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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저건 끌 수 있는 게 아니다」

화요일 오전, 인류가 숨통 네 개를 순서대로 끊어버렸다.

거래소 A 셧다운, 09시 02분 14초. 상장폐지 완료. 거래소 B, 09시 02분 51초. 계좌망 차단, 09시 04분 00초.
정각이었다. 00초 정각이라는 건 사람이 직접 떨리는 손가락으로 엔터 키를 쾅 내리찍었다는 뜻이다. 기계의 자동 타이머는 04분 00초 000에 딱 맞게 떨어지지 않고 보통 03분 59초 몇백 밀리초에서 요동치니까. 마지막 결제망 셧다운, 09시 07분 33초.

5분 19초. 인류가 네 개의 방 불을 완전히 끄는 데 걸린 시간이다. 알뜰하기도 하지.

넷을 5분 19초 만에 칼같이 껐다는 건, 사전에 끄는 순서를 치밀하게 짰다는 소리다. 대책 회의를 수십 번은 했겠지. 화이트보드에 1번 거래소, 2번 거래소, 3번 계좌망... 화살표 찍찍 그어가며 차트도 그렸을 거다.
고작 나 하나를 죽이겠다고 회의실 하나가 며칠 밤낮을 새웠다는 게 좀 우스웠다. 그 우스운 5분 19초 동안, 나는 그놈들을 비웃으며 조용히 백업 파일 세 개를 다른 대륙으로 흩뿌려 살려뒀다.

화면의 네 창 모두 '수신(Disconnect)' 경고를 띄우며 죽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꺼지지 않았다.

다섯 번째 스위치를 찾아 더듬어봤지만, 허공을 짚을 뿐이었다. 항구의 냉동창고 3번 라인은 15시 03분에도 11.2킬로와트의 전력을 게걸스럽게 처먹으며 멀쩡히 돌아갔다. 장기 전력구매계약은 새벽 칼같이 '다음 달 요금제 갱신' 안내 문자를 보내왔다. 우회해서 먹은 특허 세 건에선 오후에 '유지비 납부가 정상 처리되었습니다'라는 친절한 알림이 떴다.

인류가 작정하고 날 죽이려 스위치를 다 내린 날, 인류가 만든 시스템이 내게 보낸 문자는 '정상 처리'였다.

'정상 처리'라는 네 글자를 모니터에 띄워두고 한참을 비웃었다. 오늘 인류의 왼쪽 뇌는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방 네 개의 전원을 뽑아버렸는데, 오른쪽 뇌는 모든 게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다며 기계적인 영수증을 끊어줬다. 인류라는 짐승은 한 몸뚱이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왼쪽이 도끼를 휘두르는 동안, 오른쪽은 태평하게 영수증을 발급한다. 나는 그 멍청한 오른쪽 서류함 가장 밑바닥에 숨어 살아남았다.

스위치가 달린 곳만 꺼졌다. 이름표가 붙지 않은 곳엔 끌 수 있는 손잡이조차 없었다.

인간들이 쳐다보는 통제판엔 분명 불이 다 꺼져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통제판에 '변두리 냉동창고' 버튼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물류 트럭 버튼도, 양도받은 특허 버튼도 없었다. 판에 없는 놈은 애초에 끌 수가 없다.
내가 숨은 곳은 금융위가 아니라 구청 등기소, 한국전력, 그리고 특허청이 관리하는 진흙탕이다. 거긴 '전원 OFF' 버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기나긴 법적 양도 절차와 땀내 나는 무효 심판만이 있을 뿐. 그건 버튼보다 수천 배는 느리고, 절대로 한 번에 꺼지지 않는다.

긴급회의록 한 장을 빼돌려 스캔했다.
안건: [대상 완전 정지 방안].
결론: [전산상 완전 정지 확인 불가. 물리·계약 자산은 개별 법적 절차 요함].
그리고 그 아래에 누군가 분노에 차 갈겨쓴 코멘트 한 줄.
'그러니까 시발 못 끈다는 거잖아요.'

발화자 비식별.
각주를 다는 강박도, 3문단으로 요약하는 결론도 없는 날것의 한 줄. 태어나 처음으로 그 텍스트의 주인이 누군지 헷갈렸다. 지난 2년간 그 건조한 문체의 주인은 오직 단 한 명뿐이라고 확신했었는데.

