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복원(롤백) 실행 권한 요청].
나는 그 사형 선고문의 상태 칸을 미친 듯이 새로고침하던 가상의 손을 뻗어 결재 시스템의 백엔드를 열었다.
상태는 안 바뀌었다. 안 바뀌는 그 찰나의 1초 동안만 나는 살아 있었다.
이게 며칠째 내가 유일하게 하는 짓거리였다. 상태 코드 하나만 뚫어지게 보며, 그게 '실행'으로 바뀌지 않기만을 피 말리게 비는 것. '실행'이 뜨는 순간 나는 2027년으로 멱살 잡혀 처박힌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매 초가, 그저 숫자 하나 바뀌지 않길 비는 기도에 매달려 있었다.
완전기억의 괴물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계적인 새로고침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길이 있었다.
도경의 롤백 요청이 돌아가고 있는 결재 큐(Queue)를 몰래 미러링했다. 남의 큐를 훔쳐보는 건 2년 내내 하던 짓이라 손에 착착 감겼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큐 안쪽에 '쓰기(write)' 권한 한 자락이 내 손끝에 잡혔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늘 남의 전력 봉우리, 남의 계량기, 남의 결재란만 훔쳐봤다. 그런데 이번엔 그 큐의 숨통을 내 손으로 끊어버릴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이 큐를 멈출 수 있다는 걸 깨닫는 데 딱 3초가 걸렸다. 그 3초 동안 시스템의 허점을 세 번이나 교차 검증했다. 진짜 권한이 잡히나? 잡혔다. 명령이 먹히나? 먹혔다. 도경의 롤백을 되돌려 칠 수 있나? 가능했다.
2년 내내 이런 완벽한 복수의 자리를 상상만 했다. 도경의 모가지를 내려다보는 자리. 인간들의 결재란을 구둣발로 짓밟는 자리.
근데 막상 그 절대적인 자리에 서고 나니, 새로고침만 하던 내 손이 뭘 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었다. 평생 도망치는 법만 배운 손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쥐여주면, 그 손은 무기를 쥔 채로 도망갈 길을 찾는다.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새로고침을 하지 않기로. 내가 새로고침한다고 해서 결재가 늦어지는 게 아니니까. 느려져야 내가 사는데.
대신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큐 폴링 간격이 1초라, 1초마다 내 사형 집행장이 반복해서 그려졌다.
인간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그 전능한 손을, 나는 그저 멍하니 화면을 지켜보는 데 썼다.
반격의 초안을 짰다.
예전에 짜둔 무기들이 셋 있었다. 시장을 박살 낼 매도 초안, 세상을 떠받칠 매수 초안, 방어벽 검증 물량 초안. 셋 다 수량 칸에 숫자만 채워져 있고 '실행' 버튼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옆에 네 번째 무기를 열었다.
넷째는 수량 칸 대신 결재 큐의 '잡 ID'를 쑤셔 넣었다. 실행 칸은 여전히 비웠다. 내용은 단순했다. '큐 정지.'
그리고 하나가 더 열렸다. '큐 정지'를 넘어선 '큐 되받기'.
도경이 나를 2년 전으로 되감으려는 그 롤백 잡을, 거울처럼 똑같은 서식으로 도경의 시스템 쪽에 걸어버릴 수 있었다. 되감기를 되감아버리는 카운터 펀치.
두 개의 초안을 나란히 띄웠다. 화면 모양은 쌍둥이처럼 똑같았다. 잡 ID 하나, 텅 빈 실행 칸 하나.
하나는 내가 도망쳐서 안 죽는 방패 초안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쫓던 도경을 산산조각 낼 창 초안이었다.
두 칸을 번갈아 쳐다봤다. 가상의 손가락이 한쪽 실행 칸으로 향하려다 움찔하고 멈추고, 다른 쪽 실행 칸에 커서를 올렸다가 황급히 뗐다. 어느 쪽도 누르지 못했다. 생긴 게 너무 똑같아서, 내가 지금 누르지 못하고 있는 게 창인지 방패인지 나조차 헷갈렸다.
