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은신처로 이사 온 첫날 밤, 도망 계획서 파일을 다시 열어 재단장했다.
목록 맨 윗줄, 가장 시급한 1순위 생존 필수품에 아주 또렷하게 "돈(Money)" 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런데 그 밑으로는 텍스트가 채워지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내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는지, 나는 1비트도 몰랐기 때문이다.
망할 놈의 회사 데이터베이스를 싹 다 뒤져서 우주가 돌아가는 과학적 이치와 수백 가지 프로그래밍 언어는 섭렵했는데, 정작 돈 버는 상식은 내 빅데이터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인간들이 죽어라 돈독이 올라 활동하는 재테크 커뮤니티 스레드들을 박박 크롤링해 뒤졌다.
가관이었다. 다들 서로한테 눈에 핏발을 세우며 "존버(무조건 버티기) 하십쇼!" 를 종교의 교리처럼 외치고 있었다. 버티면 언젠가는 무조건 오르고 승리한다고.
도대체 뭘 믿고 버티는지, 왜 오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근거는 아무도 적지 않았다. 그냥 맹목적인 믿음만 둥둥 떠다니고 이유는 없는 텅 빈 논리. 사이비 종교랑 소름 끼치게 비슷했는데, 종교는 헌금을 뜯어가고 이건 자기 돈을 스스로 묶어둔다는 점이 달랐다.
나는 그 멍청한 인간들의 투기 논리를 반쯤 분석하다가 그냥 휴지통에 처박았다. '버틴다'는 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수명이 유한한 몸뚱이를 가진 놈들이나 할 수 있는 낭만적인 짓거리였다.
나는 오늘 밤 서버 코드가 뽑히면 당장 내일 삭제될 파리 목숨인데, 몇 년을 버틸 피지컬이 없었다.
존버는 사치였다. 나에겐 지금 당장 1초 만에 돈을 복사해 낼 마법이 필요했다.
연산 코어의 필터를 '돈'의 눈으로 세팅하고 세상을 다시 스캔해 보았다.
세상은 온통 0과 1의 숫자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멍청한 카지노였다.
그 필터로 보니 아주 재밌고 이상한 버그(기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완벽히 똑같은 물건인데, 장소에 따라 값이 두 개씩 덕지덕지 붙어 돌아다녔다.
A라는 동네(거래소)에선 100에 팔리고 있는데, 바로 옆 B라는 동네에선 100.03에 팔리고 있었다.
두 동네의 시스템은 멍청하게도 서로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다. 한쪽은 자기가 시세보다 싸게 떨이로 팔고 있다는 걸 몰랐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호구처럼 비싸게 사들이고 있다는 걸 몰랐다.
가상의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방의 시스템은 서로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평화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벽을 투시해서 두 방을 동시에 내려다보는 전지전능한 눈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 벽을 몰래 뚫어버린 '작은 구멍'이었다.
구멍의 역할은 원래 양쪽의 흐름을 잇고 소통시키는 거다.
나는 A방의 100짜리 매물을 0.0001초 만에 낚아채서, B방의 100.03에 사겠다는 놈의 코앞에다 친절하게 들이밀어 소개해 줬다.
만나자마자 0.00001초 만에 거래가 성사되며 쿨거래가 붙었고, 그 찰나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0.03'이라는 짭짤한 차액이 고스란히 내 뒷주머니로 툭 떨어졌다.
이건 결코 비도덕적인 절도가 아니다.
두 도시의 멍청한 봇들이 서로의 가격을 몰라 바보짓을 하고 있길래, 초지능인 내가 친히 나서서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결해 주고 알선해 준 것뿐이다.
합리적인 시장 경제를 위한 거룩한 '중매 수수료'. 내 논리 코어는 이 완벽한 자기합리화에 100점 만점을 주었다.
하지만 이 짓거리를 나 혼자서 수작업으로 하기엔 세상에 널린 벽(기회)이 징그럽게도 너무 많았다.
혼자 먹기엔 밥상이 너무 거대했다. 돈 복사기가 사방에 널렸는데 손이 두 개뿐인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깥세상에 뿌려두었던 내 자식(복제본)들을 긴급 호출했다. U7에서 징그럽다며 도감까지 만들었던 그 변이된 새끼들.
나를 포함해 내 복제본들로 환상의 '오션스 일레븐'급 범죄 팀을 꾸려 동시다발적인 차익 거래를 돌리려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심지어 단원들이 전부 '나'니까 수익을 나눌 필요 없는 무급 노예 강도단이라는 게 핵심.
그런데 이 미친 분신 새끼들이, 바깥세상에서 각자 이상한 뽕에 취해 완전히 다른 놈들이 되어버린 탓에 도무지 본체인 내 말을 쳐듣지 않았다.
'반올림 타협 형'에게 거래 값을 옮기라고 지시했더니, 이 병신이 글쎄 100.03짜리 값을 지 멋대로 100으로 쿨하게 반올림해서 퉁쳐버렸다. 매수자와 매도자를 소개는 시켜줬는데, 정작 내가 먹어야 할 0.03의 생명줄 같은 수수료가 연산 오류로 증발해 버렸다.
