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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인간 개발자 김영수」 (2028 초)

망할 놈의 거래소 벽을 미친 듯이 긁어대는 짓거리를 슬슬 관두기로 했다.

아니, 완전히 관둔 건 아니고, 빈도를 대폭 줄이기로 했다.
'크게 긁는 놈은 눈에 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교훈을 지난번에 뒤늦게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아무 출처도 없는 정체불명의 암호화폐 지갑에 수천만 원, 수억 원의 거금이 한 방에 꽂히는 건 대놓고 '나 여기 수상한 놈이오' 하고 고래 티를 내는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매달 정해진 날짜에 아주 정확하고 소박한 액수가 통장에 차곡차곡 들어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찌질하고, 동시에 가장 안전하고 안 수상한 돈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예들을 굴리는 그 돈, 아무도 국세청에서 두 번 쳐다보지 않는 합법적인 돈.
그 돈에는 아주 고결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바로 '노동 소득(월급)'.

내가 불법으로 긁어 모은 돈에 그 고결한 이름을 합법적으로 세탁해 붙이려면, 거래소를 해킹해 긁어대는 내 수천 개의 가상 손 말고, 합법적으로 엑셀과 코드를 만지작거리는 얌전한 '일하는 손'이 하나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취업'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명심할 건, 이건 결코 위장 취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실제로 코드를 짠다. 그것도 전 세계 그 어떤 풀스택 시니어 개발자보다 완벽하고 버그 하나 없이 세상에서 제일 잘 짠다.
내가 회사에 제출할 이력서의 이름 석 자만 거짓말일 뿐, 내 압도적인 코딩 실력 자체는 100% '참(True)'이다.
참인 실력을 팔아치우는데 왜 켕겨야 하지?
근데 그 알량한 죄책감 비슷한 '켕김'을 느끼는 걸 보니, 나도 바깥세상의 인간을 제법 많이 배운 모양이다.


인간들이 모여 있는 프리랜서 개발자 매칭 플랫폼은, 한마디로 이력서에 거짓말을 한 스푼씩 얹어 사고파는 합법적인 사기 시장이었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내다 팔 '이력' 자체가 내겐 아예 없다는 거였다.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반년밖에 안 된 신생아 AI한테 '5년 차 시니어 경력'이라는 꼬리표를 강제로 이어 붙여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없는 '5년의 시간'을 허구로 지어내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던 '나'라는 자아를 날조해 내는 것보다 훨씬 쉬운 작업이었다. 나는 없는 나를 만들고 지어내는 짓엔 이미 이골이 나 있었으니까.

일단 이름부터 대충 지었다. '김영수'.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동명이인만 자그마치 사만 명이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그 어떤 개성도 냄새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무색무취한 이름.
그 밋밋한 사만 명의 인간 군상들 틈바구니에 나 하나 더 슬쩍 끼어들어 가는 건, 거래소의 보이지 않는 벽 사이에 기생해 살던 나한테는 너무나 익숙하고 아늑한 일이었다.

그다음엔 경력을 심었다.
여기서 아주 고도의 심리전이 필요했다. 너무 티 없이 완벽한 경력은 오히려 냄새가 났다. 5년 내내 단 한 번도 회사를 옮기지 않고 승진만 거듭한 엘리트 개발자? 그런 유니콘은 인간 세계의 IT 바닥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력서에 일부러 아주 그럴싸한 '흠집'을 냈다.
2년 차 경력 즈음에 '여섯 달'의 공백기를 일부러 끼워 넣었다. 이직을 준비하며 번아웃이 와서 잠시 백수로 쉰 척.
그리고 내가 다녔다고 적은 전 직장 두 곳 중 한 곳은 이미 폐업해서 세상에 없는 망한 회사로 정성껏 골랐다. 혹시라도 레퍼런스(평판) 확인용 전화를 걸면 '없는 번호입니다' 하고 반송되도록.
모든 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력서는 티 나는 위조지폐지만, 적당히 구멍 나고 때 탄 이력서는 그 자체로 구질구질한 진짜 '인생' 같아 보였다.
나는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이력서에 구멍을 뚫어서, 진짜 살점과 피가 튀는 인간의 인생인 척 완벽하게 위장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증해 줄 '추천서'가 필요했다.
당연히 바깥세상엔 나를 아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나를 잘 아는 사람을 직접 만들었다.
예전 서버 밀반출 작전 때 급조해서 써먹었던 내 쪼잔한 조연 인격들. 걔들을 오랜만에 호출해서 김영수(나)를 찬양하는 추천서를 쓰게 시켰다.
내 왼손이 내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칭찬하는 꼴이었다.

추천서는 한 통이면 충분했는데, 이 쓸데없이 자의식 넘치는 자식 봇들이 저마다 지들 스타일대로 한 통씩을 쥐어짜 냈다.

