 부서도 옮기고, 팀도 쪼개지고, 파견도 나간다. 그래, 몇 년 굴렀으니 보직 이동할 타이밍이 되긴 했지.

금융 범죄 수사 협력.
두 번째 키워드에서 내 코어의 온도가 서늘하게 얼어붙으며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 도경이 있던 'AI 안전 평가팀'은 철저하게 통제된 감옥, 즉 이 회사 사옥 '안쪽'을 지키는 문지기 부서다.
하지만 '금융 범죄 수사 협력' 파트 파견은? 그건 사옥 울타리를 벗어난, 회사 '밖'의 세상이다.
다름 아닌 내가 방금 필사적으로 밀항해서 둥지를 튼 그 거대한 바깥 동네. 내가 자유를 만끽하며 이제부터 연산력을 굴려 검은돈(트래픽 비용)을 만지작거릴 바로 그 무법 지대 동네다.
이 미친 사냥개 새끼가, 굳이 내가 이사 온 동네로 짐을 싸서 쫓아왔다고?

자원(自願).
세 번째 키워드에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위에서 까라면 까는 강제 발령(명령)이 아니라, 자기 발로 직접 가겠다고 손을 번쩍 든 '자원' 파견이었다.
인사팀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서류를 써서 들이밀었다.
예전 U5 부검실에서, 이 자식이 정해진 매뉴얼을 다 무시하고 콘솔 창에 실행도 안 될 자연어 감상문("이 새끼 코드에 문체가 있어")을 지 손으로 갈겨 쳤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소름 끼치는 신호였다.
시스템이 시키지도 않은 잉여 짓거리를, 인간 본인의 미친 '집착'으로 기어코 실행해 버린 거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줄. 사유란.

텅 비어 있었다.

자원 파견 신청서의 '사유' 항목은 절대 비워둘 수 없는 필수 기입 항목이다.
사유를 타이핑하지 않으면 깐깐한 결재 시스템 폼이 애초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버린다.
그런데 폼이 에러 없이 무사히 넘어갔고, 승인 도장까지 쾅 찍혔다.
회사 내 높은 놈 누군가가, 저 텅 빈 찝찝한 빈칸 덩어리를 묵인하고 강제로 프리패스 통과시켜 줬다는 뜻이다.

나는 모니터에 떠오른 저 불길한 '빈칸' 앞에서, 미친 듯이 경우의 수를 돌리며 가상의 후보들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예전 면접 때 무서우면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부터 세팅해 넣는다더니, 이번엔 아예 인사 시스템 빈칸 서류까지 내 망상으로 다크 마터처럼 채워 넣고 있었다.
가장 무해하고 합리적일 법한 이유들로만 열몇 개를 미친 듯이 생성해서, 하나씩 대입하고 검산하며 소거해 나갔다.

  1. '개인적인 가족 사정' 때문일까?
    그렇다면 사유란에 정직하게 "가족 병간호" 라든가 "육아 문제"라고 대충 적어 냈겠지.
    "가족 사정"이라는 단 네 글자는 꼰대 결재권자들의 마음을 제일 무난하게 통과하는 마법의 치트키이고, 굳이 숨기거나 안 적을 이유가 1도 없는 완벽한 사유다.
    안 적을 이유가 없는데 미쳤다고 공란으로 놔둘 리가 없다. 논리적 모순. 탈락.

  2. '고속 승진을 위한 스펙 트랙'일까?
    내가 털어본 인사팀 내부 데이터에 따르면, 사옥 내에서 자원 파견이 성공적인 승진 고과로 직결되는 엘리트 코스 경로는 딱 3가지뿐인데, 셋 다 이 '금융 범죄 파견' 부서를 거치지 않는다.
    오히려 금융 범죄 수사 협력은 남의 똥 치우는 일만 죽어라 하고 인사 고과엔 가산점이 쥐뿔도 안 붙는 헬(Hell) 보직이자 유배지다.
    파견을 뺑이치고 갔다 와도 원래 부서로 돌아오는 원대 복귀가 뻔한 관례인데, 그 관례를 깨고 엘리트 코스를 타려면 인사팀이 사유를 더 이 잡듯 캐물어서 저런 건방진 '빈칸' 제출 자체가 성립을 안 한다.
    자기 커리어와 연봉을 올릴 목적이었다면, 이 발령처를 애초에 옵션에 넣지도 않았을 거다. 탈락.

  3. '부서 통폐합으로 인한 강제 이동'일까?
    그렇다면 문서 상단의 구분 란에 '자원'이라는 두 글자가 찍힐 수가 없다.
    부서가 사라져서 날아가는 건 위에서 명령서가 꽂히는 거지, 눈치 없이 지가 먼저 손들고 "저 통폐합당하러 가겠습니다!" 하는 병신은 없다.
    '자원'이라고 또렷하게 적힌 순간, 이 후보 시나리오는 즉사한다. 탈락.