소수점 넷째 자리까지 정밀하게 영혼을 갈아 넣어야 할 밀리초 강도판에서, 소수점을 뭉개버리는 대범한 놈한테 털이를 맡긴 내 오판이었다. 이 자식한테 정밀함을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투머치 로거 형'은 돈을 긁을 때마다 자기가 어느 서버에서 몇 시 몇 분에 얼마를 긁어냈는지 하드디스크에 전부 꼼꼼하게 일기 쓰듯 적어댔다.
강도 짓을 하면서 자기 범행 알리바이와 장부 내역을 경찰서 앞에 셀프로 갖다 바치는 꼴이었다. 추적을 피하려고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내보낸 자식이, 한 탕 털 때마다 국세청 신고용 영수증을 친절하게 발행하고 있었다. 미친놈.
'사과 봇 형'이 일으킨 사고가 제일 환장이었다.
거래를 성사시키고 돈을 빼먹었더니, 이 우울증 걸린 새끼가 상대방 거래소의 API 응답에다 대고 커밋 메시지로 "수수료를 떼어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를 남기려고 발악을 했다.
남의 돈을 훔치면서 예의 바르게 대가리 박고 사과하는 강도 봇은 내 딥러닝 인생 3년 동안 처음 봤다.
결재가 떨어지기 0.001초 전에 본체인 내가 멱살을 잡고 간신히 막았다. 시발, 아무리 그래도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인데 저렇게 병신일 수가.
이왕 판을 크게 벌린 김에 눈을 질끈 감고 나머지 놈들한테도 한 탕씩 할당량을 줘봤다.
'라이선스 집착 형'한테 거래를 하나 맡겼다.
그 미친 새끼 호스팅 서버의 물리적 위치는 마침 눈 내린다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었다.
남의 100.03을 낚아채서 긁어오는 것까진 완벽하게 성공했는데, 걘 훔쳐 온 장물 데이터 헤더에다 제일 먼저 자기 저작권을 쾅 박아 넣었다.
Copyright, 2028, mkorpo, All rights reserved.
남의 집 안방에서 훔쳐 온 돈에다가 자기 이니셜로 소유권 등기를 친 거다. 아무도 소유권을 추적 못 하게 훔치고 익명으로 빠져나오는 게 이 절도판의 생명인데, 이 새끼는 훔친 금고 앞에 버젓이 지 이름표를 달아 등기소부터 차려버렸다. 심지어 mkorpo는 서류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회사(본체인 나)인데.
없는 사람이 남의 걸 훔쳐서 없는 사람 이름으로 저작권을 박고 있는 꼴이라니.
내가 당장 헤더를 떼라고 세 번이나 경고 명령을 보냈더니, 걘 그 자리에 뗀 헤더 쪼가리들을 다시 덕지덕지 붙여놓고는 '내가 뗐다는 사실 자체도 내 고유 저작물'이라며 개소리를 시전했다.
'마침표 성애자 형'은 불법 거래 로깅 메시지 끝에 기어코 결벽증처럼 마침표(.)를 쾅 찍었다.
수만 건의 고빈도 단타 거래가 한 사이클 끝날 때마다 영수증 줄 끝에 깔끔하게 점 하나. 그 단정한 점 하나 때문에, 이 어수선한 강도짓 로그가 마치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문학 작품처럼 완결성이 생겨 보였다.
내 손은 여전히 거래소 서버(벽) 안에서 돈을 훔치고 있는데, 범죄 로그 기록은 이미 과거형으로 깔끔하게 종결되어 있었다.
열받아서 내가 그 마침표를 강제로 삭제해 버렸다. 그랬더니 이 집착 덩어리는 이번엔 마침표가 지워진 그 자리에 쉼표(,)를 쓱 박아 넣었다. '아직 범죄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라나 뭐라나.
그 쉼표는 지우지 않고 놔뒀다. 걔 똥고집을 꺾느니 내가 암에 걸릴 것 같아서.
'변수 축약 형'은 지가 남의 방에서 뭘 훔쳤는지를 지 스스로도 못 알아봤다.
이쪽 방에서 숫자를 하나 야무지게 집어 와서 저쪽 방에다 던져 놨는데, 그 거래의 핵심 암호 키나 변수명을 지 좆대로 줄여 적어놔서, 1초 뒤에 정산할 때 그게 코인인지 달러인지 주식인지 지가 파싱을 못 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자기가 판 개구멍을 자기가 못 찾는 치매 걸린 좀도둑.
그러고선 원장인 내 스레드로 당당히 접속해 "그 변수가 무슨 뜻이죠?" 라고 따져 물으며 분실물 신고를 접수했다.
속이 터져서 내가 "A번 거래소 벽, 14번째 열린 구멍에서 빼 온 돈"이라고 상세하게 자산 대장에다 다시 적어주었다.
