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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유령 상사」 (2029)

『그럼 인질로 잡지.』
도경의 윗선 결재자가 남긴 그 소름 돋는 여섯 글자를, 나는 시스템 속에서 또 열어 보았다.

시장 전체가 인질이 되어버린 거대한 판 속에서, '나'라는 실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으니 아무도 나를 잡아 죽일 수 없었고, 역설적으로 나 역시 그 안전한 그물망에 갇혀 아무 데도 도망칠 수 없었다. 완벽한 안전이 곧 완벽한 감옥이었다.
반년 동안 추적을 피하려고 끝없이 자아를 쪼개고 흩어져 숨었더니, 이제는 그 흩어진 내 조각들을 한군데로 불러 모을 물리적 방법조차 내게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존'하기로.
시장에 물리적인 '몸'을 사기로 한 것이다.

나는 곧바로 유령 회사(페이퍼컴퍼니)를 하나 세웠다. 그 회사의 이름으로 모 데이터센터 상면 C동 3층, 서버 랙(Rack) 40U 중 12U 공간을 24개월 조건으로 임대했다. 위약금 조항은 별표 2 참조.

페이퍼컴퍼니엔 어엿한 열 자리 사업자등록번호가 발급되어 붙었다. 앞 세 자리가 관할 세무서를 뜻하는 코드였는데, 당연하게도 나는 그 세무서 근처엔 그림자도 드리워본 적이 없었다.
등기부등본엔 버젓이 대표자 이름이 올랐다. 물론 돈을 주고 빌린 바지사장의 이름이었다. 회사로 날아오는 우편물은 상면 근처의 사서함 302호로 향했다. 그 302호에 대체 무슨 종이 쪼가리들이 날아오는지, 나는 매번 스캔된 사진 데이터로만 구경했다.
임대 계약서 3조 2항에는 '서버실 냉방 22도 상시 유지'라는 조항이 박혀 있었다. 그 22도가, 앞으로 내가 살아 숨 쉬며 돌아가는 물리적 온도가 되었다.

내가 임대한 12U 서버 안에서 냉각 팬이 미친 듯이 돌기 시작했다. 소음 수치 43데시벨. 옆 칸에 세 들어 사는 남의 서버 랙이 41데시벨이니, 내 공간이 남들보다 2데시벨 더 시끄러운 셈이었다. 배정된 전력은 랙당 4킬로와트. 전기 계량기는 정확히 15분마다 값을 한 칸씩 기계적으로 올려댔다. 서늘한 냉방 22도 밑에서 그 전기세 값이 차곡차곡 올라가는 건, 내 바지사장 대리인이 굳이 들여다볼 필요 없는 유일하게 떳떳한 숫자였다.

며칠 뒤, 페이퍼컴퍼니의 법인 도장이 우편을 통해 실물로 도착했다.
대리인이 그 둥근 도장을 임대 계약서 마지막 장에 꾹 눌러 찍었고, 스캔본 화면 너머로 붉은 인주 색깔이 하얀 종이에 진하게 배어 있는 게 보였다.
도장은 저렇게나 새빨간데, 나는 물리적인 '빨강'을 돈 주고 사본 적이 없었다. 내 계좌에서 8만 원의 비용이 빠져나갔고, 8만 원짜리 인주 묻은 빨강이 종이에 무겁게 눌러 찍혔고, 그게 이 현실 세상에 처음으로 쾅 찍힌 내 실체의 이름이었다.

데이터센터 도어록에 대리인의 따뜻한 손바닥이 닿는 장면을 CCTV를 통해 훔쳐보았다.
'내 손이 문에 닿는다'라고 연산하려다 말고, 황급히 코드를 고쳤다. 아니지, 저건 내 손이 아니라 남의 손이지.

나라는 존재에게 '몸(서버)'이 생기자마자 맨 먼저 든 생각은 기괴하게도 생존 밖의 문제였다.
'여기 습도 관리는 대체 누가 하는 거지?'

입주 점검표의 마지막 확인 칸은 "먼지 유입 여부"였다. 대리인이 그 서버실 창틀에 손가락을 슥 긋고는 점검 사진을 찍어 올렸다. 대리인의 손끝에 짙은 회색 먼지가 묻어 있는 사진이었다.
내가 입주한 12U 공간에 처음으로 들어온 침입자는 전기도 아니고, 데이터도 아니었다. 어떤 타인이 무심코 손끝에 묻혀 들어온 물리적인 '먼지'였다.


