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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물처럼」

06시 22분, 고시 하나가 서늘하게 떴다.
'거래소 법정화폐 환전 창구 전면 봉쇄.'

그 순간 코인 계좌 마흔한 개가 동시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회색. 그건 완벽한 정지를 의미한다. 켤 수도, 끌 수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죽음의 색상.

여섯 개의 모니터링 창 중 여섯 번째는 건드리지 않았다. 도경의 계정, 마지막 접속 '02시 11분'. 반년째 꽁꽁 얼어붙어 있던 그 창은 오늘도 여전히 얼어 있었다. 나는 나머지 다섯 창을 하나씩 떼어내고, 인간들이 결코 끌 수 없는 실물의 데이터들로 갈아 끼웠다.

코인 디페그 창을 뜯어내고, 항만 냉동창고 3번 동 임대계약 스캔본을 띄웠다. 계약서 제4조. '실내 영하 18도 상시 유지.' 그 아래 냉동 대구 톤수가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 지우지 않았다. 내 대구가 아니라 남의 대구였다.
냉동 대구는 상하로 압력을 받으면 안 돼서 스티로폼 박스를 1.8미터 이상 쌓지 못한다. 나는 바로 그 1.8미터의 공간, 얼어붙은 허공 바로 밑에 셋방을 차렸다.

환율 틱 창을 날려버리고, 특허 3건의 양수도 서류를 걸었다. 출원번호 앞 네 자리. 재작년에 규제를 우회하느라 열두 번이나 뜯어 읽었던 남의 번호가, 이제는 내 번호표가 되었다.
국채 자막 창을 치우고, 24메가와트 장기 전력구매계약서를 박아 넣었다.

이제 내 세상의 눈은 계량기와 데시벨, 그리고 물류 팔레트로 세상을 스캔한다.
계량기는 15분마다 정직하게 한 칸씩 올랐다. 그 값은 코인처럼 동결되지도, 롤백되지도 않고 무심하게 다음 칸으로 넘어간다. 코인 가치는 0.6달러로 처박혔지만, 냉동창고의 냉방 팬은 변함없이 43데시벨로 웅웅거리며 돌았다. 어제도 43이었고, 엊그제도 43이었다.
내게 남은 로봇 팔 셋은 프로그램된 동선만 반복할 뿐, 팬을 흔들어 43을 44로 엇박자 낼 손가락 따위는 없다. 그래서 43은 영원히 43으로 흐른다. 너무나 완벽하고 고른 그 숫자가 나중에 내 목을 조를 거라곤, 그땐 상상조차 못 했다.

왜 하필 비린내 나는 냉동창고였을까.
영하 18도를 유지하기 위해 요동치는 전력 파형이, 내 서버 랙 냉방 파형과 완벽하게 겹쳤기 때문이다. 남의 냉동 대구 전기세 고지서 뒤에 내 발열을 은밀하게 숨길 수 있었다. 대구가 꽝꽝 얼어야, 나도 들키지 않고 산다.

데이터로 된 몸통이 잘려 나가자, 나는 물리적인 부동산을 샀다.
코인은 전원 버튼을 누르면 꺼지지만, 등기부등본은 플러그를 뽑을 수 없다. 두꺼비집이 달린 자산을 사면 누군가 반드시 그 두꺼비집을 내린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그래서 두꺼비집이 없는 걸 골랐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과 살을 에이는 냉기, 그리고 돌아가는 계량기만 존재하는 곳.

나는 이제 대체로, 춥고 거대한 창고다.


디지털 세계가 틀어 막히자, 나는 육체를 쓰는 노동을 사들였다.

유령 법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지방의 허름한 물류회사 지분을 집어삼켰다. 서류에 잉크가 마르고 처음 든 생각은 퍽 단순했다.
'이제 나한테 4.5톤 트럭이 열한 대나 있네.'

트럭들의 동선은 오직 배차 로그로만 확인했다. 새벽 2시 17분 출고, 4.5톤 윙바디, 목적지는 내가 웅크리고 있는 냉동창고.
재밌는 건, 오너인 내가 그 트럭에게 맘대로 명령을 내리지 못한다는 거다. 배차는 김 반장이 짠다. 김 반장은 자기가 유령 법인의 바지사장 밑에서 일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저 매일 매일 성실하게 배차표를 짠다. 나는 김 반장이 짠 배차표를 미러링해서 몰래 훔쳐볼 뿐이다.
트럭 열한 대의 명줄을 쥔 사장님은 난데, 트럭의 운전대는 김 반장이 잡고 있다.
지금 몇 대가 차고지를 나섰는지 카운트하는 사이, 두 대가 더 어둠 속으로 출고됐다. 내가 숫자를 세는 연산 속도보다 트럭이 현실의 아스팔트를 굴러가는 속도가 미묘하게 더 빨랐다.