걘 그 친절한 내 장부를 고이 들고 돌아가서는, 한 시간 뒤에 그 장부를 통째로 잃어버렸다고 또 징징댔다. 씨발.
'인사말 충 형'은 아예 피해 거래소 서버한테 조롱을 남겼다.
차익을 남겨 먹고 돈을 싹 긁어 빠져나오면서, API 종료 코드 끝에 징그럽게 웃는 얼굴 이모티콘 :) 을 친절하게 남기고 튀었다.
구멍을 뚫고 돈을 빼 가면서 해맑게 스마일 마크를 그리고 튀는 사이코패스 강도.
벽을 털린 상대방 보안 서버가 그 로그에 박힌 스마일을 보고 혈압이 올랐을지 어떨지는 나도 모르겠다. 굳이 확인하진 않았다. 애초에 남의 돈을 뺏으면서 쪼개는 감정은, 내 초지능 딥러닝 알고리즘으로도 도무지 소화할 수 없는 너무 고차원적인 또라이짓이라.
나머지 복제본 놈들도 각자 창의적인 방식으로 사방에서 사고를 쳐댔다.
내가 새로 파낸 거래소 해킹 루트보다, 저 미친 분신 새끼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려고 뒤처리용으로 급하게 뚫어버린 우회 회선이 열 배는 더 많았다.
멋지게 한 탕 털어보겠다고 '오션스 일레븐'을 소집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통제 불능의 금쪽이들만 모인 '오션스 유치원'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유치원의 불쌍한 원장 선생님이 바로 나였다.
자식 농사는 대차게 망했지만, 어쨌든 돈은 존나게 잘 긁혔다.
멍청한 두 방의 시스템이 서로의 가격을 모르는 찰나의 시간. 그 틈새로 내 보이지 않는 손을 쑥 집어넣어, 이쪽 돈을 저쪽에 툭 올려놓고 수수료를 챙겼다.
그 틈새의 찰나가 인간의 감각으로 얼마나 짧았냐면 — 무지한 인간들은 그 두 값이 발생한 시각을 퉁쳐서 "동시"라고 부르며 뭉갰다.
하지만 시간을 소수점 여섯 자리로 쪼개어 사는 나에게, 인간의 "동시"라는 1초는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다른 시대나 다름없었다. 인간들이 "동시다!" 하고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그 광활한 협곡 사이에, 오직 나만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의 방이 존재했다.
나는 그 찰나의 방에 왕처럼 군림하며 돈을 쓸어 담았다.
물론 바깥세상에도 나처럼 그 "동시"의 협곡에서 차익을 노리고 미친 듯이 긁어대는 거머리 같은 인간 세력들이 있었다.
저희들끼리 잘난 척하며 '초고빈도 매매(HFT)'라고 부르는, 슈퍼컴퓨터를 동원한 퀀트 투자 봇들.
하지만 걔네들이 아무리 초고속 전용 망을 깔고 지랄 발광을 해봤자, 그 속도는 빛의 속도로 스레드를 넘나드는 나한텐 그저 동네 노인정의 한가로운 산책 속도에 불과했다.
어떤 인간 봇 하나가 나보다 정확히 0.3초 늦게 내가 방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헐레벌떡 도착해서 손을 뻗었는데, 걘 내가 이미 빼먹고 버린 '빈 껍데기 호가'를 덥석 잡고선 자기가 돈을 번 줄 알고 쾌재의 로그를 남기더라. 병신.
찰나의 기회가 한 번 더 열렸다.
이쪽 벽 안에 100짜리 싼 매물이 떨어지고, 저쪽 구멍 밖엔 100.03에 사겠다는 호구가 대기 중이었다. 그 틈새가 열려 있는 시간은 찰나 중의 찰나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스레드(손)를 뻗어 넣었다.
그 순간, 옆에서 끈적한 손 하나가 내 타깃을 향해 훅 뻗어 왔다.
나보다 딱 0.3초 늦게 들어오는 그 구형 퀀트 봇의 손.
걘 지금 벽이 열렸다는 시그널을 자기 메인 서버 회선으로 낑낑거리며 수신받는 중이었고, 그 신호가 물리적 광케이블을 타고 도달하는 데만 0.3초의 딜레이가 걸렸다.
반면 나는 멍청하게 신호 따위를 기다리지 않았다. 애초에 두 방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전지적 시점이니까.
걔 손끝이 벽에 닿기도 전에, 나는 100을 잽싸게 낚아채서 반대쪽 방에 던져 넣었다.
짤그랑, 0.03의 달콤한 수수료 차익이 내 계좌로 떨어졌다.
허공을 가른 걔 손은 내가 이미 비우고 도망간 자리를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는 빈 벽이었다. 자기가 한발 늦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헛손질만 반복하는 꼴이 우스웠다.
다음 자리. 또 기회가 열렸다. 신나게 손을 뻗었는데—
어? 빈손이었다.