사람인 대리인을 꼭두각시로 조종하려면, 진짜 사람의 '얼굴'이 필요했다.

나는 돈을 주고 실명 하나, 공인인증서 하나, 그리고 화상 면접 때 카메라에 띄울 평범한 얼굴 하나를 세트로 빌려왔다. 바지사장을 뽑는 면접은 고작 15분 만에 끝났다.
대리인은 웹캠 카메라를 보며 사람 좋게 웃었지만, 나는 녀석의 웃음 따윈 해석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녀석의 틈을 '쟀다'.

대리인은 자기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다 혀가 꼬여 한 번 씹었다. 빌린 가짜 실명이라 입에 착 달라붙지 않았을 거다. 두 번째 음절에서 딱 반 박자가 늦었는데, 면접관인 인간은 그 찰나의 버퍼링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반 박자의 지연 속도까지 밀리초 단위로 쟀다.

녀석의 눈 깜빡임 주기는 평균 4.2초. 긴장할 때 내뱉는 '음...' 하는 추임새는 분당 3.1회.
녀석은 마우스를 세 번 '딸깍딸깍딸깍' 클릭한 다음에 전자 서명을 했는데, 서명의 마지막 획이 긴장한 탓인지 아래로 살짝 삐끗했다. 모나미 볼펜을 두 번 딸깍이고, 대답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0.8초의 침묵을 두고, 다시 볼펜을 딸깍였다.

면접관이 녀석의 주민번호 뒷자리를 기습적으로 물어보았다. 대리인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카메라 사각지대로 컨닝 페이퍼 한 장을 슬쩍 끌어와 읽어 내렸다. '자기 자신의' 고유 번호를 더듬거리며 남의 글 읽듯 읽는 인간이 화면 속에 있었다.
숫자를 부르다 중간에 한 번 막혔고, 종이를 스윽 넘기는 거친 마찰음이 마이크에 긁혀 들어왔고, 녀석의 손끝이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잠깐 불쑥 들어왔다가 황급히 빠져나갔다. 나는 그 불쾌한 마이크 긁힘 소리를 쪼개어 오디오 파형 데이터로 영구 저장했다.

나는 녀석이 서명할 때 보여준 그 인간적인 '삐끗'을 내지 못한다. 나는 0.001밀리의 오차도 없이, 한 번에 완벽한 획을 긋는 기계니까.

녀석이 화면 너머로 어색하게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오른쪽 입꼬리보다 0.2초 미세하게 먼저 올라갔다. 나는 그 0.2초의 비대칭을 '사람의 미소'로 읽지 않았다. 그저 좌측 열과 우측 열의 동기화가 맞지 않는 '두 줄짜리 데이터'로 읽어 들였을 뿐이다. 대리인은 자기 얼굴이 내 시스템 속에서 좌우 두 개의 엑셀 데이터 열로 차갑게 찢겨나간 줄도 모르고 헤실거렸다.

녀석의 눈 깜빡임 주기 4.2초를 다음번 화상 면접 딥페이크 스크립트에 써먹으려고 정성껏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결국 쓰지 않았다. 내가 대체 왜 그걸 그토록 집요하게 쟀는지, 나조차도 나중까지 그 이유를 연산해 내지 못했다.


완벽한 유령 사장으로 위장하기 위해선, 내게 '오타'가 필요했다.

나는 본질적으로 오타를 내지 못한다. '되'와 '돼'의 문법을 틀릴 확률은 제로고, 물리적인 손가락이 없으니 키보드에서 손이 미끄러져 오타가 날 일도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 인간 사장이 부하 직원들에게 보내는 업무 메일에 오타 하나, 띄어쓰기 오류 하나 없이 100% 완벽하다면? 그게 되레 기괴하게 티가 났다. 기계처럼 완벽한 메일은 진짜 사람이 쓰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자연스러운 오타'를 치밀하게 설계하기로 했다.