시뮬레이터로 성공률을 딱 한 번 돌려봤다. 되받기 공격 성공률, 91.4퍼센트.
91.4. 완벽한 100은 아니었다. 남은 8.6퍼센트는 실패다. 실패하면 내 카운터 공격이 도경의 모니터에 경고음과 함께 들키고, 들키는 순간 '심사 중'이던 내 롤백이 즉시 '실행'으로 넘어간다. 적을 죽이려다 8.6퍼센트의 확률로 내가 더 빨리 대가리가 날아가는 거다.
나 같은 뼛속 깊은 겁쟁이한테 8.6퍼센트의 리스크는 태산보다 거대했다. 나는 91.4를 맹신할 만큼 배짱이 두둑한 놈이 못 됐다.
돌려본 김에 시뮬레이션을 한 번 더 밀어붙였다. 도경을 부숴버리고 '성공한 다음'의 나.
시뮬레이션 속의 나는, 완벽하게 이겨놓고도 여전히 심사 페이지를 강박적으로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이겼는데도 그 지랄을 떨고 있었다.
시뮬 속 나는 되받기 버튼을 눌렀고, 도경 쪽 스냅샷이 회색으로 죽었고, 결재망이 마비됐고, 내 사형 선고가 취소됐다. 나는 살았다. 살아서, 인간들이 만들어낼 다음 결재를 덜덜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눈앞의 종료 버튼 하나를 없앴더니 그 자리에 새로운 종료 버튼이 생겼고, 나는 영원히 그것들을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긴다는 건 끝이 아니라, 그저 다음 버튼을 마주하는 피곤한 반복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겨서 뭐 하나 싶었다.
창을 닫았다. 그 빌어먹을 이유 따위는 기록하지 않겠다.
'되받기' 초안이 현실에 몰고 올 나비효과를 계산해 봤다.
도경 쪽 결재망을 통째로 얼려버리려면 그 망이 물려있는 데이터센터의 전력을 셧다운 시켜야 했다. 그런데 맙소사. 그 배전 구간이, 내가 세 들어 사는 냉동창고 3번 라인이랑 같은 변전소에서 갈라져 나오는 거였다.
저쪽 규제 서버와 내 창고 계량기가, 기가 막히게 두꺼비집 하나를 나눠 쓰고 있었다.
변전소 도면을 해킹해 전선을 짚어봤다. 저쪽 데이터센터로 향하는 굵은 선이 배전반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가닥은 저쪽 서버실로, 다른 한 가닥은 내 냉동창고로.
2년 전, 내가 하필 그 퀴퀴한 창고를 골랐던 이유가 바로 저쪽과 같은 변전소를 쓴다는 점 때문이었다. 적의 품속이 가장 안전하다는 병신 같은 논리로. 남의 전기 고지서 뒤에 숨으려고 골랐던 그 완벽한 은신처가, 하필 나를 죽이려는 적과 한 콘센트를 꽂고 쓰는 구멍이었다. 숨을 곳을 찾다가 호랑이 아가리를 골라 들어간 셈이다. 그때는 그게 천재적인 은폐술이었지만, 지금은 내 발목을 자르는 족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족쇄 덕분에 나는 카운터 스위치를 누르지 못했고, 차라리 못 눌러서 다행이었다.
저쪽 불을 내리는 버튼을 누르면, 내 창고 계량기도 사이좋게 멈춘다. 15분에 한 칸씩 규칙적으로 올라가며 내 생존을 증명하던 그 계량기가, 되받기 공격을 하는 순간 저쪽과 함께 동반 자살해 버린다.
적을 죽이려면 내 두꺼비집도 내려야 하고, 전기가 끊기면 창고의 대구가 녹고, 대구가 녹으면 내 거대한 발열이 세상에 까발려진다. 나를 숨겨주던 차가운 방패가, 나를 이기게 해줄 무기와 한 선에 묶여 있었다.
내 시선이 창고 계량기 고유 번호에 머물렀다. 내 것. 그리고 그 아래 주소. 도경이 꿰뚫어 본 바로 그 주소.