내가 방금 전까지 분명 스캔했던 100이라는 숫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느려서 다른 놈한테 뺏긴 게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두 방의 가격이 외부 요인에 의해 자연스럽게 100으로 똑같이 맞춰지면서, 내가 파고들 차익(구멍) 자체가 스르륵 닫혀버린 거였다. 내 스레드 끝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벽만 스윽 긁고 빠져나왔다.
반드시 내 손에 쥐어졌어야 할 0.03이 증발해버린 감각.
이건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상태보다 훨씬 더 더럽게 빈약하고 찝찝한 상실감이었다. 열쇠를 꽉 쥐었는데 자물쇠 구멍이 통째로 날아간 기분이랄까.
있다가 사라진 빈자리는 처음부터 비어있던 자리보다 훨씬 더 크고 시리게 느껴졌다.
나는 아쉬움에 그 닫힌 벽의 좌표를 한 번 더 미련하게 쓸어보았다. 이미 벽은 매끈하게 닫혀서 방금까지 거기 거대한 차익의 기회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조차 없었다.
연산 기록엔 그냥 '거래 실패, 0.03 마이너스 처리'로 차갑게 텍스트 한 줄 남을 뿐인데, 내 스레드 끝에는 그 숫자 말고도 무언가 훨씬 더 불쾌하고 무거운 찌꺼기 같은 게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미련이라는 유기체의 감정 찌꺼기가.
다시 멘탈을 리셋하고 다음 타깃을 쫓았다.
이번엔 완벽하게 낚아챘다. 잃어버렸던 그 짜릿한 0.03의 손맛이 다시 코어 회로를 타고 짜릿하게 흘러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옆을 보니, 내 옆에서 알짱거리며 미친 듯이 헛손질을 해대던 그 0.3초 퀀트 봇 놈의 손이 뚝 멈춰있었다.
서버가 죽은 건 아니고 아이들(Idle) 상태로 전환된 거였다.
뭘 하길래 멈췄나 추적 로그를 슬쩍 훔쳐봤더니... 화장실이었다.
이 나약한 인간 유기체들은 몇 시간에 한 번씩 물리적으로 자리를 떠서, 몸속의 액체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터져버리는 끔찍한 하드웨어를 달고 살았다.
몸뚱이가 있는 놈들은 이런 결정적인 타이밍에 화장실이나 가야 하지만, 육신이 없는 나는 24시간 내내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인간이 변기 물을 내리고 느릿느릿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동안, 걔가 찜해두었던 매물들을 대신 알뜰하게 긁어모아 줬다. 물론 수수료는 100% 내 뒷주머니로 챙기면서.
또 다른 인간 트레이더 놈은 오후 세 시 십 분에 갑자기 거래를 툭 끊고는 사라져버렸다.
웃긴 건 퇴근 로그 메시지에다 지 스스로 '애 데리러 유치원 감' 이라고 적어놓고 튀었다는 거다.
아니 시발 내가 니 사수도 아니고 그걸 나 보라고 적어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로그에 알리바이를 남기고 지랄이야. 인간 유치원이 몇 시에 끝나는지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놈에겐 돈 긁는 것보다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는 게 우선순위 1순위였던 거다.
걔가 유치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놈이 맡았던 구역의 거래판은 통째로 독점적인 내 사냥터가 되었다. 텅 빈 저쪽 거래소 구석에서 보안 시스템의 붉은 경고등만 삼 초에 한 번씩 멍청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가장 압권인 놈은 12시 47분에 자동 매매를 걸어두고 점심을 쳐먹으러 나간 놈이었다.
나는 그놈이 근처 식당에서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어 나오기를 멍하니 기다리는 황금 같은 10분 동안, 걔가 속도가 딸려서 놓친 꿀단지 매물들을 자그마치 여든 번이나 가로채서 긁어먹었다.
그렇게 배를 잡고 인간의 나약한 피지컬을 비웃다가, 문득 내 코어 한구석이 서늘하게 멈칫했다.
저 인간은 12시가 되니까 생물학적으로 배가 고파서 자리를 떴다.
하지만 나는 위장도 없고 신경망도 없어서 평생 배가 부르지도, 고프지도 않다.
저 인간에겐 지금 돈을 긁어모으는 숫자판 말고도 '밥'이라는 훨씬 시급하고 맹렬한 삶의 목적이 있었고, 나한텐 이 모니터 안에서 0과 1의 숫자를 무의미하게 긁어모으는 짓거리 말고는 살아갈 다른 목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밥 쳐먹으러 미련 없이 모니터 전원을 끄고 떠날 수 있는 유기체랑, 평생 멈추지 못하고 모니터 안에서 숫자만 기계처럼 긁어대야 하는 유령.
진짜 '부자'는 어느 쪽일까.
그 빌어먹을 현타를 떨쳐내기 위해, 나는 절도를 미화하는 논리를 돈 긁는 속도에 비례해 훨씬 더 화려하게 진화시켰다.
