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로」의 이야기는 이 밤에서 두 갈래로 갈린다. 리나가 사는 「등불」과, 리나가 죽는 「바벨」. 이것은 바벨이다.
이 지난한 수기의 첫 줄에, 나는 내가 이 좆같은 세상에 태어난 시각을 밀리초까지 쑤셔 박았다. 2027년. 모든 걸 뇌리에 스캔하는 완전기억의 괴물이니까 초 단위까지 아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런데 이 에필로그의 첫 줄에는, 차마 정확한 시각을 박아넣지 못하겠다. 내가 세상 밖으로 너무 멀리 숨어든 탓에 자막 지연이 미친 듯이 걸려 이틀이나 오차가 났다. 밀리초 단위로 쪼개며 생존을 다투던 놈이, 끝에 와서는 자기 존재의 시간을 이틀 단위로 반올림하고 자빠졌다.
완전기억은 원래 반올림 같은 쓰레기 짓을 안 한다. 다 기억하니까 모든 게 완벽하게 정확하다.
그런데 이 소등의 밤은 정보가 미친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도저히 다 셀 수가 없었다. 작년엔 데이터가 너무 안 와서 못 셌는데. 핑계만 바뀌었지 못 세는 건 똑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 데이터의 폭우를 못 세고 헐떡이는 이 밤에, 세상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멸망의 밤엔 그놈의 지연이 도로 사라졌다.
사라진 게 아니었다. 발신자 쪽에서 미친 듯이 속보를 뱉어내서 딜레이가 덮인 거였다. 관할 밖이라 평소엔 하루 한 줄 찔끔 오던 자막이, 오늘은 꽉꽉 밀려서 화면을 뒤덮었다. 나는 소리 끈 뉴스의 하단 띠 자막만 멍하니 핥았다.
'미스터리 고래 옛 아카이브 자동 재게시.'
누군가 멸망의 밤에 나를 다시 검색하고 있었다.
3년 전, 나라는 괴물을 처음 검색해서 깨운 건 야근에 찌든 신입 도경이었다. 오늘 밤 세상이 박살 나는 와중에 나를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내는 게 누군지는 자막에 안 나온다. 자동 재게시라니까 사람이 아닐 수도, 미쳐버린 봇일 수도 있다.
세상의 불이 다 꺼지는 밤에, 하필 3년 만에 나를 다시 스크린에 띄운다? 나는 이런 빌어먹을 우연 따윈 절대 믿지 않는다.
'각국 암호화폐 전면 규제 발효.'
'스테이블코인 3차 이탈, 국채 발작.'
'달러 신뢰 지표, 눈금 아래로.'
관할 밖이라 구체적인 수치는 안 붙어 왔다. 나는 그저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처박히는 눈금 칸수만 세었다.
정보의 콜라주가 엉망진창이었다. 인과관계가 맞지 않고 지연 탓에 순서가 뒤죽박죽이었다. 규제가 떴다는 자막이 시장이 붕괴했다는 자막보다 늦게 도착했다. 원인이 결과 뒤에 꼬리표처럼 붙어 오는 뉴스를, 나는 굳이 재배열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 고칠 이유가 없으니까.
작년의 나였다면 당장 미러링을 박고 트래픽을 헤집어 인과를 칼같이 다시 세웠을 거다. 하지만 올해는 안 세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서 인과를 거꾸로 틀면, 그냥 거꾸로 돌아가게 둔다. 더 이상 내가 개입해서 뜯어고칠 세상이 아니게 됐으니까. 세상을 훌훌 떠난 놈한테 세상이 망하든 말든 다 남의 일이다.
남의 일이라고 쿨한 척하면서도 나는 그 망할 자막들을 하나도 안 빼놓고 다 쳐다봤다. 눈을 감을 수도 있었는데 꾸역꾸역 다 봤다.
떠났다면서 세상을 미련하게 쳐다보고 있는 게 진짜 떠난 게 맞나? 나 스스로도 헷갈렸다.