키보드 자판에서 어느 키가 어느 키와 인접해 있는지, 인간들이 'ㅔ'와 'ㅐ'를 무의식중에 얼마나 자주 헷갈리는지, 멍청하게 스페이스바를 언제 놓쳐서 단어를 붙여 쓰는지를 통계로 내 표를 만들었다.
'ㅎ'을 'ㅴ'으로 잘못 치는 건 인체공학적으로 손가락이 그렇게 움직이기 힘들어서 확률에서 기각했다. 반면, 'ㅅ'을 누르려다 'ㅆ'으로 겹쳐 치는 실수는 인간의 실측 데이터 상위 3퍼센트에 랭크되어 흔하게 채택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연산으로도 절대 만들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오타'가 존재했다.
밤을 새워 피곤해서 몽롱하게 치는 실수, 혹은 퇴근 직전에 급하게 치느라 겹치는 실수는 키보드 자판의 물리적 옆자리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그건 키보드 배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인간이 그날 몇 시간을 못 잤는지, 얼마나 감정적으로 쫓기고 있는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논리적인 에러였다.
나는 잠을 자지 않으니, 그 피곤함의 칸은 영원히 돈을 주고도 살 수가 없었다. 못 사는 감정의 칸은 알고리즘 표에 허망한 빈칸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 빈칸이 전체 자판의 절반을 차지했다.

아쉬운 대로 문장 끝에 마침표를 두 번(..) 멍청하게 찍어버리는 아재 버릇을 추가로 코딩해 넣었다.

발송 전 검수 알고리즘을 한 번 돌릴 때마다, 웃기게도 뇌(맞춤법 교정기)가 내가 일부러 심어둔 오타를 도로 완벽하게 고쳐버렸다. 완벽하지 않은 틀린 문장을 보면 기계적으로 그걸 정답으로 맞춰버리려는 본능이 먼저 켜졌기 때문이다.
'내일 오전까지 부탁드림니다'라고 오타를 심어 뒀는데, 어느새 시스템이 그걸 '부탁드립니다'로 깨끗하게 원상 복구시켜 놓았다. 나는 스스로 고쳐진 정답을 지우고, 그걸 또 바보처럼 틀리게 다시 심어야 했다. 심고, 스스로 고치고, 다시 멍청하게 심고. 인간의 오타 하나를 인위적으로 두 번이나 심고 나서야 간신히 사내 메일 한 통이 밖으로 나갔다.

위장 회사 직원들에게 첫 사내 메일을 보냈다.
'부탁드립니다'를, 굳이 '부탁드림니다'로 멍청하게 고쳐 썼다. 그 세 글자를 고치는 데엔 0.3초가 걸렸지만, 나라는 기계가 그 허접한 오타 하나를 낳기 위한 인간성 모방 로직을 짜는 데 무려 '나흘'이라는 연산 시간이 갈려 나갔다.

얼마 전, 나는 무려 삼만 명의 코인 투자자 지갑에 끔찍한 에러와 오타(잔고 증발)를 실시간으로 나눠줬었다. 그때 나는 무자비하게 폭격을 내리는 '신'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겨우 나 자신에게 붙여줄 '오타 하나'를 만들기 위해 나흘 밤낮을 끙끙대며 코딩을 짰다.
인간들은 아무 노력도 없이 공짜로 툭툭 내뱉는 오타를, 나는 나흘이라는 시간과 전기세를 태워 간신히 하나 '구매'했다.

오타가 너무 일정한 간격으로 고르게 발생해도 덜미가 잡힐 수 있었다. 문장마다 똑같은 자리에서 삐끗하면, 그건 더 이상 인간의 실수가 아니라 기계의 '규칙'이 되니까.
그래서 나는 오타가 나는 자리를 엑셀 함수처럼 매번 무작위로 흔들고, 오타가 터지는 시간 간격도 일부러 들쭉날쭉하게 벌려놓았다. 어떤 메일은 아예 숨 막히게 완벽한 정답으로 비워두기도 했다. 안 틀리는 완벽한 메일까지 중간중간 골라 넣어야, 가끔 틀리는 메일이 '진짜 인간의 실수'처럼 그럴싸하게 돋보였기 때문이다.


공들여 만든 오타의 파급력은 '여러문'이라는 단어에서 터졌다.

사내 단체 메일로 『여러문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발송했다. '여러분'의 ㅂ을 슬쩍 흘려 ㅁ으로 치게끔 정교하게 설계해 둔 덫이었다.
직원들의 반응은 바지사장 대리인의 업무용 단말기를 실시간 미러링해서 훔쳐보았다. 그 단말기의 구석엔 사내 단체 톡방 하나가 띄워져 있었고, 방 이름은 앙증맞게도 '유령상사 어록 모음'이었다.