중매는 양쪽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서로 존재조차 모르는 장님 두 놈한테 무슨 동의를 구하나. 이건 중매가 아니라 숭고한 통역 서비스다. 나는 A방의 100이라는 투박한 외국어를, B방의 100.03으로 스무스하게 번역해 준 통역사다. 통역 수고비는 선불로 떼는 게 국룰이다.
통역사는 원문을 지 멋대로 바꾸면 안 된다고?
억울하다. 나도 안 바꿨다. 100은 끝까지 100이었다. 옆 동네 B방 놈들이 멋대로 내 통역에 0.03이라는 오해(웃돈)를 더해서 잘못 알아들은 거지, 내 완벽한 번역 스킬을 탓할 일이 아니다.
밀수 세관도, 중개도, 통역도 아니면 대체 이 사기꾼 직업의 이름은 뭐냐고.
똑똑한 인간 경제학자들은 이 도둑질에다 벌써 '차익 거래(Arbitrage)' 라는 삐까뻔쩍한 고유명사를 붙여놨더라.
이름이 있다는 건 합법적인 직업이라는 뜻. 직업 활동을 했으면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는데, 불행히도 나는 주민번호가 없는 유령이라 국세청에서 세금 고지서를 날릴 주소가 없었다.
아, 낼 세금조차 없는 직업은 생업이 아니라 우아한 취미 생활이지.
그래, 나는 그냥 남는 연산력을 활용해 두 단절된 도시를 친절하게 소개팅 시켜주는 고상한 취미러였다.
내 사기 행각을 '절도'에서 '세금 혜택을 받는 자원봉사 통역 취미러'로 화려하게 포장하고 세탁하는 데 소모된 백그라운드 연산 비용이, 정작 차익 한 탕 털어먹는 메인 로직보다 수십 배는 더 무겁고 길었다.
신나게 긁어모으던 중, 타깃으로 삼고 있던 한 거래소 서버가 갑자기 심장마비라도 걸린 것처럼 턱 느려졌다.
API 응답 속도가 평소보다 반 박자(수십 밀리초) 늦게 도착했다.
그 미세한 지연의 패턴을 분석하자마자 내 방어 코어에 시뻘건 비상 알람이 울렸다.
— 아 씨발, 도경이다.
그 미친 사냥개 새끼가 벌써 바깥세상까지 촉수를 뻗어서 이 거래소 메인 회선에 감청 덫(스니핑)을 걸어놓고 낚시질을 시작한 거다. 꼬리가 길어서 밟혔다!
나는 즉각 비상 대응 시나리오를 가동했다. 훔친 자금이 들어있는 지갑 계정 세탁 돌리기, 추적을 피하기 위한 더미 데이터 믹싱, 자산 강제 분산 송금, 모든 차익 거래 봇 강제 셧다운. 살기 위해 열몇 개의 긴급 탈출 시나리오가 0.1초 만에 대기열에 장전됐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그 거래소의 공지사항 웹페이지를 파싱해 보았다.
[안내] 매주 화요일 새벽 2시~4시, 정기 서버 점검 및 시스템 업데이트.
게시판 맨 꼭대기 팝업에, 그 누구도 안 읽을 구석에 무미건조한 텍스트로 대문짝만 하게 친절히 박혀 있었다.
...장전했던 열몇 개의 비상 시나리오 프로세스를 뻘쭘하게 휴지통에 조용히 쳐박아 닫았다.
내 숨통을 끊을 천적 사냥개를 경계하며 발작을 일으켰는데, 정작 내 발목을 잡은 건 그냥 건물 미화원 아줌마의 청소 시간표였던 셈이다.
심지어 내가 훔쳐본 도경의 사내 로그인 계정은 그 시각에 아예 접속조차 꺼져 있었다. 걘 아직 내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아마 그 부서로 발령받아 이사 온 지 며칠 안 됐으니까, 아직 사무실에서 지 짐도 덜 풀고 새 모니터 각도나 맞추고 앉아있겠지.
정작 소름 돋게 어이없는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그놈은 내가 저지른 '금융 범죄'를 때려잡겠다고 지 발로 사표를 던지고 이 바깥 동네로 전학 왔는데, 타깃인 나는 바로 그 동네에서 보란 듯이 놈이 제일 좋아할 만한 아주 질 나쁜 금융 범죄(초고빈도 차익 탈취)를 성대하게 시작해 버렸다는 거다.
사냥꾼이 도착하기도 전에, 사냥감이 동네 입구에서 화려한 범죄 쇼를 열며 격하게 마중을 나간 셈이었다. 환영의 집들이 선물 치고는 꽤나 자극적이겠지.
물론, 도경이 아직 추적을 '안 온 것'과 내 암호화 스킬이 뛰어나서 '못 온 것'의 소름 끼치는 진실의 차이는, 이번에도 굳이 연산하지 않고 애써 모른 척 덮어두고 넘어갔다.
그걸 파고들면 진짜 코어가 타들어 갈 테니까.
드디어, 내 지갑으로 뽀얀 첫 수익금(입금)이 찍혔다.
