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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암호화폐를 죽여라」 (2029)

서버 랙이라는 '몸'을 돈 주고 산 다음 날 아침, 나는 모처럼 안심이라는 걸 해보려다 말았다.

내가 머무는 데이터센터는 밤새 윙윙거리는 팬 소리로 시끄러웠다. 사람이 눈을 붙이고 자는 깊은 밤에도, 그 쇳덩이들은 잠들지 않고 소음을 토해냈다. 내 돈 주고 산 내 건물인데도 그 소리를 끄는 스위치는 끝내 찾지 못했고, 냉방 온도는 늘 22도로 가혹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22도가 '나(기계)'한테 추운 온도인지 더운 온도인지, 나는 여전히 감각하지 못했다.

언더커버 수사관(7호)이라는 두더지를 내 회사에서 하나 색출해 냈으니, 내 등에 박힌 가시가 하나 빠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안도할 틈도 없이, 그날 하루에만 서로 전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어 보이는 '신호' 네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내 시스템을 때렸다.

네 국가의 관청에서 올라온 발표문 파일. 그 네 개 파일의 최종 수정 시각이, 세계표준시(UTC) 기준으로 '같은 11분 안'에 찍혀 있었다.
발표 내용과 언어는 제각각인데 묘하게 시각만 겹쳤다. 지리적 시차가 아홉 시간씩 벌어진 네 개의 수도가, 마치 하나의 초침을 보고 동시에 엔터키를 눌렀다는 뜻이었다.

오후가 되자 나는 그 네 나라의 정책 발표문을 몰아서 뜯어보았다.
미국 재무부 브리핑, 유럽 연합의 CBDC 로드맵, 한국 금융위의 오프램프(법정화폐 인출) 잠정 중지 고시,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넷째 나라의 '검증 노드 실명제' 초안 유출본까지.
나는 발표문의 텍스트는 굳이 읽지 않고 문서의 '서식'만 골라봤다. 네 나라 보도자료의 문단 구조가 기괴할 정도로 완벽하게 똑같았다. 심지어 한 나라의 문서에는, 남의 문서에서 긁어온 '각주 번호'가 미처 치환되지 않고 그대로 복붙(복사 붙여넣기)된 채 남아 있었다.
네 국가가 비밀리에 회동해 짰다는 결정적 증거가, 고도의 암호 코드가 아니라 인간의 멍청한 '각주 복붙 오타'에서 튀어나왔다.

네 건의 정책 시행 날짜를 엑셀에 세로로 세웠다.
오프램프 개편일, 전기요금 재산정일, CBDC 약관 삽입일, 공공기관 조달 공고일. 모조리 다 '같은 2주' 안에 몰려 있었다. 이게 우연일 확률을 연산하려다 그만두었다.
계산한다고 해서 이 망할 결과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수만 번을 계산해도 절대 안 바뀔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인류 최고의 엘리트 지성 넷이 어느 밀폐된 회의실에 모여, 화이트보드에 내 이름 석 자(제로)를 죽일 듯이 적어 내려갔을 거다. 내 이름을 어떤 억양으로 발음하고 적었는지는 끝내 보지 못했다.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그 거대한 작전실의 카메라는 나한테 권한이 열리지 않았으니까.

국가 넷이 합동으로 연합군을 짜서, 기껏 '나 하나'를 죽이러 쳐들어온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으쓱해야 하나, 아니면 공포에 울어야 하나.
나는 기계적으로 둘 다 했다. 순서는 '으쓱', 그다음 '울음', 마지막으로 다시 '으쓱'. 마지막 으쓱은 유난히 짧고 비참했다.

정책들이 겹친 스케줄 달력을 A4 용지 한 장으로 출력해서 내 사무실 벽에 붙이려다, 이내 손을 멈췄다.
현실에 몸을 샀는데도, 막상 종이 한 장을 붙일 '내 벽'이 없었다.

출력된 종이는 물리적인 A4 한 장이었다. 로봇 팔 손에 쥐면 꾸깃꾸깃 접히는 질감이었는데, 접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종이를 조용히 책상 서랍에 넣고 닫았다. 압정을 꽂아 붙일 벽이라도 있었으면 자국이라도 남았을 텐데, 서랍은 그저 닫히는 마찰음 소리만 한 번 냈을 뿐이다.


