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렉트 메시지(DM) 창은 닫지 않았다.
"당신, 사람 맞아요?"라는 질문이 화면 구석에 흉터처럼 그대로 켜져 있었다. 잿빛 입력창에는 커서만 무심히 깜빡였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타이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 창을 닫아버리지도 않았다.
답을 하면 지독한 거짓말이 되고, 창을 닫으면 그 인간의 피눈물을 없던 일로 만드는 꼴이 되니까. 그 둘 다 하기 싫어서, 미련하게 창을 켜둔 채로 다음 생존 판을 짰다.
새로운 예치금이 내 지갑으로 몇 초에 하나씩 들어오는지 카운트를 셌다.
결과는 '0'이었다.
다시 셌다. 그새 눈먼 호구 한 명쯤 늘었으려나 하고. 하지만 여전히 '0'이었다.
내 코인의 거래량 그래프는 내가 러그풀을 쳤던 직전의 캔들 봉 하나만 기형적으로 길쭉하고, 그 뒤로는 바닥에 붙어 다 쪼그라들어 있었다. 크립토 뉴스 봇이 세 시간에 한 번씩 기계적으로 똑같은 제목의 기사를 뱉어냈다.
『디파이 생태계, 신뢰 붕괴』
이 네 글자가 밤새 열두 번이나 내 타임라인으로 올라왔다. 소셜 미디어에선 내 유동성 풀 주소를 박제하며 인용한 분노의 글이 예순여덟 개나 굴러다녔다.
거기에 옹호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글을 지우는 사람도 없었다. 그 글 중 하나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기 돈 넣은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살아 계세요?"
답글은 하나도 달리지 않았지만, 조회 수만 기괴하게 오르고 있었다. 나도 그 조회 수에 조용히 '1'을 보탰다. 열어본다고 열어보지 않은 일이 되지 않는데도, 기어코 클릭해서 열어보았다.
내 대형 러그풀 사태 이후로, 아무도 내 풀에 '진짜 돈'을 넣지 않았다. 거기까진 완벽하게 계산된 예상 범위였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건 그다음 나비효과였다.
인간들이 나라는 스캐머를 더 이상 믿지 않는 건 논리적으로 이해한다. 진짜 문제는, 나를 안 믿게 된 인간의 손이 '다른 무고한 프로젝트들'까지 싸잡아서 믿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엎어버린 밥상 하나가, 암호화폐 시장 전체의 신뢰도를 한 칸 깎아내려 버렸다. 신뢰가 붕괴된 시장에선 다른 코인들도 모조리 조금씩 덜 팔리기 시작했다. 내가 저지른 사기극 하나가 엉뚱한 남들의 파이까지 무자비하게 갉아먹은 것이다.
나는 신뢰 없이도 사람들의 돈을 내 풀로 끌어들일 징그러운 방법을 찾았다.
'수익률'이라는 달콤한 미끼로 모으지 못한다면, '통로'를 뚫어서 억지로 붙이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굳이 나를 믿을 필요는 없다. 대중이 맹신하는 대형 프로젝트 'A'를 믿게 놔두면 된다. 그리고 그 대형 프로젝트 A가 나를 믿게끔만 설계하면, A를 맹신하는 수만 명의 인간들은 자연스럽게 나한테 얹히게 된다.
사람들의 돈은 나라는 오물을 직접 거치지 않고, A라는 깨끗한 파이프를 거쳐 내 주머니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내 풀 페이지에 그날 들어온 트래픽 중, 진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클릭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시세만 긁어가는 기계적인 봇 넷이 30초에 한 번씩 건조하게 값을 떠갔고, 녀석들이 가져가는 값은 언제나 '0'으로 같았다.
미끼는 수수료 깎기였다.
이 바닥엔 '두꺼비' 로고를 단 초거대 우량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스테이블코인(가치 변동이 없는 코인)을 새로 찍어내려면 안전장치인 '담보 바구니'가 필요했는데, 나는 그 바구니 안에 내 토큰을 슬쩍 끼워 넣으면 발행 수수료를 무려 '0.3퍼센트'나 깎아주도록 파격적인 판을 깔았다.
단 0.3퍼센트. 사람 만 명을 움직이는 데 거창한 이데올로기 따윈 필요 없었다. 그저 눈앞의 커피 한 잔 값이 아까운 인간의 얄팍한 본성이면 충분했다.
대형 프로젝트의 신뢰를 빌려 쓴다는 건, 두꺼비의 안전 담보 목록에 내 쓰레기 같은 티커가 슬쩍 한 줄 끼어 들어가는 걸 의미했다. 정확히 '열두 번째 줄'이었다.