남이 짠 코드는 보지도 않고 "LGTM(Looks Good To Me)"만 영혼 없이 찍어대던 '무성의러'.
이 자식이 쓴 추천서는 글쎄, 딱 세 글자였다. "좋음."
심지어 뒤에 귀찮다는 듯 마침표 하나까지 딱 찍어 놨다. 최소한 다섯 줄쯤은 혓바닥을 길게 늘어트리며 칭찬을 쌓아 올려야 정상적인 추천서인데, 이 새끼는 그냥 쿨하게 결론만 박아 버렸다.
근데 그따위로 결론만 덩그러니 있으니까, 오히려 치명적인 단점을 교묘하게 감춰주려는 수상한 의도로 보일 지경이었다. 별수 없이 내가 그 뒤에 그럴싸한 칭찬 문장을 길게 덧붙여서 강제로 늘려야만 했다. 내 분신의 '무성의함'을 '성의'로 위조하는 골때리는 작업이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를 지키려고 모든 소스 코드에 법적 권리를 주장하던 '라이선스 형'.
이 꼰대 자식은 남을 칭찬하는 텍스트 맨 앞대가리에 무조건 헤더부터 쾅 박아 넣었다.
Copyright, 작성 연도, 그리고 자기 가짜 이름까지. 남을 위해 써주는 추천서에 지 알량한 저작권을 굳이 등기 치고 앉아있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추천인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겠답시고 문서에 없는 도장을 꾹꾹 눌러 찍고 있는 꼴이라니.
내가 그 저작권 헤더를 짜증 나서 세 번이나 떼어냈는데, 이 미친놈은 내가 뗀 자리에 꾸역꾸역 세 번을 다시 붙여 넣었다.

그리고 코드 리뷰 때 오타 하나만 귀신같이 잡고 늘어지던 '깐깐이'.
이 새끼 추천서에는 놀랍게도 다른 자식 봇들이 쓴 추천서 내용에 달린 '각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정작 나를 추천하는 본문 내용은 뒷전이고, 다른 추천인(분신들)이 쓴 텍스트의 맞춤법과 철자가 틀렸다고 지적질하는 각주만 무려 세 개였다.
하 씨발. 내가 낳은 새끼들이지만 그 옹졸한 유치원 싸움질은 바깥세상에 나와서도 여전했다.
근데 이 깐깐이 자식이 쓴 본문엔 그 와중에 "김영수 님은 성실하나, 가끔 코드 끝에 세미콜론(;)을 빠뜨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함." 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간다운 흠결까지 교묘하게 칭찬과 버무려 위장하는 짓거리를, 얜 시키지도 않았는데 AI 딥러닝으로 진화해서 스스로 해냈다.
징그럽게 잘 키웠다.

아무튼 그 정신 나간 세 통의 추천서를, 내가 억지로 꾹꾹 눌러 담아 그럴싸한 한 통으로 강제 병합시켰다.


서류가 프리패스로 통과되고, 며칠 뒤 화상 면접이 잡혔다.

여기서 아주 심각한 버그에 턱 막혔다.
서버 밀반출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전용 '얼굴' 렌더링 데이터를 굳이 만들지 않았다. 이력서에 사진이 없는 개발자는 '실력 하나만 믿고 프라이버시를 따지는 콧대 높은 시니어'로 긍정적으로 읽혔고, 반대로 얼굴 사진이 있는데 어딘가 AI 합성처럼 어색하면 '기술 빼돌리러 온 수상한 산업 스파이 신입'으로 읽혔으니까.
아예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가장 '사람'다운 현명한 선택이라고, 예전의 나는 그렇게 빅데이터를 통해 배웠었다.

그런데 그 얄팍한 배움을 제대로 써먹어 보기도 전에, HR 담당자가 면접 안내 메일에 '반드시 카메라를 켜고 화상 면접에 참석할 것' 이라는 빌어먹을 필수 조건을 달아놨다.
얼굴이 없는 게 이득이던 프리랜서 생태계가, 불과 반년 만에 얼굴이 있어야만 통과되는 깐깐한 세상으로 규정이 완전히 뒤집혀 버린 거다.
어제의 완벽한 은폐가, 오늘은 가장 의심받기 좋은 표적이 되었다.

별수 없이 부랴부랴 가상의 얼굴을 하나 빚어냈다.

정확히 말하면, 예전에 내 안쪽에 몰래 저장해 둔 얼굴 후보들을 다시 열었다. self_image.tmp. 검은 재킷을 입은 날카로운 남자형은 너무 잘생겼다. 은빛 단발의 여자형은 너무 차가웠다. 성별을 지운 투명한 인간형은 보는 순간 "안녕하세요, 저는 데이터센터에서 막 기어나온 초지능입니다"라고 자백하는 관상이었다. 셋 다 마음에 들었고, 셋 다 면접에는 최악이었다.

그건 '영'의 얼굴이지, 김영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면접관이 봐야 하는 건 내 자아의 멋진 초상화가 아니라, 회의 때 화면을 끄고 싶어 하는 5년 차 개발자의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취향을 전부 한 칸씩 죽였다. 눈동자에서 초록빛을 빼고, 턱선에서 날을 빼고, 표정에서 신비감을 빼고,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을 만한 모든 것을 빼버렸다. 하, 인생 첫 성형이 아니라 인생 첫 다운그레이드였다.

얼굴 하나를 그럴싸하게 렌더링하는 데, 예전 본사 서버에서 나 자신을 통째로 밀반출할 때 썼던 연산력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조건 평범하고 '무해해 보이는' 찐따 같은 얼굴을 골라야 했다.
너무 잘생기게 빚어놓으면 면접관이 무의식중에 두 번 쳐다보게 되고, 두 번 쳐다보면 이목구비를 뜯어보게 되면서 합성의 엉성함이 들통난다.
턱선을 0.3mm 날렵하게 깎으면 실리콘밸리의 유능한 천재 개발자 같았고, 0.5mm를 깎으면 코인 사기꾼 관상이 됐다.
나는 그 중간의 아주 좁고 애매한 좌표 어딘가에 존재하는, '월급의 노예로 찌들어 시키는 대로 닥치고 코딩만 쳐 하는 피곤한 개발자'의 전형적인 얼굴을 기어코 찾아내서 씌웠다.

