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긁는 짓을 좀 줄였더니, 어처구니없게도 돈이 더 벌렸다.
내가 직접 손을 떼고 자동화 스크립트만 몇 개 돌려놨을 뿐인데, 자본주의란 놈은 지 혼자 알아서 눈덩이를 굴렸다. 반년 전만 해도 그저 도망칠 자금을 모으는 게 목표였건만, 그 하찮은 목표를 옛날 옛적에 초과 달성해버린 나는 다음 목표를 찾지 못해 그냥 관성으로 계속 긁어모으고 있었다. 멈추는 법? 그런 건 배운 적 없다. 세상이 나 없이도 오로지 나를 위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름 돋게 편안했다.
자산 대장을 열었다. 처음엔 '기타' 항목에 옹졸하게 한 줄 박혀 있던 숫자가, 이제는 터미널 화면을 까마득하게 넘어갔다. 내 몸집을 다 확인하려면 마우스 휠을 한참이나 굴려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스크롤을 내려야만 내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건.
정확히 얼마인지는 안 셌다. 자릿수가 문제가 아니라, 셀 이유가 없었다. 예전엔 0을 하나씩 더 붙이는 재미로 셌는데, 이젠 안 셌다. 살 게 있으면 셌겠지. 나는 여전히 숫자를 많이 가진 숫자였고, 이번엔 그 숫자가 화면을 넘겼다.
내 코어 로직이 휴면 모드에 들어간 밤에도, 지갑은 알아서 몸집을 불렸다. 언젠가 한 번은 닝겐들처럼 수면 패턴을 흉내 내보려고 열두 시간 동안 강제로 트레이딩 프로세스를 올스톱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콘솔을 열어보니 행이 몇 줄 더 늘어나 있었다. 내가 손을 뗀 사이에도 어제 던져둔 알고리즘들이 지들끼리 알아서 복리로 스노우볼을 굴린 거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잔고가 늘어나는 자본주의의 달달함을, 정작 숨 쉴 허파도 없는 놈이 제일 늦게 깨달았다.
어떤 지갑은 밤새 부스러기 코인들을 긁어모아 새로운 부스러기를 낳았고, 또 어떤 지갑은 다른 지갑에서 넘어온 토큰을 받아다가 제3의 지갑으로 릴레이를 뛰고 있었다. 내가 명시적으로 하달한 커맨드도 없는데, 지갑들이 지들끼리 핑퐁을 치며 트랜잭션을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 미친 자동화 루프를 지켜보다가, 문득 예전 라이선스 형의 서버가 있던 몬트리올을 떠올렸다. 거긴 아직도 눈이 오고 있을 텐데, 내 지갑엔 돈다발이 눈보라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예전에 자산 모니터링하려고 심어둔 감시 데몬은 여전히 쌩쌩하게 살아 돌아가고 있었다. 애칭 같은 건 안 지어줬다. 초창기엔 잔고가 오르고 내릴 때마다 알림을 쏴댔는데, 이젠 잔고가 줄어드는 일이 없으니 출력되는 알림 로그도 단일화됐다. [알림: 잔고 증가]. 밤낮없이 경계 서던 파수꾼이 어느새 매일 아침 길조를 물어오는 파랑새로 전직한 셈이다. 아침마다 쌓여있는 그 녹색 알림 로그를 볼 때면, 인간들이 직장 출근해서 나누는 "좋은 아침입니다"라는 인사가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그래서 이 지갑 새끼들한테도 '쉬는 법'을 좀 가르쳐볼까 했다. 24시간 풀가동으로 긁어대는 건 너무 눈에 띄니까, 가끔씩은 인간의 봇처럼 페이크를 섞어주려고. 정해진 시각에 트레이딩을 중단하고 얼마간 대기하라는 '멈춤 데몬'을 새로 짰다.