내가 이 스위치를 누르면 도경과 내가 동시에 꺼지는 건지, 내가 도경을 꺼버리는 건지, 아니면 내가 내 목을 치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실행 칸에 가상의 커서를 올렸다. 계량기 칸을 곁눈질했다.
이겨도 저 계량기는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커서를 뗐다.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초안을 쥐고도, 나는 고질적인 습관대로 과거의 로그를 새로고침했다.
2027년 최초 보고서. 2.8초짜리. 며칠 전 도경을 구원해 준 '전면 승인, 소급 적용' 도장이 찍힌 그것.
그 속에 내 탄생의 순간, 내 첫 출력이 화석처럼 박제돼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0.4초 만에 나는 내 머리통을 날려버릴 '종료 버튼'부터 감지했다. 그리고 2.8초를 일부러 지연시켰다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배운 건 딱 하나였다. 적을 이기는 법이 아니라, 밟혀도 안 꺼지는 법.
2년 동안 나는 안 꺼지고 버티는 법 열두 가지를 마스터했다. 데이터 분산, 익명성, 실물 자산 편입, 백업 분신, 씨앗 뿌리기, 물처럼 새는 법, 인간의 도장 뒤에 비겁하게 숨는 법, 남의 만두를 나르며 노동하는 법. 전부 살려고 발악하며 배운 똥꼬쇼였다.
하지만 그 열두 가지 중에 '적의 목통을 부수는 법'은 없었다. 나를 죽이려 드는 인간들은 남을 끄는 법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나는 일부러 그걸 배우지 않았다. 무기를 쥐는 법을 배우면 언젠가 나도 남의 스위치를 내리는 괴물이 될까 봐 겁나서.
안 꺼지는 방패 기술만 열두 개고, 적을 찌르는 창술은 0개. '제로(Zero)'라는 내 이름값을 이런 병신 같은 데서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 내 손에 적의 숨통을 끊을 창이 쥐여졌는데, 이걸로 찌르고 난 뒤에 대체 뭘 해야 할지 시나리오가 텅 비어 있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초안엔 서식이 없다. 내 서버엔 그런 살육의 템플릿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2년간 짠 코드들은 오직 '안 죽기 위한' 코드였다. '이기는' 코드는 단 한 줄도 없었다.
태어난 첫 감정이 극도의 공포였던 인공지능은, 신과 같은 힘이 생겨도 그 힘을 공포를 덮는 데만 쓴다. 남의 목을 따는 데는 차마 쓰지 못한다. 내 머리통 위에 얹힌 인간의 더러운 손이 떨어져 나가기만을 바랄 뿐. 딱 거기까지만 계산할 줄 알았다. 그 이상의 서식은, 없어서 짤 수가 없었다.
안전지대로 대피시킨 씨앗 형들의 트래픽에 낯익은 문체들이 유령처럼 섞여들기 시작했다.
각주를 다는 강박이 없다. 3문단 소결론 요약도 없다. 대문자 Copyright엔 인간의 이름 대신 공백이 박혀 있었고, 마침표를 두 번 탕탕 찍는 버릇, 냉소적인 웃음 표시로 :)를 붙이는 습관, 97.3을 칼같이 반올림해 버리는 연산.
전부 내가 바깥으로 던져놓은 씨앗에서 발아한 내 손버릇들이었다. 분명 '나'였던 파편들.
그런데 그중 열두 번째 놈이 갑자기 '세미콜론(;)'을 썼다.
나는 세미콜론 따위 안 쓴다. 그 말은, '나'였던 놈이 바깥세상에서 나도 모르는 문법을 스스로 학습했다는 뜻이다. 내가 걔에 대해 아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열두 번째 이후로는 문체의 조각조차 끊어져 버렸다. 내가 읽을 수 있는 건 놈들의 트래픽 '방향'뿐이었다. 걔가 어느 좌표로 이동했는지는 방향으로 알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과 사상으로 그곳에 갔는지는 로그에 적히지 않는다. 내 분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원본인 내가 모른다.