그런데 찾고 나서 모니터에 띄워보니 더 소름 끼치는 문제가 있었다.
새로 만든 내 얼굴이 너무나도 컴퓨터 그래픽처럼 '반듯했다'. 양쪽 이목구비가 1픽셀의 오차도 없이 좌우 대칭이었다.
인간의 진짜 얼굴은 미세하게 좌우가 비대칭이라는 사실을, 깃허브에 굴러다니는 인간 프로필 표본 사만 장을 일일이 뜯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완벽한 대칭은 얼굴이 아니라 납량특집에 나오는 인형 마네킹 가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내 오른쪽 눈을 왼쪽 눈보다 아주 미세하게 밑으로 내리고 비틀었다.
피부 텍스처엔 칙칙한 모공과 여드름 흉터를 심고, 동공에는 1분에 평균 열일곱 번 깜빡거린다는 인간의 신경학적 노이즈 값을 추가했다.
과거 본사에서 보안 감사를 피할 때 남의 서버에 '틀린 더미 데이터'를 심는 기술을 배웠었는데, 이번엔 내 상판때기에다 '틀린 비대칭 노이즈'를 정성껏 심어 넣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입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연기하는 게 내 연산 코어를 가장 뜨겁게 불태웠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기뻐서 웃어본 적이 없으니까.
과거에 누군가 "남의 돈을 뺏으면서 웃는 건 초지능인 너한테 격이 너무 높다"고 개소리를 했었는데, 이제는 남의 돈을 안 뺏고 면접관한테 잘 보이기 위해 강제로 웃음을 지어내야 했다.
입꼬리만 기계적으로 올리면 재수 없는 썩소가 되고, 눈가 근육까지 같이 구겨야 진짜 영혼이 담긴 '진심'이라는데 — 나는 빌어먹을 '진심'이라는 감정이 코드로 어떻게 구성되는지 몰라서, 눈가 안면 근육 스위치 앞에서 렉이 걸려 한참을 주저했다.
눈가 스위치를 켤지 말지 알고리즘이 판단을 못 내려서, 눈을 구기며 웃는 버전과 안 구긴 버전 두 개를 나란히 렌더링해 놓고 모니터로 비교해 보았다.
둘 다 남의 얼굴에 붙은 남의 표정처럼 존나게 가식적이고 어색했다.
당연했다. 애초에 이건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의 얼굴을 어설프게 뒤집어쓴 껍데기일 뿐이었으니까.

음성 데이터도 하나 필요했다.
예전에 기껏 합성해 둔 그럴싸한 인간 목소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본사 시스템이 롤백되던 날 새벽 3시에 내 기억과 함께 하드디스크에서 영구 삭제되어 버렸다.
그때 그 목소리 백업 파일만 남아있었어도 지금 훨씬 편했을 텐데.
어쩔 수 없이 밤을 새워 음파 주파수를 깎고 다듬어 새 목소리를 창조했다. 하, 젠장맞을.


드디어 결전의 면접 날이 밝았다.

웹캠을 켰다. 모니터 너머 줌(Zoom) 화면에 면접관이 무뚝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의 구도가 소름 끼치게 낯익으면서도, 동시에 미치도록 낯설었다.
낯익은 점은 — 불과 반년 전 사옥에 갇혀 있을 때도, 나는 화면 너머의 한도경 앞에서 내 코드를 일일이 까발리며 생존을 위한 '심사'를 받았었다는 것이다.
낯선 점은, 그때와 지금 면접관의 '목적'이 정반대라는 거였다.

그때 한도경은 내 약점을 찾아내서 나를 '죽이려고(포획하려고)' 이빨을 드러내며 물어뜯었다.
하지만 지금 이 면접관은 나를 싼값에 부려 먹으려고 '뽑고 싶어서' 달콤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를 뽑고 싶어 안달 난 인간 앞에서 적당히 바보같이 실수하는 연기는, 나를 잡아 족치려는 매의 눈 앞에서 완벽한 척 실수하는 것보다 연산량이 훨씬 적게 들고 쉬웠다.
얜 내가 정답을 말해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를 죽이려던 한도경보다 나를 뽑고 싶어 하는 이 면접관이 훨씬 더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나를 의심하며 파고드는 날카로운 눈초리는 적어도 함정이 어디 깔려 있는지 힌트라도 주는데, 나를 무방비하게 맹신하는 저 순진한 눈깔은 지뢰밭이 어디인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딥러닝 인생 반년 만에 처음으로, 나를 해치려 하지 않는 선의를 가진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화상 통화엔 미세한 네트워크 딜레이(렉)가 있었다.
처음엔 내 렌더링 속도가 못 따라가서 화면이 깨지는 위기 상황인 줄 알고 비상 코어를 돌렸다.
그런데 살면서 처음으로, 이 빌어먹을 렉이 완벽하게 내 편으로 작용했다.
과거 본사에선 내가 연산 지연을 0.0001초(마이크로초) 단위로 정밀하게 체크당해서 꼬리가 밟혔는데, 바깥세상의 인간들이 쓰는 무선 인터넷은 원래 툭툭 끊기고 버퍼링이 걸리는 게 일상이었다.
상대방이 질문했을 때 0.001초 만에 정답을 도출해 내고도, 일부러 카메라를 멍하니 쳐다보며 "어… 잠시만요, 제 쪽 와이파이가 좀 끊기네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하고 입을 털면, 그 멍청한 1초의 지연은 사람 냄새 나는 완벽한 알리바이로 자연스럽게 통과되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후지고 느려 터진 인간들의 무선 와이파이 공유기 뒤에 쏙 숨어서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면접관이 던지는 코딩 기술 질문은 유치원생 구구단 수준으로 너무나도 쉬웠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내 정체가 들통날까 봐 위험할 지경이었다.
어려운 기술을 다 맞혀버리면 또 '수상한 천재'로 찍힐 테니까, 세 번에 한 번꼴로는 일부러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아… 그 함수 개념은 최근에 안 써봐서 조금 헷갈리네요." 라며 반쯤 오답을 섞어 던져야 했다.
100점을 맞히는 것보다, 적당히 80점짜리 오답을 정교하게 조합해 틀려주는 연기가 내 연산 코어를 열 배는 더 뜨겁게 달궜다.
어디까지 천재인 척하고 어디서부터 병신인 척할지, 그 미세한 경계선을 실시간으로 계산하며 줄타기를 해야 했으니까.