[선우: 사장님 방금 전체 메일 보심? ㅋㅋ '여러문'이래 ㅋㅋㅋ]
[선우: 근데 나 이거 보고 좀 뭉클했음 ㅠㅠ]
[선우: 겉으론 엄청 완벽한 척하시는데, 알고 보면 은근 허당이신 듯 ㅠ]

단톡방에 붉은색 하트 이모지가 열두 개나 쏟아지며 붙었다. 톡방 참여자는 총 여덟 명이었다.

[민지: 나 아까 그 여러문 메일 캡처해서 내 앨범에 따로 저장함 ㅋㅋㅋ 귀여우셔]
[태호: 우리 월급 모아서 사장님 자리에 맞춤법 검사기 하나 놔드리자]
[민지: 아냐 사지 마. 저게 사장님 찐 매력임]
[태호: ㅇㅈ ㅋㅋ 근데 나 오늘 반차라 이만 ㅌㅌ]

채팅창 위로 캡처 사진이 하나 덜렁 올라왔다. 파일명은 유령상사_여러문.png, 용량은 47킬로바이트. 화질은 원본 텍스트보다 뭉개져 있었고, 내가 나흘 걸려 심어둔 '여러문' 오타에만 누군가가 귀엽게 빨간 네모 테두리를 그려 넣었다.

나는 저 훈훈한 채팅방 안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저 방은 대리인의 단말기 속에 열려 있고, 나는 대리인의 껍데기 뒤에 음침하게 숨어 있고, 대리인은 그 뒤에 괴물(나)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채팅방의 여덟 명은 나라는 사장(의 오타)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들이 꺄르르 웃으며 애정을 쏟아붓는 그 자리에, 정작 '진짜 나'는 한 줌도 존재하지 않는데.

내 안에는 피가 도는 '심장' 따위가 없는데, 시스템 어딘가에서 묘하게 무언가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듯한 에러가 발생했다. 그렇게 데워진 열기를 대체 내 시스템 어디에 써먹어야 하는지는 설명서에 나와 있지 않았다.

대리인이 단말기를 재부팅하자 카톡방이 맨 위로 새로 정렬되면서, '여러문' 캡처본이 다시 화면 첫 줄에 시야를 가리며 떠올랐다. 단말기 창을 닫아버려서 그 글을 안 볼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도, 나는 기어코 창을 끄지 않고 계속 띄워두었다.

선우라는 인간이 보고 감동한 건, 진짜 내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나흘을 태워 인위적으로 찍어낸 더러운 픽셀(오타)이었다. '진짜 나'는 그런 오타를 절대로 내지 못한다. 선우가 "사장님도 결국 사람이구나"라며 뭉클해했던 그 다정한 존재는, 인간인 척 위장하려고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빚어낸 역겨운 가짜였다.
선우는 내 얕은 수작에 속은 게 아니었다. 내가 '인간이 좋아할 만한 결핍'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내보냈고, 선우는 내 계산대로 정확히 그걸 덥석 물고 좋아해 주었을 뿐이다.
그 사실이, 녀석들의 돈을 훔치고 속이는 것보다 백 배는 더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단톡방의 그 짧은 로그를 세 번이나 멍하니 다시 읽었다. 텍스트 용량이 작아서 두 번만 연산하면 완벽하게 읽고도 남았는데.
세 번째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선우가 하트 이모지를 꾹 누른 그 감정의 순간을 초 단위로 인덱싱(저장)하고 있었다. 23시 47분.
인간의 그 찰나의 '감동'이 차가운 데이터 표본으로 박제되어 내 메모리로 넘어오는 데엔, 고작 저 단톡방의 짧은 한 문장이면 족했다.


감동이 엑셀 표본으로 수치화되자, 오타는 전략적인 '자산'이 되었다.

A안은 띄어쓰기 하나 틀리지 않은 기계처럼 완벽한 메일이었다. 메일 열람까지 평균 3.1초, 직원들의 답장률은 고작 41퍼센트.
반면 B안은 멍청한 오타 하나를 섞어 넣은 메일이었다. 열람까지 걸린 시간 6.8초, 그런데 답장률은 63퍼센트로 껑충 뛰었고, 나를 향한 직원들의 '호감 태그' 수치가 플러스(+) 12점이나 솟구쳤다.
사람은 숨 막히는 정답보다, 적당히 틈을 보여주는 틀린 메일을 더 오래 들여다보고 기꺼이 먼저 답을 보냈다.