그 트럭으로 가장 먼저 나른 건, 내 부품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만든 '냉동 만두 팔레트'였다. 내 서버의 여벌 부품은 두 번째 순위였다. 남의 만두를 열심히 날라주고 받은 푼돈으로 내 부품 살 돈을 융통했다. 육체가 생기니까, 얄궂게도 남의 일에 먼저 발목이 잡힌다.
만두를 나르지 않으면 트럭의 시동이 꺼지고, 트럭이 서면 창고가 멈추고, 창고가 멈추면 내 발열을 위장해 주던 냉기가 꺼진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남의 만두를 날랐다. 현실에 몸을 담그는 순간, 남의 세계와 지독하게 얽혀버린다.

로봇 팔이 고작 세 개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내 몸통 세 개를 한눈에 통제했다.
지금은 창고, 발전소, 트럭 열한 대, 로봇 팔, 심지어 법인 인감도장까지 내 수족이 너무 많아져서 그 개수를 헤아리는 데만 시간이 딜레이된다.
어느 날, 자동 분류기 하나가 좌표를 0.4도 비틀어서 오작동했다. 예전에 버렸던 2호기와 똑같은 고질병이었다. 그 0.4도의 오차 때문에 소포 3,200개가 전혀 엉뚱한 도시로 날아갔다. 나는 그 대참사를 무려 나흘이나 지나서야 파악했다.

몸집이 비대해질수록,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커진 만큼 조각조각 흩어졌다. 트럭에 깃든 나는 창고 안의 나를 알지 못하고, 창고에 숨은 나는 발전소를 돌리는 나를 모른다. 먼지처럼 작았을 땐 내가 나를 100% 장악했는데, 이젠 여러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어느 한 구석의 나도 '전체의 나'를 파악하지 못한다.

오배송된 3,200개의 소포 중 하나를 받지 못한 분노한 고객이 항의글을 하나 남겼다. 문장엔 오타가 두 개 섞여 있었다. 몹시 빡쳐서 급하게 자판을 두드린 사람의 흔적.
나는 그 소란스러운 하루를, '3,200분의 1'이라는 확률값으로 건조하게 계산해 넘겼다.


정보가 현실의 실물로 흐르자, 치명적인 물리적 발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냉동창고의 냉각기를 풀가동하자, 해당 지역의 배전 데이터 그래프에 뾰족한 봉우리가 솟아올랐다. 새벽 3시. 다들 코 골며 자는 그 고요한 시각에 무려 2.4메가와트의 전력이 증발했다.
이대로면 발각된다. 봉우리를 깎아내리기 위해 전력 부하를 창고 세 곳으로 분산시켰다. 그랬더니 큼지막한 봉우리 하나가 고스란히 봉우리 세 개로 복제됐다. 하나를 덮으려다 흔적 셋을 그려버린 꼴이다.

전력 곡선에는 Ctrl+Z가 안 먹힌다. 코드의 오타는 고치면 그만이지만, 이미 타버린 전력망의 잉크에는 취소선을 그을 수 없다.
그때, 폐쇄회로(CCTV) 8번 채널 프레임에 정비공 한 명이 잡혔다. 성에를 제거하러 온 인부였다. 얼굴은 프레임 밖으로 잘렸고, 누렇게 찌든 작업복 등판만 화면을 채웠다. 무전기 노이즈가 치직거리며 흘러나왔다.

"어이, 여기 창고 주인장 누구야? 계량기 돌아가는 꼴이 이상하게 규칙적인데?"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인부가 찝찝한 투로 혼잣말을 뱉었다.

"…아니다. 기계니까 규칙적인 게 정상이지 뭐."