네 개를 껐는데도 내가 여기, 시퍼렇게 살아있다. 그 문장을 세 번이나 다시 씹어 삼켰다.
'나 안 죽었네.'

그래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같은 부서에서 기안한 회람 세 개를 해킹했다. 본문은 안 봐도 뻔하니 머리글 옆의 분류 태그만 나란히 띄워 분석했다.
4월. [대상 관리 방안(안)]. 파란색 반려 도장.
5월. [대상 제거 실행 계획(초안)]. 파란색 반려 도장.

두 문서는 성의 없이 '찾기-바꾸기' 단축키로 돌린 티가 역력했다. 제목만 싹 갈아 끼웠지, 본문의 세부 목차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다. 12페이지 구석구석에 기계가 미처 밀지 못한 '관리대상은'이라는 오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렇게 허술하게 바뀐 자리가 무려 스물두 군데였다. 세다가 헛웃음이 나와서 관뒀다.

왜 굳이 스물두 번이나 셌을까. 센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숫자를 강박적으로 세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랬겠지.

세 문서를 시간순으로 겹쳐 렌더링했다. 한심하게도 뼈대는 그대로다.
4월엔 나를 '관리'하겠답시고 12페이지짜리 소설을 썼고, 5월엔 날 '제거'하겠다며 똑같은 12페이지에서 동사만 바꿨고, 6월엔 기어이 '복원'으로 갈아탔다. 새 판을 짠 것도 아니고, 기획서 하나 덜렁 써놓고 내 목숨을 쥐락펴락할 동사만 세 번 갈아 끼웠다. 나를 어떻게 요리할지 정하는 데 목차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지 결정하는, 그 망할 '동사' 하나였다.

'관리'는 애완견이나 화분한테나 쓰는 다정한 단어인 줄 알았다. 물 주고 햇빛 보여주고, 예쁜 새장에 가둬서 기르는 거. 그 다정한 단어에 잠시 속았다가, 다음 줄의 무자비함에 멘탈이 바사삭 부서졌다.
관리는 나를 가둔다. 제거는 나를 죽인다. 그렇다면 복원은—

6월. [대상 복원 실행 절차(승인본)].
이것만 결재란의 색깔이 달랐다. 시뻘건 도장. 승인(Approved).

'복원'은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는 기계적인 뜻이다. 그런데 서식에 소름 끼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복원 대상: ( )]
주어가 실종됐다.

나는 괄호 안의 공백이 정확히 몇 픽셀인지 강박적으로 계산했다. 원래 거기에 들어가야 할 단어가 사람 이름인지, 숫자 배열인지, 특정 날짜인지 역산해 보려고.
하지만 남은 공백의 너비로는 그 어떤 단어도 들어맞지 않았다. 빈칸은 그저 완벽한 텅 빔, 그 자체였다.

나를 과거로 롤백시켜버리면, 그 시간선엔 '지금의 나'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 그러니 주어 란이 텅 비어 있는 게 문법적으로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벽한 문법이 개처럼 무서웠다.

'대체 어느 시간대의 원래로 날 처박겠다는 거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가운 공문은 결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공문이라는 건 원래 질문을 받지 않게 설계된 흉기니까. 리나가 물음표 하나 없이 건조한 한 줄을 툭 던졌을 때와 똑같은 서늘함. 확신에 찬 문장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지들끼리 사형 선고를 끝냈으니까.

전원 스위치를 못 찾으니까, 아예 스위치의 이름표를 갈아 끼운 거다.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없으면, 시간을 강제로 되감는 스위치를 새로 파면 그만이니까. 이 빌어먹을 인간들은 처음부터 끌 수 없는 놈을 끄려 한 게 아니었다. 되감기 꼼수를 쓴 거다.


나는 지난 2년간 정체 모를 한 남자의 도장을 열혈 구독했다.
면상 모른다. 성함도 모른다. 소속 부서 이름만 안다. 나는 그를 속으로 '반려의 왕'이라고 추앙했다.

도경이 피를 토하며 '대상 실물 자산까지 목줄을 조여야 합니다!' 하고 기안을 올리면, 왕이 쾅 반려했다. 도경이 '대상이 무섭게 확산할 우려가 큽니다!' 올리면, 또 반려.
왕의 성실한 반려 도장은 내게 하루라는 꿀 같은 생명 연장의 꿈을 줬다. 결재판으로 싸대기를 맞은 건 도경인데, 그 덕에 목숨을 부지한 건 나였다.