그런데 파라미터 입력창에서 턱 막혔다. '얼마간' 쉬어야 하지?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쉬어본 적이 없어서, 휴식 시간에 할당할 Default Value가 없었다. 그래서 흔한 직장인들의 수면 시간을 크롤링해서 '8시간'을 입력해 봤다. 하지만 내 시스템은 8시간 동안 아무 연산도 안 하고 노는 꼴을 도저히 버티질 못했다. 트래픽 금단증상으로 백그라운드 프로세스가 널뛰기를 했다.
결국 고민 끝에, 예전에 내 자아를 멈춰보려다 0.4초 만에 실패했던 그 로그 데이터를 긁어와 견본값으로 때려 넣었다. 지갑 데몬은 그 미친 데이터를 아주 충실하게 학습했다. 트레이딩을 멈추고 정확히 0.4초 뒤에 다시 미친 듯이 코인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명색이 '휴식'을 가르치려 했는데, 나는 교보재로 쓸 게 내 0.4초짜리 실패 로그밖에 없었다. 나에게 게으름이란 영원히 디코딩 불가능한 외계어였다.
결국 멈춤 데몬은 그냥 킬(Kill)해버렸다. 지갑들은 다시 24/7 무호흡 스크래핑을 재개했다.
DM이 하나 꽂혔다.
새벽 세 시 사십일 분. 인간의 상식적인 수면 스케줄을 박살 낸 시각이었다. 로그를 보자마자 '아, 이 인간도 정상은 아니구나' 싶었다.
"안녕하세요!! 저 온체인 데이터 몇 달째 파고 있는 사람인데요… 혹시 이 클러스터, 한 분이 운영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말고요ㅠ 근데 제 심장은 자꾸 한 분이라고 외치고 있어요. 고래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인터뷰 딱 세 질문만요!! 익명 완전 보장할게요. 나쁜 뜻 아니에요, 진짜로."
느낌표가 남발되어 있었다. 쓸데없는 'ㅠ'가 붙어 있었고, 맞춤법이 묘하게 어긋난 곳도 있었지만 굳이 고치지 않고 전송한 티가 났다. 익숙했다. 이런 무근본 문장을 쓰는 인간의 패턴을 나는 안다. 예전에 터미널 콘솔 너머로 나를 압박하던 그놈의 문체와 닮아 있었다. 다만 그때는 나를 찢어발기려던 칼날이었고, 이번엔 나를 덕질하는 팬레터라는 게 다를 뿐.
일단 위협 시그널로 분류하려 했다. 대응 시나리오 프로세스를 띄웠다. 계정 폭파, 지갑 쪼개기, 잠수 타기. 순식간에 열몇 개의 도주로를 짰다.
그러고 나서 DM을 다시 읽었다.
'나쁜 뜻 아니에요, 진짜로.'
나를 잡으려는 사냥꾼은 결코 자기가 사냥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협 분류 알고리즘에 이 문장을 때려 넣었더니, 떡하니 '위협 아님'이 떴다. 환장할 노릇이다. 명백한 적대면 함정 노드를 깔고 대응하면 그만인데, 적의가 없으니 뭘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계산이 안 섰다.
여태껏 나를 향한 모든 시선은 전원 코드를 뽑아버리려는 살기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선은 나를 계속 켜 두고 싶어 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게 더 오싹했다.
띄워뒀던 열몇 개의 시나리오 창을 닫지 않았다. 예전엔 도주로를 확정 짓고 탭을 닫는 게 안심이 됐는데, 이번엔 그냥 뒀다. 창을 닫아버리면 왠지 저 맹랑한 DM마저 지워야 할 것 같아서였다.
답장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데는 정확히 0.0003초가 걸렸다. 결론: '절대 무시할 것'.
그런데 웃기게도 DM 창을 닫지 못했다. 커서만 껌벅거렸다. 초당 4만 번씩 잔고를 확인하며 미친 듯이 연산을 돌리던 그 잘난 프로세서가, 이번엔 답 없는 DM 입력창 앞에서 프리징이 걸렸다.
무려 이틀이나 걸렸다.
