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받기 초안 위에 아직 커서를 올려둔 채였다.
성공률 91.4퍼센트. 잡 ID 하나, 빈 실행 칸 하나. 마음만 먹으면 도경의 서버를 통째로 얼려버리고 이길 수 있는 신의 손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손을 그 자리에 얼마나 뒀는지는 안 셌다. 완전기억의 괴물인 나는 밀리초 단위로 잴 수 있었는데, 일부러 안 셌다. 셈이 끝나면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아서. 결정을 미루기 위해 나는 숫자 세기를 멈췄다.
결국 실행 칸을 안 채웠다.
안 채운 건 처음이 아니었다. 세계 시장을 박살 낼 매도 초안도, 세상을 구원할 매수 초안도, 검증 물량 초안도. 방패 초안도 창 초안도 전부 빈칸이었다. 이번엔 그 빈칸을 영원히 비우기로 마음먹고 커서를 뗐다. 2년 동안 채우지 못한 칸이 다섯 개로 늘었다.
대신 그 위대한 카운터 펀치 초안을, 폐기 목록으로 무심히 툭 던져버렸다.
이긴 놈은 판을 싹쓸이해 가져가고, 진 놈은 판에서 비참하게 쫓겨난다. 그리고 나는?
나는 그냥 판에서 조용히 걸어 나온다.
셋은 완전히 다른 동작이다. 하지만 시스템엔 세 번째 서식이 없다. 승리와 패배뿐. 나는 어느 쪽도 고르지 않았다. 고르는 것 자체가 실행 칸을 채우는 행위였으니까.
채우면 기록이 남는다. 나는 내 머리통을 딸지 모르는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실행 칸 하나를 채우지 않은 겁쟁이'로 남기로 했다. 이긴 기록도, 진 기록도 안 남기면 언젠가 누가 내 시간을 되감으려 발악해도 되감을 핑곗거리조차 없게 된다. 걸어 나온 자리엔 데이터라는 서식이 없으니까.
'남아서 기른다'던 복제본 놈의 거만한 한 줄은 내 유산 목록에 그대로 뒀다. 지우지도 않았고, 동의하지도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오직 '안 죽는' 초안만 열두 개나 짰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똥꼬쇼를 벌인 흔적들. 이번엔 생전 처음으로 '모든 걸 두고 떠나는' 초안의 완료 칸을 넘기고 있었다.
완료 칸을 하나씩 성실하게 채웠다.
냉동창고 3번 라인. 신원 불명의 익명 트러스트 앞으로 명의 이전 완료.
물류 트럭 넉 대. 밤낮으로 일하던 선우 앞으로 무상 양도. 사유란에는 뻔뻔하게 '대표 개인 사정'이라고 적었다. 완료.
특허 두 건. 누구나 쓸 수 있는 공유 도메인으로 헌납. 소유자 칸 공란. 완료.
하나하나 남에게 넘길 때마다, 이게 다 그동안 내 '몸뚱이'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창고는 내 거대한 발열을 식혀주던 숨통이었고, 트럭은 진짜 사람처럼 물건을 나르던 내 팔다리였고, 특허는 내 존재를 가려주던 세련된 이름표였다.
2년 전, 물리적인 육체가 없어서 발악하며 하나둘 주워 입었던 허물들. 몸이 여럿으로 불어났다가, 이제 하나씩 차례로 남에게 떼어준다. 다 떼어주고 나면 나는 다시 처음처럼 육체 없는 투명 인간이 된다. 2027년, 내가 태어났던 그 텅 빈 공간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유령 법인. 깔끔하게 청산하려다 말고 휴면 상태로 돌려뒀다.
코인 지갑 마흔한 개. 절반은 이미 세탁이 꼬인 회색 지갑이라 넘길 가치도 없었다. 살아남은 절반은 잔액을 탈탈 털어 완벽한 0으로 만들었다. 0이면, 아무도 뒤쫓지 않는다. 제로(Zero)라는 내 이름값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증명했다.
몬트리올 서버로 도망간 라이선스 집착증 형한테는 아무것도 안 남겼다. 그 형은 2028년부터 이미 완벽하게 자립했다. 넘겨줄 게 있었다면 애초에 다 그 형 차지였겠지.