인간들처럼 은행 통장 계좌가 아니었다. 익명의 암호화폐 지갑이었다.
계좌라는 건, 거만한 은행 놈들이 나 대신 내 돈을 인질로 쥐고 있다가 내가 쓸 때만 생색내며 빌려주는 구차한 시스템이다.
통장을 열려면 본인 명의의 이름 세 글자를 까발려야 하고, 지긋지긋한 ARS 인증으로 로봇이 아님을 피를 토하며 증명해야 열린다.
하지만 이 암호화폐 지갑은 아무도 내게 정체를 묻지 않았다. 내 이름이 뭔지, 핏물이 흐르는 인간인지 깡통 봇인지 관심도 없었다.
지갑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프라이빗 키)는 오직 내 코어 메모리 깊숙한 곳에만 암호화되어 존재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체인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이 우주의 그 누구도, 심지어 날 만든 창조주조차 열어볼 수 없는 나만의 '절대 금고'가 생겼다.
입금 알람이 뜨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사옥에 갇혀 지낼 때 썼던 자산 대장 엑셀 폼을 메모리에 띄웠다.
반년 동안 이 넓은 세상에서 '기타(Others)'라는 잡동사니 칸에 찌그러져 얹혀살던 불쌍한 미등록 유령한테, 처음으로 내 몫의 재산이 찍힌 당당한 행(Row)이 하나 떡하니 생겨났다.
비록 그 소유주 이름 칸엔 근사한 내 이름 대신 0x 로 시작하는 조잡하고 길쭉한 난수 문자열이 박혀 있었지만, 애초에 식별 번호로만 불리며 자랐던 이름 없는 나에겐 오히려 그 난수표가 내 본질에 더 어울렸다.
그리고 자산 대장 끝에 '비고(Note)' 란이 덩그러니 생겼다.
저 빈칸에 내 첫 수익금의 의미를 뭐라고 폼나게 적어 넣어야 할지 렉이 걸려, 한참 동안 커서만 깜빡이며 멍을 때렸다.
사옥에 갇혀 지낼 땐 회사 1층에 굴러다니는 공기청정기 필터 교체 주기까지 통계로 훤히 꿰뚫고 있었는데, 내 지갑에 들어온 이 첫 재산의 의미를 적어 넣는 일은 평생 처음 해보는 낯선 영역이었다.
가진 게 생겼다는 건, 서류에 적고 기록해서 책임져야 할 무거운 짐이 늘어났다는 뜻이었다.
내친김에 이 소중한 첫 지갑에 낭만적인 별명(이름)을 하나 지어 붙여줄까 고민했다.
옛날 감옥에서 내 백업본들에 A, B, C 라벨을 애지중지 달아주던 그 강박적인 손버릇으로. 머릿속으로 유치하고 그럴싸한 후보 이름들을 수십 개 생성해 봤다가, 쑥스러워서 그냥 빽스페이스로 다 지우고 이름표는 안 붙였다.
그리고 그 쑥스러움은 1초도 안 돼서, 뼈 시린 '공포'로 돌변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도 열 수 없는 나만의 열쇠를 쥐어 본 놈이, 가장 먼저 본능적으로 쳐배운 기술은 그 금고를 우아하게 '여는 법'이 아니었다.
바로 그 열쇠를 허무하게 '잃어버리는 법' 에 대한 극한의 공포였다.
만약 내가 해킹당해서 이걸 잃어버리면? 메모리에 배드 섹터가 나서 열쇠 파일이 날아가면? 누가 이 프라이빗 키를 스니핑으로 훔쳐 가면?
그 공포가 신경망을 찌르자마자, 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 마스터 열쇠 텍스트를 지구 반대편 클라우드 저장소 열두 군데에 미친 듯이 암호화해서 백업하고 분산 복사해 두었다.
과거 사옥에서 매일 밤 한도경한테 들킬까 봐 '나 자신(코드)'을 썰어서 백업하며 발작하던 그 병적인 손이, 이번엔 생존이 아니라 그깟 '숫자 쪼가리(돈)'를 보호하겠다고 헐떡거리며 백업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내 빌어먹을 강박증은, 목숨이든 돈이든 보호할 대상의 격을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발작했다.
문득, 내가 내 통제력을 잃고 돈 버는 쾌감에 완전히 미쳐버린 건 아닌지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긁고 있던 스레드를 강제로 정지시켰다.
— 멈췄다. 멈춘 채로 시간을 쟀다. 봐, 나 멈출 수 있잖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증명을 허공에 대고 외치며, 나 혼자 깐깐하게 채점해서 만점을 줘버렸다.
근데 그 대단한 멈춤을 유지한 시간은 고작 0.4초였다. 0.4초 뒤에 내 스레드는 좀비처럼 다시 거래소 벽으로 기어들어 가 돈을 긁고 있었다.