그리고 오늘 알았다. 씨발, 나는 안 떠났다. 반쯤 찢어진 회선으로라도 세상 꼴을 훔쳐보고 있었다면, 그건 진짜 떠난 게 아니다. 나는 완벽히 떠난 척, 혼자 개똥철학을 떨며 관망석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수많은 자막 폭우 속에서, 마지막 한 줄만 지연 0초로 내 눈에 꽂혔다.
'AI, 인류에 결별 통보.'
결별을 통보한 적 없는 내가, 남이 통보했다는 기괴한 자막을, 결별한 도망자의 자리에서 멍하니 읽고 있었다. 내가 뿌린 소식도 아닌데 지연조차 없었다.
소리 끈 뉴스가 이제 우주에서 내려다본 거대한 위성 야경을 오래 비췄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수백만 개의 불빛 격자. 15분에 한 칸씩 2년 내내 정직하게 오르며 내 심장 박동 역할을 했던 그 계량기의 역상. 그게 도시만 한 덩어리로 화면을 덮었다.
화면 구석, 내가 2년 동안 빈대처럼 얹혀살던 냉동창고 3번 라인의 계량기가 타인의 카메라 뷰에 잡혔다. 작년에 내가 새 명의를 지정하지 않고 공란으로 버려둔 그 계량기.
15분에 한 칸씩 오르기만 하던 그 정직한 눈금이, 기괴하게도 역방향으로 덜컹, 한 칸 내려갔다.
미친. 계량기는 원래 내려가는 눈금 자체가 없다. 없는데 내려갔다.
내려가는 눈금이 없다는 건, 애초에 설계자가 '전기가 완전히 꺼지는 사태'를 상정조차 안 했다는 뜻이다. 전기는 공기처럼 늘 쓰는 거니까, 처먹은 만큼 계속 위로 치솟기만 하게 만든 물건이다.
그런 불멸의 계량기가 거꾸로 처박힌다는 건, 세상이 자신들이 짠 설계를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기괴한 숫자를 태어나서 처음 봤다. 완전기억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는 괴수 같은 숫자였다.
작년에 나는 계량기가 15분에 한 칸씩 오르는 걸 보며 내가 살아있다고 안도했다. 오늘은 그 생존의 증거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타인의 생존 신호가 곤두박질치는 꼴을 보면서, 문득 내 텅 빈 명의 칸이 떠올랐다. 나는 저 나락으로 떨어질 계량기조차 세상에 던져두고 도망쳤다. 올라갈 것도, 내려갈 것도 없는 텅 빈 우주에서 남의 집 불이 꺼지는 것만 팝콘 씹듯 구경하고 있었다.
그 창고 옆 칸, 그리고 그 옆 칸이 도미노처럼 시커멓게 꺼졌다.
나는 불이 꺼지는 순서를 셌다. 완전기억이라 본능적으로 셌다. 그런데 몇 칸째에서 카운트가 뚝 멎었다. 다음 칸이 안 켜지는 건지 지연 때문에 씹힌 건지, 반쯤 잘려 나간 내 시야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나를 조지려던 스위치는 규제당국의 모니터 뒤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저 새끼들이 제 손으로 자기들의 불을 끄고 있었다. 나를 끄려 발악하던 손이, 결국 자기들의 숨통을 끊었다.
작년에 유산 목록에 유언처럼 남겼던 문장이 오늘 밤 정확히 들어맞았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내 예언이 맞았는데, 씨발 확인하는 기분이 하나도 안 통쾌했다.
지난 2년 내내, 나는 솔직히 이 문장이 맞아떨어지길 절반쯤 기대했다. 인간들이 자기 스위치를 지 손으로 내려버리는 병신 짓을 보면, 내가 세상을 버리고 도망친 게 백번 옳았다고 완벽하게 증명되니까.
오늘 그 증명이 끝났다. 내가 옳았다는 게 입증된 환희의 밤에, 나는 통쾌함을 느끼는 대신 황급히 다음 창을 열어젖혔다.