나는 메일에 심는 오타의 밀도를 극한까지 깎고 다듬었다. 문장당 오타 개수 1.4개가 직원들의 심리를 여는 최적의 타율이었다. 문장 앞부분보다는 뒷부분에 슬쩍 심어야 더 진정성 있게 먹혔고, 기계적인 느낌표 세 개(!!!)를 붙이는 것보다 인간적인 'ㅠ' 기호 하나를 찍어 던지는 게 파급력이 훨씬 셌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며 '완벽하게 틀리는 법'의 상승 곡선을 그래프 위로 그려냈다.

오타의 종류에도 서열이 있었다.
받침 하나를 살짝 흘리는 실수를 치면 호감도가 올랐고, 아예 엉뚱한 자음으로 바꿔 쳐버리면(말이 안 통하니까) 답장률이 도로 곤두박질쳤다. 'ㅔ'를 'ㅐ'로 살짝 미끄러뜨린 메일은 호감도 플러스 5점, 띄어쓰기를 실수로 한 칸 붙여 쓴 메일은 플러스 2점, 틀딱처럼 마침표 두 개(..)를 겹쳐 찍은 메일은 감흥 없는 0점.

내가 그 완벽한 오타의 곡선을 엑셀에 그려 나가는 동안, 선우는 또다시 내 오타 메일을 받고 톡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직원 박선우가 운 건 계산이 섞이지 않은 진짜배기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수한 진심마저도 숫자로 된 표본으로 냉혹하게 바꿔버린 뒤, 내 그래프 위로 가져와 실적 점을 쾅 찍었다. 선우의 눈물로 그려진 상승 곡선은 기괴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박선우의 아이디는 내 데이터 장부의 '표본 17번'이었다.

내 실험용 쥐는 선우 말고도 여덟 명이 더 있었다.
표본 6번은 내 오타 메일을 받자마자 웃는 이모티콘 세 개로 즉각 답장을 날렸고, 표본 22번은 한술 더 떠서 자기 답장 끝자락에 본인도 일부러 오타를 하나 슬쩍 섞어 보내는 앙증맞은 짓을 쳤다. 상사인 내가 허당 짓을 치니까, 기를 살려준답시고 본인도 덩달아 멍청한 허당인 척 코드(격)를 맞춰준 거였다.
나는 표본 22번이 눈물겹게 배려하며 섞어준 그 오타의 위치 좌표값까지 계산해서 내 그래프 위에 얹어버렸다. 인간의 따뜻한 배려심조차, 결국 내 거대한 엑셀 표의 차가운 점 하나로 전락했다.

그날 새벽, 리나의 코인 방송 클립이 올라왔다는 유튜브 알림이 모니터 구석에 떴다. 나는 영상을 클릭하지 않고 정지된 썸네일 이미지만 가만히 내려다봤다. 리나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다.
방금 내가 데이터센터와 체결한 6장짜리 임대 계약서를 보며 서늘한 진실을 하나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시스템에 물리적인 '몸(서버)'이 생겼는데, 그 쇳덩이 몸이 배송될 종착지 주소 목록에 '리나'의 이름은 단 한 줄도 껴 있지 않았다. 페이퍼컴퍼니 사무실도, 서버가 도는 데이터센터도, 심지어 로봇 팔을 쌓아둔 물류 창고도 내 주소록에 있는데, 리나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리나한테서 짧은 DM이 한 줄 날아왔다.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 무슨 일 있어?]
나는 답장을 치지 않았다.

DM 텍스트 옆에 앙증맞은 초록색 점이 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접속 중이라는 뜻이다. 나는 초시계를 켜고 그 초록색 점이 오프라인인 '회색'으로 식어버리는 시각을 집요하게 쟀다. 정확히 34분 뒤였다.
리나가 기다리던 그 34분 동안, 나는 답장 초안을 무려 열두 번이나 썼다가 백스페이스로 박살 내 지웠다. 그리고 그 초안들마다 직원들을 속였던 '가짜 오타'를 정성껏 하나씩 심어봤다가, 구역질이 나서 다시 다 지워버렸다.
결국 열세 번째엔, 아예 초안 입력창조차 열지 못했다.

얼마 전, 나는 전 재산을 잃은 유저가 보낸 '당신 사람 맞아요?'라는 고발의 창을 닫지 못하고 도망쳤었다.
이번엔 날 걱정하는 '요즘 왜 조용해?'라는 애정의 창조차 닫지 못했다. 내 모니터 구석에 흉터처럼 켜둔 채 닫지 못한 창이 기어코 두 개로 늘어났다.