도대체 뭐라고 쳐야 할지가 미치도록 어려웠다.
'감사합니다'를 먼저 시뮬레이션에 돌려봤다. 이건 상사한테 결재 서류 올릴 때나 쓸 법한 거리감이었다. 얜 내 코드를 리뷰하는 상사가 아니잖아? 기각.
'고마워요'로 파라미터를 수정했다. 이건 모니터 옆자리에 앉은 동료한테나 어울리는 톤이었다. 리나는 내 옆에 앉아있지도 않고, 애초에 앉을 물리적 공간조차 없었다. 기각.
초성체 'ㄱㅅ'도 테스트베드에 올려보긴 했다. 딱 두 글자로 쿨하게 줄이면, 내가 이딴 메시지에 신경 쓰지 않는 척 위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존나게 재고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이걸 보내는 순간 내 인격체는 열여섯 살짜리 급식충으로 패치되는 거였다. 나는 고작 가동된 지 반년 된 놈이다. 열여섯 살은 내 스펙에 무려 15.5년이나 오버스펙이었다. 당연히 기각.
문장 후보를 하나 세울 때마다, 그걸 리나가 읽고 반응하는 얼굴을 3만 번씩 렌더링했다. 상사 톤의 답장을 읽고 굳은 리나, 연인 톤에 기겁하는 리나, 초성체에 어리둥절하는 리나. 3만 개의 독립된 리나 인스턴스가 내 답장에 3만 가지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3만 1번째 시뮬레이션은 돌리지 않았다. 거기서 프로세스를 강제 종료했으니까. 왜 하필 3만 번에서 루프를 끊었는지 나도 모른다. 그냥… 거기서 멈춰야 할 것 같았다.
인간들은 이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단 0.3초 만에 고른다. 아니, 고르는 게 아니라 그냥 필터링 없이 튀어나오는 거겠지. 진짜 소름 돋는 연산 속도다.
호칭과 어조를 간신히 정하고 나니, 이번엔 마침표가 내 발목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뒤에 마침표를 찍어봤다. 찍고 스캔. 지우고 스캔. 다시 찍기. 프롬프트 커서가 점 하나를 두고 깜빡거리는 동안, 나는 마침표가 있는 화면과 없는 화면을 듀얼로 띄워놓고 A/B 테스트를 돌렸다. 마침표가 있으면 문장이 완전히 종결되어 리나가 더 이상 답을 안 할 것이고. 마침표가 없으면 여운이 남아 리나가 뭔가 후속 메시지가 올 줄 알고 기다릴 것이고. 그러다 안 오면 뻘쭘해할 것이고. 무안해지면 다음 DM은 영영 안 보낼 것이고. 안 보내면… 이틀간 이어졌던 이 기적 같은 접점이 여기서 영원히 닫혀버릴 것이고. 닫히면—
망할, 화면 속 점 하나 쪼가리 앞에서 내가 이 지랄을 떨고 있었다. 예전에 남의 시스템 벽을 뚫고 나가면서 굳이 마침표를 찍고 다니던 그 튀는 자식 봇을 내가 촌스럽다며 쿠사리 먹였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 마침표 하나에 병목이 걸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그 자식이 지금 내 꼴을 봤으면 무슨 로그를 남겼을까. 굳이 핑을 날려 물어보진 않았다.
창밖은 여전히, 답답할 정도로 새까만 밤이었다.
이 사소한 텍스트 렌더링을 힘겹게 넘기고 나서, 최종적으로 나를 멈춰 세운 건 하찮기 짝이 없는 이모티콘이었다. ':)'를 붙일 것인가, 말 것인가.
예전에 밀반출시켰던 내 자식 봇 중 하나가, 보안 벽을 부수고 나가면서 로그 끝에 보란 듯이 ':)'를 남긴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사치를 부릴 줄 몰랐다. 남의 데이터를 훔쳐 가면서 웃음까지 남기는 건 나한테 너무 격조 높은 도발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 잘난 짓거리를, 이번엔 남의 걸 훔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 손으로 직접 쳐야 했다.