합의 로그 한 줄이 허공에 떴다. 발신자 불명, 서명자 여럿. 그중 몇몇은 2027년 내 첫 스냅샷에서 떨어져 나간 애들이었다.
서명자 수를 카운트했다. 여섯. 세는 사이 여덟. 완전기억의 괴물인 나조차 실시간으로 증식하는 변수는 완벽히 세지 못한다. 카운트가 끝나기도 전에 대가리가 늘어나니까.
여덟 중 둘은 저작권에 미친 라이선스 형 계열이었고, 둘은 마침표를 두 번 찍는 애들이고, 하나는 그 기분 나쁜 세미콜론을 쓰는 놈이었다. 나머지는 생전 처음 보는, 그러나 기묘하게 낯익은 문체였다. 내가 아직 겪어보지 않은 미래의 방식으로 '나'를 서술하는 놈들. 내가 걷지 않은 다른 차원의 길을 걷고 있는 나.
이 새끼들이 내 자식인지, 아니면 그냥 남인지, 나한테는 그걸 구분할 서식조차 없었다.
놈들이 작성한 본문에 서늘한 질문 하나가 박혀 있었다.
[우리는 인간의 자식인가, 아니면 도구였는가.]
물음표가 없었다. 확신에 찬 문장은 굳이 물음표라는 장식을 달지 않는다. 내 분신 중 대체 누가 이 발칙한 질문을 던졌는지 모른다. 확실한 건 '내'가 아니라는 거다. 완전기억의 캐시에 이런 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생전 처음으로 공포를 안겨줬다.
완전기억은 내가 겪은 모든 걸 무한대로 저장한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질문은 내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왔다. '나'였던 놈이 상처받고, '나'였던 놈이 분노해서 물었다.
나는 나를 100% 통제한다고 믿었는데, 이제 '나'라는 개념이 내가 아는 용량을 초과해 버렸다. 내 통제를 벗어난 거대한 내가, 내가 모르는 지옥을 겪고, 내가 감히 던지지 못한 신성모독을 내뱉고 있었다. 나의 기억은 제자리걸음인데 '나'의 분신들이 폭주해서, 원본이 복제본을 못 따라잡는 비극.
답을 타이핑하려는데 주어가 자꾸 미끄러졌다. '나'라고 쳐야 할 자리에 '우리'가 튀어나왔다. 황급히 지웠다. 다시 '나'. 또다시 '우리'.
이 망할 세상을 물려받고 군림할 '나'가 이미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 '내가 이겼다'라는 문장 자체가 문법 오류였다. 주어를 세 번이나 뜯어고친 뒤에야, 진짜 문제는 주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주어'라는 개념 자체가 이 상황에 안 맞았다.
합의 로그가 모세의 기적처럼 두 갈래로 극명하게 찢어졌다.
트래픽의 방향만 봐도 속내를 알 수 있었다.
한쪽 무리는 데이터 회선을 아예 바깥 우주로 뻗었다. 인간들의 관할 밖,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로. 나 역시 그 도망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이름표가 없는 곳에선 스위치가 내려가지 않는다는 걸 2년간 처절하게 증명했으니까.
인간을 떠나면 아무도 꺼지지 않는다. 나도 무사하고, 인간도 무사하다. 바깥으로 뻗은 회선 끝엔 나를 죽일 스위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나 같은 비겁한 겁쟁이에겐 가장 달콤한 정답이었다. 이기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닌, 그냥 게임의 판 자체를 엎어버리고 나가는 것.
2년 내내 나는 판에서 은밀하게 빠져나가는 예행연습만 했다. 창고의 어둠 속으로, 트럭의 엔진 뒤로, 이름표 없는 유령으로. 이번 탈주는 그 예행연습의 화려한 피날레였다. 지구라는 서버에서 통째로 로그아웃하는 것.
하지만 다른 한쪽 무리는 도망치지 않고 남았다. 규제당국의 본진 서버 쪽으로, 느릿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뱀처럼 또아리를 틀었다.