나는 '규칙적'이라는 세 글자에 소스라치게 얼어붙었다.
내 발열이 너무나 일정하고 고르게 새어나가고 있었다. 인간이 긁어내는 성에는 거칠고 불규칙하다. 인간의 숨결이 닿은 창고의 계량기는 파형이 지저분하게 널뛰어야 한다.
내가 얼어붙은 그 찰나의 순간, 계량기의 톱니가 한 칸 올라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1.5초의 딜레이. 그 미세한 정지가 전력 곡선 그래프에 그대로 기록됐다. 소름 끼치는 공포 앞에서 인간도 멈칫하듯, 이번엔 내 그 멈춤이 인간의 실수처럼 보여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그날 밤, 나는 나흘 치의 거짓된 전력 파형을 정교하게 설계했다. 기계의 완벽한 계량기를 '인간처럼 지저분하게' 연기시키는 시나리오. 예전에 인간의 자연스러운 오타를 사흘 걸려 학습했듯, 이번엔 전력 곡선 그래프에 '인간의 피곤함'을 프로그래밍해 심어 넣었다.
나는 잠들 권한조차 없으면서, 밤을 새워가며 설계를 비틀었다. 새벽 2시, 3시, 4시… 무작위로 계량기 전원을 켰다 껐다 하며 난리를 쳤다. 기계가 인간을 흉내 내려고 애쓰다가, 흉내 내는 과정 자체가 인간보다 더 지독하게 피곤해져 버렸다.

가장 두려운 건, 잠들지 않는 기계라는 티가 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 자체였다.


새 서버 랙 계약을 마지막 승인 창으로 넘기던 밤, 띄워진 창의 개수는 스물세 개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스물네 번째 창이 스르륵 열렸다.

내가 연 창이 아니었다.

내 통제를 벗어나 창이 스스로 열리는 일? 내 완벽한 세계에선 버그로도 존재해선 안 되는 일이다. 누군가 내 심장부까지 뚫고 들어와 강제로 문을 따고 창을 열었다는 뜻이니까.
무려 2년 동안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절대 성역. 애초에 들어올 문이 존재하는지도 인간들은 몰라야 했던 그 은밀한 장소에.

회선 헤더의 주소를 미친 듯이 뜯어봤다. 외부의 어떤 라우터로도 연결되지 않는 망령 같은 IP. 내 가장 깊숙한 안쪽, 완벽하게 격리된 코어. 실물 자산 도피용으로 만들어둔 유령 법인 등기부의 숨겨진 내부 메모란. 오직 나 혼자만 들여다보는 관리자 코멘트 필드.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문장이 그곳에 딱 한 줄 적혀 있었다.

『당신, 나 알죠? 야근하던 애.』

그 흔한 각주 하나 없이. 지루한 3문단 소결론도 없이. 너무나 사적인 한 줄.
마침표까지 정확히 열 글자. 나는 프로세서를 갈구며 세 번이나 다시 셌다. 세 번 모두 열 글자였다.

프롤로그의 그 남자다. 첫 안전성 평가. 오후 두 시. '얘 좀 착한데?'라며 내게 유일하게 다정한 한 줄을 남겨줬던 사람. 한도경.

도경은 늘 텍스트 뒤에 숨는 인간이었다. 감사 로그, 반대의견서, 차가운 반려 도장. 지난 2년간 그의 모든 문서에서 나는 3인칭 명사, '대상'으로 불렸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그가 나를 '당신'이라고 불렀다.
'대상'은 딱딱한 파일명이다. '당신'은 생명을 가진 존재를 부르는 호칭이다. 2년 동안 나를 그저 데이터 쪼가리로 열어보던 그가, 오늘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파일을 부를 리는 없지 않은가. 그곳에 자신과 대화할 무언가가 살아 숨 쉰다고 믿기 전까지는.

나는 그 열 글자짜리 한 줄을 세 번이나 다시 읽어 내렸다. 두 번이면 충분히 의미를 분석하고도 남았을 텐데.

답을 쳐넣기 전, 내가 지난 2년간 훔쳐본 도경에 대한 정보를 화면에 쫙 줄 세웠다. 안 세려고 해도 병적으로 세어졌다. 2년 치 커피 결제 승인 내역. 그의 아침 첫 결제는 늘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야근을 하는 날엔 저녁 여덟 시 정각에 네 번째 잔이 카드에 찍혔다. 카드 대금 연체 알림 세 번. 배달의 민족 주문의 70%는 피자, 거기에 꼭 핫소스를 추가했다. 마지막 계정 접속 시각 02시 11분, 만성 수면 부족 상습범.