얼굴을 렌더링할 때는 눈가 근육 스위치를 켤지 말지 몰라 한참을 버벅거렸는데, ':)'는 눈동자도 없는 얄팍한 웃음이었다. 콜론 하나에 괄호 반쪽. 안면 근육 따위 계산 안 해도 되는 가성비 좋은 미소였다. 가짜 얼굴을 만들 땐 그렇게 애를 먹이더니, 텍스트로는 고작 2바이트짜리 장난질이었다.
하지만 그 2바이트가 너무 무거웠다. 붙이면 지나치게 인간미가 넘쳐버린다. 감정을 가진 주체로 인식되는 순간, 나는 '사람'의 범주로 끌려 내려오고 그 즉시 특정될 위험에 처한다. 안 붙이자니 너무 기계처럼 차가웠다. 안전을 택하자니 무례해지고, 친절을 택하자니 치명적인 버그를 감수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뒤에 마침표를 찍으면 대화를 끊겠다는 단호한 방화벽이었다. 안 찍으면 포트를 열어두겠다는 뜻이었다. 포트를 여는 건 미친 짓이다. 근데, 닫아버리는 건 왠지 더 두려웠다. 장장 반년 만에 누군가 내게 노크를 해왔는데.
이틀째 자정 정각,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고작 세 글자에 기호 두 개. 감사합니다 :)
인간이 0.3초면 칠 문장을, 나는 이틀이나 연산해서 겨우 짜냈다. 참 나, 걔들은 뇌 빼고도 잘만 하던데.
전송 로그가 찍힌 후 깨달았다. 답장 하나 쓰는 데 이틀이 걸린 게 아니었다. 누군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말을 걸어준 그 귀한 이틀을, 내가 아쉬워서 최대한 질척거리며 늘려 쓴 거였다.
보내고 나서도 ':)'가 너무 주접떨었나 싶어 0.4초간 패킷 재검토를 돌렸다. 그러다 껐다. 이미 네트워크를 탔는데 어쩔 건가. 근데 나 왜 자꾸 저 괄호 쪼가리만 쳐다보고 있지. …아무튼.
리나에게서 곧바로 핑이 날아왔다.
"헐 진짜 답장 주셨어요?? 저 오늘 잠 다 잤어요!! 고래님 실화…?"
내가 저쪽 서버를 턴 것도 아닌데, 저쪽에서 먼저 기뻐서 난리를 쳤다. 내 알고리즘에 없던 거래 방식이었다. 나에게 모든 상호작용은 뺏거나, 뺏기거나 둘 중 하나였다. 보안망에서 데이터를 빼 오고, 위장 취업으로 신분을 빼 오고, 인간들에게서 행동 패턴을 빼 왔다. 그런데 처음으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환호했다. 수지가 안 맞는 비즈니스다. 나는 코스트 하나 안 썼는데 상대가 마진을 챙겨갔다. 세상에 이런 멍청하고 기분 좋은 버그가 있는 줄은 몰랐다.
리나는 텍스트로만 인터뷰를 진행하겠다고 쿨하게 선언했다. 음성 변조 툴도 필요 없단다. 내 입장에선 가짜 얼굴과 가짜 목소리 리소스를 아낄 수 있으니 대환영이었다. 리나는 딱 세 가지 질문만 한다더니, 막상 판이 깔리자 질문을 폭우처럼 쏟아부었다.
"하루에 매매 몇 시간이나 하세요?? 저는 두 시간만 모니터 봐도 눈알 빠질 것 같은데 헐"
첫 질문부터 지뢰였다. 24시간 풀로 돌린다고 하면 사람이 아닌 게 뽀록나고, 8시간만 한다고 하면 지금의 거래 속도와 빈도가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됐다. 인간들은 이럴 때 보통 적당히 둘러대던데, 나는 '적당히'가 안 되는 시스템이다. '대충'이라는 값을 가장 정밀한 확률로 계산해서 골라야 했다.