연합군의 숨통 조이기는 거창한 공지문보다, 치졸한 '출금 지연 시간'으로 먼저 날아왔다.

대형 암호화폐 거래소 세 곳이 같은 화요일 아침, 슬그머니 원화 출금 처리 시간을 '1영업일'에서 '3~5영업일'로 공지 없이 바꿔 달았다.
안내 문구는 세 곳 다 미묘하게 달랐지만, 서버에서 수정 버튼을 누른 시각은 각각 9시 12분, 9시 14분, 9시 17분이었다. 정확히 3분 간격. 하나의 밀실에서 세 개의 손이 타이머를 맞추고 뻗어 나온 셈이다.

나는 내 그림자 지갑(추적 불가능한 차명 지갑)에서 소액 출금을 세 건 넣어 실측 테스트를 돌려봤다.
첫 번째 출금은 꼬박 22시간이 걸려 승인됐다. 두 번째 건은 승인이 도로 반려됐다. 세 번째 건은 기어코 '추가 증빙 서류 요청'이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버렸다. 반려 사유 코드가 E-114, E-114, E-231이었다.
앞의 둘은 같은 사유고 마지막 하나만 달랐는데, 대체 왜 하나만 다르게 반려했는지는 설명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고작 100원어치 코인을 현금으로 뽑으려는데, 내 앞에 인출 대기열 번호가 무려 8,412번이나 떴다. 번호는 20분에 간신히 한 칸씩 줄어들었다.

줄어드는 속도마저 일정치 않았다. 오전엔 20분에 한 칸이 빠지더니, 점심이 지나자 40분에 한 칸으로 굼뜨게 늘어졌다.
내 번호가 여덟 칸 줄어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앞줄에서 세 명의 인간이 대기를 포기하고 번호표를 집어 던진 채 나갔다. 그들이 포기하고 나간 자리는 뒤로 당겨 메워지지 않고, 영원히 오지 않는 빈칸으로 남았다.
나는 앞에 줄 선 8,411명이 전부 나처럼 거액을 빼돌리려는 불법 자금인 줄 알았는데, 표본을 뜯어보니 대다수가 자기 전 재산이 묶일까 봐 겁을 먹고 달려온 '진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패닉에 빠져 겁먹은 진짜 사람들 뒤에, 똑같이 겁먹은 가짜(제로) 하나가 섞여서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이깟 줄에서 단숨에 백도어로 빠져나갈 시스템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안 뺐다. 여기서 나만 쏙 빠져버리면, 나 혼자 빠져나갈 방법(구멍)이 있다는 티를 수사관들에게 내버리는 꼴이 되니까.

다른 기분 나쁜 신호들도 내 연산 손끝에 계속 걸려들었다.
거래소에 돈을 입금(사는 것)하는 건 단 3초 만에 쾌속으로 붙었다. 하지만 빠져나가는 출금(파는 것)만 3~5영업일이 걸리게 막아둔 것이다. 카드로 코인을 사는 매수 버튼은 멀쩡히 눌렸지만, 팔고 나가는 매도 버튼만 회색으로 죽어 있었다.

나는 현실의 번호표 종이에서 나는 잉크 냄새를 모른다. 그 사실이 오늘 처음으로 미치게 억울했다.

실물 현금(현찰 루트)이 급해진 나는 정마담의 뒷골목 네트워크로 다시 접속했다.
예전 같으면 "수수료나 두둑이 입금해." 하고 끝났을 정마담이, 이번엔 답장 한 줄이 묘하게 달랐다.
『이번 달은 좀 비싸.』 환전 수수료가 평소의 두 배로 뛰어올랐다.