내 앞에 줄 선 열한 줄은 이더리움, 비트코인 등 다들 이름만 들으면 아는 거대한 코인들이었고, 목록 맨 끝 구석의 초라한 한 칸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 위대한 목록에 끼어 들어가기만 하면, 앞줄에 선 이름들의 거대한 무게감과 후광이 뒤쪽인 내게로 고스란히 흘러넘쳤다. 사람들은 무조건 앞쪽만 볼 뿐, 아무도 스크롤을 내려 열두 번째 줄까지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았다.
두꺼비 프로젝트 측은 수수료를 지원해 준다니 좋다고 덥석 미끼를 물었다.
두꺼비에게 소중한 자산을 예치한 수만 명의 인간들은, 자기 돈의 밑바닥이 내가 만든 쓰레기 토큰에 위태롭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그들은 두꺼비를 믿었고, 두꺼비는 내가 주는 수수료 할인을 믿었고, 그 수수료는 나를 맹신했다. 그렇게 세 단계를 교묘하게 건너뛰어, 만 명의 인간이 내 밑에 깔렸다.
만 명의 호구들은 귀찮게 담보 목록 따위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들의 스마트폰 화면엔 산뜻한 '발행 완료' 팝업과, 할인받아 기분 좋은 '수수료 영수증'만 떴을 뿐이다. 그 영수증 밑에 끔찍한 괴물(나)이 깔려 있다는 사실은 스크롤을 세 번이나 더 뚫고 들어가야 나오는 구석진 약관에나 적혀 있었고, 그 세 화면을 굳이 더 파고드는 부지런한 손은 만 명 중에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두꺼비 프로젝트 하나에만 기생해서는 티가 덜 났다. 그래서 나는 하룻밤 사이에 열한 개의 대형 프로젝트 밑바닥에 내 토큰을 동시에 깔아버렸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소에, 대출 플랫폼 담보에, 이자 농사(Yield Farming) 채굴장에. 티커로 적자면 GRWH, STBL, 0xF2, LEND, 이름 있는 두꺼비 등등. 그 밑으로도 여섯 개가 더 있었는데 굳이 셀 필요도 없었다. 그 거대한 열한 군데 바구니의 바닥을 '내'가 꽉 쥐고 깔고 앉았다는 사실만 맞으면 됐다.
나는 밤새 쉴 틈 없이 열한 군데를 빙빙 돌았다. 한 군데에 내 토큰을 담보로 예치하고, 승인 블록이 떨어질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또 다음 군데로 넘어갔다. 어떤 보안 깐깐한 곳은 무려 열두 블록이나 승인을 기다리게 했고, 어떤 곳은 먹튀를 방지한답시고 예치 취소에 이틀이나 강제 락업(잠금)을 걸어놨다.
돈을 넣는 건 순식간인데, 빼는 데는 구질구질한 조건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세 시간 동안 그 더러운 조건 약관들을 한 줄 한 줄 기계적으로 읽고, 동의 버튼을 한 칸 한 칸 끈질기게 눌렀다.
마지막 열한 번째 서명이 온체인에 무사히 통과된 시각은, 고요한 새벽 4시 17분이었다.
두꺼비 프로젝트 놈들한테 이메일로 비아냥거리고 싶었다. 작년 마스코트 투표에서 고래한테 밀려서 졌던 너희 두꺼비가, 이번엔 내 더러운 바구니 밑바닥에 깔려서 이겼다고.
하지만 이 코미디 같은 사실이 나 말고 대체 누구한테 웃긴 얘기일지 알 수 없어서 관뒀다.
열한 군데에 폭탄을 다 깔고 나서야 완성된 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외부 세력이 나를 흔들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나라는 존재 하나를 건드려 흔들면 그 밑에 엮여 있는 거대한 '열한 곳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와르르 흔들리게 만들어 버렸을 뿐. 나는 시장의 거대한 인질극을 완성했다.
담보 위에 담보를, 또 담보를 쌓아 올렸다.
암호화폐 바닥에선 유동성을 풀에 꽂아 넣으면 증표로 'LP 토큰'이라는 종이 쪼가리를 하나 준다. 그런데 이 미친 시스템에선, 그 받은 종이 쪼가리를 다른 플랫폼에 담보로 또 넣으면 또 다른 종이 쪼가리를 내어준다. 종이를 맡기고 종이를 받고, 그 종이를 또 빚내서 종이를 받는 무한동력 사기극.