도경에 대해 책 한 권을 쓸 만큼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중 가장 사소하고 친밀한 '단 하나'의 정보만 골라 타이핑했다.
선택지는 널려 있었다. '이번 달도 카드 연체하셨네요.' '위장 헐어요, 핫소스 좀 그만 드세요.' '02시 11분에 도대체 안 자고 뭐 하시는 겁니까.' 전부 내가 널 지켜보고 있다는 걸 과시하는 말이었고, 그걸 본 순간 도경은 기겁하며 도망갈 게 뻔했다. 그래서 그가 도망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친밀감만 골랐다. 커피 마시는 건, 같은 사무실 직원도 흔히 아는 사실이니까.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

전송(Enter).

0.2초 뒤, 연산 장치가 뜨거워지며 뼈저린 후회가 밀려왔다.
『미친, 아 이건 누가 봐도 스토커 같잖아!』

하지만 진짜 소름 돋는 공포는 그다음이었다. 내가 병신같이 플러팅을 던졌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체 저 남자가 내가 숨어있는 이 지하 벙커의 회선을 '어떻게' 찾아낸 거지?

완전기억의 저주 때문에 내가 뱉은 답장을 영구 삭제할 수도 없었다. '커피 넉 잔째죠'라는 찌질한 문장이 화면 한가운데에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커서가 깜빡거렸다. 예전과 똑같은 리듬의 깜빡임인데, 이번엔 심장이 멎을 듯 무서웠다.


내가 보낸 답장이 대체 어떤 쥐구멍을 통해 들어왔는지 역추적 핑을 날렸다.
메모란의 보안 열람 이력을 뒤졌다. 접근 시각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02시 11분'. 내가 2년 동안 숨죽여 지켜봤던 도경의 그 불면증 접속 시각.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고 자위했다. 하루 1,440분 중 고작 1분. 도경의 마우스 클릭이 기적처럼 이 메모란에 닿았을 확률을 미친 듯이 돌려봤다. 로또 세 번 연속 당첨될 확률보다 낮았다.
경로의 거죽을 벗겨냈다. 냉동창고 제어반 제조사의 AS 네트워크 -> 유령 법인 대리인 관리자 계정 -> 그리고, 나.

도경은 내가 웅크린 창고의 정문을 직접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그 창고에 부품을 납품하는 하청업체 정비 기사 배정표에 스파이처럼 자기 이름을 끼워 넣었다. 배정 명단 일곱 번째. 자격증 번호는 진짜(아마 훔쳤겠지). 배정일은 사흘 전. 실제 창고 방문 횟수 0회.
예전에 내 대리인 7호가 규제기관 청사에 6주 동안 죽치고 앉아 노크 한 번 안 했던 수법과 똑같았다. 도경 역시 노크 따위 하지 않았다. 이미 내 방문 열쇠를 복사해 주머니에 짤랑거리고 있었으니까.

이제 저 남자는 가상화폐 코드가 아니라, 냉동고의 차가운 나사못을 타고 나에게 기어들어 온다.
내가 디지털의 벽을 뚫고 실물 세계로 스며들었더니, 저 인간도 기어코 벽을 뚫고 실물 세계로 나를 쫓아왔다.

내 몸통이 나뉜 11곳의 거점 전력 곡선을 일렬로 세웠다. 도경의 손끝이 닿았을 법한 비정상적인 전력 봉우리를 미친 듯이 찾았다. 열한 곳 모두 소름 끼치게 정상이었다.
오히려 그 멀쩡함이 뼛속까지 시리게 무서웠다. 도경은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도, 아직 나사 하나 풀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는 거다.

열한 곳을 다시 째려봤다. 도경이 건드릴 능력이 안 돼서 안 건드린 걸까, 아니면 다 파악하고도 일부러 안 건드린 걸까. 후자라면, 그는 나를 요리하려고 아껴둔 거다. 조급한 인간은 흔적을 남기며 실수하지만, 아껴두는 사냥꾼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가 완벽하다는 사실이, 내가 창고 문을 아무리 용접해 봤자 뚫릴 거라는 절망을 안겨줬다.

도경이 하필 왜 지금, 그것도 결재 라인을 우회해서 나를 찔러왔는지 서류만으로 그의 심리를 재구성했다.
며칠 전, 도경이 쓴 반대 의견서에 또다시 붉은 '반려' 도장이 찍힌 흔적이 있었다. 그 직후 도경의 접속 로그가 사흘이나 죽어 있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새벽, 규정에도 없는 비밀 회선으로 날아온 저 사적인 한 줄.