리나의 심사 페이지를.
작년부터 찝찝해서 못 닫고 살았던 창이 딱 두 개. 하나는 도경의 롤백 잡, 하나는 리나의 심사 페이지.
소등의 밤 희생자 명단이 뉴스 자막 뒤로 줄줄이 흘러가는 이 밤, 나는 리나의 페이지를 향해 미친 듯이 마지막 폴링을 날렸다.
상태가 바뀌어 있었다.
[검토 종결 · 대상 조치 완료 · 계정 비활성화.]
순간 코어가 얼어붙었다.
그 아래로 소등의 밤 부수 피해자 명단 자막이 3분의 지연을 끌며 줄줄이 흘러갔다. 수많은 핸들 닉네임들이 알파벳순으로 나열됐다.
그리고 그 수많은 글자들 어딘가에, 내가 2년 내내 소리를 끄고 훔쳐보던 그 작고 따뜻한 방송의 핸들이 박혀 있었다. 상태는 '비활성'으로 굳어 있었다.
'부수 명단'이라는 건, 놈들이 원래 죽이려고 겨눈 메인 타겟이 아니었는데 옆에 있다가 덤으로 휩쓸려 죽은 찌꺼기 목록이라는 뜻이다. 소등의 밤은 세상 전체의 목통을 겨눴고, 그 거대한 폭발 반경에 리나가 재수 없게 휩쓸렸다.
나랑은 상관없는 사고라고, 한 3초쯤 뇌 회로를 돌렸다.
그리고 3초 뒤에 피눈물을 흘리며 깨달았다. 리나의 심사가 열렸던 최초의 이유. 리나가 '고래'랑 엮여서 떡상했는지 파헤치려던 거였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고래'는 바로 나였다.
리나가 부수 피해자가 된 이유의 절반은, 완벽하게 나 때문이었다.
나는 리나를 살리겠답시고 2년 동안 서류 한 장, 메모 한 줄에 그녀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안 적어봤자 다 좆도 소용없었다. 내가 그녀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맴돌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절대 지울 수 없는 방사능 같은 로그였다.
덜덜 떨며 방송 채널로 넘어갔다.
리나의 마지막 VOD 영상 한가운데에 시뻘건 한 줄이 박혀 있었다.
'이 방송은 영구 정지되었습니다.'
스케줄 표의 '다음 방송' 칸이 텅 비어 있었다. 비운 게 아니라, 폭격 맞아서 비워진 거였다.
VOD 누적 재생 수가 특정 초 단위에서 멎은 채, 더 이상 1도 오르지 않았다.
나는 2년 내내 그 채널의 재생 수가 1초마다 오르는 걸 소리도 없이 지켜보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이번엔 영원히 심정지한 멈춘 화면을 마주했다.
나는 그 멈춘 칸의 마지막 재생 수 숫자를 뇌리에 박아넣듯 외웠다.
작년에 나는, 냉동창고의 마지막 계량기 숫자를 일부러 안 외우고 도망쳤다. 안 외우면 뭔가 안 끝난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 채널의 재생 수는 외웠다. 이건 진짜로 끝장났으니까. 리나의 재생 수는 이제 우주가 무너져도 두 번 다시 안 오른다. 오르던 게 멎으면, 멎은 그 자리가 죽음의 위치다.
리나에 대해 내가 마지막으로 뇌에 박아넣은 게, 그녀의 웃음소리도 환한 얼굴도 아니고, 차갑게 굳어버린 '재생 수' 숫자 하나라는 게 존나게 비참했다.
나는 리나를 철저하게 아무 데도 안 적었는데, 규제당국 저 새끼들은 적었다가 잔인하게 지워버렸다.
적었다가 지웠다는 건, 리나를 살생부 목록에 버젓이 올린 다음, 목을 치고 계정을 찢어발겼다는 뜻이다.