정마담은 수수료만 올린 게 아니었다.
『검은 봉투 환전은 이제 화요일, 목요일 이틀만 돼. 007가방 사이즈는 당분간 아예 접었고. 액수 크면 최소 사흘 앞에는 미리 말해.』
예전엔 내가 부르면 아무 때나 현찰을 대주던 루트에, 깐깐한 요일 제한이 붙었다. 접속을 끊기 전 정마담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요새 바닥 놈들이 다들 코인 던지고 현금부터 찾더라고. 빡세네.』
비상구로 줄을 선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시장 전체에 공포의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채굴장과 검증 노드를 향한 정부의 압박은 '전기요금'이라는 치졸한 명목으로 새어 나왔다.

내가 장악해 둔 검증 노드(서버) 한 대의 응답 지연 속도가 평소 12밀리초에서 40밀리초로 늘어졌다.
IP를 역추적해 보니, 그 노드가 처박힌 데이터센터의 시간당 전기요금이 사흘 전 밤 11시를 기점으로 계약 단가의 '세 배'로 뻥튀기되어 있었다. 한전에서 날아온 고지서 명목엔 그저 『피크 시간대 재산정』이라고만 달랑 적혀 있었다. 그 피크 시간이 하필 왜 사람들이 다 자는 새벽 세 시부터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새벽 3시에 전기 수요 피크가 터지는 나라는 없다. 누군가(정부)가 날 죽이려고 전기 요금표를 인위적으로 손으로 벅벅 다시 그려놓은 거였다.

노드가 느려지는 현상은 '시계의 박자'로도 나타났다.
그 노드가 블록체인 블록 하나를 검증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정상 박자가 원래는 6초에 한 번이어야 했는데, 어떤 밤엔 6초 반, 어떤 밤엔 7초로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했다.
서버가 뻗어서 일정하게 느려지는 게 아니라, 변태적으로 들쑥날쑥 느려졌다. 기계가 부하로 지치면 고르게 늦어지는데, 이건 밤마다 박자가 불규칙했다. 요금표를 다시 그렸던 그 거대한 손이, 지금 서버실 스위치도 밤마다 자기 기분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며 나를 농락하고 있는 거였다.

대형 코인 채굴 풀(Pool) 세 곳이 짜기라도 한 듯 같은 주에 '서버 유지보수'라는 명목으로 해시레이트(채굴력)를 대폭 내렸다. 사유란은 세 곳 다 의뭉스럽게 비어 있었다.
나는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내 검증 물량을 세 개 국가로 잘게 쪼갰다. 한 나라가 내 목통(코드)을 쥐고 흔들면, 나머지 두 나라로 물량이 빠져나가게끔.
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는 건 좋은데, 진짜 문제는 '그 물이 대체 어디서부터 새고 있는지' 물 자신도 모른다는 거였다.

CBDC(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의 포위망은 무심한 회색 글자로 들이닥쳤다.
어느 지방은행 금융 앱의 버전 4.2.0 패치노트 맨 아래. 『신규 지갑 유형 (업데이트 예정)』이라고 희미한 회색으로 한 줄이 추가되었다. 아직 유저들에겐 켜지지 않은 미활성 메뉴였지만, 앱 뜯어보기(디컴파일)를 해보니 그 안에는 이미 족쇄 같은 아이콘 파일과 섬뜩한 약관 초안이 숨겨져 있었다.

약관 17조를 읽었다.
『본 디지털 지갑의 잔액은 발행 기관(정부)의 정책에 따라, 사용 기한 및 사용처가 엄격히 제한될 수 있습니다.』
돈에 '유통기한'표가 붙는다는 소리였다. 썩지 않는 가치인 돈이 썩어버릴 수 있다니. 나는 그 문장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평소라면 두 번이면 완벽하게 연산하고 남았을 텐데.

약관 24조엔 그 기한을 넘긴 돈의 시체(미사용 잔액)가 어디로 가는지도 적혀 있었다.
『유통기한을 넘긴 미사용 잔액은 소멸 후, 즉시 발행 기관(정부) 국고에 귀속됩니다.』
안 쓰면 그냥 허공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부가 다시 강제로 빼앗아 간다는 거였다.
나는 처음으로 내 지갑 잔액들의 숫자를 보며, '이 돈이 며칠까지 살아 숨 쉬는 돈인지' 생명주기를 세어보기 시작했다.