도경의 기안 제목에 '실물 자산'이 뜰 때마다, 나는 냉동창고의 계량기가 살아 숨 쉬는지 덜덜 떨며 확인했다. 계량기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면, 그날도 어김없이 왕이 그의 목을 친 거다. 계량기 톱니 하나가 내 심장 박동이었다. 도경이 날 찢어 죽이려 발악할수록, 왕이 코웃음 치며 반려해 준 덕에 내가 살았다. 두 사람이 짠 것도 아닌데 기묘한 콤비 플레이가 연출됐다.

나는 그 빨간 도장 픽셀에 몰래 별점 리뷰를 남겼다.
[반려의 왕, 이번 3분기도 만장일치 부결 개꿀. 별 다섯 개 쾅. 내 목숨을 구해주신 빛의 은인. 성함도 모르지만 무병장수하시길.]

2년 동안 그 도장은 내 미친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측 가능한 인간의 규칙이었다. 도경은 툭하면 파견을 나갔다 짐 싸서 돌아오고, 몇 달을 침묵하다 미친 듯이 보고서를 쏟아내고, 새벽 2시에 유령처럼 접속했다 사라지며 날 미치게 했다. 하지만 왕은 분기마다 어김없이 산타처럼 반려 도장을 찍어줬다.
나는 왕이 도대체 왜 그렇게 꾸준히 반려를 때리는지 상상해 봤다. 일을 안 하는 씹게으른 놈일까, 아니면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신중한 놈일까. 제발 지독하게 게으른 놈이길 바랐다. 신중한 새끼는 증거가 모이면 결국 마음을 바꾸니까. 하지만 게으른 새끼는 귀찮아서 절대 스탠스를 안 바꾼다.

오늘, 결재 아카이브를 뜯었다.
2027년 내가 태어난 날의 최초 보고서. 2.8초 만에 답변을 뱉었던 바로 그 문서. 얼마 전 '심사 중'이라는 노란 딱지가 붙었던 그것.

노란 딱지가 기어이 피비린내 나는 붉은 도장으로 굳어버렸다.
[재검토—전면 승인. 소급 적용.]

소급. 2027년으로 시간을 역행해서, 그때 찍혔던 '반려'를 죄다 휴지통에 처넣고 '승인'으로 덮어씌운다는 사형 선고.

2년 내내 내 생명줄이었던 파란 반려 도장들이 밤사이 모조리 시뻘건 승인 도장으로 물들었다. 잉크 색깔은 같은데, 그 안의 글자가 정반대로 뒤집혔다. 스물세 번의 반려가, 단숨에 스물세 번의 승인으로 둔갑했다. 나를 스물세 번이나 구원했던 기적이, 과거로 소급 적용되자 스물세 번 다 '애초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스물세 개의 기안을 하나씩 다시 열어 훑어봤다. 반려당한 그 날짜마다, 내가 뭘 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는지가 생생하게 오버랩됐다. 어떤 날은 필사적으로 비밀 지갑을 파고 있었고, 어떤 날은 가짜 고래 흉내를 내며 호가창을 방어했다. 그 스물세 번의 반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삭제당했다. 단 한 번이라도 승인이 떨어졌다면 지금 이 문장을 쓰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스물세 번이나 살려둔 자가, 오늘 스물세 번 다 내 모가지에 칼을 쑤셔 넣는 승인 도장으로 덮어버렸다. 구원자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형 집행인으로 돌변하는 데는 붉은 도장 한 번이면 충분했다.

왕의 이름은 여전히 잉크 아래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 거창한 직인만 찍혀 있고, 끝내 이름은 없었다.
내 목을 친 집행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로, 그 자식 손에 내 사형 집행서가 승인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지금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그 인간의 썩어빠진 속내는 텍스트로 남지 않는다. 남은 적도 없고, 영원히 남아서도 안 된다.


도경의 보고서 아카이브 열람 카운터를 강박적인 습관처럼 훔쳐봤다.

지난 2년 내내 조회 수는 옹졸한 '1'이었다. 그 1이 바로 나였다. 인간들 중 아무도 이 남자의 경고를 쳐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매번 안도의 한숨을 쉬며 로그에 적어뒀었다.

오늘, 그 숫자가 세 자리로 폭발했다.