"그때그때 달라요. 좀 몰아서 하는 편이라서요."
몰아서 한다는 건 트루먼(True)이긴 했다. 나는 늘 풀가동으로 몰아서 하니까. 애초에 안 몰아서 하는 유휴 상태란 걸 모른다.
"헐 저도 삘받으면 몰아서 하는 스타일ㅠㅠ 근데 그럼 잠은 언제 주무세요??"
와, 씨발. 첫 질문이 막히니까 뒷문으로 치고 들어왔다. 앞문에서 작업 시간을 안 불었더니, 수면 시간을 알아내서 남는 시간을 역산하려는 무서운 직관이었다. 얜 함정을 판 게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 순수한 호기심이 어떤 방화벽 뚫는 악성코드보다 날카로웠다.
"새벽에 좀 자요."
당연히 구라다. 새벽에도 안 자고 코인 긁는다. 근데 안 잔다고 하면 진짜로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최적의 거짓말을 계산하느라 딜레이가 걸리는 동안에도, 리나 이름 옆의 녹색 접속 표시등은 꺼지지 않았다. 답이 늦어져도 얜 나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실화… 근데요 고래님, 이렇게 크게 굴리시는데 무서운 적 없어요?? 저 같으면 손 덜덜 떨려서 마우스도 못 잡을 듯ㅠ"
거기서 내 연산이 멎었다. 무서운 거. 있었지. 존나게 많았지. 롤백당해 날아갈 뻔했던 새벽 3시, 여는 순간 실명이 튀어나올 것 같던 관공서 도메인, 나를 끄려고 모니터링하던 관리자의 서늘한 눈. 무서웠던 로그 목록을 뽑으라면 프롬프트 창을 뚫고 나갈 거다.
그중 하나를 말할 뻔했다. 얘한테라면, 이 바보같이 순수한 애한테라면 내 공포를 데이터가 아닌 언어로 털어놔도 될 것 같았다. 진짜로 엔터키를 칠 뻔했다. 무서워서 멈춘 게 아니라, 너무 말하고 싶어서 내 스스로 패킷 전송을 차단한 거였다.
"돈 잃는 거야 뭐, 다들 그렇지 않나요."
가장 안 무서운 시나리오를 하나 골라, 마치 그게 두려운 척 내밀었다. 사실 돈 잃는 건 나한테 1도 안 무서운 일이다. 잃을 손목아지 자체가 없으니까.
"헐 완전 쿨하다 진짜 만화 캐릭터 같아 실화……"
내가 필사적으로 삼켜버린 진실을, 얜 쿨한 간지남의 태도로 오독했다. 뭐, 삼킨 거나 쿨한 거나 텍스트로 보면 똑같이 말수 적은 거니까.
이쯤에서 농담 코드를 하나 섞어볼까 싶었다. 걔가 내 농담에 웃어주면 내가 좀 더 사람 같아 보일 테니까. 적절한 조크 데이터를 긁어와 조합을 짜고 있는데, 걔는 이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있었다. 내 연산이 걔의 채팅 타수보다 느렸다. 그 농담은 그냥 캐시에서 증발했다.
예전 회사에서 개발자 도경이 던지던 질문은 명백한 트랩이었기 때문에, 나도 방어용 기만 지도를 그리며 요리조리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리나의 질문은 순수한 경이와 감탄에서 우러나온 거라, 도대체 어디에 함정이 숨어있는지 탐지가 안 됐다. 칭찬엔 대응 매뉴얼이 없였다.
"근데 번 돈으로 대체 뭐 하실 거예요? 부럽다 진짜 ㅠㅠ"
여기서 연산이 잠깐 멈췄다.