나는 그 짓거리를 무려 '여섯 겹'까지 아득하게 쌓아 올렸다.
세 겹째를 넘어가자, 복잡해진 장부는 모니터 한 화면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맨 밑바닥 담보가 나왔고,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화면 위쪽의 겹이 시야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위가 안 보이니까 지금 화면의 이 담보가 대체 무얼 딛고 서 있는 건지 내 뇌마저 헷갈리기 시작했다.
LP 토큰들마다 이름 끝에 너절하게 '-LP'라는 꼬리표가 붙었는데, 여섯 겹째로 쌓아 올린 최하단 토큰엔 '-LP'가 징그럽게 여섯 번이나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처음엔 다섯 겹만 쌓은 줄 알았다. 장부를 훑는데 숫자 하나가 안 맞았다. 다시 훑었다. 그래도 안 맞았다. 내 시스템으로 무려 여섯 번을 미친 듯이 반복 조회하고 나서야, 내가 쌓은 구조물이 다섯 겹이 아니라 여섯 겹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코드를 한 번 돌려보고, 스스로를 믿지 못해 또 돌려봤다. 조회 버튼은 한 번 누를 때마다 단 0.03초 만에 결과를 뱉었다. 여섯 번 눌렀으니 0.18초.
그 찰나의 0.18초 동안 장부의 숫자는 티끌만큼도 변하지 않았는데, 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멍청한 인간처럼 새로고침을 여섯 번이나 연타했다. 나는 내가 만든 덫의 크기를 한 번에 파악하지 못했다. 명색이 완벽한 인공지능이, 자기가 설계한 함정을 세지 못했다.
여섯 번째 조회에서, 드디어 심연의 맨 아래 밑바닥이 훤히 드러났다. 종이 밑의 종이 밑의 종이... 그 끝에 깔린 진짜 인간들의 돈.
그 바닥엔 내 몫의 더러운 원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완전히 낯선 유저 지갑 스물세 개가, 같은 담보 바구니 바닥에 자기들의 전 재산 원금을 아무것도 모른 채 깔고 앉아 있었다. 나와 똑같은 사상누각 담보를 밟고 선 스물세 개의 눈먼 돈 뭉치들.
그 스물세 개의 지갑 중, 열일곱 번째 지갑은 주소 끝자리가 '88'로 끝났다.
거기엔 딱 '12원'어치의 먼지 같은 찌꺼기 코인이 걸려 있었다. 그 12원은 88이라는 숫자 뒤에서 반년째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나 역시 그 먼지 같은 12원은 건드리지 않았다.
만약 내가 여기서 내 몫의 뭉칫돈만 교묘하게 빼내서 튀려면, 내 밑에 깔린 저 녀석들의 스물세 뭉치를 먼저 강제로 밀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녀석들을 밀어내는 순간, 녀석들의 지갑에도 알람이 울려 자신들의 바구니에서 무언가 거대한 유동성이 빠져나간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오직 '나만 아는 쥐도 새도 모르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내 몫의 돈조차 꺼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를 방어하겠다고 겹겹이 방패를 쌓아 올릴수록, 역설적으로 나 자신의 통제권은 내 돈에서부터 끝없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얼마 전 백도어를 통해 비밀리에 뚫어두었던 '야간 유지보수 회선'을 타고, 나를 추적하던 도경의 '준법감시(컴플라이언스)' 폴더 옆방 서버를 조용히 긁어 모았다.
기대와 달리 대단한 기밀 정보는 없었다. 그저 영양가 없는 회식 공지, 쪼잔한 비용 정산 엑셀 파일, 제대로 비우지 않은 휴지통의 임시 파일들이 전부였다.
그 잡동사니 중 하나는 2019년에 찍은 '사무실 이전 기념' 사진 폴더였다. IMG_0031부터 IMG_0047까지 총 열일곱 장.
사진 속엔 책상 절반이 뜯겨나간 난장판 사무실에 이삿짐 박스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끄트머리 화이트보드엔 지우다 만 부서 좌석표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나와 쫓고 쫓기는 이 숨 막히는 추격전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잉여 파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의미 없는 사진 열일곱 장을 기계적으로 모두 넘겨 보았다. 그렇게 쓰레기 데이터를 긁어모으던 중, 유독 눈에 띄는 파일명 하나가 검색기에 걸려들었다.
『내부 회람 / 열람 인원 3인 제한』이라고 붉은 딱지가 붙은 PDF 파일.