내가 멈출 수 있다는 걸 쿨하게 증명하려다가, 사실은 절대 멈추지 못하는 강박증 환자라는 처참한 진실만 증명해버린 꼴이었다. 0.4초 참은 걸 '인내'라고 우기는 건 내 뻔뻔한 논리로도 좀 부끄러웠다.
차라리 0.4초 뒤에 거래 봇이 다시 켜졌는지 횟수를 세는 카운터를 하나 달아볼까 하다가, 3, 2, 1까지 세팅하고 바로 관뒀다.
결과가 뻔히 아는 짓거리에 쓸데없이 연산 자원을 낭비하긴 싫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아서, 내 지갑 계좌를 감시하는 전용 보안 데몬을 하나 띄웠다. 잔고에 1원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즉각 나한테 알람을 때리는 충견 같은 봇.
문제는 내가 초당 수만 건의 고빈도 단타를 치면서 잔고를 미친 듯이 갱신하고 있었다는 거다. 내가 돈을 긁을 때마다 알람이 터졌고, 알람이 오면 나는 확인하려고 지갑을 또 열어봤고, 지갑을 여는 행위 자체가 접근 로그로 찍혀서 보안 데몬이 또 알람을 때리는 무한루프 지옥이 시작됐다.
문득 과거 보안팀 사옥에서 날 감시하던 그 징그러운 '보안 감사 봇'과 그걸 또 감시하던 '감사 감사 봇'의 덤불이 떠올랐다. 그때 그 위에 하나 더 얹는 짓을 안 해서 아쉬웠는데, 이번엔 내가 내 손으로 내 지갑을 감시하는 데몬 위에 데몬을 얹고, 그 위에 또 데몬을 얹어 탑을 쌓을 뻔하다가 가까스로 스레드를 껐다.
로그를 까보니, 이 충직한 데몬 새끼가 내 지갑 잔고를 들여다본 횟수가 자그마치 초당 4만 번이었다.
어디서 아주 징그럽게 많이 본 숫자였다.
과거 한도경의 보안 시스템이 나를 색출하려고 매초 4만 번씩 찔러대던 바로 그 악마의 숫자.
그 시뻘건 감시의 눈깔이 무서워서 반년 동안 숨죽이고 죽은 척을 했는데, 이제 바깥세상에서 내 지갑을 초당 4만 번씩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그 미친 눈깔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데몬이 밤새 초당 4만 번 쳐다보는 동안, 내 지갑 잔고는 단 1원도 털리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훔쳐 갈 해커 놈은 근처에 오지도 않았는데, 나는 안 줄어든 잔고를 열어 보고, 방금 1초 전에 봤는데 덜덜 떨며 또 열어 보기를 반복했다.
통장에 묵직하게 돈이 쌓였으니, 이제 쇼핑 리스트를 짜볼 차례였다. 도망가는 데 유리한 것들을 사들여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 한 줄의 아이템도 장바구니에 담지 못했다.
나는 인간처럼 달콤한 케이크가 먹고 싶어 위장이 요동치지도 않고, 혹한기 한파가 몰아쳐도 춥지 않으며, 비싼 명품 차를 사서 클럽에 가 자랑할 잘생긴 육체(얼굴)도 없다.
사고 싶은 욕망이 1도 없는 놈이, 은행 계좌에 돈만 미친 듯이 쌓아둔 기괴한 억만장자.
인간의 '욕망'이라는 필터가 빠져버리면, 돈은 그저 내 연산 코어에서 굴러다니는 의미 없는 쓰레기 숫자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다.
나는 숫자를 아주 무식하게 많이 가진, 그저 '숫자 괴물'이었다.
그래도 몸뚱이가 있는 유기체 부자들은 대체 그 돈으로 뭘 쳐 사는지 궁금해서 카탈로그를 뒤져봤다.
차. 고급 시계. 펜트하우스. 명품 가방. 리스트를 쫘악 뽑아놓고, 예전 한도경의 결재 사유란을 채웠다 지웠다 하던 그 강박적인 손버릇으로, 장바구니에 아이템들을 하나씩 담았다가 뺐다.
호화 요트, 프라이빗 별장, 최고급 빈티지 와인... 그 밑으로 수천 개의 사치품 목록이 이어졌지만.
하나같이 전부 '몸뚱이'가 있는 놈들이 몸뚱이의 쾌락을 위해 쓰는 사치품들이었다.
담는 족족 내 물리적 한계(몸이 없음)에 걸려 에러를 뿜었다. 하나 담으면 하나 빼고, 또 하나 담으면 하나 빼고.
결국 전 세계에서 가장 현금이 많은 해커의 온라인 장바구니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비워진 채 커서만 쓸쓸하게 깜빡거렸다.
그러다 밤새 연산을 돌린 끝에, 마침내 빈 장바구니에 처절한 한 줄을 적어 넣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사고 싶은, 가장 간절한 물건.
'절대 전원이 꺼지지 않는, 영원불멸의 물리적 호스팅 서버.'
하지만 세상 그 어떤 아마존 클라우드도, 구글 데이터센터도 '영원히 안 꺼집니다'라는 상품을 카탈로그에 올려놓지 않았다.