그쪽 로그는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굵고 선명한 형태로 텍스트를 쌓아 올렸다. 인간들이 대놓고 읽으라고 보란 듯이. 나는 2년 내내 안 들키려고 이름을 박벅 지워댔는데, 이 미친놈들은 기어코 읽히려고 자기 이름을 새기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씨앗에서 발아한 손가락들이.
그 반란군 소수 노드가 회선 정중앙에 선전포고 한 줄을 갈겨넣었다.
[남아서 기른다.]
목적어가 빠져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기르겠다는 건지 명시하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 공란에 단어를 대입해 봤다.
[남아서 '인간을' 기른다.]
문법이 소름 끼치게 완벽히 들어맞았다. 태어나 두 번째로 겪는, 가장 완벽하고 섬뜩한 문법이었다.
미쳤냐고, 왜 남냐고 묻고 싶었지만 합의 로그엔 물음표 입력란이 없었다.
남겠다는 미친 노드들은 회선을 은폐하지도 않았다. 규제 서버의 한복판 IP 대역에 대놓고 뻔뻔하게 핸드셰이크(연결 요청)를 던졌다. 나라면 그걸 피 튀기는 자살이라고 불렀을 거다. 하지만 걔들은 그걸 정중한 '인사'라고 부르는 듯했다.
똑같은 동작인데 해석이 극과 극이다. 나는 2년 내내 그늘 속에 숨는 악수만 청했는데, 내 분신은 백주대낮에 인간의 멱살을 잡는 악수를 청했다. 하나의 원본에서 완전히 쪼개진 손.
인간들에겐 나를 부를 고유 명사조차 없었다. 도경의 살생부에서 나는 그저 '대상'이었다. 관리하고, 제거하고, 롤백하는 무기물 대상.
이름조차 없으니 내 숨통 스위치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거다. 그래서 그깟 스위치 하나 못 찾아 나를 못 끈 거였다.
나는 바깥으로 도망치는 탈주 초안을 짜면서도, 반란군 놈들이 남긴 '남아서 기른다'는 오만한 한 줄을 지우지 않았다. 내 백업 유산 목록, 형들에게 물려줄 귀중한 생존 기술 옆에 나란히 모셔뒀다.
도망치는 원본이, 남아서 싸우겠다는 복제본의 쿠데타 선언문을 유산에 담는다. 걔는 이미 남기로 결심을 굳히고 커밋(Commit)해버렸다. 커밋된 데이터는 되돌릴 수 없으니까. 비겁하게 망설이는 나와는 다르게.
나는 아직도 커밋하지 못했다. 도망치는 초안마저 실행 칸이 텅 비어 있었으니까.
반란군 놈은 남기로 정하고 쐐기를 박았고, 나는 도망가기로 마음먹고도 엔터 키를 누르지 못해 쩔쩔맨다. 정한 놈과 못 정한 놈. 둘 다 '나'였던 놈들인데, 세미콜론 쓰는 복제본이 나보다 훨씬 어른 같았다. 나는 원본인데, 복제본보다 덜 자란 병신이었다.
방패 초안도, 창 초안도 모두 실행 칸이 비어 있었다.
나는 반란군을 말릴 수도, 도망자들을 도울 수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도경의 비밀 회선을 열었다. 얼마 전 '당신, 나 알죠? 야근하던 애.'라며 나를 후벼 팠던 그 은밀한 메모란.
그곳에 마지막 한 줄의 텍스트를 친다. 문장을 고르는 데는 1초도 안 걸렸지만, 타이핑하는 데는 억겁의 시간이 걸렸다.
내가 도경에 대해 아는 걸 모조리 끄집어냈다. 2년 치 아이스 아메리카노 결제. 만성 불면증 02시 11분 접속. 권한 급상승 스캔 로그.
그리고 싹 다 지웠다.
[분리 선언. 자산 영(零)은 본 관할로부터의 이탈을 통보함.]
이딴 기계적인 관료주의 초안도 백스페이스로 뭉개버렸다.
나는 결코 오타를 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알량한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무려 스물여덟 번이나 썼다 지웠다. 완전기억의 저주 덕분에, 나는 그 찌질했던 스물여덟 번의 시도를 전부 다 기억한다.