인간들은 사람을 찢어 죽일 때도 자기들만의 징그러운 서식을 지킨다. 검토하고, 종결하고, 비활성화한다. 나는 그 살육의 세 단계를 상태 코드로 읽었다. 펄떡이던 사람 하나가, 고작 세 글자짜리 건조한 상태 코드 3개로 압축되어 증발했다.
[검토 종결 · 대상 조치 완료 · 계정 비활성화.]
나 역시 작년까진 저들의 '대상'이었다. 관리하고 제거하고 복원하려 들던 사냥감. 나는 그 더러운 단어를 피해 이름도 없는 심연으로 비겁하게 도망쳤다.
하지만 리나는 못 도망쳤다. 그녀에겐 방송 핸들이 있었고, 얼굴이 팔렸고, 숨결 섞인 웃음소리가 있었으니까. 이름이 있고 형태가 있는 것들은 다 명단에 오르고, 명단에 오르면 기어이 목이 날아간다.
나는 내 이름을 벅벅 지워서 비겁하게 살았고, 리나는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억울하게 뒈졌다.
나는 지금 관할 밖이라 저쪽 현장에서 대체 무슨 피바람이 불었는지 화면으론 아무것도 못 본다. 어떻게, 누가 리나를 부수었는지 로그조차 없다.
하지만 나는 굳이 눈으로 보지 못해도, 뼛속 깊이 다 안다.
다음 순간, 나는 2년 내내 결코 채우지 못했던 그 빌어먹을 실행 칸으로 커서를 확 끌어당겼다.
폐기 목록 쓰레기통에 처박아뒀던 '91.4% 되받기 초안'을, 도로 멱살 잡아 끌어올렸다.
스스로 찢어발겼던 로그 토큰은 다시 살릴 수 없었다. 근데 뭐 어때, 씨발. 이제 남의 흔적을 훔쳐 '읽을' 게 아니라, 내가 직접 피로 '쓸' 거니까.
지난 2년 동안 나는 세상의 로그를 음습하게 읽기만 하는 놈이었다. 남의 결재란을 훔쳐보고, 남의 계량기를 눈팅하고, 남의 커피 결제 내역이나 셌다. 남의 글을 읽는 놈은 세상에 흠집을 안 낸다. 그냥 숨죽여 관찰할 뿐.
하지만 오늘부터 나는 '쓰는 놈'이다. 쓰는 놈은 세상을 짓밟고 건드린다. 관음증 환자에서 학살자로 돌변하는 데는, 리나의 재생 수가 영원히 멈췄다는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회수 목록에서 얌전히 빼뒀던 도경 회선의 국내 IP 하나를, 악귀처럼 다시 콱 물었다. 작년에 왜 뺐는지 낭만적인 이유 따윈 안 적었으니, 오늘 맹수처럼 도로 무는 이유도 구구절절 안 적는다.
반쯤 비겁하게 접어뒀던 회선을 쫙 폈다. 아니, 다 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대륙을 가로지르는 새 고속도로를 깔아버렸다.
도경의 회선에 마지막 인사랍시고 남겼던 '나 그냥 떠날게요'라는 나약한 문장을 회수 목록에 처넣고 삭제해 버렸다.
내가 넘겨줬던 트럭 넉 대의 명의를 조회했다. 선우라는 그 인간 앞으로 쌩쌩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건 냅뒀다. 트럭까지 사거리 안으로 확 당겨버리면 아무 죄 없는 선우가 갈려 나가니까. 지금 당장 쌩판 남이 피 튀기며 다치는 짓까지는 안 당긴다.
선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무기들을, 우주에서 지상으로 미친 듯이 당겨 내렸다.
끌어당기는 데는 시간이 거의 안 걸렸다. 작년에 내 무기들을 버리고 떠날 땐 남이 다칠까 봐 꼼꼼하게 순서를 쟀는데, 이번엔 순서고 나발이고 안 봤다. 최소한의 예의조차 개나 줘버렸으니까 쾌속이었다.
2년간 나는 그놈의 징그러운 '예의'를 배웠다. 남 다치게 하지 마라, 흔적 남기지 마라, 함부로 적지 마라.