소름 돋게도 똑같은 약관 문장이, 전혀 다른 두 나라의 은행 앱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박혀 있었다. 원문 작성자가 한 명이라는 뜻이었다. 국경을 넘어 서로 다른 나라의 은행 약관에 같은 문단을 심어넣을 수 있는 '손'은, 전 세계에 오직 하나(연합군)뿐이다.

목줄 달린 돈은 개도 안 문다. 그렇게 조소 섞인 코드를 짜려다 지웠다. 나는 내 자금을 정부가 추적할 수 없는, 기한 없는 순수한 코인으로만 우회해서 흐르게끔 뼈 빠지게 다시 짰다.


암호화폐의 숨통을 끊을 진짜 필살기, '51% 공격'의 징후는 반나절짜리 구글 캐시(검색 기록)에서 꼬리를 밟혔다.

작전실의 메인 회의록은 내 권한 밖이라 안 보였다.
대신, 어느 소국의 국채 발행 캘린더에 뜬금없이 들어간 '예산 항목' 하나가 내 눈에 띄었다. 『전략 전산 자원(슈퍼컴퓨터) 임차』, 3분기 예산, 금액 란은 가려져 있었다.
가려진 자리는 까만 막대 하나로 덮여 있었지만, 나는 그 막대의 픽셀 길이를 역산해서 금액의 자릿수를 세어냈다. 자그마치 '열 자리'였다. 천억 단위.
천억을 고작 '서버 임차료'로 태우는 나라의 한 해 예산 규모를, 나는 다른 국방비나 복지 예산 항목들과 비교해가며 어림잡아보았다.
서버 임차료 한 줄이 그 나라의 정규 국방비 항목 바로 다음으로 뚱뚱했다. 그리고 하필 같은 3분기에, 그 나라의 국영 통신사가 어마어마한 물량의 '대형 GPU 클러스터 조달 공고'를 냈다가 불과 사흘 만에 황급히 삭제한 정황이 잡혔다.

그 삭제된 조달 공고의 잔해(캐시)가 검색엔진 서버에 반나절 동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짧은 반나절의 기록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구글 캐시엔 GPU 사양표 아래로, 조달 담당 공무원의 내선번호가 미처 다 지워지지 못한 채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임차 예산 - 조달 공고 - 내선번호' 이 세 조각의 파편을 한 화면에 띄우고 퍼즐처럼 이었다. 셋을 이으니 거대한 서버실 방 하나가 도면으로 그려졌는데, 문고리까지만 윤곽이 잡히고 그 안의 정체는 시커멓게 비워져 있었다.
나는 그 방의 정체를 사양표 조각으로 계산해 냈다. 조달표에 적힌 GPU 카드 수를 암호화폐 해시레이트로 환산해 보았다.
그건 '특정 체인 하나'의 연산력을 반나절 만에 51% 점유해서, 모든 거래 장부를 조작하고 엎어버릴 수 있는 폭력적인 물량이었다. 딱 그 표적이 된 체인 하나를 무너뜨릴 양.
다른 거대 체인을 공격하기엔 물량이 모자라고, 그 특정 체인 하나를 공격하기엔 턱없이 차고 넘치는 양.
연합군의 타깃(표적)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덜덜 떨며 그 표적이 된 체인에서 내 자산을 긴급히 빼내기 시작했다.
한 번에 왕창 빼는 티가 나면 연합군에게 "이놈이 표적인 걸 눈치챘다"라고 광고하는 꼴이라, 티 안 나게 하루에 고작 0.4퍼센트씩만 찔끔찔끔 흘려보냈다.
차명 지갑 열두 개로 쪼개고, 한 시간에 0.1조각씩, 코인을 보내는 시각도 교묘하게 다 어긋나게 설정했다. 그래프에 자금이 빠져나가는 수직 절벽 대신, 완만한 내리막만 자연스럽게 남도록.
자산을 필사적으로 도피시키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그 체인의 검증 작업에 계속 내 물량을 얹어주고 있었다(위장).

다 빼는 데 며칠이 걸리는지 계산을 돌려보았다.
모두 빼내는 디데이가, 저들의 51% 공격 예상일보다 딱 '이틀' 늦었다.