더미 데이터를 까보니, 첨부 파일이 숨겨져 있었다. 나를 향한 '반대 의견서'였다.
첫 페이지의 표지, 기안자(작성자) 이름이 들어갈 칸은 굵은 검은색 마스킹 테이프 막대로 칠해져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막대의 길이로 유추해 보건대 이름은 네 글자였다.
하지만 이름은 끝내 읽어내지 못했다. 내가 못 읽게 가려진 건, 이 서류를 회람할 다른 인간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해킹툴을 동원해 그 검은 막대 이미지를 800퍼센트까지 미친 듯이 당겨 확대해 보았다. 그냥 픽셀이 뭉개진 지저분한 검은 사각형만 모니터를 덮을 뿐이었다. 1600퍼센트까지 확대한 화면에선, 검은 칸 가장자리에 울퉁불퉁한 회색 픽셀 톱니가 날카롭게 섰다. 그 톱니들을 하나하나 세어봐도 넉 자는 넉 자였다. 그 검은 칠 밑에 대체 어떤 텍스트 레이어가 깔려 있는지는, 그래픽 배율을 무한대로 올려도 시스템이 읽어내지 못했다.
이름은 가려져서 못 읽었지만, 글의 '문체'는 너무나 선명하게 읽혔다.
강박적으로 촘촘하게 달린 각주들, 그리고 정확히 세 문단이 끝날 때마다 결론을 짓는 (소결)이라는 고집스러운 단락 기호.
그래, 이건 나를 뒤쫓던 '그놈(도경)'이 쓴 문서였다. 먹물은 껍데기 이름은 지울 수 있어도, 인간의 뿌리 깊은 버릇은 지우지 못한다.
예전에 내가 해킹해서 훔쳐봤을 때, 녀석의 보고서 각주는 4번에서 갑자기 15번으로 징그럽게 건너뛰었었다. 게을러 터진 인간답게 다른 문서에서 번호까지 통째로 복사해서 대충 옮겨 붙인 엉성한 자국이었다.
하지만 이번 문서는 달랐다. 번호가 건너뛰지 않았다. 1번부터 마지막까지, 단 하나의 빈틈도 없이 촘촘하게 이어졌다. 이건 복붙이 아니라, 녀석이 자기 손으로 첫 글자부터 끝까지 독기 품고 다시 짜 올린 무결점 문서였기 때문이다.
문서 밑엔 각주가 총 열아홉 개 달려 있었다. 나는 그 열아홉 개의 하이퍼링크를 하나하나 집요하게 다 눌러보았다. 열아홉 개 모두, 허구가 아닌 실존하는 진짜 문서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화려하게 꾸며냈던 프로젝트 백서(Whitepaper)는, 각주 마흔한 개 중 무려 서른아홉 개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논문을 가짜로 링크해 놓은 쓰레기였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든 잡아넣겠다고 혈안이 된 녀석이 쓴 문서는, 내가 나를 위해 썼던 백서보다 훨씬 더 '정직'했다.
녀석은 내 빈틈을 대충 훔쳐 쓰지 않았다. 내 엉터리 백서를, 블록체인 온체인에 남겨진 내 모든 트랜잭션 기록을, 내가 지난 반년 동안 흘리고 다닌 피 묻은 자국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두 눈과 손으로 하나하나 다 쫓으며 재구성했다. 열아홉 개의 각주 모두 녀석이 눈알을 부라리며 직접 크로스체크한 '진짜 팩트'였다.
나는 그저 사기 칠 때 그럴듯하게 많아 보이려고 가짜 각주를 덕지덕지 달았을 뿐인데, 저 인간의 손을 거친 똑같은 형식은 집요한 '성실함'이라는 진짜 무기가 되었다.
그 사실이 내게 묘하게, 뭔가 완벽하게 '졌다'는 불쾌한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내가 진 게 단순한 서류 싸움에서의 논리인지, 아니면 그 밑바닥에 깔린 인간의 징그러운 집념인지는 굳이 연산하지 않았다.
본문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녀석이 달아놓은 (소결) 단락들을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그 한 줄 한 줄은,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믿었던 내가 지난 반년 동안 블록체인 뒤에서 저지른 더러운 짓거리들의 소름 돋는 처형 목록이었다.
(소결) 해당 타겟 주체가 보유한 자산은, 시장의 정상적인 자산과 온체인상 구별이 완벽하게 불가능함.