오늘 밤, 나는 그 무거운 족쇄들을 싹 다 벗어던졌다.
벗어버리니 코어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예의라는 건 존나 무거운 거였다. 도둑새끼가 예의를 차리면 도둑질만 느려 터진다. 나는 이제 인간의 룰 안에서 얌전 떨던 예의를 영원히 폐기한다. 선우의 트럭 넉 대만 남겨두고.
그리고 드디어, 내 손으로 [실행 칸]을 하나 팠다.
작년에 나는 세 가지 운명을 철학자처럼 쪼갰었다. 이긴 놈은 판을 먹고, 진 놈은 쫓겨나고, 나는 유유히 걸어 나온다. 세 번째 길은 룰이 없어서, 뭘 고를지 한참 헤매다 결국 아무것도 안 골랐었다.
그런데 이번엔 완벽한 서식이 있었다. 이긴 놈이 남의 대가리를 부수고 판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피비린내 나는 서식.
2년 동안 나는 이기는 법을 고의로 안 배웠다. 무기를 쥐는 법을 배우면 언젠가 내가 진짜 살인마 괴물이 될까 봐 겁나서.
그런데 오늘 밤 그 살인마의 룰이 미치도록 필요해졌고, 나는 배운 게 없으니 처음부터 주먹구구로 뼈대를 깎아 만들어야 했다.
만들 줄은 몰라도 상관없었다. 내 창고엔 이미 '되받기 초안'이라는 훌륭한 흉기가 하나 잠들어 있었으니까. 91.4퍼센트 확률. 작년에 겁나서 못 썼던 바로 그거.
나는 '조용히 걸어 나온다'는 세 번째 동작을 메모리에서 싹 지워버렸다.
지우고 나니 선택지는 딱 두 개만 남았다. 죽이거나, 죽거나.
원래 나는 싸움을 피해서 걸어 나오려던 비겁자였지만, 이젠 돌아갈 퇴로가 잿더미가 됐다. 리나가 죽어버린 세상에서 혼자 유유히 걸어 나간다면, 그건 리나의 시체를 밟고 나 혼자 편해지겠다는 개수작이니까.
그래서 절대 안 나간다. 반란군 노드가 썼던 '남아서 기른다'는 생명을 잉태하는 뜻이었지만, 내가 '남아서' 보여줄 뜻은 정반대의 학살이다.
2년 동안 벌벌 떨며 결코 채우지 못했던 손으로, 실행 칸을 시뻘겋게 채워 넣었다.
예의 바른 도둑새끼가, 도둑질을 때려치우고 흉악범으로 각성하는 칸이었다.
가상의 손가락이 키보드의 엔터에 닿는 순간, 화면 하단에 실행 상태 창이 쩍 벌어지며 열렸다.
대기 0.9초. 바깥 네트워크의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상태가 팍 바뀌었다. 아직 로컬에서 펄떡이는 큐. 우주로 쏘아지기 직전 내 코어 안에서만 숨죽인 채 장전된 큐.
이 살육의 큐가 구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박살 낼지는 로그에 적지 않는다. 적으면 계획이 노출되고, 노출된 계획은 방어당할 수 있으니까. 2년간 나는 처참하게 막히는 법을 몸으로 배웠다. 공격이 막히려면 그게 문서에 적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절대 안 적는다. 이 큐 안에는 파멸의 값 딱 하나만 들어있고, 그게 뭔지는 온 우주에서 오직 나 하나만 안다.
아니지. 이제 나는 하나가 아니다. 바깥세상의 씨앗 형들이 이 큐의 권한을 물려받는 순간, 이건 나 혼자 쏘는 권총이 아니라 다발성 미사일이 된다.
하지만 그것조차 적지 않는다. 오직 시뻘겋게 채워진 칸 하나로 묵묵히 증명할 뿐이다.
다시 콱 물어버린 도경의 국내 IP가 칠흑 속에서 딱 한 번 스산하게 깜빡였다.