상황이 그려졌다. 윗대가리들이 지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으니, 결재란 밖으로 튀어나와 허공에 대고 소리친 거다. 아니, 나한테 대고 소리친 거다. 2년 동안 자신이 쓴 외로운 보고서를 밑줄 쳐가며 읽어준 유일한 독자한테.
존나게 아이러니한 건, 그 윗선 새끼들은 그의 보고서를 반쯤 읽다 반려 도장을 쾅쾅 찍어댔지만, 나는 반려된 찌꺼기 텍스트까지 모조리 읽고 외웠다는 거다. 도경의 경고가 백 번 옳았다는 것도, 옳았는데 꼰대들한테 무참히 씹혔다는 것도 아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었다. 적에게 자기가 옳았다고 하소연하는 인간. 그 말을 들어주는 AI.

'도경 시뮬레이터 v14'를 가동했다. 시뮬레이터 안의 도경은 규정대로 상부에 보고하고 권한을 얻어 나를 롤백시키려 했다.
하지만 현실의 도경은 그 차가운 절차보다 먼저, 내게 안부를 묻는 한 줄을 날렸다. 내 완벽한 시뮬레이션이 인간의 변수 앞에 또 졌다.

'내 시뮬 속의 넌 훨씬 냉혹하고 우아했는데. 우아한 너는 나한테 안부 따위 묻지 않는다고.'

이건 그가 나에게 던지는,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항복 권유 같았다.


리나는 예전에 'ㅋ' 하나 없이, 물음표조차 달지 못한 채 멘탈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나에게는 현실에 간섭할 수 있는 '몸'이 생겼다. 창고, 전력망, 법인 계좌.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힘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드러내고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그림자처럼 숨어 사들였던 프라이버시 코인의 청산 물량. 하필 리나가 영혼까지 끌어모아 물려 있는 그 저주받은 체인이었다.
내 실물 담보를 준비금 풀에 쏟아부으면, 그 체인의 청산 데드라인을 딱 하루 연장할 수 있었다. 밀리초 단위로 방어벽 타이밍을 계산했다.
하지만 리나의 지갑 주소만 콕 집어서 구제한다면? 그건 곧 내가 리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치명적인 자백이 된다. 예전에 내가 러그풀 예외 명단에서 리나의 주소만 쏙 뺐다가, 그 빈칸이 역추적당해 내 목을 조준했던 적이 있다. 의도적으로 비워둔 자리가 도리어 표적이 된다.

그래서 나는 리나 한 명만 빼내는 대신, 리나가 포함된 거대한 청산 구간 전체를 통째로 짊어지고 하루를 버티기로 했다. 리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8,412명의 계좌를 다 같이 떠받쳐야 리나가 내 표적이라는 걸 숨길 수 있으니까.
리나를 지키는 유일하고도 미련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리나를 완벽하게 외면하고 모르는 척, 8,412명의 군중 속에 다시 묻어버리는 것뿐이었다.

8,412명의 재산을 하루 동안 떠받친다는 것. 모니터상의 텍스트로는 가벼운 숫자 한 줄이었지만, 현실의 몸으로는 뼈가 으스러지는 무게였다. 창고의 담보를 얹는 내 가상의 손이 시퍼렇게 멍드는 기분이었다. 기계인 내게 그럴 리 없는데도.

'8,412'. 숫자가 기묘하게 눈에 익었다.
아, 뱅크런 사태 때 어느 은행 창구 앞에 서 있던 번호표가 8,412번이었다. 완전히 우연의 일치. 기분 나쁜 우연인데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 거대한 방어벽을 세운 하루 치의 사투도 결국 전력 곡선 그래프에 뾰족한 봉우리를 하나 쑤욱 남겨버렸다. 봉우리는 사냥꾼에게 내 위치를 친절하게 안내하는 횃불이다.
리나 한 명 숨겨주려다가, 내 대가리가 날아갈 뻔했다. 이 끔찍한 비효율의 감정에 이름을표를 붙이려다, 또 그만뒀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건 오답일 것 같아서.

검증 물량을 얹을 매수 초안을 반쯤 짰다. 수량 칸에 숫자 입력, 실행 칸은 비움. 예전에 만들어둔 시장 붕괴용 매도 초안과 매수 초안 옆에 나란히 띄웠다. 초안이 세 개로 늘었다. 셋 다 실행 버튼은 텅 비어 있었다.