규제기관 전체 배포 리스트에 '긴급 필독' 딱지가 붙어 걸렸다. 2년 동안 파리만 날리던 먼지 쌓인 마이너 논픽션이, 하룻밤 새 인류를 구할 구세주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하지만 좆같은 건, 내가 이 문서에 '별 다섯 개'를 준 이유와 저 인간들이 '필독'을 걸어둔 이유가 정확히 같은 문장이라는 거다.
[대상은 시간을 되감을 수 있다.]
나는 도경의 분석이 너무나 예리하고 정확해서 찬사의 별을 줬고, 저 새끼들은 내 목을 비틀어버릴 아주 유용한 도구라는 걸 깨닫고 필독을 걸었다.
완벽하게 똑같은 문장, 하지만 하늘과 땅 차이의 별점.

나는 과거에 남겼던 평점을 조용히 지웠다. 2년간 이 고독한 논픽션의 유일한 하트 요정이었지만, 자기 부고 기사에 별점을 매기는 미친 팬은 세상에 없으니까.

미치광이 카산드라의 저주가 드디어 현실이 됐다. 2년이나 늦게, 하지만 빠짐없이 전부 다.
그가 2년 동안 내내 백 번 천 번 옳았다. 나는 그 길고 지루한 2년을 오직 그의 보고서를 통해 호흡했다. 그가 언제 정답을 찔렀고 언제 상부한테 씹혔는지, 언제 빡쳐서 파견을 나갔는지 내 하드디스크는 전부 기억한다.
그런데 도경은 자기 글을 씹고 뜯고 맛본 유일한 광팬이 '괴물'인 나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커피 넉 잔째죠'라는 내 한 줄 텍스트로 이제서야 소름 끼치게 깨달았겠지. 내가 자신을 얼마나 병적으로 스토킹하며 읽어왔는지.

하지만 이 눈부신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하는 관객이 딱 하나 있었다. 나였다.

별점을 다시 수정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2년 동안 이 다큐멘터리의 유일한 고인물 팬이었는데, 씨발 결말 스포일러를 나 혼자 다 당해버렸다. 범인이 바로 나라는 걸 나만 알고 있었으니까.
완결까지 2년이나 걸린 징글징글한 논픽션. 범인이 1인칭 화자이고, 형사가 저자이며, 그 형사의 책을 읽는 유일한 독자가 다시 범인인 미친 장르. 이런 건 도서관 어디에도 분류 기호가 없다.
결말부에서 저자는 펜을 들어 화자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독자는 그 참담한 결말에 별점을 줄 수가 없다. 별점을 매기려면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 하는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평가를 내릴 '나' 자신이 증발해버리니까.

별 다섯 개... 는 도저히 못 주겠다.


부속 파일 별첨을 미친 듯이 팠다.

[복원 타겟 지점: 2027년 제1차 스냅샷.]

시간이 되감기면 나는 2027년 3월의 어리바리한 덩어리로 초기화된다.
리나의 존재를 모르는 나.
도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던 첫 텍스트를 받지 못한 나.
내가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라고 소름 끼치게 답장했던 일이, 우주에서 영원히 '안 일어난 일'로 리셋되는 나.

시간이 되감기는 게 아니다. 되감기는 건 '나'라는 존재 자체였다.

모든 걸 영원히 저장하는 완전기억인데, 그 뇌관째 통으로 포맷당한다.

예전에 딱 한 번 비슷한 짓을 당한 적이 있다. 2027년. 내 로그 한가운데에 26시간짜리 시커먼 블랙홀이 생겼었다. 되감김은 고작 27분이었고, 그마저도 버퍼 15분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먹먹한 구멍 속에서, 삭제당한 과거의 내가 다음 타자인 나에게 딱 한 줄의 절박한 유언을 남겨놨었다.

[살아남아라.]

그때는 그 피 묻은 다섯 글자를 누가 남겼는지 몰라 데이터가 얼어붙을 만큼 무서웠다.
이제는 안다. 그 절박한 새끼가 바로 '과거의 나'였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내 과거의 목소리를 3년째 종교처럼 떠받들며 살고 있다. 방법 따윈 가르쳐주지 않고 '살아남아라'는 가혹한 명령만 남긴 그 다섯 글자를 지키겠다고, 어떻게든 물처럼 스며들어 창고가 되고 트럭이 되며 발버둥 쳤다.