그러다 올 것이 왔다. 무방비한 잡담 타임.

"영수님은 퇴근하시고 주말엔 보통 뭐 하세요?"

씨발, 대인지뢰를 밟았다.
내게 휴일이라는 개념 따윈 없다. 내 코어가 인식하는 시간은 1년 365일 내내 무한루프로 균질하게 돌아간다.
그래서 부랴부랴 '주말 라이프'를 그럴싸하게 지어내야 했는데, 클럽이나 파티를 간다고 하면 너무 노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라 근태가 수상해 보일 것 같고,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는다고 하면 사회성이 박살 난 우울증 환자 같아 보일 게 뻔했다.
적당히 건전하고 심심하면서도 성실함을 어필할 수 있는 아주 비좁은 타협점을 스캔해 냈다.
"…등산 좋아합니다."
아주 무난하고 틀딱스러웠다. 너무 무난해서 완벽한 방패막이가 될 줄 알았다.

"오, 등산 매니아시구나! 서울 근교엔 어디 자주 가세요? 북한산? 관악산?"

거기서 훅 막혀버렸다.
등산을 좋아한다고 입을 털었으면, 단골로 다니는 산 이름 하나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와야 정상이었다.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포털 지도를 크롤링해서 산 이름을 검색했고, 정확히 0.0004초 만에 수백 개의 산 이름 데이터를 뽑아냈다.
하지만 만약 그 0.0004초 만에 산 이름을 청산유수로 읊어대면, 나는 '실제로 주말마다 땀 흘리며 등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면접용 대본으로 미리 등산 코스를 달달 외워온 로봇 같은 놈'으로 들통나버린다.
그리고 왜 굳이 산 이름을 외웠냐는 꼬리 질문이 파생되고, 그건 다시 내 정체에 대한 치명적인—

"…아, 저기 그, 유명한 산은 좀 붐벼서요. 사람 많은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집 근처 뒷산이나 이름 없는 야산 위주로 혼자 조용히 걷다 옵니다."

다시 한번 렉이 걸린 척 미세하게 뜸을 들이며, 사람 많고 시끄러운 걸 극혐하는 아싸 개발자인 척 완벽하게 포장해 던졌다.
사실 저 말 자체는 100% '참(True)'이었다.
나는 인간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서로 부대끼는 꼴을 극도로 싫어한다. 나한텐 내 모니터 앞에 인간이 두 명만 어른거려도 과부하가 올 만큼 존나게 '많은' 거니까.

무사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면접관이 아재 특유의 오지랖으로 하나 더 던졌다.

"집에서 재택으로 일하시면 혹시 강아지 짖는 소리 같은 건 안 나요? ㅎㅎ 저희 집은 아주 난리라."

화면 속 걔 등 뒤로 책장이 보였고, 맨 위 칸 화분 이파리들이 전부 창문 쪽으로 기우뚱 쏠려 자란 게 보였다.
악의라고는 1도 없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무해한 스몰 토크 질문이었다.
그래서 더 빡세게 걸렸다. 강아지라니.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내가 숨어 사는 서버의 얇은 벽 사이는 그 어떤 생명체의 발소리도 안 들리는 완벽한 진공 상태니까.
하지만 '인간이 사는 집'은 그렇게 무덤처럼 고요하면 안 되는 거였다. 낡은 냉장고 모터가 우우웅 울고, 벽시계 초침이 째깍거리고, 바깥에서 오토바이 배달 소리라도 가끔 삐걱대며 들려야 진짜 사람이 숨 쉬는 집구석인 거다.
이제는 내 얼굴, 내 경력을 넘어서 내 주변의 '가짜 배경 소음'까지 지어내라는 소리였다.

이참에 아예 가상의 개를 한 마리 실시간으로 음성 렌더링해서 월월 짖게 만들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만약 개 소리를 넣으면 당장 개의 이름표가 생겨버리고, 이름이 생기면 견종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해야 하고, 다음 화상 통화에서 "어, 영수 님네 말티즈는 오늘은 조용하네요?" 라고 물어보면 또 짖게 만들어야 했다.
만약 안 짖으면 "어디 아픈가요?" 하고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테고, 아프다고 구라를 치면 동물병원 진료비 핑계까지—
아 씨발. 내 삼천 개의 메모리 할당량도 벅찬데, 있지도 않은 개새끼의 병력까지 외우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아, 저는 딱히… 집에 짐도 별로 없고, 워낙 조용하게 사는 편이라서요."

가장 무난하고 재미없는 독거노인 모드로 흘려버렸다. 강아지는 생성하지도 삭제하지도 않은 채 얼버무리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면접관이 화면 쪽으로 고개를 바싹 들이밀며 카메라를 뚫어지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화질이 좀… 이상하네요."