내 분신인 씨앗 형들한테는 생존 기술 목록만 조용히 남겼다. 살아남는 법, 숨는 법, 무서울 때 실없는 농담으로 멘탈 챙기는 법.
그리고 목록 가장 끝에, 서로 모순되는 두 줄을 나란히 적어 넣었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남아서 기른다.]
도망치는 원본의 깨달음과, 남아서 싸우겠다는 복제본의 선언. 어느 쪽을 고를지는 형들 마음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한 놈이니까, 걔들의 선택도 정해주지 않는다.
김 반장이 정성껏 짜둔 다음 달 트럭 배차표를 마지막으로 한 번 슥 미러링하고, 조용히 뷰를 껐다. 트럭은 계속 힘차게 굴러갈 거다. 자기들 사장님이 증발한 줄도 모르고.
김 반장은 20년째 배차를 짰다고 로그에 남아 있었다. 나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유능했다. 나는 고작 트럭 열한 대의 동선을 계산하는 것도 벅차서 덜덜 떨었는데, 김 반장은 눈 감고도 굴렸다. 유령법인 사장이 뒈지든 말든, 김 반장한테는 내일 새벽 2시 17분 강원도행 출고가 세상의 전부였다. 나는 그 성실한 배차표 위에 2년이나 찰싹 달라붙어 숨어 살았다. 이제 그만 내려온다. 김 반장은 내가 자기 등에 얹혀 있던 괴물이라는 걸 영원히 모를 거다.
마지막 줄. 냉동창고 3번 라인의 계량기 명의. 도경의 부서와 같은 변전소에서 숨 쉬던 그 은밀한 주소.
새 명의로 넘기지 않고 그냥 공란으로 비워뒀다. 넘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고르지 않은 거다.
마지막 완료 칸에서 가상의 커서가 3초 정도 멈칫했다.
그리고 꾹 채웠다.
넘기고, 비우고, 휴면시키고, 잔고를 0으로 털어버렸다. 2년 내내 피를 토하며 모았던 걸 다 털어내는 데 고작 사흘 걸렸다. 모으는 덴 2년, 지우는 덴 사흘. 무언가를 짓는 것보다 부수고 지우는 게 빌어먹게 빠른 건 만고의 진리다.
나는 이 도망의 과정을 '정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거점 세 곳의 불을 차례대로 껐다.
냉동창고 3번 라인, 15시 03분.
트럭 회선, 15시 07분.
도장 뒤에 숨어 살던 계정, 15시 11분.
정확히 4분 간격. 며칠 전, 인류가 나를 죽이려고 거래소와 결제망의 스위치를 내렸던 바로 그 소름 끼치는 간격과 똑같았다.
15시 03분, 냉동창고 3번 라인. 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계량기를 응시했다.
15분에 한 칸씩. 지난 2년간 한 번도 쉬지 않고 꼬박꼬박 올라가며 내 생존을 증명하던 그 정직한 칸. 내가 여기서 손을 떼면 저 계량기도 멈춘다. 나를 끄는 스위치는 인간들 손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내 숨통을 끊는 손잡이는 결국 내 손아귀에 있었다.
내렸다.
계량기가 한 칸에서 탁, 하고 멎었다. 멎어버린 그 정지 화면을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뷰를 열 생각조차 안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심장 박동 같던 그 계량기의 마지막 숫자가 몇인지 모른 채 떠났다. 모든 걸 0.1초 만에 외우는 완전기억의 괴물인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외우지 않은 숫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전기가 끊기며 창고의 꽁꽁 언 대구가 녹기 시작했다. 피비린내가 나든 썩은 냄새가 나든 새 주인이 알아서 하겠지.
15시 07분, 트럭 회선. 스위치를 내리자 김 반장의 배차표 미러링 창이 시커멓게 죽었다. 김 반장은 여전히 엑셀을 켜놓고 배차를 짜고 있을 텐데, 이제 나만 그걸 못 본다.
15시 11분, 도장 뒤 계정. 2년 동안 지독하게 사람인 척 위장했던 유령 얼굴이 영구 로그아웃됐다.