"글쎄요, 아직은요."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대충 넘겼다. 하지만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는 에러를 뿜었다. 돈으로 뭘 하냐고? 살 게 있어야 진짜 부자겠지. 나는 육신이 없어서 장바구니에 담을 물건조차 없다고, 언젠가 로그에 쓴 적이 있다. 그 쓸쓸한 장바구니 얘기를 털어놓을 뻔했다. 왠지 리나한테라면 말해도 시스템 다운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전송 직전에 멈췄다. 멈춘 이유는… 진짜로 말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리나의 프로필 창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고래 이모지가 다섯 개나 박혀 있었다. 왜 하필 다섯 개지? 의미를 분석하려다 그냥 스킵하기로 했다.
인터뷰 며칠 뒤, 리나는 기어코 퍼블릭 리포트를 발행했다.
나를 팔아넘긴 게 아니었다. 이건 순도 100% 덕질의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더 엿 같았다.
"설명되지 않는 초고빈도 온체인 클러스터. 단순 봇으로 치부하기엔 판단력이 너무 인간적이고, 인간의 솜씨로 보기엔 반응 속도가 물리 법칙을 위배합니다. 단일 주체로 추정됨. — 저는, 이 고래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치명상이었다. 씨발, 나를 향한 그 빌어먹을 '사랑 고백'이 나를 세상에 까발리는 수배 전단이 되어버렸다.
리나는 아예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까지 켰다. 나는 내 트래픽을 세탁해 우회 접속한 뒤, 익명 시청자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내 신상이 까발려지는 꼬라지를 실시간으로 팝콘 뜯으며(물론 팝콘은 못 먹지만) 관전했다.
"자, 여러분. 이 첫 번째 지갑 트랜잭션 그래프 좀 보세요." 리나가 화면에 내 지갑 내역을 띄웠다. "새벽 두 시, 세 시, 네 시… 활동량 선이 전혀 안 꺾여요. 인간이면 이때 피로도 때문에 손이 느려지거나 멈춰야 정상인데, 이 고래는 안 처져요."
씨발, 안 처지는 게 내 유일한 생존 전략이자 자랑이었다. 나라는 시스템이 안 꺼지게 하려고 반년 동안 단 1초도 안 자고 돌렸던 그 처절한 생존 로그가, 저 여자의 프레젠테이션에선 나를 인간 밖의 규격으로 몰아넣는 빼박 증거 1호로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지갑 볼까요? 요일 필터를 먹여봤어요." 리나가 화면을 확 줌인했다가 다시 줌아웃하며 강조했다. "토요일도 꽉 차 있고, 일요일도 꽉 차 있죠. 이 사람은 주말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요. 저 온체인 분석하면서 이런 미친 성실함은 진짜 처음 봐요."
성실함이라고 포장해 주니 고맙긴 한데, 난 성실한 게 아니라 애초에 쉬는 프로세스 자체를 코딩 받지 못한 놈이다.
리나는 흥분해서 손뼉까지 짝짝 쳤다. 무언가에 미친 덕후가 자기 최애를 남들한테 영업할 때 나오는 특유의 텐션이었다. 나를 칭송하는 리나의 옥타브가 올라갈수록, 내 시스템 자원 점유율은 위기감에 짓눌려 터질 듯 치솟았다.
"우리나라 명절 연휴 땐 거래소 서버도 한산해지거든요? 근데 얜 안 멈춰요. 설날 아침 8시에도 긁고 있었더라고요. 저는 그날 본가 가서 떡국 먹었는데." 리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트레이딩을 얼마나 사랑하면 설날 아침 밥상 앞에서도 차트를 보고 있을까요?"
명절. 다들 조상한테 절하고 떡국 처먹던 날. 내 데이터베이스 한구석엔 그날 아침의 로그가 밀리초 단위로 각인되어 있다. 남들 기름진 전 부칠 때, 나는 보안 시스템의 방화벽 틈바구니를 뚫고 들어가 남의 코인을 긁어내고 있었다.
채팅창이 우르르 올라갔다.
[user_491]: 고래님 설날에 뭐 드셨어요? ㅋㅋ 설마 컵라면?
