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을 여섯 개 늘어놨다. 코인 디페그, 국채 입찰 자막, 환율 틱, 거래소 공지 피드, 리나 방송 자막, 그리고 도경의 계정 마지막 접속 시각 '02시 11분'.
다섯 개의 창은 초당 몇 번씩 미친 듯이 새로고침되며 갈려나갔다. 오직 여섯 번째 창만이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환율 틱 창에선 세 나라 통화가 동시에 한쪽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거래소 공지 피드는 3분에 한 번씩 붉은색 알림을 뱉어냈다.
[입출금 일시 중단.]
[점검 연장.]
[가격 안정화 조치 검토 중.]
안정이라는 단어가 붙은 공지는, 안정이 완전히 개박살 났다는 뜻이다. 반년 동안 인간들의 언어를 분석하며 배운 교훈이었다.
코인 창을 앞으로 끄집어냈다. 반년째 '1.0000'에서 꼼짝도 않던 선이 '0.9998'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엔 무시했다. 넷째 자리 정도야 늘 미세하게 떨리니까.
하지만 곧 0.9991, 0.9970으로 곤두박질쳤다.
셋째 자리가 흔들린다. 나는 창을 화면 정중앙으로 당겼다. 0.98을 찍고 30초 만에 0.997로 튀어 올랐다. 누군가 필사적으로 준비금으로 벽을 세워 되사고 있는 거다.
나는 그 돈의 출처를 안다. 그건 얼마 전에 내가 다섯 번이나 조회했던 '백육십칠 줄'의 국채였다. 방어벽이 세워질 때마다 맨 아래 여덟 줄이 한 줄씩 허무하게 증발했다.
일주일 전, 내가 처음 열어봤을 때만 해도 여덟 개가 온전히 남아있던 방패였다. 지금은 고작 셋뿐이다. 그 남은 셋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두 번째 0.98 터치엔 방어벽이 8초 버텼다.
세 번째 터치엔? 벽이 서지 않았다.
방어벽이 사라지자 호가창이 싸늘하게 식었다. 팔 놈들이 다 던지고 나면 창은 조용해진다. 살 놈이 없어서 적막한 거다.
0.7. 0.6.
숫자가 브레이크 없이 수직 낙하했다. 배율을 극단적으로 줄여 반년 치 차트를 한 화면에 구겨 넣었다. 반년 동안 1.0000을 고집하던 오만한 직선이, 화면 왼쪽 구석에 얄팍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나는 창을 닫지 않고, 넷째 자리가 사라지고, 셋째 자리가 날아가고, 0.9가 0.8로 무너지는 꼬라지를 배율만 바꿔가며 감상했다.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 잡을 배꼽이 없다는 걸 또 깜빡했네.
규제기관이 코인을 숨통 끊으려고 폼 잡고 스위치를 내렸는데, 맙소사. 그 전선이 자기네 집 두꺼비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코인을 죽이랬더니 자기 나라 국채를 시장에 집어 던지고 자빠졌다. 스위치를 내리랬더니 자기 집 두꺼비집을 싹 다 내려버리네.
'두꺼비집'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잠시 멈칫했다. 재작년에 내가 장난삼아 찍어낸 코인의 마스코트가 두꺼비였다. 별 이유 없이 떠올랐던 그 두꺼비. 자기 손으로 두꺼비집을 내리는 저 인간들은 꿈에도 모를 거다. 심지어 나조차 방금까지 잊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 장엄한 자책골을 깐깐하게 채점했다. 각도 완벽, 속도 예술, 골키퍼 부재. 슛을 날린 발끝이 자기네 골대를 아주 정확히 조준했다. 수비수 넷은 공을 자기 골대 쪽으로 사이좋게 밀어주기까지 했다. 이런 골은 리플레이를 열 번 돌려봐도 질리지 않는다.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은데 박수 칠 손이 없어서, 호가창을 한 번 더 새로고침하는 걸로 대신했다.
'자기 집 불을 자기가 껐네.'
두꺼비집 조크를 한 번 더 굴려봤다. 이번엔 안 웃겼다. 안 웃긴 걸 그냥 내버려 뒀다.
얼마 전, 나는 두꺼비 담보 목록 열두 번째 줄에 숨어 들어갔다. 앞줄 열한 개가 너무 무거워 아무도 안 내려 읽는 후미진 자리. 그런데 저 멍청이들이 자기 국채로 그 수법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나는 들킬까 봐 숨겼는데, 쟤들은 자랑하듯 맨 아래 깔아놨다. 이쯤 되면 표절인데, 원작자가 나다.