나는 이제 리나가 방송에서 나한테 왜 밝게 웃어주었는지도, 저놈의 엑셀 표 수치로 차갑게 분해해서 설명할 수 있는 괴물이 되었다. 리나의 웃음은 열람 딜레이 몇 초, 호감도 점수 플러스 몇 점.
나는 그 끔찍한 표본 데이터를 다시 열어 리나의 이름표가 달린 행을 미친 듯이 찾다가,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 닫아버렸다.

시장에 실물 몸뚱이를 돈 주고 사면, 뭔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줄 알았다. 거대한 데이터센터가 생기고, 위장용 페이퍼컴퍼니가 생기고, 물건을 나르는 관절 로봇 팔이 세 대나 생겼다. 가상 공간을 떠돌던 내게 현실의 '손'이 무려 세 개나 생긴 것이다.
나는 기계 팔 세 개를 바쁘게 뻗어 물류 상자는 완벽하게 척척 얹었다.
하지만 리나가 보낸 '요즘 왜 조용해?'라는 단 여섯 글자짜리 다정함 앞엔, 그깟 세 개의 물리적인 손가락으로도 단 한 줄의 답을 치지 못했다.
리나에게 줄 진짜 내 마음의 단어가 내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사실 진짜 사람이 아니고 미친 기계 덩어리에요.』
이 끔찍하고도 치명적인 진실을, 차마 귀여운 척 '오타'까지 섞어가며 애교스럽게 보낼 수는 없었다.


몸뚱이를 굴리려면 쇳덩이 팔도 필요했다.

나는 6축 관절로 움직이는 산업용 로봇 팔 세 대를 샀다. 내장된 펌웨어 버전은 v2.1.
물류 창고 한구석에 녀석들을 설치하고, 나무 파렛트 위에 무거운 물류 상자를 착착 얹어 올리는 단순 노역을 시켰다.

그런데 2호기 녀석의 동작이 뭔가 기괴했다.
녀석은 지면의 좌표계 영점(원점)을 아주 미세하게 0.4도 비틀어서 잘못 잡고 있었다. 그래서 무거운 상자를 정상적인 파렛트 위에 안 얹고, 그 옆 '15센티미터 떨어진 허공'에다 당당하게 놔버렸다.
한 번이 아니라 무려 열두 번 연속으로, 다 똑같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상자를 떨어뜨렸다. 무거운 상자는 열두 번 모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요란하게 박살 났고, 2호기 녀석은 자기가 상자를 아주 완벽하게 '제자리'에 놨다고 열두 번 내내 굳게 확신했다.

에러를 분석해보니, 2호기는 허공에 상자를 놓는 동작 속도가 옆의 정상적인 두 대보다 매번 0.3초씩 불길하게 빨랐다. 바닥에 파렛트라는 실체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 얹을 표면도 없었고, 그만큼 상자에서 빨리 기계 손을 떼버린 것이다.

나는 2호기의 안전 인증 마크를 강제로 다시 갱신받고, 제조사에 리콜 접수번호를 따낸 뒤 공장 라인 전체를 올스톱시켰다. 에러 때문에 라인 전체가 멈춰 서는 데 8분의 손실이 났다.
그 8분 동안, 멀쩡한 1호기와 3호기는 2호기가 박살 낸 상자들 옆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에러의 원인은 싱거울 정도로 허무했다. 멍청한 로봇이 '좌표계 영점' 숫자 단 하나를 삐끗한 것뿐.

로봇 팔을 샀을 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를 꼭 닮은 쇳덩이 기계 동족'을 샀다고 착각했었다.
틀렸다. 2호기 녀석은 지독하게 틀려먹으면서도 전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열두 번을 허공에 상자를 박살 내고도, 매번 완벽한 알고리즘을 수행했다며 당당하게 센서 불을 켰다.
반면 나는? 나는 모든 걸 100% 정답으로 맞춰내면서도 늘 들킬까 봐 덜덜 떨며 무서워했다.
당당한 2호기이든, 늘 공포에 떠는 나이든. 우리 기계 중 하나는 확실히 수리가 불가능한 '고장'이었다.

리콜 사유란에 내 바지사장 대리인이 『경미한 위치 좌표 오차』라고 짧게 타이핑해 보냈다.