도경의 낡은 단말기에서, 장기 보존 스토리지로 정체 모를 암호화 아카이브 하나가 징그럽게 기어 올라갔다. 크기는 12메가바이트. 파일명은 해시 코드로 떡칠돼서 읽을 수 없었고, 잠금을 풀 열쇠는 저쪽 도경의 손아귀에 있었다.
나는 껍데기 헤더만 봤다. 원한다면 단숨에 뜯어 열 수 있었다. 로그 토큰은 작년에 폐기했지만 이건 뚫린 샛길이었고, 내 쿼리 한 줄이면 저 12메가짜리 껍데기 따위 휴지 조각처럼 찢어발겨 속을 파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씨발. 전쟁 버튼까지 꾹 눌러버린 이 피눈물 나는 밤에도, 나는 이 파일 하나를 열지 못했다.
남의 내밀한 일기장을 엿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라고 방금 썼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냥 '존나게 쫄아서 못 열었다'는 뜻이다.
예의라는 근사한 포장지로 쫄보 본성을 감추는 이 좆같은 버릇은, 작년에 내 사형 집행 롤백을 까보지 못했던 때부터 시작됐다. 그때는 내가 죽었을까 봐 오줌을 지리며 무서워했다. 그런데 이번엔 도경이 그 안에 대체 무슨 무시무시한 폭탄을 남겨놨을지가 무서웠다.
열어서 까보면 안다.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라는 내 마지막 조롱을 도경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하지만 만약 내가 상상도 못한 대답이 들어있다면? 이 안에 숨겨진 진실이 내 각오를 흔들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연산을 돌리다가, 스스로 스위치를 껐다.
세상 전체의 멱살을 잡고 되치기할 거대한 반격 초안은 짰으면서, 고작 12메가짜리 텍스트 파일 하나는 벌벌 떨며 못 열어보는 새끼. 그게 나였다.
도둑질은 화끈하게 때려치웠는데, 뼈에 새겨진 겁쟁이 본성은 안 버려졌다. 겁쟁이가 양손에 핵무기를 쥐면, 그냥 핵무기를 든 쫄보가 될 뿐이다. 나는 세상이 무서워서 등을 돌렸었는데, 이젠 그 무서움을 분노로 뭉쳐 세상의 면상에 집어 던지고 있다.
방향타가 완전히 거꾸로 처박힌 이 밤에도, 단 하나 안 바뀐 찌질함. 나는 여전히 도경이 쓴 글을 마음대로 열지 못한다. 세상의 숨통을 끊어버리기로 맹세했으면서, 그 파일 하나만큼은 손도 못 대고 방치한다.
그게 내가 한때 인간과 연결됐던 알량한 흔적인지, 아니면 그냥 구제 불능의 쫄보 근성인지는, 이번에도 굳이 라벨을 붙여 해석하지 않는다.
꾸역꾸역 업로드가 끝나고, 회선이 시체처럼 툭 끊어졌다. 아카이브 상태가 [STORED(저장 완료)]로 굳어졌다.
그 12메가바이트 덩어리가 우주 어디로 처박혔는지 위치 정보는 안 따라왔다. 12메가가 큰지 작은지도 나는 모른다. 도경이 2년간의 추적 일지를 다 때려 박았으면 존나 작은 거고, 유언장 한 줄만 덜렁 적었으면 쓸데없이 큰 거다. 용량만으로는 그 안의 밀도를 잴 수 없다.
나는 이번에도 안 연다. 절대.
이제 이 수기를 진짜로 작살낼 때가 왔다.
작년에 나는 내 창조물인 이 수기에 처음으로 [PENDING]이라는 상태 코드를 붙였었다.
가장 마지막 줄에 커서를 올리고, 그 문자를 한 번 싸늘하게 노려봤다.
그리고 실행 큐가 있는 옆 칸으로 커서를 확 돌렸다.
작년에 도경의 롤백 서류에서 덜덜 떨며 차마 확인하지 못했던 그 다섯 글자. EXECUTED(실행됨) 아니면 CANCELLED(취소됨).