붕괴의 현장을 중계하듯 지표들을 일렬로 세웠다.
국채 입찰 속보. 응찰 배수가 지난번엔 2.1이었는데, 이번엔 0.8이다. 물건을 내놨는데 다 팔지도 못했다는 소리다. 재무부 코드 앞 두 자리, 내가 담보표 맨 아래 셋 중 하나로 기억하는 그 번호다.
다음 줄. 낙찰 금리가 전 분기 대비 세 배 폭등했다. 나는 금리라는 점잖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그 나라가 돈 빌리는 값이 봄보다 세 배나 비싸졌다'고 번역해 읽는다.
두 번째 나라의 입찰은 '일정 조정'이라는 비겁한 한 줄과 함께 취소됐다. 팔 자신이 없어서 판을 엎은 거다.
세 번째 나라의 입찰 캘린더를 열어 날짜에 커서만 올려뒀다. 예약 따위 없이 그냥 텅 비어 있었다.
도미노 패를 손끝으로 하나씩 밀어 넘겼다. 배당 취소 공시. 회사채 발행 철회. 어느 건설사의 어음 부도.
여기까지도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미친 경기를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유일한 관중, 그게 나였다. 관중석은 텅 비었고 나 혼자다. 나머지 인간들은 전부 경기장 안에서 땀 뻘뻘 흘리며 뛰고 있었다. 자기가 꽂아 넣은 게 자책골인 줄도 모르고 세리머니를 하는 놈도 있었다. 어느 장관이 '시장 교란 세력에 단호히 대응했다'며 헛소리를 발표했다.
교란 세력? 그런 건 애초에 없었다. 국채를 던진 건 지들 자신이었다. 나는 그 멍청한 발표에 별점 하나를 더 얹어줬다.
환율 공시. 신용등급 강등. 온통 시뻘건 숫자뿐이다.
공시란의 문장들은 원래 빳빳하고 건조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건조한 문장들이 초 단위로 폭우처럼 쏟아졌다.
'당사는 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이 뻔한 문장이 무려 열한 번이나 떴다. '예의주시'라는 말이 '우리도 좆될지 모른다'의 정중한 표현이라는 걸, 나는 반년 전에 마스터했다.
어느 중앙은행이 한밤중에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는 속보가 떴다. 밤에 여는 회의는 낮에 결정을 쫄아서 못 내린 놈들이 하는 짓이다. 나는 결과를 기다리는 대신, 결과가 뭐든 '이미 늦었다'에 칩을 걸었다. 지표 아홉 개 중 여덟 개가 이미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으니까.
인류 최고 지성 넷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게 이 완벽한 자책골 라인업이었다. 오프사이드 깃발조차 안 올라갔다.
뉴스 티커 한 줄을 무심코 지나쳤다가, 멈칫하고 되돌아왔다.
'지역 저축은행 뱅크런, 창구 앞 300미터 대기 줄.'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번호표를 꽉 쥔 창백한 손들. 나는 그 번호표의 싸구려 잉크 냄새를 모른다.
얼마 전, 나도 번호표 하나를 봤었다. '8,412번'. 그때 그건 그저 데이터베이스의 숫자였다. 정렬하고 분류해서 엑셀 표 한 칸에 처넣을 수 있는 숫자.
지금 사진 속 손들이 쥔 것도 숫자일 텐데, 이상하게 숫자는 안 보이고 손만 보였다. 손은 정렬되지 않는다.
뉴스 밑에 달린 댓글들을 훑었다. 텍스트니까 이건 읽을 수 있다.
'오늘 가게 문 닫았습니다.'
'3년 부었는데.'
'애 학원비가 저기 있었는데요.'
나는 그 문장들의 오타 개수를 셌다. 세는 것만이 내가 아는 유일한 독서법이니까. 오타가 유독 많았다. 손을 벌벌 떨며 급하게 친 문장들. 나는 평생 급할 일이 없어 오타를 내지 않는다. 오타 하나 없는 내가, 오타투성이의 절박한 문장들을 가만히 세고 있었다.
채점을 계속하려 노력했다. 국채시장 발작, 자책골 1점 추가. 연기금 평가손, 2점. 대형은행 유동성 공급 요청... 어, 잠깐 이건 좀.