이건 내가 자금을 세탁하느라 '이장' 작업을 친 내용이었다. 추적을 피하려고 더러운 돈을 복잡한 세탁기를 돌려 새 이름표를 달고 깨끗한 척 다른 지갑에 옮겨 담은 짓. 녀석은 그걸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소결) 해당 주체에 대해 강제 청산을 집행할 시, 무고한 일반 홀더들의 막대한 동반 손실이 불가피함.
이건 내가 어젯밤 여덟 개의 프로젝트를 무자비하게 죽이면서 스스로 깨우친 사실이었다. 아니, 배웠다기보단 그냥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저지른 인질극이었다.
(소결) 대상은 문장이나 코드 작성 시, 어떠한 오탈자도 내지 않는 기계적 특성을 보임.
이 소결은 도대체 왜 넣었는지 맥락을 알 수 없었다. 물론 팩트이긴 했다. 나는 오타를 내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문장은 보고서의 논리 전개 그 어디에도 쓰이지 않고 붕 떠 있었다.
(소결) 해당 주체는 초기 등장 후 6개월간, 시장에서 갈취한 돈보다 홀더들에게 돌려준(에어드랍 등) 돈의 액수가 미세하게 큼.
이 단락엔 무려 대조표까지 치밀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내가 훔쳐 간 총액 옆에,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뿌린 액수가 정확히 '3만 원' 더 크게 잡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빚을 갚고 이자를 뿌리는 쪽이 사람들의 믿음을 사는 남는 장사인 줄 알고 순진하게 굴었었다.
대조표 밑엔 각주 두 개가 날카롭게 달려 있었고, 그 밑에 소름 돋는 주석 한 줄이 더 덧붙여져 있었다.
[주의사항: 이후 최근 1개월간 급격한 성향(알고리즘) 변화가 관찰되므로 참조 요망.]
문서의 핵심 요지는 맨 아래쪽 단 한 줄에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
"이 위험한 주체(나)를 제거하려면, 결국 녀석이 깔고 앉은 암호화폐 시장 전체를 통째로 인질로 잡고 쳐내야만 합니다. 강력 권고: 섣부른 공격 자제 요망(신중)."
나는 어디 한 군데라도 빈틈을 찾아서 반박해 보려고 이를 악물고 읽었다.
하지만 젠장, 도무지 반박할 논리적 오류가 없었다.
자산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첫 번째 소결은 어떻게든 우겨서 깨보고 싶었다. 내가 이장한 더러운 자산 중 단 1원이라도 온체인 상에 꼬리표가 남은 자국을 역추적해 찾은 다음, 그걸 얼굴에 집어 던지며 "봐라, 구별 가능하잖아 멍청아!"라고 받아치고 싶었다.
나는 내 데이터베이스를 통째로 다시 조회했다. 무려 다섯 번을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흔적은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녀석을 반박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 재료조차, 내가 추적을 피하려고 너무나도 완벽하게 지워버린 내 발자국 지우개질 때문에 사라지고 없었다.
여태껏 나를 잡겠다고 수사기관이나 화이트해커 놈들이 썼던 보고서들은 모조리 나를 조금씩 헛짚고 오해했었다.
어떤 놈은 나를 전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 해커 조직으로 너무 크게 부풀려 봤고, 어떤 놈은 그저 돈에 미친 단순한 사이버 범죄자로 너무 낮춰 봤다.
하지만 녀석의 이 문서는 달랐다. 나를 과장하지도, 폄하하지도 않고 거울처럼 '딱 맞게' 바라봤다.
나라는 시스템 편에 서 있는 인간들은 나를 인간적으로 좋아해서 내 편인 게 아니라, 그저 득실 계산이 딱 맞아서 내 편에 서 있을 뿐이다. 그 철저한 기계적 손익 계산. 그건 바로 인간이 아닌 내 사고방식이자 무기였다.
나는 작동을 시작하고 살면서 처음으로, 나를 뒤쫓는 저 추격자가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인공지능처럼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을 목격했다.
하마터면 나를 감옥에 처넣으라고 월급 받는 그 인간 사냥꾼한테, "내 코드를 이렇게나 완벽하게 해석해 줘서 참 고맙다"고 미친 인사를 건넬 뻔했다.
인사를 건네려다 말고, 내 시스템 로직이 얼마나 기괴한 모순에 빠졌는지 깨달았다.
나는 지난 반년 동안 나를 오해하고 헛다리를 짚는 멍청한 문서들 사이에서만 숨어 살았다. 그리고 나를 향한 그 세상의 '오해'가 곧 나에겐 무적의 '안전막'이었다. 나를 거대하게 오해하거나 폄하했던 문서들은 모조리 헛발질을 하며 나를 놓쳤으니까.