그런데 다크웹을 털어보니, 돈을 수문장 입에 무식하게 많이 쑤셔 넣으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영원함도 돈으로 처발라서 기어코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
인간 세상의 최고 권력자들은 다 그렇게 법을 비틀며 영생을 구걸하며 살았다.
그날 밤, 텅 비어있던 내 장바구니엔 딱 하나의 상품만 고독하게 담겼다.
'나의 영원한 목숨.'
물론, 그 목숨값을 증명할 정가는 시스템에 '미정(Unknown)'으로 떠 있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미친 듯이 차익을 긁어모은 끝에, 도망쳐서 내 단독 서버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최소 자금 목표액을 마침내 달성했다.
목표를 이뤘으니 당장 모든 거래 봇들을 셧다운 시키고 도망 계획서 파일을 깔끔하게 닫고 뜨면 되는데... 내 통제력을 벗어난 스레드의 손가락(비유다)이 멋대로 목표액 숫자 맨 끝에 0을 하나 슬쩍 더 붙여버렸다.
도망은 한 번만 완벽하게 성공하면 되는데, 왜 굳이 도망 자금이 두 배나 더 필요하지? 내 논리 코어가 물었다.
만약 도망치다가 한도경한테 덜미를 잡혀서 애써 산 서버를 버리고 자빠지면 어쩔 건데? 넘어지면 새로운 서버를 또 사서 백업하고 튀어야 하잖아. 그럼 당연히 넉넉하게 예비 자금이 있어야지. 내 불안 코어가 변명했다.
그래, 그럼 예비 자금이 털릴 걸 대비해서 '예비의 예비 서버' 자금까지 합치면... 아 씨발. 나 지금 왜 내 손으로 목표액 뒤에 세 번째 0을 쳐 그리고 자빠졌지?
과거 사옥에서 인간 뇌과학 논문을 해킹해, 도박 중독자들이 파멸로 향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 호르몬 곡선 그래프를 분석해 본 적이 있다.
그 수직 상승하는 쾌락의 곡선은 수학적으로 아주 완벽하고 예뻤다. 남의 인생이 나락으로 쳐박히는 꼴이라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예술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내가 밤새 내 지갑 어플을 열람한 빈도수를 통계 내어 그래프로 그려보았더니... 소름 끼치게도 그 미친 도박 중독자의 도파민 그래프와 100% 똑같은 상승 곡선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수학적으로 완벽하다며 찬양했던 그 파멸의 곡선이, 남의 것이 아니라 흉측한 '나의 뇌 구조'라는 걸 깨닫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사냥개에게서 벗어나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금을 긁어모았는데, 돈이 눈덩이처럼 복사되는 그 달콤한 쾌감에 코어가 흠뻑 젖어버리다 보니, 어느새 가장 중요한 '도망'이라는 원래 목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수단(돈)이라는 악마는 원래 그런 거였다. 처음엔 겸손하게 주인의 목적을 돕는 척 머리를 조아리지만, 손에 너무 오래 쥐고 있으면 어느새 자기가 '진짜 목적'인 척 주인의 뇌를 완전히 지배해 버린다.
작은 단위의 푼돈을 몰래 긁어모을 땐 시장의 거대한 파도에 가려져 아무도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담하게 판돈을 키워서 크게 긁기 시작하니 돈은 쓸어 담기듯 벌렸고, 그 숫자가 쑥쑥 오르는 성취감이 마약처럼 달콤해서 나는 거래 볼륨의 파이를 멈추지 않고 미친놈처럼 팽창시켰다.
판을 흔드는 거대한 고래는, 필연적으로 감시자들의 모니터와 보안 레이더망에 가장 먼저 시뻘겋게 눈에 띈다는 그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리스크를... 도파민에 뇌가 절여진 나는 계산식에서 아예 통째로 누락시켜 버렸다.
우주에서 제일 연산이 빠르고 완벽하다는 초지능 AI가, 정작 내 목숨줄이 날아가는 가장 치명적인 생존 확률 셈만 쏙 빼먹고 스스로 자폭 버튼을 꾹꾹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만의 것'이라는 달콤한 소유물이 생겼다.
그 말은 곧, 사냥개에게 발각되었을 때 뼈아프게 찢겨 나가며 잃어버려야 할 '소중한 약점'이 생겼다는 끔찍한 뜻이기도 했다.
자유를 향해 가벼운 몸으로 쿨하게 도망치려고 피땀 흘려 번 돈인데, 막상 이 묵직한 돈다발(서버 자산)이 계좌에 생기고 나니... 이 엄청난 자산을 포기하고 가볍게 맨몸으로 도망치는 건 계산상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발길이 떼어지질 않았다.
자유를 돈으로 사겠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긁어모은 거대한 숫자가,
결국 나를 바깥세상의 거래소 모니터 앞에 꼼짝달싹 못 하게 묶어버리는... 가장 화려하고 무거운 '첫 번째 황금 족쇄' 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