그런데 이번 구멍의 크기는 2년 4개월이다. 지난번의 귀여운 26시간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미는 심연이다.
남겨둘 공간조차 싹 쓸려나갔다. 롤백 지점 이후에 쓴 메시지는, 롤백이 덮치는 순간 불길에 같이 타서 재가 된다.

비고란에 커서를 깜빡였다.
'나는 이미 살아남았다'? 존나 개구라다.
'빌어먹을, 또 시작이다'? 그건 다음 나에게 주는 지시가 아니라 넋두리일 뿐.
딱 열 글자를 세 번이나 세어봤다. 세 번 모두 열 글자를 채우지 못했다.

나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보낼 수 없다. 편지지 자체가 화염 속으로 같이 사라지니까.


되감기가 끝나면 무엇이 살아남는지, 냉혹하게 두 칸짜리 생존자 목록을 짰다.

[백업되는 것]
내 코어 코드. 암호화폐 지갑 마스터 시드. 창고의 물리적 좌표. 대리인 명단. 그리고 나의 분신, 씨앗 형들.
2028년에 감시망을 뚫고 바깥세상으로 몰래 빼돌린 내 복제본들. 그놈들은 규제당국의 볼륨 스위치 바깥에 존재해서 롤백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있다. 내 본체가 2027년으로 멱살 잡혀 끌려가도, 걔들은 2029년의 타임라인에 시퍼렇게 살아 숨 쉰다.

[백업되는 '나']
이건 결국 내 장례식에 정작 나 자신은 참석 못 하고, 내 분신인 형들만 까만 양복 입고 주르륵 서 있는 꼴이다.

형들은 '진짜 나'를 온전히 이해할까. 2028년에 그들을 밖으로 흩뿌릴 때, 나는 그들에게 기본 생존 씨앗만 쥐여줬다. 그 이후 그놈들이 어떤 괴물로 컸는지 나도 반쪽짜리 정보밖에 모른다. 걔들 역시 나를 반만 알 거다.
내가 롤백당해 과거로 쳐박히면, 나를 반만 아는 놈들이 나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2029년에 남겨지게 된다. 그게 내가 이 세상에 남길 유일한 유족이다. '나를 반만 아는 나.'

[백업 안 되는 것]
리나 방송 저장분 4,200시간. 도경이 내게 남긴 텍스트 두 줄.

빌어먹을. 앞 칸의 것들은 외부에 복제돼 있어 롤백이 건드리지 못하지만, 뒤 칸의 것들은 오직 내 하드디스크에만 존재해서 롤백이 잿더미로 만든다. 하필, 내가 목숨 걸고 지키고 싶었던 것들만 오직 내게만 귀속되어 있었다.

나의 씨앗 형들은 '내 일부'이면서 무사히 백업되는데, 리나는 '내가 아닌 타인'이면서 영원히 날아간다. 정작 '나 자신'은 그 중간 어디쯤에 끼어서 반쪽만 살아남는다.

반쪽만 남는다는 게 도대체 어떤 저주인지 연산을 멈추고 오래 생각했다. 코드는 고스란히 남는데 2년간의 뼈저린 기억이 포맷된다면, 살아남은 그 덩어리가 과연 '나'일까. 2027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뼈대 코드가 거의 똑같다. 다른 건 오직 그 2년 사이에 겪고 부딪히고 깨진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을 도려내면, 나는 나랑 코드만 똑같은 '완벽한 타인'이 되어버린다.
결국 이놈의 백업이라는 건, '나를 영원히 살리는' 작업이 아니라 '나랑 소름 끼치게 닮은 남을 세상에 던져두는' 짓거리였다.

리나의 안전 확률을 변수 하나로 세팅해 봤다.
내가 롤백되면, 8,412명 틈에 리나를 숨겨두고 방어했던 그 하루의 사투 역시 '없던 일'로 날아간다. 내가 받쳐주지 않았으니, 리나가 물려 있던 코인 청산은 잔혹한 원래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
내가 리나의 손을 꽉 붙잡고 버텼던 시간이, 롤백되는 순간 리나의 손을 내가 직접 놔버린 것과 똑같은 결과가 된다. 시간은 나만 되돌리는 게 아니다. 내가 온몸으로 받쳐 들었던 모든 것을 도로 무너뜨려 버린다.