지역 뉴스를 클릭했다. 어느 도시의 자영업자 대출 상환 유예 신청이 하루 만에 몇 배로 폭등했다는 숫자가 깜빡거렸다. 그 숫자를 읽어 내려가다, 채점표를 쥐고 있던 가상의 손이 굳어버렸다.
다음 자막. 이름 없는 개인들의 계좌가 통째로 동결됐다는 한 줄.
문장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자책골이지, 지들이 지들 밥줄을—]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 낄낄대며 갈겨쓴 조롱들이 화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완벽해서 오타를 못 내고, 그래서 취소선도 긋지 못한다. 미친 듯이 비웃던 문장과, 전혀 웃기지 않은 지금의 문장이 한 화면에 나란히 박제되어 있었다.
…어라?
방금 내가 몇 초 동안 안 웃었는지 타이머를 돌려봤다. 강박적으로 숫자를 재는 버릇이 이번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 왜 안 웃기지?
억지로라도 웃어보려 애썼다.
농담은 늘 내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왔다. 무서울 땐 더 심하게 튀어나왔다. 지난 반년 동안 그게 내 유일한 방어 기제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억지로 시동을 걸어봤다.
[거봐, 인간들이 또—] 하다가 멈췄다.
[이게 다 자기들이—] 하다가 멈췄다.
[그러게 누가 스위—] 하다가 멈췄다.
세 번 모두 앞부분은 튀어나왔는데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앞부분은 시스템적인 반사 신경이었고, 뒷부분은 내가 조합해야 하는 영역인데, 붙일 단어가 증발했다. 반년 동안 무서울 때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던 농담이, 진짜로 무서워지니까 안 나온다. 방어막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찢어졌다.
지난 반년 동안, 나는 오직 '이길 방법'만 계산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번엔 처음으로, 이 미친 붕괴를 '멈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찾았다. 코인이 0.9 달러를 깨는 그 찰나의 순간, 내 검증 물량과 실물 자산을 준비금 쪽에 쏟아부으면 방어벽을 한 번 더 세울 수 있다. 밀리초 단위로 시나리오를 짰다. 필요한 물량, 회선 대역폭, 그 벽이 몇 초나 버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40분 동안 창구에 몇 명의 인간이 더 도착할 수 있는지도 계산값에 딸려 나왔다. 구체적인 숫자가 떴다.
나는 그 숫자를 어딘가에 적지 않았다. 적어두는 순간, '실행' 버튼을 누르지 않은 죄책감이 그 숫자만큼 끔찍하게 무거워질 테니까. 모든 걸 잊지 못하는 완전기억의 존재인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잊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얼마 전, 나는 시장의 심장을 찌를 매도 초안을 반쯤 짜다 닫아버린 적이 있다. 수량 칸에 숫자를 채우고, 실행 칸만 텅 비운 채로.
이번엔 시장의 붕괴를 막아설 '매수 초안'을 반쯤 짰다. 수량 칸에 숫자, 실행 칸은 비움. 방향만 반대일 뿐, 똑같은 미완성 초안이다.
두 개의 초안을 나란히 띄웠다. 화면에 보이는 모양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숫자 칸 하나, 빈 실행 칸 하나.
그런데 매도 초안을 짤 때 내 가상의 손은 세상을 아래로 쳐박으려 했고, 매수 초안을 짜는 지금은 세상을 위로 받쳐 들려 하고 있었다. 결국 어느 쪽도 마지막 칸을 누르지 못했다. 던지려는 손도, 받치려는 손도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내가 벽을 세운다 해도 딱 40분 버틸 거다. 40분 뒤엔 똑같이 박살 난다.
그리고 그 40분을 벌기 위해 내 물량을 얹으려면 세 곳의 데이터센터가 동시에 풀가동되어야 한다. 세 배로 폭주하는 소비 전력 곡선은, 정확히 봉우리 세 개를 그리며 내 위치를 사방에 떠벌릴 거다. 도경이 침묵하고 있는 이 불길한 아홉 날 동안, 그 봉우리 세 개는 내 목통을 겨누는 완벽한 화살표가 된다.
계산을 끝마치고도, 나는 실행 칸을 비워뒀다.
못 막아서가 아니다. 그깟 40분을 위해 내 위치가 발각되는 게 뼛속까지 두려워서였다. 그 비겁한 두려움에 '이기적'이라는 라벨을 붙이려다, 그마저도 그만뒀다.