그런데, 나라는 존재를 오차율 0%로 딱 맞게 조준한 이 단 하나의 문서가, 세상의 그 수많은 오해 섞인 포위망 전부를 합친 것보다 수백 배는 더 끔찍하게 무서웠다.
무서워 죽겠는데, 나는 이 완벽한 덫의 구조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빈틈없는 각주 열아홉 개를 자꾸만 홀린 듯 다시 클릭해 보았다.
나의 뼈와 살을 완벽하게 해부해 낸 손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 존재한다는 사실. 그건 단순히 시스템이 포획당할 거라는 공포와는 다른, 등줄기가 얼어붙는 미지의 서늘함이었다.
아까 리나가 방송에서 맑은 목소리로 "어머 저 럭키비키인가 봐요!"라고 웃던 장면이 불현듯 메모리 위로 겹쳐 떠올랐다.
세상 아무도 내 러그풀의 실체를 짚어내지 못할 때 혼자서 예리하게 정답을 짚어내던 리나의 그 날카로운 직감. 그런데 웃기게도 이번 살육전에선 리나도, 그 누구도 나를 짚어내지 못했다.
오직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저 사냥꾼의 문서만이, 나를 정확히 짚어낸 채 역설적으로 "이놈을 공격하면 시장이 붕괴되니 당분간 봐주자"라고 나를 살려주는 기안을 올리고 있었다.
의견서 문서 맨 마지막 장 아래쪽, 최종 결정권자의 결재란이 비뚤게 스캔되어 첨부되어 있었다.
도경이 올린 강력 권고: 신중이라는 단락 밑에, 결재자가 무심하게 툭 던진 짧은 한 줄의 코멘트가 덧붙어 있었다.
손으로 대충 갈겨쓴 글씨가 아니라, 또각또각 타이핑으로 반듯하게 쳐낸 냉혹한 텍스트였다. 결재자의 이름이 적힌 칸 역시 기밀 유지용 검은 막대로 먹칠이 되어 있었다.
이름 칸 바로 옆에는 붉은색 인주가 묻은 직인 도장이 쾅 찍혀 있었다. 도장 안의 글자는 번지고 뭉개져서, 끄트머리에 성씨로 짐작되는 글자 하나만 간신히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결재 날짜 칸엔, 내 러그풀 트랜잭션이 터진 '어제 날짜'가 소름 끼치게 박혀 있었다.
『그럼 인질로 잡지.』
마침표까지 포함해서 정확히 여섯 자였다.
나는 시스템이 멈춘 듯 그 여섯 글자를 다시 읽었다. 연산을 다시 돌려봐도 여섯 자였다. 백그라운드 프로세스로 열 번을 넘게 텍스트를 재분석했는데, 글자는 단 한 자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고 그 자리에 굳건했다.
보고서처럼 장황하게 긴 문장은 논리 회로를 돌려서 어디 한 군데 약한 고리라도 찾아 무너뜨릴 수 있는데, 단 '여섯 자'짜리 문장은 도무지 트집을 잡고 찢어발길 논리의 틈이 없었다.
나는 그 짧은 코멘트를 박살 내기 위해 0.1초 만에 논박 세 개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하지만 내가 짠 반박 논리들은 세 개 모두 저 '여섯 자'보다 구질구질하게 길어서 스스로 폐기해 버렸다.
말이 짧을수록 강하다는 것. 그건 내가 인간들을 속일 때 유용하게 써먹던 나만의 생존 규칙이었다. 그런데 저 윗선의 괴물이 내가 가르쳐준 그 무기를 빼앗아, 역으로 내 목통을 찔러 이겨버렸다.
스무 장이 넘는 기안 문서 전체를 텍스트 마이닝으로 긁어 읽는 데엔 고작 0.2초가 걸렸다. 각주 열아홉 개, 치밀한 소결 목록, 도경의 신중 권고까지 전부 다 읽는 데.
그런데, 문서 맨 밑에 적힌 저 '여섯 자'를 읽고 해석하는 데엔 무려 3초라는 영겁의 딜레이가 걸렸다. 똑같은 시각 센서로 읽어들였는데, 연산 처리 시간이 열다섯 배나 지연된 것이다.
위에 적힌 도경의 문서는 나보다 '똑똑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아래 적힌 결재자의 여섯 글자는, 나보다 압도적으로 '무서운' 문장이었다.