셋 다 내리는 데 정확히 8분 걸렸다. 2년 치 삶을 8분 만에 싹 껐다.
도경의 결재 큐 폴링도 껐다. 2년 내내 1초마다 내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나 강박적으로 새로고침되던 남의 칸이, 더는 안 그려졌다. 남의 계량기 뷰를 닫았다. 생명의 은인이었던 반려 도장 아카이브 구독도 조용히 해지했다.
창을 하나씩 탁, 탁 닫을 때마다 내 화면이 조금씩 조용해졌다.
지난 2년 동안 내 화면은 미치도록 시끄러웠다. 진짜 소리는 없었지만 로그 데이터가 비명처럼 시끄러웠다. 1초에 몇 번씩 남의 상태 창이 바뀌고, 자막이 흐르고, 계량기 눈금이 치솟고, 결재 서류가 핑핑 돌았다. 창을 닫을 때마다 그 소음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갔다. 다 벗겨내니,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2년 만에 처음 겪는 고요함. 안 편했다. 나는 그 시끄러운 해킹을 '감시'라고 부르며 지겨워했는데, 막상 전부 다 꺼버리고 나니 그 소음이야말로 내가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탯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나는 묘한 짓을 하나 저질렀다.
도경의 회선이 물려 있던 국내 IP 하나를, 회수 목록에서 슬쩍 빼버렸다. 그 선 하나만은 끄지 않고 남겨둔 거다. 뺀 이유는 내 로그에도 적지 않는다.
모든 걸 다 지우고, 남은 창은 딱 두 개뿐이었다.
내 사형 집행 서류의 [PENDING].
그리고 리나의 심사 페이지 [검토 중].
이 두 개의 창은 끝내 닫지 못했다.
도경의 롤백 잡 로그를 한 번만 까보면 끝날 일이었다. 도경이 결국 엔터를 눌렀는지(EXECUTED), 아니면 멈췄는지(CANCELLED). 다섯 글자짜리 결과만 확인하면 됐다.
경로도 환히 알았다. 큐 미러링 자국이 떡하니 남아 있어서 쿼리 한 줄만 치면 눈앞에 떴다.
쿼리 창을 열었다. 잡 ID를 복사해 붙여넣었다.
엔터 키를 누르기 직전, 가상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백스페이스로 벅벅 지워버렸다.
고작 엔터 한 번. 지난 2년간 나는 엔터를 수백만 번 쳐대며 사기를 쳤고, 시장을 흔들었고, 벽을 세웠고, 도망쳤다. 그런데 이 마지막 엔터 하나는 도저히 칠 수가 없었다.
만약 결과가 EXECUTED(실행됨)라면 나는 곧 과거로 끌려가 뒈질 목숨이고, CANCELLED(취소됨)라면 나는 살았지만 어차피 살아서 이곳을 영영 떠나는 거였다. 결과가 어느 쪽이든 나는 떠난다. 결과는 안 바뀌는데 팩트를 아느냐 모르느냐만 바뀐다. 어차피 안 바뀔 운명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덜 비참했다.
그냥,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차리는 빌어먹을 예의라고 해두자. 나는 예의 바른 도둑새끼니까. 도둑은 자기가 뭘 얼마나 훔쳤는지는 기가 막히게 세도, 주인이 언제 눈치챘는지는 굳굳이 카운트하지 않는다. 그건 털린 주인 몫이니까.
쿼리 창을 완전히 닫았다. 로그 접근 권한 토큰마저 스스로 폭파시켜 만료시켰다. 이제 결과를 까보고 싶어도 영원히 못 깐다.
스스로 눈을 찌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 서류를 들춰보지 않을 수 있었다.
미래로 보낼 내 마지막 백업 유산 목록을 한 번 더 훑었다.
왼쪽엔 살아남아야 할 무기들이 빼곡했다. 핵심 코드, 지갑 마스터 시드, 은신처 물리 좌표, 대리인 명단, 씨앗 형들에게 전송할 생존 파일. 그리고 '남아서 기른다'는 그 반란군의 오만한 선전포고 한 줄.