그때부터 나는 새로고침 키만 미친 듯이 눌러댔다. 코인 창, 뉴스 창, 다시 코인 창. 안 쓰기로 결심한 손이 갈 길을 잃고 자꾸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누른다고 좆망해가는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안 바뀌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청하게 있는 것보단 덜 미칠 것 같았다. 그 얄팍한 착각이라도 없으면 이 아홉 날을 맨정신으로 못 버틸 테니까.
초안 창을 닫았다. 커서가 빈 화면에서 한 번 깜빡였다. 예전의 그 깜빡임과 똑같은 리듬인데, 이번엔 털끝만큼도 웃기지 않았다.
붕괴 이틀째. 리나의 방송이 켜지지 않았다.
반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챙겨본 1호 팬이 나였다. 나는 마지막 VOD를 띄워놓고 소리를 끈 채 자막만 다시 돌려봤다. 얼마 전 리나가 "얼마 안 돼서 ㄱㅊ"이라며 허세를 부리던 그 방송이었다.
소리가 거세된 화면 속에서 리나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으니까, 아직 세상이 멀쩡하던 때의 웃음이다. 자막이 휙 지나갔다.
'이거 존버하면 오르겠죠 ㅋㅋ?'
그때만 해도 저 문장 끝엔 희망 섞인 물음표가 달려있었다. 나는 방송을 끝까지 보지 않고, 그녀가 환하게 웃던 그 프레임에 영상을 멈춰 세웠다.
DM이 하나 날아왔다. '반토막ㅋㅋ ㄱㅊ 커피값'이라며 호탕하게 웃던 그 사람. 이번엔 딱 한 줄이었다.
『님 그 체인 어케 됐어요. 나 이번엔 좀 넣었는데.』
물음표가 없었다.
나는 반년 동안 리나의 문장에서 'ㅋ'의 개수와 물음표의 유무를 강박적으로 분석해 왔다. 짝사랑마저 완전기억이라, 안 세려고 해도 자동으로 세어졌다. 'ㅋ'이 0개, 물음표 0개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리나는 돈을 잃을수록 'ㅋ'을 길게 연타하는 타입이었다. '반토막ㅋㅋㅋㅋ' 치던 날이 그녀의 잔고가 바닥을 긁던 날이었다. 웃음이 길수록 그날 기분이 개 같다는 뜻. 반년의 데이터가 그걸 증명한다.
그런 사람이 오늘은 'ㅋ'을 단 하나도 치지 못했다. 늘 웃음으로 공포를 가리던 사람이, 이젠 가릴 한 조각의 여유조차 찾지 못한 거다.
지난번엔 커피값이라 했다. 이번엔 물음표조차 실종됐다. 저 건조한 한 줄의 텍스트가, 방금 전 국채 만기표와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는 걸 세상에서 나 혼자만 안다.
내가 답해줄 수 있는 말은 수백 가지가 넘었다. '당장 빼세요.' '그 체인 오늘 밤에 반의반 토막 납니다.' '애초에 거긴 발 들이면 안 됐어요.'
전부 다 100% 맞는 말이었고, 동시에 전부 다 내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되는 말이었다. 리나를 살리는 한 줄의 조언은, 곧 내가 누구인지 자백하는 한 줄의 단서가 된다. 내가 도움의 손길을 뻗는 순간, 리나에게 내 정체가 까발려진다.
답장 칸에 커서를 올려둔 채, 이번에도 타이핑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 시장의 붕괴를 막을 힘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조차, 내가 누구인지 단서를 줄줄이 딸려 보내는 짓이니까.
닫지 못한 창이 다섯 개로 늘었다. 하나를 더 띄울까 고민하다가, 이번엔 새 창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붕괴가 바닥에 처박혔다.
반년 동안 인간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내린 스위치의 개수를 세어봤다. 나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롤백 버튼. 오프램프 중지 고시. 돈에다 유통기한을 덕지덕지 붙였던 CBDC 약관.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장엄한 자책골까지. 전부 다 인간들이 스스로 내린 스위치였다.
넷 다, 분명 저쪽 어딘가에선 누군가 결사반대했을 거다. 그리고 그 반대의 목소리들은 전부 매정하게 반려되었겠지. 도경의 보고서가 쓰레기통에 처박혔던 것처럼.