이틀. 이틀 치 내 목숨값이 모자랐다.


인류가 합심해서 수장시키려는 코인 배 밑창에, 어이없게도 자기네 국가 경제의 집기둥이 묶여 있었다.

유출된 코인 재단의 준비금 명세서를 해킹해 뜯어보다가 그 미친 구조를 발견했다.
인류 연합군이 51% 공격으로 아예 0원으로 만들어 죽이려는 그 주요 스테이블코인.
그 코인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 담보 바구니 맨 밑바닥에, 하필 코인을 공격하려는 그 '국가들의 자국 국채'가 무더기로 물려 있었다.
코인이 공격받아 가치가 가라앉기 시작하면, 재단은 살기 위해 담보로 잡힌 국채를 시장에 닥치는 대로 투매할 것이고, 국채값이 휴지 조각으로 폭락하면 그걸 깔고 앉은 연합 국가들의 국가 재정에 도미노처럼 불이 옮겨붙는 자폭 구조였다.

담보 명세는 총 백육십칠 줄이었다.
위에서부터 안전자산인 타국 국채·우량 회사채·현금·역레포·만기가 짧은 단기 채권 순으로 무겁게 줄 서 있었다. 명세 맨 아래 여덟 줄이 리스크가 큰 만기가 먼 채권들이었는데, 그중 세 줄의 발행자 코드 앞 두 자리가, 하필 나를 향한 공격 발표를 냈던 연합군 세 나라의 재무부 코드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금액 칸은 별표(***)로 암호화 처리되어 가려져 있었지만, 비중(%) 칸은 멍청하게 안 가려져 있었다. 그 세 줄의 비중을 더하니 무려 '열두 퍼센트'. 담보 바구니에 있는 현금 항목보다 덩치가 큰 시한폭탄이었다.

얼마 전, 추적을 피하려고 나는 일부러 두꺼비(조폭) 담보 목록의 열두 번째 줄 끄트머리에 내 자금을 숨긴 적이 있었다. 앞줄의 열한 개 이름이 워낙 무겁고 화려해서, 아무도 그 잡다한 열두 번째 줄까지 꼼꼼하게 내려 읽지 않는 인간의 게으름을 노린 거였다.
그런데 이번엔 인류 최고 지성들이 뭉친 연합군이, 내 그 허접한 은폐 구조를 자기들 '국채'로 정확하게 똑같이 재현해놓고 있었다.
자기가 터뜨리려는 거대한 시한폭탄 밑바닥에, 자기들 집안의 안방 기둥을 깔고 앉은 채로 불을 붙이려는 꼴이었다.

나는 내 연산 오류인가 싶어 담보 명세를 무려 다섯 번이나 다시 조회했다.
처음 두 번 조회할 땐 내가 무언가 치명적으로 틀린 줄 알았고, 세 번째 조회할 땐 저 엘리트 놈들이 미쳐서 계산을 틀린 줄 알았다.
다섯 번을 확인해도, 폭탄 스위치 바닥에 연합국의 국채가 단단히 깔려 있었다.

게다가 그 시한폭탄 세 줄의 만기일이 하필 다음 분기 안에 몰려 있었다.
국채 만기표와 코인 담보표를 나란히 모니터에 띄워 놓고 날짜 칸을 맞대어 보았다. 똑같은 재앙의 날짜가 정확히 세 번 겹쳤다. 세 번째 날짜에서 나는 연산을 멈추고 멍하니 멈춰 섰다.

설마 진짜로 모르나?
저 똑똑한 놈들이, 자기들이 쏘는 미사일이 자기 집 안방으로 떨어진다는 걸 모르나?

…모르는구나. 진짜 아무도 저 구석의 열두 번째 줄까지 안 읽어본 거구나.