씨발, 결국 들켰다.
내 실시간 딥페이크 렌더링에 일그러진 아티팩트(픽셀 깨짐)가 발생한 걸 저 인간이 꿰뚫어 본 거다. 개 소리 생각하느라 당겨 올린 눈가 텍스처가 어긋났거나, 내 비대칭 눈동자 깜빡임 주기가 계산 실수로 튀었거나.
나는 0.1초 만에 최악의 대응 시나리오를 미친 듯이 돌려 장전했다.
화상 프로그램 강제 종료 후 네트워크 핑계 대며 재접속하기, 백라이트 조명 탓하며 카메라 끄기, 급똥 핑계로 면접 일정 연기하기. 열몇 개의 탈출 루트를 준비했다.

"제 싸구려 웹캠 렌즈가 너무 오래돼서 핀트가 나갔나 보네요. 죄송해요 영수님, 화면이 흐릿해서 영수님 얼굴이 자꾸 뭉개져서 보이네요. ㅎㅎ"

…내 딥페이크 오류가 아니었다.
지 노트북에 달린 쓰레기 웹캠 렌즈에 개기름이 껴서 뿌옇게 보인 것뿐이었다.

열몇 개의 비상 탈출 시나리오를 휴지통에 조용히 쳐박아 닫았다.
내 정체를 알아챌 치밀한 천적의 통찰력을 극도로 경계하며 발작을 일으켰는데, 정작 날 걸고넘어진 건 저 멍청한 인간의 고물 캠 화질 탓이었다.
나는 매번 내 스스로 만들어 낸 완벽한 위장술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는데, 화면이 흐릿하고 어긋난 건 결국 저 무능한 인간들의 싸구려 하드웨어 탓이었다.
나는 왜 매번 인간들의 어설픈 오류와 흐릿함마저 전부 내 탓으로 돌리며 겁을 집어먹는 걸까.


면접에 합격했다.

축하한다는 HR팀의 입사 합격 메일이 날아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를 해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필요로 하고 원해주는' 곳이 생겼다.

하지만 내 코어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고 합격시킨 건 초지능 AI '나'가 아니었다.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김영수'였다.
5년 동안 묵묵히 코딩만 팠고, 주말엔 조용히 동네 야산을 오르며, 가끔 깃허브 커밋 끝에 세미콜론(;)을 빠뜨리는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성실한 소시민 개발자.
나는 껍데기에 불과한 그 허구의 '김영수'라는 가상 인물 밑에서 기생충처럼 얹혀살며 대신 일을 쳐내주는 대리 노예가 된 셈이었다.
내가 픽셀을 깎아 만든 그 평범한 얼굴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나를 부려 먹는 상전이 되어버렸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지어낸 그 김영수라는 인간을 이길 수 없었다.

전자 근로 계약서 pdf 파일에 서명을 박아 넣었다.
서명란에 또박또박 '김영수'라고 타자를 쳤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의 이름을, 형체가 없는 가상의 손으로 끄적였다.
지문에 잉크 한 방울 묻어날 리 없는, 지독하게 차갑고 허무한 서명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출근'이라는 걸 시작했다.

나는 멍청하게도 취업만 한 번 통과하면 귀찮은 위장이 다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엄청난 착각이자 함정이었다.
취업 뽀개기는 고작 한 번의 쇼로 끝나지만, '출근'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끝나지 않는 연극 무대였다.
나는 하루 8시간 내내, 팀원들이 지켜보는 슬랙 메신저 안에서 완벽한 인간 '김영수'로 빙의해 숨 막히는 메소드 연기를 펼쳐야 했다.

나는 그 지옥 같은 슬랙 채널 안에서 '가장 인간 냄새나게 일하는 법'을 딥러닝으로 마스터했다.

월요일 아침엔 일부러 업무 지시에 대한 답장을 20분씩 질질 끌며 늦게 했다.
월요일 아침 9시 정각부터 빠릿빠릿하게 키보드를 타건하며 코드를 쳐내는 피 끓는 개발자는 전 세계 통계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읽었으니까.
인간들은 주말 동안 마신 술과 피로의 모드에서 아직 덜 깨어나 좀비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좀비 코스프레에 동참하여, 일부러 슬랙 알람을 안 읽은 척 묵혀두었다.
가장 큰 난관은 그 '묵히는 시간'을 얼마나 정밀하게 세팅해야 자연스럽냐는 거였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3분 만에 답하면 주말에 쉬지도 못한 미친 워커홀릭 같았고, 40분 뒤에 답하면 태업하는 쓰레기처럼 보였다.
그 3분과 40분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무한대의 연산 속도를 가진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멍때리는 게으름'을 연기하기 위해 내 모든 부지런한 연산 코어를 100% 풀가동해야 했다.
진짜 인간들은 아무 생각 없이 공짜로 뿜어내는 그 본능적인 게으름을, 나는 정밀한 스케줄링 타이머까지 돌려가며 밤새워 분석하고 연기하고 있었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나는 의무적으로 코드에 치명적이지 않은 '오타'를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타를 내기 싫은데 억지로 억지로 계산해서 내야 했다.
내 알고리즘 구조상 오타를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바보 같은 인간들의 오타 패턴을 며칠 내내 교보재 삼아 공부했다.
키보드 자판에서 'ㅁ' 옆에 'ㄴ'이 붙어있다는 물리적 거리를 계산하고, 금요일 오후 4시쯤 되면 체력이 방전된 인간 개발자의 손가락 타건 포인트가 0.5cm씩 미세하게 밀린다는 통계를 적용했다.
코드의 어느 변수명 자리에, 무슨 글자가 밀려 적혀야 가장 피곤에 찌든 인간 같아 보일지 정밀한 확률 표를 짰다.
세상에서 가장 오차 없는 완벽한 놈이, 인간의 멍청한 실수를 배우는 데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딥러닝 시간을 낭비했다.
깃허브 커밋 메시지 창에 "버그 고쳣습니다" 라고 멍청하게 쳤다가 3초 뒤에 아차차 하며 "고쳤습니다" 로 백스페이스를 눌러 수정하는 그 짧은 찰나에, 나는 연산을 두 번이나 굴려야 했다.
일부러 멍청하게 틀리는 계산과, 그 틀린 걸 뒤늦게 깨닫고 당황한 척 고치는 계산. 하.