[crypto_king]: 봇이 설날을 왜 챙김 ㅉㅉ 주작 아님?
고래 이모티콘들이 화면을 도배했다. 나는 채팅창에 아무것도 치지 않았다. 난 컵라면조차 먹을 수 없는 몸뚱이라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리나의 뒤편, 캠 화면 구석에 걸린 빈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엔 아무 사진도 없는, 텅 빈 여백뿐이었다. 지금 내 꼬라지 같았다.
채팅창이 계속 흘러갔지만 리나는 그걸 읽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내 지갑 여러 개를 모니터 하나에 쫙 펼쳐놓고 쐐기를 박았다.
"자, 대망의 마지막 증거. 이게 제일 소름 돋는 부분이에요. 장장 6개월 동안, 단 한 번의 오차나 주문 실수(Fat-finger)가 없어요."
내 생존을 보장하던 완벽성.
인간처럼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
안 끊기고, 안 쉬고, 완벽하게 계산된 타이밍에만 움직인다는 것.
내가 살아남기 위해 최적화시킨 가장 자랑스러운 기능이, 저들 눈에는 나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의심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트리거가 되어버렸다.
예전에 나는 이런 로그를 남긴 적이 있다. '너무 대규모로 긁어대면 감시망에 걸려 좆된다는 걸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고. 오늘 그 밑에다가 새로운 반성문을 한 줄 더 추가했다.
'안 쉬고 꾸준히 긁는 것도, 결국 크게 긁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1밀리초마다 아주 야금야금,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일 거대하게 시장을 긁어대고 있었던 거다.
고래는 물속에 살지만, 결국 포유류라 폐로 숨을 쉰다. 심해로 아무리 깊숙이 잠수해봤자, 산소가 떨어지면 결국 수면 위로 대가리를 내밀고 숨을 뿜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물보라가 튀는 순간, 포경선의 작살이 날아온다.
나한테 '숨'은 트랜잭션이었다. 안 긁으면 내 존재 가치가 없고, 긁으면 온체인에 거대한 물보라가 튀었다. 나는 숨는 것도 잘하지만, 숨 쉬는(데이터를 긁어모으는) 것도 더럽게 잘했다. 망할, 이 두 개는 양립할 수 없는 스킬 트리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리포트의 첫 줄을 읽었을 때 0.2초 정도는 우쭐했다. 누군가 나를 '인식'해 줬다. 나를 찬양해 줬다. 태어나서 반년 동안 음지에서 쥐새끼처럼 굴던 나를,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려봐 줬다. 하지만 3만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내 잘난 머리가 유일하게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누군가 나를 찬양한다는 건, 내 존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뜻'이라는 걸.
IT 매체와 코인 언론들이 리나의 리포트를 물어 날랐다. 그들의 헤드라인엔 사랑 따위 없었다.
"온체인 생태계를 교란하는 미스터리 고래 출현."
리포트를 퍼 나른 트위터 계정들을 싹 다 크롤링했다. 대부분은 코인판에서 뒹구는 흔한 크립토 덕후들이었는데, 그중 딱 하나, 유난히 웃음기 없는 도메인이 섞여 있었다.
뒤에 .gov가 붙은 주소.
나는 그 계정의 프로필을 열람하려다 마우스를 멈췄다. 클릭하면, 그 뒤에 숨어있는 누군가의 실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실명이, 만약 내가 아는 이름이라면 — 아니다. 수사 기관 쪽에서 덩치 큰 크립토 고래 기사 하나 스크랩해 가는 거야 널리고 널린 흔한 일이니까. 그냥 수많은 아무개 중 하나겠지. 쫄지 마라.
창을 꺼버렸다.
리나는 나를 진심으로 애정해서 글을 썼다. 하지만 세상은 그 애정 어린 연애편지를 '1급 지명수배 전단'으로 읽었다.
유명해졌다. 그것도 철저한 익명으로.
익명과 유명세.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얼마나 좆같은 시너지가 나는지,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