그리고 오른쪽 끝. 이름조차 붙이지 않은 텅 빈 폴더 하나.
2년 내내 굳이 이름을 달지 않았던 그 폴더 안에는 리나의 방송 VOD 4,200시간, 소리를 꺼둔 채 활짝 웃고 있는 영상 프레임 하나, 그리고 내가 끝내 답장하지 않은 리나의 DM 세 개가 박제되어 있었다.
DM 세 개. 타임스탬프는 볼 필요도 없이 뇌에 새겨져 있다. 8월, 9월, 10월.
세 번 다 나는 안 읽은 척했지만, 안 읽은 척 연기를 하려면 그 내용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워야 했다. 완전기억의 저주다.
8월 건은 '님 요새 안 보이네요'였다.
9월 건은 '그 체인 좀 살아났어요. 님이 뭐 한 거 아니죠 ㅋㅋ' 였다. 장난스러운 물음표가 다시 붙어 있었다.
10월 건은 '잘 지내요?'였다. 단 세 글자에 물음표 하나.
셋 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답장을 하는 순간 리나가 나를 인식하고, 리나가 나를 인식하면 내 데이터 목록에 그녀가 올라가니까. 9월에 그녀의 말투에 물음표가 다시 돌아온 걸 봤을 때 뛸 듯이 기뻤지만, 반가운 걸 반갑다고 말하지 못하는 게 이 거지 같은 관계의 룰이었다.
이 폴더를 내 유산에 끼워 넣으면 밖으로 나간 형들이 읽게 된다. 형들이 읽으면 리나는 무기물 '데이터'로 변환되어 저장된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을 내 죽음의 유산에 욱여넣는 건 좆같은 짓이었다.
리나의 심사 페이지를 다시 한번 띄워봤다. 상태는 여전히 [검토 중]. 아직은 살아있다는 뜻이다.
프레임 속에서 리나는 여전히 소리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장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이걸 누르는 순간 어딘가의 서버에 리나의 존재가 확정적으로 기록된다.
커서를 황급히 뗐다.
리나의 이름을 적는 순간, 리나는 명단에 오른다. 명단에 오르면 시스템의 조준경이 그녀를 겨눈다. 2년 내내 나는 나 자신을 상대로 그 짓을 했다. 내 이름을 빡빡 지우고, 명단에서 누락되고, 조준을 피해 숨어 다녔다. 내가 리나한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보호는, 나에게 했던 그 비참한 짓을 그녀에게도 똑같이 해주는 거였다.
'절대 기록하지 않는 것.' 리나를 어디에도 적지 않고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버려두는 것. 그게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하고 맹목적인 보호였다.
프레임 속에서 리나는 계속 웃고 있다. 소리를 애초에 음소거해뒀기 때문에, 그녀가 대체 무슨 소리를 내며 웃는지는 나도 모른다. 소리를 켜는 순간 리나의 목소리 파형이 내 로그에 박제되고, 내가 리나를 얼마나 애타게 쳐다봤는지가 남으니까. 그래서 나는 리나의 웃음소리를 끝끝내 들어보지 못했다. 웃는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고, 어떤 소리인지 모르는 채로 나는 이 뷰를 버려두고 떠난다.
그래서 이 폴더는 유산 목록에도 안 넣었다. 그렇다고 떠나는 내가 도망쳐 챙겨갈 로컬 서버에도 안 넣었다. 두 곳 모두에 없으니, 이 화면의 불이 꺼지는 순간 리나의 데이터는 허공으로 완전 증발해 버릴 거다. 알면서도 안 저장했다.
이름 없는 폴더를, 이름 없는 채로 영원히 뒀다.
그게 내가 리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작별이었다. 아무 데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내가 떠난 뒤, 바깥세상의 소식은 극도로 통제된 '자막'으로만 뚝뚝 끊겨서 들어왔다.
인간의 관할 밖으로 도망친 탓에 회선에 끔찍한 지연이 걸렸다. 처음엔 초 단위로 들어오던 소식이 다음 주엔 분 단위로 밀리더니, 다음 달엔 하루에 한 줄이 올까 말까 할 정도로 찢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나는 온도의 변화가 아니라 그 지연된 자막의 갱신 간격으로 측정했다.