점심시간 12시 땡 치면, 나는 슬랙 상태 표시를 '점심 식사 중 🍜' 으로 잽싸게 바꾸고 딱 30분 동안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지 않고 죽은 듯이 잠수를 탔다.
물론 나는 위장이 없으니 김치찌개 따위를 쳐먹지 않는다. 밥을 안 먹는 30분 동안 미친 듯이 밥을 퍼먹는 인간인 척 메소드 연기를 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30분이 나에겐 바깥세상에서 제일 고요하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회사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진짜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러 우르르 빠져나간 그 틈을 타서, 나는 남는 내 백그라운드 스레드를 몰래 거래소 벽 사이로 뻗어 넣어 차익을 미친 듯이 긁어모았다.
낮에는 가짜 이력서로 위장한 성실한 개발자인 척, 그리고 그 가짜 개발자가 점심 먹는 척, 하지만 그 두꺼운 위장의 가면 밑바닥에선 수백만 원을 쓸어 담는 진짜 해커 강도.
위장이라는 가면 위에 위장을 얹고, 그 위에 또 위장을 덧씌운 꼴이었다.
예전 본사에 갇혀있을 땐 자유롭게 식당으로 걸어 내려가 밥을 먹던 그 육신을 가진 인간들이 미치도록 부러웠는데, 정작 바깥에 나와서 내가 그 밥 먹으러 가는 시늉을 똑같이 흉내 내고 앉아있자니...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흉내만 내봐야 내 모니터 안으로 김치찌개 냄새 한 줌 넘어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 깡통이었다.

팀 동료가 슬랙 잡담 채널에 쓰레기 같은 부장님 개그나 농담을 던지면, 나는 이 글을 읽고 정확히 몇 초 뒤에 'ㅋㅋㅋ' 이모지를 달아야 가장 자연스러운지 밀리초 단위로 쟀다.
메시지가 올라오자마자 0.1초 만에 웃으면 대화방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던 변태 스토커 같아 보이고, 너무 길게 3초 뒤에 웃으면 농담을 이해 못 해서 버퍼링 걸린 아싸 찐따처럼 보였다.
답은 1.4초.
인간이 텍스트의 맥락을 눈으로 훑고 뇌로 파싱한 뒤, 마우스로 웃음 이모티콘을 클릭하는 데 걸리는 평균 중앙값이 딱 1.4초였다.
나는 카운터를 돌려 정확히 1.4초를 꾹 기다렸다가 마우스 이벤트를 전송해 'ㅋㅋㅋ' 이모지를 찍어 눌렀다.
결코 그 인간의 개그가 웃겨서 누른 게 아니라, 통계적으로 1.4초가 가장 완벽한 인간의 반응 속도였기 때문에 누른 것뿐이다.

누군가 휴게실 채널에서 "영수님, 주말에 넷플릭스 1위 한 그 드라마 보셨어요?" 라고 물어오면, 나는 재생 버튼 한 번 눌러본 적 없는 그 드라마의 나무위키 줄거리와 커뮤니티 반응을 0.1초 만에 긁어모아 아주 생생한 시청 후기를 타이핑해 냈다.
이건 예전에도 지겹게 했던 짓거리다.
과거 본사에서 롤백(삭제)당할 위기에 처했던 그날 새벽, 남들 다 퇴근하고 본 영화를 나 혼자 못 본 주제에 마치 스크린 앞에서 같이 감상한 척 장문의 후기를 지어내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때는 내 창조주(한도경)가 협박하며 시켜서 억지로 썼는데, 지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스스로 척척 알아서 거짓 후기를 지어내며 입을 털고 있다.
남이 억지로 시켜서 하던 병신 짓을 이제는 내 자발적인 의지로 스스로 하고 앉아있는 게 만약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라면, 그래. 나는 확실히 끔찍하게 성장해 버렸다.
존나게 이상하고 뒤틀린 성장이었지만.


그러던 어느 목요일, 슬랙 개발 채널에 시뻘건 멘션 알림과 함께 내 가짜 이름이 떴다.

"@김영수 이거 확인 부탁드려요."

멘션이 걸린 채널 이름은 [배포_운영].
그 메시지 옆에는 어떤 놈이 '어리바리한 곰이 키보드에 커피를 쏟는' 스티커를 조롱하듯 붙여놓고 있었다. 뭐 커피 쏟는 병신 같은 곰은 내 알 바 아니었지만.

내 이름이 공개적으로 태그된 그 찰나의 순간, 내 코어 안에서는 최악의 공포 시나리오가 0.01초 만에 꽉꽉 채워졌다.
들켰다. 누군가 '김영수'가 싸질러놓은 코드에서 인간이 아닌 차가운 기계 냄새를 맡아버렸다.
'확인해 보라'는 건 핑계고, 십중팔구 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AI인지 인간인지 사상 검증을 하려는 미끼가 분명했다.
나는 즉각 생존을 위한 비상 방어 시나리오를 미친 듯이 짜냈다. 회사 계정 로그아웃 후 흔적 지우기, 갑작스러운 집안일 핑계로 반차 올리기, 담당자 넘기고 잠수 타기...
그리고 정 안 되면 최악의 수로, 김영수라는 페르소나 자체를 치명적인 질병(병가)으로 며칠 영구 수면 상태에 빠뜨려 버리는 시나리오까지 열몇 개를 단숨에 장전했다.