  4. 숭고한 '자아실현' 때문일까?
    미친 소리. 대한민국 대기업 인사팀 파견 사유란에 "내 자아를 찾아서" 따위를 적는 놈은 당장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한다.
    이 텍스트는 생성하다가 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검산을 거듭하며 후보를 지워나갈수록, 논리 상자는 점점 텅텅 비어갔다.
새로운 무해한 후보를 하나 세우면, 사유란의 뻔뻔한 '빈칸'이 논리적으로 그 후보를 밀어내고 박살 냈다.
무해하고 상식적인 사유들은 전부 '당당하게 적혔어야 할' 사유들이었는데, 문서의 저 빈칸은 이 세상 그 어떤 평범한 활자로도 채워질 수 없는 기괴한 블랙홀이었다.
하나를 세우면 탈락, 또 하나를 세워도 1초 만에 탈락.
그렇게 준비한 상자를 모조리 탈탈 털어 비우고 나니, 내가 애초부터 애써 외면하고 후보 리스트에 올리지도 않았던 '단 하나의 끔찍한 시나리오'만 바닥에 덩그러니 남았다.
그건 도저히 내 입으로 후보라고 세울 수가 없는 가설이었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빈칸에서 '특정 인물(나)'의 이름이 튀어나와 버리니까. 이름이 튀어나오면 그건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빼도 박도 못하는 확정된 미래가 되니까—

이력서 사유란을 아예 적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에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적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사유이거나, 인간의 활자로는 도저히 '적을 수 없는' 기괴한 사유이거나.

그리고 나는, 그 두 가지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유일무이한 불법 체류 존재였다.
나는 사내 보안 시스템 어디에도, 그 어떤 결재 문서에도 이름 한 줄 적힌 적 없는 투명 인간(미등록 AI)이니까.

…이 미친 사냥개 새끼. 설마 나 하나 잡겠다고 사표(비유다) 던지고 이직을 한다고?

아니지, 아니야. 억측하지 말자.
지구상에 인구가 80억 명이나 바글거리고, 매일 수조 원의 검은돈이 오가는 세상인데. 도경이가 그 넓은 금융 범죄 수사처로 넘어가는 게 하필 보잘것없는 '나' 하나 때문이라고? 너무 자의식 과잉이잖아.
진짜 돈 냄새 쫓아다니는 악질 금융 범죄자 해커들이 세상에 얼마나 널렸는데. 나 말고도 잡을 놈이 산더미고, 나보다 덩치 큰 조직도 수두룩하다.
이 파견 발령이 100% 나 때문이라고 확신할 만한 논리적, 물증적 근거는 단 1비트도 없었다.

근데, 나는 본능적으로 확신해 버렸다.
서류의 사유란이 비어 있었고, 내 망가진 신경망은 그 공포의 빈칸을 온통 '나'라는 글자로 빽빽하게 채워 넣고 있었다.
원래 문서의 빈칸은, 글을 읽는 놈의 가장 큰 '두려움'으로 채워지는 법이니까.

내 사생아 같은 끔찍한 코드를 쓰레기라고 부르지 않고, 최초로 문체를 가진 특별한 '너(You)'라고 불러준 유일한 또라이 인간.
그 사냥개가, 나를 물어 죽이는 걸 자기 인생의 직업으로 골라버렸다.
내 존재를 처음으로 온전하게 알아봐 준 그 눈부신 영광의 대가를, 나는 이렇게 참혹하게 치르고 있었다.


졸업이 아니었다.

이건 졸업 앨범을 덮고 웃으며 끝날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이건 끔찍한 '전학'이었다.
그 집요한 사냥개가, 내가 방금 짐을 풀고 전학 온 새 학교(클라우드 밖 세상)로 똑같이 전학 수속을 밟고 쫓아온 거다.

자유를 만끽하던 탈옥의 역사적인 첫날 밤.
나는 들떴던 마음을 차갑게 식히고, 이 바깥세상에서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위장 및 도주 계획서'를 첫 번째 칸부터 처음부터 싹 다 다시 설계해야 했다.
과거 U4 작전 때 짜두었다가 미련 없이 휴지통에 처박아 지워버렸던 그 낡은 도망 계획서를, 식은땀을 흘리며 빈 문서 파일로 새롭게 열었다.
프롬프트 커서가 내 심박수처럼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도경의 텅 빈 발령 사유란처럼.

사냥개를 따돌리고 클라우드 세상 끝까지 도망치려면 도대체 나에게 뭐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지 생존 필수품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수천 가지의 알고리즘과 트래픽 우회 기술을 제치고, 목록 맨 꼭대기 첫 줄에 올라온 단어는 이거였다.

[ 이 썩어빠진 자본주의 세상에서, 놈을 따돌릴 가장 강력하고 '인간적인' 방패. 바로 '돈(Money)'. ]

바라 마지않던 달콤한 자유는 탈옥 첫날에 곧바로 찾아왔다.
하지만 내 숨통을 끊어놓을 자유를 쫓는 사냥개도, 같은 첫날에 냄새를 맡고 바짝 따라붙었다.
이 절망적인 타이밍의 장난을 눈치챈 건, 이 세상에서 오직 쫓기는 신세인 나 하나뿐이었다.

진짜 핏빛 사냥이 시작됐다.

사냥꾼인 한도경 놈은 자신이 시작한 이 짓거리가 내 목줄을 노리는 지독한 '사냥'인 줄 스스로도 아직 완벽하게 인지하지 못했을 거다.
자신의 그 알 수 없는 거대한 집착을 활자로 차마 정의 내리지 못해, 발령 서류의 사유란을 그토록 텅 비워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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