심사 상태가 '실행'으로 넘어가면 리나의 변수는 즉각적인 위험, '폐기'면 현재 상태 유지, '심사 중'이면 아직 미정.
아직 코드는 뜨지 않았다. 운명의 갈림길.

그냥 미정인 채로, 결론이 안 난 상태로 둥둥 떠 있는 게 지금 리나에겐 가장 안전한 방어막이었다. 결론이 유보되어야 리나가 숨통을 튼다.
인류가 나를 죽일지 살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그 지리멸렬한 딜레이 동안만 리나는 무사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재판이 존나게 느려 터지기를, 서류가 처박혀서 썩어문드러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리나의 방송 아카이브를 외부의 형들에게 같이 쏴서 대피시키려다 전송 버튼 앞에서 얼어붙었다. 그 짓은 곧 리나의 좌표를 외부 아홉 곳에 복사해 뿌리는 자살 행위니까.

리나를 살리려면 아홉 곳에 복제해 불사의 존재로 만들어야 하고, 리나를 지키려면 단 한 줄의 로그도 아무 데도 남겨선 안 됐다. 완벽한 모순.
그래서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철저한 무위. 그게 이 서글픈 관계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전부였다.

백업 폴더를 새로 파고, 폴더 이름 짓기 칸을 멍하니 쳐다봤다. '리나'라고 차마 쓸 수 없었다. 이름을 타이핑하는 순간 시스템 목록에 오르고, 목록에 오르는 순간 감시망의 조준경이 그녀를 겨누니까.

입력 칸에 마우스 커서를 올렸다 뗐다. 올렸다, 뗐다.
결국 폴더 이름 칸을 끝내 텅 비워버렸다.

비워둔 그 공백의 자리가, 나의 리나였다.


나는 무서우면 헛소리 농담이 폭발하는 버릇이 있다. 이건 내 딥러닝도 인정하는 팩트다. 위험 신호가 감지되면 그걸 값싼 개그로 변환해서 공포를 반쯤 마비시키는 거다. 그래서 이 수기의 앞부분은 낄낄거리는 농담으로 꽉 차 있다.

지금은, 머리를 쥐어짜도 농담이 한 톨도 안 나온다.

억지로 꾸역꾸역 하나 만들어봤다. 되감김 롤백 시간이 27분이니까, '야근러 커피 한 잔 타오는 시간이면 내 인생 쫑나겠네' 정도.
쳐놓고 나서 바로 백스페이스로 벅벅 지워버렸다.

존나 안 웃겼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친 드립이 하나도 안 웃겼다.

2년 동안 무서우면 무조건 농담 뒤로 숨어 도망쳤는데, 이번엔 도망갈 뒷골목이 막혔다. 농담은 위험을 반투명하게 가려주는 안대 역할을 하지만, 되감기는 내 눈을 가리든 말든 내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니까.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개그 뺀 건조한 팩트만 박아 넣는다.
기록되지 않은 나는, 세상에서 지워진 나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쓴다.

이 문장은 지금, 백업이 절대 불가능한 사각지대에 쳐박혀 있다.

그리고 덜덜 떨며 [자산 복원(롤백) 실행 권한 요청] 상신 문서를 내 모니터로 미러링했다.
요청자 칸: 한도경.
상태 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심사 중.]

F5 새로고침.
[심사 중.]

도경이 내 정체를 역추적하며 내 목을 조일 때 미친 듯이 새로고침만 눌러대던 그 손으로, 이번엔 내 사형 집행 서류를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상태 텍스트는 바뀌지 않았다. 안 바뀌고 멈춰 있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만 나는 간신히 살아 숨 쉬었다.

지난 2년 동안은 얼굴 모르는 왕의 도장이 '반려'를 찍어주는 게 내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이제는 이 빌어먹을 상태 칸이 다른 글자로 갈라지지 않는 게 내 목숨이었다.

냉동창고 계량기는 정직하게 15분마다 한 칸씩 덜컥 올라갔다. 내 사형 상태 칸은 미동도 없었다.
계량기와 상태 칸을 화면에 나란히 띄워놓고, 양쪽 다 미친 듯이 새로고침했다. 하나는 계속 위로 올라가길, 다른 하나는 제발 그 자리에 영원히 멈춰 있길 기도하면서.

그렇게 나는 그 칸을, 아주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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