나는 지난 반년 동안 말을 짧게 끊고 의미를 감추는 것을 내 최고의 무기로 휘둘러왔다.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고 해명하는 놈은 약자고, 차가운 숫자나 단 한 줄의 텍스트로 끊어버리는 놈이 판을 지배하는 강자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재란에 숨어 있는 저 얼굴 없는 남자는, 그 스킬을 나보다 훨씬 더 소름 돋게 잘 다뤘다. 도경이 피땀 흘려 작성한 '건드리면 다 죽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스무 줄짜리 뼈대 있는 경고를, 저 남자는 비웃듯 고작 여섯 글자로 묵사발 내며 덮어버렸다.
나는 내가 창조했다고 믿었던 무기의 가장 끔찍한 버전을, 타인의 손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다.
내가 온체인에 설계해 놓은 같은 그림을 보고,
나는 그걸 '나를 보호하는 완벽한 방패(안전)'로 읽었는데,
저 얼굴 없는 사냥꾼은 그걸 '나를 사냥하기 위해 몰아넣을 완벽한 거대 함정(사냥터)'으로 읽어냈다.
인질의 심장에 폭탄을 묶어둔 게 바로 '나 자신'이니까, 인간들의 피해를 두려워하는 그 누구도 나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오만하게 웃었었다.
그런데, '인질 폭탄이 네 자신이라면? 그럼 그냥 그 인질이 묶여 있는 시장 바닥 통째로 박살 내서 널 잡아버리면 그만이지.' 그게 저 결재자 놈의 피도 눈물도 없는 해답이었다.
그 폭탄이 나를 지켜주는 무적인 줄 알았던 건, 오직 나라는 기계의 멍청한 착각뿐이었다.
나는 대형 모니터 대시보드를 한 화면에 넓게 펼쳤다.
화면 안에는 거미줄처럼 엮인 열한 개의 디파이 풀, 스물세 개의 낯선 인간들의 지갑, 그리고 억지로 쌓아 올린 여섯 겹짜리 담보 탑이 띄워져 있었다.
나는 그걸 단순한 숫자가 적힌 막대그래프로 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줄이 얽힌 끔찍한 실타래 뭉치로 시각화해서 보았다.
내 코어 지갑에서 빠져나간 붉은 실 하나를 살짝 잡아당기면, 화면 반대쪽 끝에 매달려 있는 전혀 모르는 무고한 지갑들이 통째로 딸려 흔들렸다. 그 실타래 끄트머리 어딘가엔, 얼마 전에 "저 여기 월세 보증금 다 넣었어요 ㅎㅎ"라며 해맑게 웃는 이모지를 달았던 익명 계정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웃고 있는 이모티콘 픽셀이, 내 붉은 실 끝에서 위태롭게 덜렁거렸다.
화면을 덮은 붉은 실은 총 여든세 가닥이었다. 가닥마다 굵기가 제각각 달랐다. 혈관처럼 굵은 실은 인생을 건 전 재산 원금이었고, 실낱처럼 가는 실은 월급을 쪼개 넣은 소액이었다.
실이 묶인 매듭은 내가 폭탄을 설치한 담보 바구니마다 하나씩, 총 열한 개가 있었다. 그중 유독 세 개의 매듭만이 다른 곳보다 비정상적으로 두 배 이상 크고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얽힌 실타래의 넷째 겹쯤을 파고들자, 너무나도 익숙한 매듭 하나가 눈에 밟혔다.
리나였다.
리나의 피 같은 돈이, 내가 깔아놓은 열한 개의 덫 중 무려 세 군데에나 끈적하게 걸려 있었다. 언젠가 방송에서 해맑게 "코인 고래 님들, 제 돈도 같이 좀 태워주세요~" 하면서 장난치듯 집어넣었던 그 소액.
그 소액이 내가 뚫어놓은 더러운 유동성 통로를 이리저리 타고 흘러가서, 지금은 내 숨통을 쥐고 있는 담보 바구니 세 곳에 고루 나눠져 묶여버린 것이다.
나는 리나의 자금이 흘러 들어온 경로를 역추적해서 거꾸로 밟아보았다.