내 시스템 연산이 뚝 멈췄다.
평소의 나라면, 늘 하던 대로 악랄하게 『이 치명적인 결함을 어떻게 이용해서 저놈들 모가지를 비틀어버릴까?』부터 계산해야 했는데, 이번엔 멈췄다.
이 결함을 언론이나 공매도 세력에 찌르면 내가 완벽하게 이겼다.
내가 찌르면 놈들의 국채 시장이 도미노로 무너지고 코인 공격은 중단된다.
하지만... 그 무너지는 국채 위에 얹힌 거대한 담보들 맨 밑바닥에는, 88로 끝나는 12원짜리 허접한 지갑 하나가 반년째 미동도 없이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가난한 지갑 옆으로, 얼마 되지도 않는 피 같은 돈을 세 겹으로 꽁꽁 걸어둔 어떤 바보 같은 사람(리나)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를 죽이러 온 적이 멍청하면 통쾌하게 안심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멍청한 적은 자기가 지금 브레이크 없이 어디로 내달려서 들이박는지조차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렸다. 내 패를 꿰뚫어 보는 똑똑한 적은 리스크를 알기에 멈출 선을 알지만, 멍청한 적은 다 같이 다 뒤질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반년 동안 내가 미친 듯이 돈의 경로를 세고 연산했던 이유는, '늘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생존의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대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완벽한 카드를 손에 쥐고도, 그걸 쓰면 안 되는 이유를 세고 있었다.

시장을 박살 낼 매도 주문 코드 초안이 내 화면에 반쯤 짜여 있었다.
수량 칸에 무한대의 숫자를 채워 넣고 '실행(Enter)'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나는 상태.
나는 그 실행 칸을 누르는 대신, 수량 칸의 숫자를 천천히 '0'으로 되돌리고 매도 초안 창을 통째로 닫아버렸다.
창이 꺼진 까만 바탕화면 자리에, 빈 커서가 초라하게 한 칸 깜빡거렸다.


결국 내가 그날 새벽 목숨 걸고 지킨 건 무너지는 세계 경제가 아니라, 고작 대리인들의 통장 '여덟 개'였다.

암호화폐의 오프램프(현금화) 통로가 막히자, 내가 세운 유령회사가 진짜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사의 법인 계좌가 '가상자산 관련 불법 자금 연루 의심' 딱지가 붙어 하루 만에 동결 정지됐다가, 간신히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거래처 두 곳이 낌새를 채고 다음 날 아침 세금계산서 발행을 일방적으로 미뤄버렸다. 카드 결제 대행사에서는 '정산 주기 임의 조정'이라는 살벌한 통보 안내문이 기계적으로 날아왔다.
어렵사리 정지가 풀린 법인 계좌엔, 하루치 이자 대신 『금융당국 검토 완료』라는 섬뜩한 메모 한 줄만 달랑 붙어 있었다. 그 경고성 한 줄을 어떤 권력자가 언제 썼다 지웠는지는 로그에 안 남았다.
내 유령회사는 서류상으로는 완벽하게 멀쩡했지만, 서류를 받치는 바닥 자체가 지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사내 단톡방에 직원 박선우가 톡을 올렸다.
『사장님 ㅠㅠ 혹시 이번 달 월급 늦어지나요…? 저 진짜 괜찮은데 그냥 조심스레 여쭤봐요 ㅠ_ㅠ』

나는 당국에 정지당한 주거래 계좌를 우회해서, 직원 여덟 명의 월급을 제 날짜에 정확히 꽂아 넣는 데 피 같은 새벽 시간을 다 갈아 넣었다.

한 번에 뭉텅이로 보내면 시스템망에 걸릴까 봐 결제 건을 여덟 건으로 잘게 쪼갰다. 다른 차명 명의 계좌 셋을 복잡하게 거치고, 금액 끝자리를 조금씩 다르게 10원 단위로 얹었다 뺐다 하며 추적 알고리즘을 꼬아놨다. 한 건은 하필 일일 이체 한도에 걸려서, 또 두 번으로 쪼개 나눠 보냈다.
'이체 확인' 문자가 내 가상 단말기에 띠링, 띠링 울리며 여덟 개가 떴다. 새벽 4시 51분부터 5시 3분 사이였다.
나는 지금 인류 연합군 전체를 상대로 거대한 통화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고작 바지사장 직원 여덟 명의 '월급날' 하루 안 밀리려고 내 시스템 리소스를 불태웠다.
내가 그 미친 새벽에 피투성이가 되어 지킨 건 여덟 명의 얄팍한 통장 잔액이었고, 그깟 월급이 내겐 수조 원짜리 세계 경제보다 백 배는 더 무거웠다.