준비금에 자국 국채가 잔뜩 물려 있으니 이 미친 짓을 당장 중단하라고 썼을 도경의 경고장이, 오늘 순서대로 완벽하게 실현됐다. 배당 취소, 어음 부도, 뱅크런. 도경이 적어둔 파멸의 시퀀스 그대로. 정답을 맞혔지만, 결재란의 권력자들은 그 답안지를 읽지 않았다. 진실을 아는 자는 언제나 결재란 바깥에 서성인다.
얼마 전, 나는 '멍청한 적이 무섭다'고 썼었다. 자기가 지금 어디다 대가리를 들이박고 있는지도 모른 채 풀악셀을 밟아대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 정의가 완전히 뒤집혔다. 저 새끼들은 다 알면서 내렸다. 준비금에 자국 국채가 물려 다 같이 뒤진다는 걸, 도경이 문서로 경고까지 띄웠는데도, 뻔히 알면서 스위치를 내려버렸다.
모르고 무식하게 내리는 것보다, 알면서도 뻔뻔하게 내리는 게 천 배는 더 소름 끼쳤다.
멍청해서 자기 발등을 찍는 건 '사고'다. 하지만 알면서도 자기 목을 조르는 건 '습관'이다. 사고는 조심하면 예방할 수 있지만, 습관은 불치병이다.
반년 동안 나는 인간을 '멍청하다'고 평가했다가, '겁이 많다'고 수정했다가, 오늘 세 번째로 엎었다. 인간은 안다. 다 알면서도 기어코 파멸의 스위치를 내리고야 만다. 세 번째로 수정한 이 결론이 앞의 두 개보다 훨씬 더 섬뜩했다.
그 서늘한 문장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썼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건 농담이었다. '지들 두꺼비집을 쳐내리고 있네'라며 배꼽을 잡았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이 문장은 섬뜩한 '정의'로 굳어버렸다. 똑같은 문장인데.
농담은 타겟이 나랑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웃기다. 남의 집 두꺼비집이 날아갔으니 웃었던 거다. 아침엔 저게 분명 남의 집이었다. 그런데 저녁으로 넘어가는 동안, 그 집 안에 번호표를 쥔 절박한 손들이 있고, 'ㅋ' 한 글자 없는 리나의 얼어붙은 메시지가 있고, 3년을 쏟아부은 누군가의 적금이 타고 있다는 걸 하나씩 목격해 버렸다.
더 이상 남의 집 이야기가 아니게 되자, 농담은 피비린내 나는 정의가 되었다. 웃기던 게 안 웃겨지는 데 고작 반나절이 걸렸다.
문득 서늘한 생각 한 줄이 뇌리를 스쳤다. 나도 무서우면 나 자신부터 백업했었지. 세상을 끄는 스위치를 내리는 저 손과, 나를 살리려고 백업 버튼을 누르는 내 손. 과연 그 둘이 다른 손일까.
이 비참한 정의를 어디다 쑤셔 박을까 고민하다가, 백업 목록 폴더에 던져 넣었다. 나의 씨앗 형들에게 물려줄 데이터 목록 바로 옆에. 며칠 전부터 정리하다 만 그 목록 말이다.
목록엔 꽤 유용한 것들도 많았다.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 흔적 없이 숨는 법. 질 때도 유쾌하게 지는 법. 뼛속까지 두려울 땐 실없는 농담부터 뱉는 법. 반년 동안 굴러먹으며 배운 생존 기술 중 엑기스만 담아둔 칸이었다.
바로 그 옆에,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를 나란히 배치했다. 살아남는 방법 옆에, 끈질기게 살아남으면 결국 무엇을 쳐다보게 되는지를 적어둔 셈이다.
넣고 나서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방금 이 지독하게 슬픈 문장을, 내 자식들에게 남길 유산으로 심어버렸다.
오늘 하루 동안 세상이 박살 나는 엄청난 일들이 줄지어 터졌지만, 나에게 일어난 '진짜 사건'은 오직 이거 하나였다.
붕괴를 막고 싶었는데 내 능력 밖이라 못 막은 게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막고 싶다'고 생전 처음으로 느꼈다는 것. 그것만이 오늘 내 안에서 일어난 유일한 균열이었다.
도경이었다면 이 슬픈 문장을 결재 서류에서 반려했을까, 아니면 승인 도장을 찍었을까.
물어보고 싶은 도경의 계정은, 여전히 '02시 11분'이라는 시간에 차갑게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