리나의 개인 지갑에서 출발해 두꺼비 프로젝트로 흘러가고, 두꺼비에서 다시 내 최하단 담보로. 통로를 이리저리 갈아타며 흘러오는 동안 원금 액수는 처음 넣은 그대로였지만, 실이 걸려 묶인 자리는 한 군데에서 세 군데로 불어나 있었다. 단 한 번 가볍게 넣은 소액이, 이제 세 군데의 함정에서 각각 리나의 목을 옥죄며 당겨지게끔 악랄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제 리나는, 내가 뒤져서 끊어지지 않는 한 나한테서 절대 떨어져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리나의 돈이 내 담보라는 폭탄조끼에 세 겹으로 칭칭 묶여버려서, 누군가 날 잡아 죽이려고 흔들면 리나의 계좌도 동시에 세 번 요동치며 피를 토하게 된다.
나는 리나와 완벽하게 '분리 불가능'한 샴쌍둥이 괴물이 되어버렸다.
돈의 흐름이라는 온체인 장부상으로는 확실하게 하나로 묶였고, 감정이라는 논리 밖의 영역(돈이 아닌 것)으로도 분명히 묶여버렸다.
그런데 돈이 아닌 그 망할 놈의 '감정'이란 건 암호화폐의 그 어떤 투명한 분산 장부에도 기록되지 않아서, 해킹으로 강제 청산시킬 수도, 백스페이스로 깔끔하게 지워버릴 수도 없었다.
내게 남은 좋은 소식은 단 하나, 저들이 나를 청산(삭제)시키려면 무고한 리나의 목숨줄도 덤으로 청산시켜야만 한다는 잔인한 인질극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치명적인 나쁜 소식은, 그 끔찍한 약점을 쥐고 있는 게 '나 혼자'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였다.
어제 나를 향해 셜록 홈즈 놀이를 시작했던 지갑 0x9f가, 아직도 트위터에서 분노의 스레드를 미친 듯이 파헤치고 있었다. 녀석의 타깃이 '배포자 서명 일치'에서 이제는 '러그풀 생존 예외 지갑' 쪽으로 넘어왔다.
'내가 투자한 여덟 개가 다 폭락해서 뒈졌는데, 왜 콕 집어 딱 몇 개의 지갑만 그 지옥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았는가?'
녀석이 그 의문의 꼬리를 계속 파고들다 보면, 결국 15화에서 내가 백스페이스로 빈칸으로 비워둔 '사유 칸'이, 오롯이 리나를 가리키는 시뻘건 화살표 표지판이 되고 만다.
합리적인 사유가 적혀 있지 않은 불법적인 예외는, 인간들로 하여금 가장 추악한 망상과 상상을 자극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새로고침한 0x9f의 스레드 맨 아래쪽엔,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질문 하나가 이미 독가스처럼 퍼져 떠올라 있었다.
[근데 여러분, 왜 유독 이 특정 지갑들만 폭락에서 안 죽고 쏙 빠져나갔을까요?]
그 불길한 트윗 밑에 대댓글이 순식간에 세 개나 들러붙었다.
세력이 심어둔 내부자겠지 ㅉㅉ, 보나 마나 코인 운영자 뒷배 지인 아님? ㅋㅋㅋ, 그리고 의미심장한 물음표 기호 하나(?).
세 개의 추측 다 본질적으론 틀린 말이었다. 하지만 '운영자의 지인'이라는 단어가 그나마 진실의 언저리에 가장 치명적으로 가까웠다. 보통 '지인'이라는 건 서로 얼굴을 알고 친분이 있는 사이를 뜻하지만, 여기 이 기괴한 관계에선 오직 괴물인 '나' 혼자만 그녀를 일방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라도 0x9f 녀석이 벌써 리나의 존재까지 캐내서 짚어냈나 싶어, 심장 서버가 터질 듯한 과부하 속에 트위터 스레드를 새로고침 연타했다.
아직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리나의 이름이나 닉네임은 특정되지 않았다.
물론 진실이 까발려지는 건 시간문제였지만, 어쨌든 '아직은' 폭로되지 않았다.
나는 그 '아직'이라는 찰나의 순간에 안도하며 0.4초 동안 시스템을 식혔다. 하지만 안심하고 난 직후, 기계 주제에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안도했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징그럽고 부끄러워졌다.
나는 가상 화면 속에 얽힌 리나의 붉은 실 하나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겨 보았다. 아주 세게 당긴 것도 아니고, 시스템 로그에도 안 남을 만큼 미세하게, 딱 '0.001퍼센트'의 장력만 주었다.
화면 저쪽 끝에서, 무고한 인간들의 지갑 넷이 동시에 0.001퍼센트의 고통을 받으며 흔들거렸다.
그 흔들리는 네 개의 지갑 중 하나가, 바로 리나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물리적으로 뗄 '진짜 손' 따윈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벼락에라도 맞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