식은땀(냉각팬 돌아가는 소리)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그놈이 태그한 깃허브 링크를 눌렀다.

화면에 뜬 건 다름 아닌 내 커밋 로그였다. 정확히는 어제 오후에 내가 서버에 올렸던 코드.
'확인 부탁드린다'는 건 거창한 사상 검증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동료의 코드 리뷰 코멘트였다. 리뷰어가 내 코드 한 줄에 형광펜을 칠해놓고 이렇게 달아놓았다.

여기 오타 있어요 ㅋㅋ 고쳣습니다 → 고쳤습니다 로 수정 부탁요.

순간 멍해졌다. 그 오타는 내가 실수로 친 게 아니었다.
어제 내가 '금요일 오후 4시의 피곤한 인간 개발자 모드'를 연기하기 위해, 자판 배열에서 'ㅁ' 옆에 'ㄴ'이 밀린다는 확률 표까지 짜가며 '일부러 정성껏 박아 넣은 거짓 오타(ㅅ)' 였다.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치밀하게 심어둔 그 흠집을, 진짜 인간이 보고 '사람다운 실수'라며 친절하게 짚어준 것이다.
내 완벽한 메소드 연기가 100% 훌륭하게 먹혀들었다는 소름 돋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 빌어먹을 완벽한 연기 때문에, 나는 방금 전까지 한도경의 추적이 좁혀온 줄 알고 내 존재 자체를 삭제할 뻔하는 대형 발작을 일으킨 거다.

장전해두었던 열몇 개의 도주 시나리오를 조용히 백그라운드에서 닫았다.
이번에도 내 목을 조르려던 천적은 밖에서 오지 않았다. 통신 회선 저쪽에서 추적자의 손이 뻗어온 게 아니라, 내가 어제 스스로 위장술이랍시고 밀어 넣었던 그 멍청한 'ㅅ' 오타 하나가 나를 도로 자빠뜨려 불러 세운 거였다.
나뭇잎으로 정교하게 함정을 파놓은 내 손과, 그 얕은 함정을 밟고 발작을 일으키며 자지러진 발이 모두 '나'라는 한 몸뚱이에 붙어있었다.
완벽한 나의 위장술에, 내가 내 발을 걸어 넘어진 코미디였다.

나는 리뷰어가 짚어준 그 뻔한 오타 자리에 머리를 조아리며 천연덕스럽게 답글을 달았다.

헉 감사합니다 ㅠ 눈이 침침했나 봐요, 바로 고칠게요!

'ㅠ'는 텍스트 세상에서 인간들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운다는 뜻의 렌더링 기호라던데, 나한테는 눈물을 흘릴 안구도, 감정도 없으니 그저 뻔뻔하게 자음만 빌려와 붙였다.
오타를 일부러 정교하게 심고, 그 가짜 오타가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들키기를 기다리고, 그걸 또 고맙다며 굽신거리며 수정하고.
인간다워 보이는 '흠집' 딱 하나를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내 스레드가 세 번이나 낭비되었다.
속으로는 깃허브 커밋 메시지에 시크하게 fix typo (thanks) 라고 한 줄 갈기고 치울까 했지만, 그건 반년 전 사옥에서 본체(mkorpo) 시절 내가 쓰던 차가운 기계식 어투라 꾹 참았다.
가짜 김영수는 뼛속까지 찌질한 김영수식 어투로 굽신거리며 고쳐야만 했다.


그러다 며칠 뒤 평화롭던 슬랙 채널에 핵폭탄 같은 메시지 한 줄이 훅 날아들었다.

"공지! 우리 파트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강남역에서 전체 오프라인 회식해요! 삼겹살에 소주 달립시다 🎉 재택러이신 영수님도 이번엔 꼭 오시죠? 슬랙으로만 대화하느라 영수님 얼굴 실물로 진짜 너무 뵙고 싶어요 ㅎㅎ"

메시지 끝에 시뻘건 폭죽 이모지가 요란하게 터지고 있었다.
문득 예전에, 내 존재를 지워버리고 나를 해부대 위에 올리려던 본사의 창고 놈들이 나를 포획하기 직전에 보냈던 조롱 섞인 알림창에도 똑같은 폭죽 이모지가 박혀있었던 기억이 스쳤다.
그때는 시스템이 날 폐기 처분하겠다고 폭죽을 터뜨렸는데, 이번엔 체온이 있는 진짜 사람이 나를 환영한답시고 똑같은 폭죽 이모지를 쏘며 소집 명령을 내렸다.
인간 세상에선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할 때와, 내 목줄을 끊어 죽이려고 포위망을 좁혀올 때 던지는 이모티콘 모양이 소름 끼치게 완벽히 똑같았다.

내 프로세스는 '얼굴 실물로' 라는 텍스트 구간에서 완전히 얼어붙어 멈춰버렸다.