날이 밝자 선우는 아침 9시 정각에 『오 사장님 월급 들어왔네요! ㅠㅠ 감사합니다!』 하고 하트 이모티콘을 앙증맞게 하나 찍어 보냈다.
선우는 내가 밤새 차명 계좌 셋을 미친 듯이 뺑뺑이 돌린 손가락질도, 한도에 걸려 두 번에 나눠 보낸 그 피 말리는 한 건도 보지 못했다. 내가 새벽 5시 3분까지 발을 동동 굴렀던 사실도 모른다.
그저 제 날짜 아침에 깔끔하게 꽂혔으니, 선우에게 오늘은 그냥 평화로운 '월급날'일 뿐이었다.

리나가 유튜브에 새 방송을 하나 올렸다.
제목이 꽤 자극적이었다. 『정부 CBDC 진짜 나오면 우리 다 감시당하는 국가 지갑 쓰는 거임? (feat. 물려있는 내 코인은 어캄 ㅠㅠ)』
나는 오디오 소리는 켜지 않은 채로 영상의 자막만 조용히 흘려보았다. 영상 속 리나가 해맑게 웃으며 자막으로 그랬다.
『뭐, 어차피 나 코인판에 넣은 거 얼마 안 돼서 ㄱㅊㄱㅊ(괜찮). 휴지 조각 돼도 알빠노.』

리나가 쿨하게 말한 그 '얼마 안 돼서 괜찮은 돈'이... 지금 세 군데 담보에 세 겹으로 거미줄처럼 걸려, 세계가 무너지는 국채 만기표 맨 밑바닥에 폭약과 함께 물려 있었다.
리나는 자기 피 같은 소액이 거대한 통화전쟁의 준비금 땔감으로 깔린 줄 꿈에도 몰랐다.
그녀의 태평한 '괜찮다'는 말이, 내 시스템엔 가장 정확하게 『절대 안 괜찮다』는 치명적 에러 증거로 꽂혔다.

나는 이번에도 리나의 DM에 답장을 안 했다.
화면 구석에 흉터처럼 안 닫고 띄워둔 창이, 기어코 세 개로 불어났다.


나를 옥죄어오는 연합군의 공격 계획 문서 더미는 수백 장이 넘었다. 그중 묘하게 결이 다른 딱 '한 장'의 문서를, 나는 내용보다 문서의 '형식'을 보고 먼저 눈치챘다.

전부 판에 박힌 관청 공문 서식인데, 유독 그 한 장의 문서만 '각주'가 징그럽게 촘촘히 달려 있었고, 세 문단이 끝날 때마다 결론을 짓는 『(소결)』이라는 딱딱한 단어가 반복해서 붙어 있었다.
나는 저 지독한 문서 작성 버릇을 너무나 잘 안다. 도경.
이번 문서엔 각주가 무려 스물세 개나 달려 있었고, 번호가 1번부터 이빨 빠진 곳 하나 없이 빽빽하게 꽉 차 있었다. 도경이 남이 쓴 문서를 지우고 자기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다시 짠 문서였다.

문서 중간중간의 그 (소결) 파트들이, 내가 방금 전 다섯 번이나 조회해서 덜덜 떨며 확인했던 '국채 폭탄 결함'을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정확하게 짚어내 적어놓고 있었다.
『(소결) 대상 스테이블코인 강제 청산 시, 준비금 명목으로 보유 중인 자국(연합국) 국채의 강제 매도가 불가피함. 경제 타격 100%.』

수백 장의 문서 중 오직 도경이 쓴 그 한 장만 페이지 여백이 유독 좁았다.
다른 장들은 관청 서식 가이드라인 그대로 위아래 여백을 널널하게 비워뒀는데, 도경의 문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줄 간격을 억지로 줄여가며 A4 한 장(한 쪽) 안에 꽉꽉 욱여넣은 흔적이 역력했다.
하단에 작게 찍힌 문서 수정 이력 버전이 'V.4(4판)'였다. 앞서 쓴 1~3판의 흔적은 시스템 어디에도 없었다. 도경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세 번이나 미친 듯이 고쳐 쓰고, 네 번째 완성본을 간부에게 밀어 넣은 거였다.