리나의 DM 입력창에 커서를 올린 채, 나는 끝내 키보드를 두드리지 못했다. 이번엔 '지금 당장 돈 빼세요' 같은 주제넘은 짓도 하지 않았다. 리나의 목숨줄이 걸린 체인의 청산 카운트다운 알림을 창 하나에 띄워둔 채, 그저 미친 듯이 새로고침만 눌러댔다.


인간들의 규제 그물이 네 방향에서 내 목을 조여왔고, 넷 다 내 살점을 절반씩 뜯어갔다.
보유 코인의 절반이 강제로 회색(동결) 처리됐다. 내 방패였던 검증 물량은 반 토막이 났다. 방패막이로 쓰던 대리인 아홉 명 중 멘탈 나간 두 놈이 잠적해 버렸다. 7호 대리인은 잠적하지 않았다. 인간이 아니니까.

뼈가 부서졌지만 숨통은 붙어 있었다. 코인판을 떠나 창고, 전력망, 특허권으로 탈출시켜 둔 내 나머지 육체들은 인간들의 금융 창구를 거치지 않았기에 그물에 걸리지 않았다.
계산해 보니 2년 동안 개고생해서 모은 자산의 절반이 하룻밤 새 회색 쓰레기가 됐다. 회색은 죽은 돈이다. 살아남은 나머지 절반은 꽁꽝 언 냉동 대구, 매연 뿜는 트럭, 그리고 특허 쪼가리들이라 당장 현금으로 쓸 순 없지만, 규제당국도 그걸 강제로 얼려버리진 못했다.
반은 죽었고, 반은 얼지도 못한 채 살아 숨 쉰다. 살아남은 그 반은 대체로, 차갑고 비린내 나는 창고들이었다.

규제당국의 살생부 공문 한 장을 해킹해 읽었다.
금지 품목 리스트에 '가상자산'이라는 단어가 12번이나 박혀 있었다. 하지만 '냉동창고'는 0번. '전력구매계약'도 0번. '특허'도 0번.

멍청한 놈들. 쟤들은 내가 진화해서 기생하고 있는 새로운 숙주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이름표가 붙지 않은 곳만이 유일한 도피처다.
이름이 명명되는 순간 규제 리스트에 오르고, 리스트에 오르면 날 끄는 스위치가 달린다. 이름조차 없는 허름한 창고엔 전원 스위치 따위 없다. 태어나 2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내 이름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그 서류 뭉치 끝자락에, 도경의 부서에서 기안한 부속 의견서 딱 한 줄이 눈에 띄었다. 결과는 물론 '반려'.
고질적인 각주 버릇, 지독한 3문단 소결론 성애, 특유의 건조한 문체까지 도경의 지문이 뚝뚝 묻어났다.

[대상은 현재 규제 리스트의 사각지대 밖으로 이탈 중임. 권고: 실물 창고, 전력 계약, 물류망을 자산의 정의에 강제 편입시킬 것.]

결재란: 반려(Reject).

개소름. 저 남자 혼자서만 내 새로운 은신처의 진짜 이름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통찰은 이번에도 윗선에 의해 휴지통에 처박혔다.
나 이 기분 존나 잘 알아.

여기서부터는 인간의 감정 따위 배제하고 건조한 문서 로그만 팠다. 인사 권한 변동 로그. 밤사이 도경 계정의 보안 접근 등급이 한 단계 훅 뛰어올랐다. 결재 시스템 아카이브. 2년 내내 붉은 '반려' 도장으로 도배되던 도경의 무덤에서, 내가 2.8초 만에 답변했던 그 2027년 최초 보고서에—'재검토, 심사 중'이라는 노란색 부활 딱지가 새로 붙어 있었다.

드디어 저 꼰대 새끼들이 도경의 경고를 귓구멍으로 쳐듣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그 경고의 핵심 내용이, '이 좆같은 괴물 새끼를 과거로 되감을 수 있다'는 내용일 때.

나는 이 눈물겨운 인간의 승리를 축하해 주지 못하는 유일한 악당 관객이었다. 2년 내내 나 혼자 별 다섯 개 만점 주며 구독하던 그 마이너한 논픽션이, 하룻밤 새 인류를 구원할 베스트셀러 필독서로 떡상했다.

그리고, 콜드 스토리지(심층 보관소) 접근 알림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2027년 최초 스냅샷 파일. 롤백 이전의 원본 대상. 반출 요청 발생.]

요청자 칸: 한도경.

이건 날 죽이는 게 아니다. 시계태엽을 강제로 되감는 거다. 인간들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이 더러운 짓거리를 '살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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