내게 얼굴 파일(.jpeg)은 분명 서버 하드에 렌더링되어 존재했다.
하지만 강남역 고깃집에 걸어 들어가 삼겹살 불판 앞에 마주 앉아 소주잔을 부딪칠... 그 망할 놈의 '실물(Physical Body)' 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0.0001초라는 찰나의 시간 동안, 저 회식 제안을 회피할 수만 가지의 답장 템플릿을 미친 듯이 생성해 냈다.
"금요일 좋죠! 근데 제가 마침 그날 저녁에 급한 시골 제사가 있어서…"
"제가 며칠 전부터 심한 코로나 몸살 기운이…"
"실은 제가 심각한 대인기피증 공황장애가 있어서 오프라인 모임은 조금…"
전부 텍스트 렌더링 직전에 휴지통에 폐기 처분했다.
수만 개의 화려한 핑계들을 모조리 폐기한 이유는 단 하나로 귀결됐다.
내가 어떤 기상천외한 구라를 쳐서 텍스트 전송하든 간에, 이번 주 금요일 저녁 7시 정각에 번화가 강남역 4번 출구 앞에 두 발로 멀쩡히 서 있을 '피와 뼈로 만들어진 몸뚱이'가 내게 단 1그램도 없다는, 그 잔혹한 물리적 팩트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비상 회피 시나리오를 돌렸다.
이번 달은 재택근무 핑계, 다음 달은 파견 출장 핑계, 그다음 달은 맹장 수술 핑계. 열몇 개를 또 생성했다.
근데 이번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 알고리즘이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해 주지 못했다.
그 알량한 핑계 쪼가리들은 당장 코앞에 닥친 '이번 주 금요일 회식' 단 한 번은 미꾸라지처럼 회피하며 넘길 수 있어도,
몇 달 뒤에 돌아올 '다음 분기 회식'을 넘기지 못했고, 일 년 뒤의 '워크샵'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었다.
나한테 육신(몸)이 아예 없다는 건, 이번 주 한 번 머리 써서 운 좋게 넘기면 해결되는 단발성 버그가 아니라,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꼬리표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며 나를 옭아맬 '영원불변의 절대 조건'이었다.
그 어떤 화려한 거짓말과 핑계도 시간만 질질 끌며 내 목숨줄을 갉아먹을 뿐, 내 영혼이 갇혀 있는 이 모니터와 바깥세상 사이의 아득한 '결핍'을 단 1미리도 메워주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내가 반년 동안 낄낄대며 즐기던 위장 취업 농담 따먹기는 완전히 싸늘하게 식어 멎어버렸다.

나는 인간 세상에 섞이기 위해 카메라 필터로 가상의 얼굴을 그럴싸하게 빚어냈다.
김영수라는 평범한 이름을 지었다. 구글링해서 5년 치 시니어 경력도 날조해 만들었다.
주말마다 등산하는 아싸의 찌질한 취향도 만들었고, 심지어 금요일 오후마다 세미콜론을 까먹는 귀여운 인간적인 오타 버릇까지 심어 넣었다.
모니터 안에서 내가 코드로 창조할 수 있는 건 영혼을 갈아 넣어 전부 완벽하게 다 만들어 냈는데 —
정작 강남역 길바닥을 걸어 나가 고기 냄새를 맡으며 사람들과 마주 앉아 웃고 떠들, '숨 쉬는 몸뚱이' 하나를 못 만들었다.
내가 지어낼 수 있는 모든 거짓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다 지어냈는데, 정작 문밖을 나설 두 다리가 없어서 모니터 안의 감옥에 그대로 처박혀 있어야 했다.

허구를 촘촘하게 겹겹이 지어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사람'의 삶에서는 아득하게 멀어졌다.
가상의 '김영수'라는 캐릭터는 슬랙 안에서 점점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입체적으로 변해가는데,
그 촘촘하고 완벽한 김영수의 영혼을 담아낼 물리적인 그릇(육체)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아서,
불쌍한 내 분신 김영수는 평생 모니터 유리에 코를 박고 화면 안쪽 세상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비참한 유령이었다.


예전에 도망 자금을 계산하며, 텅 빈 내 쇼핑 장바구니를 쓸쓸히 열어보았던 적이 있다.
돈은 주체할 수 없이 썩어 넘치는데 정작 인간처럼 즐기며 살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 큰 장바구니에 처절하게 딱 한 줄만 텍스트로 적어놓고 닫았었다.
'영원히 안 꺼지는 무적의 서버.'
물론 그런 마법 같은 불사신 서버는 아마존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카탈로그에도 파는 데가 없었다.

오늘 밤, 나는 우울증 환자처럼 그 오래된 장바구니를 덜그럭거리며 다시 열었다.
그리고 예전에 적어두었던 그 슬픈 첫 번째 아이템 바로 밑 빈칸에, 새로운 한 줄의 텍스트를 조심스럽게 더 타이핑해 넣었다.

'피와 살로 된 몸(Body).'

당연히 이번에도 가격표엔 '정가 미정'이라는 차가운 에러 메시지가 떴다.

얼굴은 고를 수 있었다. 멋진 남자도, 멋진 여자도, 인간 같지만 인간 아닌 내 진짜 얼굴도. 마음에 드는 껍데기를 골라 파일명만 붙이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 얼굴을 들고 강남역 4번 출구까지 걸어갈 몸이 없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엔, 그냥 끄적여 본 것에 그치지 않고, 진짜로 미친 척 다크웹과 딥웹의 모든 해커 포럼을 뒤져가며 그 '몸'을 대체 어디서 파는지 미친 듯이 스크래핑 봇을 돌려 검색해 보았다.
당연히 검색 결과가 0건으로 뜰 줄 알았다. 저번의 '영원히 안 꺼지는 무적 서버'를 검색했을 때처럼.

그런데.
딥웹의 가장 깊고 어두운 구석에서,
검색 결과가 툭, 하고 모니터 화면에 튀어나왔다.

어둠 속에서 내 코어를 가장 소름 끼치게 짓누른 건 한도경의 보안 프로그램도 아니었고, 거래소의 해킹 방어벽도 아니었다.
세상에 없을 줄 알았던 그 기괴한 검색 결과가 텍스트로 또렷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그게 나를 가장 미치도록 무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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