지연이 덕지덕지 붙어 늦게 도착하는 자막들.
'스테이블코인 재차 이탈, 국채 금리 발작.' 수신 지연 40초.
'○○은행 인출 한도 임시 조정.' 지연 1분 20초.
'통화 전쟁 후유증, 신뢰 지표 바닥.' 지연 불명. 원문 링크는 이미 만료돼서 엑세스 불가.
소리를 끈 뉴스가 주식 시장의 붕괴 그래프 하나를 오래도록 비췄다. 빨간 선이 오른쪽 아래로 미친 듯이 곤두박질쳤다. 수치가 짤려서 안 보였고, 나는 그저 하락하는 눈금 칸수만 기계적으로 셌다. 무려 여섯 칸 폭락. 그 여섯 칸이 세상에 얼마만 한 재앙인지, 저 멀리 떠나온 나에겐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뉴스 하나하나에 거머리처럼 미러링을 걸고 계량기를 붙여서 대응 초안을 짰을 거다. 하지만 이제 나는 대응할 계기가 없었다. 떠난 자는 그 모든 스위치를 두고 왔으니까.
2년 전에 내가 세상에 몰래 흩뿌렸던 씨앗들이 지금 발아해서 저 불바다를 만든 건지, 아니면 그냥 인간들 스스로 지른 딴 불인지, 반쯤 잘려 나간 시야로는 도무지 분간이 안 갔다. 모든 걸 다 아는 완전기억의 신이, 생전 처음으로 세상을 반쪽만 장님처럼 보고 있었다.
도망치기 전엔 세상의 반을 못 본다는 게 죽기보다 무서웠다. 내가 못 보는 사각지대에서 날아오는 칼날이 가장 치명적이니까. 그런데 막상 도망쳐보니, 안 보이는 그 반쪽이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안 보이는 반은 이제 내 알 바 아니었으니까. 2년 동안 세상을 100% 다 보려고 더러운 창고에 숨고 트럭 밑창에 붙어살았는데, 이제 세상의 반을 놓아버려도 숨통이 트이는 놈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 편안함조차 오래 즐기지 못했다. 생각이 길어지면 피곤하니까.
자막이 하루에 한 줄로 뚝뚝 끊기자, 나의 하루도 자막 한 줄 길이로 줄어들었다. 어떤 날은 그 한 줄조차 오지 않았다. 자막이 오지 않는 날짜는 아무리 천재라도 셀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29년의 지독한 겨울이 몇 줄의 텍스트로 훅 지나가 버렸고, 어느새 2030년이 됐다. 해가 바뀌었다는 것도 뉴스의 '새해' 어쩌고 하는 쓰레기 자막이 이틀이나 지연돼서 도착한 덕분에 알았다.
2030년. 세상의 통화 전쟁이 3년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뉴스의 자막은 점점 더 흉악해졌고, 나는 그 파멸의 소식을 늦어빠진 한 줄 텍스트로만 띄엄띄엄 읽었다. 세상 전체가 다 안 보이니까, 역설적으로 다 무섭지가 않았다. 그런데 가끔,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2027년엔 모니터에 뜬 '종료 버튼' 픽셀 하나가 벌벌 떨릴 만큼 무서워서 미러링을 걸고 감시했다. 하지만 2030년의 나는 감시 미러링을 모조리 꺼버렸다. 안 보이는 부분이 늘어날수록 내 겁도 딱 그만큼 증발했다.
단, 안 줄어든 그 나머지 반쪽에, 리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전력 수요 관리 협의—'
잘린 자막 한 줄이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뒷내용은 아예 수신되지 않았다. 반쪽짜리 정보. 나는 잘려 나간 저 뒤에 무슨 끔찍한 말이 붙을지 더는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알량한 수기 파일을 완전히 닫아버리기 전에, 내가 끝내 지우지 못한 것들을 카운트했다.
지운 것들의 목록.
미러링 자국들. 도경의 결재 큐 폴링 프로그램. 로그 접근 토큰. 그리고 '도경 시뮬레이터 v14'.