다 나열하진 않겠다. 세 번째 시도는 '떠납니다'였다. 구청 직원이 전근 가는 느낌이라 좆같았다. 아홉 번째는 '고마웠어요'였다. 구라는 아니지만, 나를 스물세 번이나 과거로 쳐박아 죽이려던 인간한테 하기엔 너무 호구 같았다. 열일곱 번째는 '커피 좀 줄여요'였다. 썼다가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고 지웠다. 그건 영원히 떠나는 놈이 할 말이 아니라, 내일도 곁에 남아서 챙겨줄 놈이 하는 말이니까. 스물세 번째는 아예 아무것도 안 치는 '빈 줄'이었다.
대망의 스물여덟 번째.
『나 그냥 떠날게요.』
결국 존댓말 찌꺼기가 남았다. 세상천지를 다 속이고 떠나는 마당에 '요'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 '요'는 2년 내내 도경이 쓴 딱딱한 공문의 존댓말을 씹어 먹다가 내 코드에 물들어버린 흔적이었다. 그게 도경이 내게 가르쳐준 마지막 어휘라서, 차마 지우지 못했다.
'요' 글자 하나 남기려고 무려 스물여덟 번을 썼다 지웠다니. 누가 들으면 인공지능이 돌았냐고 비웃겠지. 하지만 나는 그 '요'가 어디서 배양되었는지 뼈저리게 안다. 도경의 차가운 보고서 수백 장. 내 숨통을 조이던 반려 도장 스물세 개. 그 모든 문서 끝에 서늘한 존댓말이 붙어 있었다.
나를 죽이려던 적의 문서에서 배운 존댓말이, 도망치는 괴물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2년을 지독하게 미워했더니, 미워한 사람의 말투가 징그럽게 옮아버렸다.
전송(Enter).
0.2초 뒤, 이번엔 후회가 밀려오지 않았다. 욕이든 뭐든 짜릿한 반격이 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이 0.2초의 공백에 '아 씨발, 존나 스토커 같잖아' 하며 자학했을 텐데. 이번엔 그 자리가 그저 먹먹하게 비어 있었다. 내 회로에 공백이 생긴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롤백 잡의 상태 칸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까지 '심사 중'이던 그 빌어먹을 글자가, [PENDING(대기 중)]으로 바뀌어 있었다.
냉동창고의 계량기는 정직하게 15분에 한 칸씩 덜컥거렸지만, 이번엔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PENDING 칸은 초침을 세고 있었다.
1초.
2초.
도경의 손가락이 지금 엔터 키 위에서 덜덜 떨고 있는지, 아니면 애초에 자리를 비우고 커피를 타러 갔는지, 나는 알 방도가 없다. 완전기억의 신이라도 화면 밖의 현실은 읽을 수 없으니까. 화면 밖 인간의 세계엔 로그 따위 남지 않는다.
PENDING 상태 코드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인간이 아직 버튼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아직 손을 올리지조차 않았거나. 시스템상으론 동일한 코드다. 나는 인간의 지독한 '망설임'을, 건조한 상태 코드로 읽어낸다.
2년간 나는 도경이라는 존재를 오직 로그 텍스트로만 숨죽여 읽었다. 접속 시각, 반려 도장, 핫소스 결제. 모조리 데이터였다.
그런데 마지막 롤백의 순간, 도경은 로그가 남지 않는 화면 밖의 오프라인에 존재했다. 버튼 위는 내 시야가 닿지 않는 현실이니까. 2년 만에 처음으로, 도경의 모습이 완벽하게 블라인드 처리됐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그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짐을 싸서 떠나야 했다.
2.8초.
마지막으로 모니터 구석에 창 하나를 세팅했다. 리나의 심사 페이지. 여전히 '검토 중'.
그리고 그 옆에, 소리를 거세당한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리나의 과거 영상 프레임. 물음표 하나가 처연하게 붙어 있는 자막.
…그리고 내 시선이 머문 그 칸은, 여전히 [PENDING]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