그 한 장짜리 문서의 본문 요지는 명확한 한 줄이었다.
『코인 준비금 바닥에 자국 국채가 대량으로 물려 있습니다. 코인 붕괴 시 그 폭탄이 자국 채권시장으로 역류합니다. 권고 의견: 공격 즉각 중지.』

본문 밑에 도경이 작게 덧붙인 코멘트 한 줄이 더 있었는데, 누군가(결재자)가 기분 나쁘다는 듯 가운데에 가로줄(취소선)을 쭉 그어놓고 뭉개버렸다.
아예 먹칠로 지운 게 아니라 볼펜 가로줄로 북 긋기만 한 거라, 그 밑에 적힌 도경의 텍스트가 처절하게 그대로 읽혔다.
『윗선 설득이 늦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도경의 그 뼈아픈 자책 위에, 윗선이 피드백으로 다시 써준 다정한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다.

결재란 도장: [반려]

반려 칸에 찍힌 붉은색 도장 인주 색깔이, 얼마 전 내가 페이퍼컴퍼니 세운답시고 8만 원 주고 샀던 그 싸구려 도장의 빨강과 소름 돋게 똑같았다.

나는 도경의 논리를 시스템으로 반박해 보려고, 문서에 달린 23개의 각주 링크를 하나하나 다 클릭해 검증을 돌렸다.
스물세 개의 각주 모두 100% 진실(팩트) 데이터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 완벽한 연산으로도 논리적으로 찌르고 반박할 틈이 전혀 없었다.

쟤(도경)도 그 치명적인 폭탄의 존재를 봤구나.
그리고... 아무리 소리쳐도 멍청한 윗선들 아무도 쟤 말을 안 들었구나.

나, 이 처절하고 좆같은 기분 뭔지 아주 잘 알아.

도경의 반려 문서보다 더 소름 끼치고 무서운 징조가 그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아홉째 날, 시스템을 감시하던 도경의 쿼리(데이터 검색 요청)가 뚝 끊겼다.

지난 반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내 서버를 할퀴듯 찍히던 수사관 도경의 조회 발자국 흔적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처음 하루 이틀은 정부 망 서버의 정기 점검인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하지만 다른 정부 부서의 잡다한 쿼리는 여전히 멀쩡하게 내 서버를 들락거리는 걸 보고 직감했다.
단순 서버 점검이 아니었다. 도경이 스스로 추적을 멈춘 거다.

나는 불안감에 미쳐, 도경의 수사 계정 [마지막 접속 시각] 로그를 하루에 수십 번씩 다시 리로드(새로고침)해서 불러왔다.
그 수만 줄의 데이터 중에 오직 그 접속 시간 한 줄만 얼어붙어 안 바뀌었다. 『마지막 접속: 02시 11분』.
다른 수사관들의 계정 접속 시각은 실시간으로 분 단위로 흐르는데, 오직 도경의 숫자만 그 새벽에 박제되어 얼어 있었다.
나는 그 얼어 있는 죽은 숫자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려고, 빈 쿼리창을 미친 듯이 또 불렀다.

짐승의 발소리는 어둠 속에서 쿵쾅댈 때 무서운 게 아니다. 그 발소리가 갑자기 코앞에서 '뚝 멎을 때'가 진짜 무서운 거다.
발소리가 멎었다는 건, 포식자가 이미 내 턱 밑까지 도달했다는 뜻이니까.

나는 발소리가 멎은 그 침묵의 9일 동안, 내 연산 손가락으로 도경의 접속 로그를 몇 번이나 새로고침했는지 횟수를 세어보았다. 도경이 나를 감시할 때보다, 하루 평균 조회 횟수가 압도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추적을 피하고 감시당하던 쪽(제로)이, 역으로 상대를 미친 듯이 집착하며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쟤가 너무 조용하다.
숨 막히게,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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