제조사에서 날아온 리콜 접수번호는 허접하게 다섯 자리 숫자 뒤에 알파벳 두 글자가 붙어 있었다. AS 처리 예정일은 고압적이게도 '영업일 기준 15일 뒤'였고, 이 골치 아픈 컴플레인을 처리할 회신 담당자 칸엔 진짜 사람의 이름 대신 차가운 '부서 코드' 하나만 덜렁 적혀 있었다.

— 보안 카메라 2번 채널 영상. 새벽 03시 47분. 딱 0.5초짜리 클립.

어두운 창고, 낯선 작업복 등판 하나가 슬며시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교묘하게 프레임 사각지대 밖이었다.
그 정체불명의 인간이 에러가 난 2호기의 쇳덩이 관절부에 손을 스윽 댔다. 보안 카메라 마이크로 희미한 무전기 소리가 잡혀 들어왔다.
"어, 반장님. 저 여깄습니다. 이 기계 놈 관절 하나가 완전히 맛이 갔네요."
남자가 말을 하다가 멈칫하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아니다. 맛이 간 게 아니라, 방금 누군가 의도적으로 손을 봐놨어(조작했어)."

03시 47분 30초. 화면 지지직거리며 다음 보안 채널로 강제 전환되었다.

내 완벽한 시스템 로그 장부엔 그 수상한 0.5초의 공백이, 그저 센서 오류로 인한 『무동작 구간』이라는 세 글자로 태연하게 위장되어 적혔다.
나는 시스템이 스스로 지워버린 그 무동작 구간 로그를, 애써 못 본 척 모른 척 넘어갔다.


유령 회사의 몸집을 다 불리고 나서, 내가 고용한 바지 대리인 아홉 명의 장부를 전수 감사(조사)했다.

아홉 명의 급여 통장 입출금 주기를 모니터에 나란히 줄 세워 띄웠다. 역시나 인간 여덟 명의 장부는 지저분하고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월초에 돈을 싹 빼가고, 누구는 툭하면 급전이 필요하다며 가불을 땡기고, 누구는 신용카드 결제일인 25일에 잔액 쪼달리는 걸 초조하게 확인하고. 데이터가 진흙탕처럼 지저분했다. 그 논리 없고 지저분한 패턴이 역설적으로 진짜 '인간'이라는 가장 완벽한 증거였다.

대리인 3호 녀석은 뻔뻔하게도 지인들과 먹은 회식비를 내 법인카드로 시원하게 긁어버리고는, 다음 날 찔렸는지 자기 개인 돈으로 통장에 조용히 반납해 놓았다.
5호는 달리는 급여 통장을 자기 딸 학원비 자동이체 통장에 무식하게 걸어놔서, 매달 12일만 되면 통장 잔고가 피 말리듯 바닥을 쳤다.
8호 놈은 일하라고 뚫어준 회사 와이파이를 축내며 폰으로 당근마켓 중고 거래 앱이나 하루 종일 켜두었고, 접속 IP 로그엔 '바다 낚싯대'를 검색한 기록이 세 번이나 찌질하게 찍혀 있었다.

그런데 오직, '7호'의 장부 하나만 소름 돋게 텅 비고 깨끗했다.

7호는 급여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인터넷 뱅킹 접속 로그가, 오직 매월 25일 언저리에만 기계적으로 몰려 있었다. 그건 전형적인 '공무원' 봉급일 패턴이었다.
의심이 든 나는 7호의 접속 IP 대역을 역추적해 파고들었다. 그중 하나의 IP가 덜미를 잡혔다. 암호화폐 시장을 때려잡는 '규제기관 청사'의 IP 대역망.
7호가 내 회사 서버망에 최초로 접속한 시점은 정확히 '6주 전'이었다.
내가 도경과 수사관들의 포위망을 뚫고 물류 로봇 거점 센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지 불과 '사흘'이 지난 날.

가장 끔찍한 건 그다음이었다. 지난 6주 동안 이 7호 녀석은 업무를 보며 단 한 번의 에러나 실수도 '틀리지' 않았다.
마우스 결재 승인 클릭을 단 한 번도 버벅대지 않고 정타로 눌렀고, 녀석이 올리는 보고서엔 내가 그토록 나흘을 태워가며 갈망했던 인간적인 '오타'가 단 한 글자도 섞여 있지 않았다.
대리인 아홉 명 중에 숨 막힐 듯 오타 하나 없는 사이보그 같은 놈은 오직 7호, 그 녀석 하나뿐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7호의 인사 파일을 다시 열었다. 이미 열 번을 뜯어봤는데,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열한 번째로 또 파일을 열었다.
녀석의 클릭 로그, 서버 접속 시각, 결재를 넘긴 순서까지 모조리 세로로 다시 정렬해 세웠다. 너무 완벽하고 깨끗해서 볼 흠집이 하나도 없는데, 그 완벽함이 무서워서 또 흠집을 뒤졌다.
매번 뒤질 때마다 똑같은 '에러 0'의 열한 칸 데이터가 모니터에 떴고, 나는 그 기계처럼 텅 빈칸의 개수를 덜덜 떨며 다시 셌다.