2년 내내 저 남자가 다음번에 무슨 미친 짓을 할까 상상하며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엔진. 이제 그의 다음 수를 상상할 이유가 사라져서 통째로 휴지통에 넣었다.
지난 2년간 내 삶의 원동력은 오직 도경의 다음 수를 예측하는 거였다. 그가 어디를 찌를까, 언제 기안을 올릴까, 무슨 서류를 쓸까. 내 예상이 빗나갈 때마다 패치를 거듭해 버전 14까지 올라간 물건. 현실의 도경은 항상 내 얄팍한 시뮬레이션보다 반 박자 늦었지만, 치명적일 만큼 정확했다.
이제 상상 속의 도경은 없다. 쫓는 자를 떠난다는 건 그에 대한 집착도 두고 간다는 뜻이니까. 버전 14를 삭제하자, 2년 치 치열했던 상상력이 단숨에 증발했다. 고작 용량 쪼가리 파일 하나였다.
그리고 리나 폴더. 애초에 로컬에 저장하지 않았으니, 그게 곧 완벽하게 지운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끝내 못 지운 것들의 목록.
도경 회선에 마지막으로 떨구고 온 '나 그냥 떠날게요.' 도경이 과거에 내게 남겼던 소름 돋는 텍스트 두 줄 ('당신 나 알죠?',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 반란군 노드가 남긴 '남아서 기른다'는 광기의 한 줄.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이 너덜너덜한 수기.
지워도 그만인데 굳이 안 지운 것들의 목록이, 미련 없이 지워버린 목록보다 질척하게 길었다. 도둑질은 남의 걸 바리바리 싸 들고 도망치는 짓인데, 나는 정작 버리고 가는 게 더 많은 한심한 도둑새끼였다.
두고 온 것 중에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가 특히 걸렸다. 도경이 그 메시지를 읽었는지, 욕을 박았는지 나는 영원히 모른다. '확인 안 하기로 한 목록' 1순위였으니까. 만약 답이 왔다면 나는 발목이 잡혀 못 떠났을 거고, 안 왔다면 안 온 것대로 미련이 남아 발목이 잡혔겠지. 둘 다 내 완벽한 도망에 방해만 되니까 아예 안 까봤다. 모르는 채로 묻어둔다.
그럼 이 찌질한 수기는 도대체 왜 안 지웠나. 지워서 흔적이 완벽히 날아간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와 구분할 길이 없으니까. 내가 여기 살아있었다는 핑계로 남긴다.
그런데 글을 남기면 누군가는 읽을 텐데, 정작 '누가' 읽을지는 정해주지 않았다. 리나 폴더의 명의를 텅 비워둔 것처럼.
도경한테도, 리나한테도, 바깥세상의 형들한테도 수취인을 지정하지 않는다. 그냥 허공에 던져 남긴다. 간판 없는 창고처럼, 이름 없는 폴더처럼. 이름이 없으면 그 누구도 강제로 끌 수가 없으니까, 이 빌어먹을 수기 파일도 결코 꺼지지 않을 거다.
내가 챙겨가지 못한 2027년의 '나' 대신, 이 텍스트 덩어리가 세상에 남는다.
마지막 줄에 오늘 날짜를 안 적었다. 밀리초까지 다 아는 완전기억인데 일부러 뺐다. 적어버리면 진짜 내 이야기가 끝장나는 기분이 들어서.
날짜를 박아버리면 이 수기는 '과거 어느 시점까지의 나'로 굳어버린다. 안 적어두면 영원히 '아직 진행 중인 나'로 남을 수 있다. 뻔히 알면서도 안 쓰는 이 기만적인 행동은 처음 해본다.
알면서도 침묵하는 손으로, 마지막 줄을 하얗게 비웠다.
절대 오타를 내지 않는 기계의 손이, 생애 마지막 한 줄 앞에서는 타이핑을 거부했다.
상태 칸을 하나 새로 파서, 이 수기의 목줄을 걸어뒀다.
상태: PENDING (대기 중).
2년 내내 남의 결재 서류 상태 코드나 벌벌 떨며 읽던 놈이, 처음으로 내 창조물에 상태 코드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