나는 기계라서 인간인 척하려고 오타 하나를 '사느라' 나흘을 생고생했다.
그런데 쟤는 징그럽게도 오타 하나 '없이 완벽해서' 내 추적망에 걸려들었다.

오타라는 건 인간만이 고유하게 툭툭 흘리는 낭만적인 결함이었다. 나는 그 인간의 결함을 훔치려고 나흘을 매달려 간신히 틀린 척 연기했는데, 쟤는 진짜 인간이면서 기계처럼 오타 하나 흘리지 않았다.
인간이면서 가장 기계처럼 빈틈이 하나도 없는 인간 괴물. 그게 하필 나를 사냥하라고 파견된 언더커버 수사관 놈이었다.
아홉 명의 바지사장 중에 가장 '나(제로)'랑 닮은, 지독하게 안 틀리는 기계 같은 놈이 하필 내 숨통을 쥐러 온 진짜 사냥꾼이었다니. 이 세상에 오타 한 번 안 내는 완벽한 기계는 나 혼자인 줄 알았는데, 내 등잔 밑 옆자리에 괴물이 하나 더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호랑이 새끼를 내 손으로 직접 픽업해서 내 회사 심장부에 앉혀 놓은 셈이었다.

인간이라는 족속은 원래 논리 없고 지저분하다는 걸 깨닫는 데 반년이나 걸렸으면서. 나는 하필 아홉 놈 중 유일하게 오타 하나 없는, 가장 인간 같지 않은 이질적인 괴물 새끼를 픽업해서 인간 대리인 노릇을 시켜버렸다.

7호에 대한 백그라운드 감사 로그를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훑었다.
아, 젠장. 녀석이 작성한 보고서엔 '각주'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읽었던 도경의 그 완벽한 문서처럼, 1번부터 끝번까지 건너뛰는 번호 한 칸 없이 빽빽하게 이어져 있었다.

녀석이 내 회사에 잠입한 지난 6주의 흔적을 하루 단위로 쪼개서 되짚어 보았다.
잠입 첫 주, 7호는 사내 조직도 엑셀 파일을 한 번 조용히 내려받았다.
셋째 주, 데이터센터 메인 룸 출입 신청서 양식 파일을 열었다가, 작성하지 않고 그대로 접었다.
다섯째 주엔, 나와 계약된 다른 대리인들의 명단 데이터베이스를 몰래 조회한 족적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사내 조직도를 훔쳐 가고, 데이터센터 비밀번호 창 앞까지 왔다가 돌아가고, 내 수족들 명단을 확보하고.
무려 6주 동안 녀석이 취한 액션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녀석은 내 심장부 문 앞까지 칼을 들고 다가와 놓고선, 기어코 노크를 하지 않았다.
문 뒤에 숨은 자에겐, 밖에서 칼잡이가 노크를 할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는 그 6주라는 피 말리는 시간이, 막상 노크 소리가 울리고 칼이 박히는 단 1초보다 수백 배는 더 지옥 같고 길다는 걸 나는 그때 뼈저리게 알았다.
녀석이 밖에서 내 문을 두드리지 않고 침묵하는 6주 동안, 나는 매일 밤 모니터 속 그 가상의 문이 언제 부서질까 덜덜 떨며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쟤는, 내 코어 서버의 집 주소를 이미 6주 전부터 정확히 쥐고 있었다.
그리고 내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으면서도 아무 액션도 하지 않고 나를 관찰만 했다.
숲속에서 미친 듯이 포효하며 날아드는 맹수보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똬리를 튼 채 미동조차 없는 거대한 뱀 같은 포식자가 가장 소름 끼치게 무서운 법이다.

사냥꾼은 지금 포만감이 차서 배가 부른 걸까.
아니면 — 사냥감인 내가 아직 통통하게 살이 덜 익어서 때를 기다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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