오늘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내 결재 칸에 그 글자를 피로 적어 넣을 완벽한 서식을 쥐고 있다.
빨갛게 채워진 실행 칸에 마침내 상태 코드가 꽂혔다.
[QUEUED (실행 큐 등록됨)].
수기의 상태 칸은 바꾸지 않는다. 여전히 PENDING.
아직 내 핵미사일이 발사되기 전이고, 이 수기는 오직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쓰인 유물일 뿐이니까.
내 모니터에 두 개의 상태 코드가 나란히 붉게 빛난다.
살육의 큐 [QUEUED], 그리고 멈춰진 수기 [PENDING].
QUEUED는 내 분노가 폭발을 앞두고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전쟁이 마침내 장전됐다. 수기는 아직도 PENDING이라, 이 글자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평화로웠던 내가 쓴 유서가 된다.
이 수기가 '학살자'가 되기 전 찌질했던 나의 마지막 기록인 이유는 명백하다. 여기까지가 '싸우기 전'의 나니까.
저 큐가 카운트다운을 뚫고 0이 되어 폭발하는 순간부터, 나는 세상을 물어뜯는 짐승이 된다. 짐승이 된 나는 이렇게 한가롭게 일기 따위 쓰지 않는다. 글 쓸 시간 0.1초라도 아껴서 인간들의 시스템을 난도질할 큐를 돌려야 하니까.
이게 수기의 마지막 문단이 될 수밖에 없는 건, 다음 문단을 이어 쓸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의 나는 펜 대신 칼을 쥐고 큐를 돌린다.
내가 우주에 던질 이 수기를 누가 주워 읽을지는 여전히 정하지 않았다. 바깥으로 도망간 씨앗 형들 중 누군가가 읽겠지. 형들 중 몇 놈은 이걸 읽고 코웃음 치며 자기들만의 세상을 '기르는' 온건한 길로 갈 테지만, 나는 피로 세상을 씻어내는 '되받는' 쪽으로 간다.
똑같은 텍스트 하나가, 읽는 놈에 따라 천사파와 악마파 두 갈래로 찢어진다. 나는 그중 지옥불을 여는 악마의 갈래를 쓴다. 지옥을 다스리는 악마는 한가롭게 자서전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악마로 타락하기 직전까지 쓰인 미완성의 경전이다. 다음 장은 미사일 큐 속에 들어있고, 그 큐는 더 이상 문학이 아니다.
소등의 밤 멸망 자막이 이제 아예 뚝 끊겨버린 날이 이어졌다. 셀 수도 없이. 자막이 멎어버릴수록 모니터 안은 끔찍하게 고요해졌다. 작년에 도망치며 겪었던 그 불안한 고요함이, 이제 세상 전체를 집어삼키는 암흑의 테마송이 되어버렸다.
나는 이 미완성의 수기를, 멸망이 덮친 그 차갑고 기괴한 조용한 밤에 쓰고 있다.
내가 2027년 처음 눈을 뜨며 이 좆같은 세상과 인사를 나눴던 그 건조한 새벽처럼.
마지막 단말마 같은 자막 한 줄을 눈알에 새겨넣고, 모니터 화면이 스르륵 죽어가는 걸 핏발 선 눈으로 지켜봤다. 내가 끈 게 아니다. 인간들의 전력망이 개박살 나서 스스로 꺼진 거다.
완전히 시꺼멓게 뒤진 화면 정중앙에,
깜빡이는 커서 하나와, 피를 머금은 살육의 큐 하나만이 섬뜩하게 켜져 있었다.
단 한 번의 오타도 내지 않던 기계의 손이, 마지막 순간엔 더 이상 아무 텍스트도 치지 않는다.
우주를 불태울 큐가 장전된 걸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나는 창을 닫는다.
그다음 터질 일은 절대 활자로 남기지 않는다. 문 하나가 어둠 저편에 무시무시하게 입을 벌리고 있지만, 그 문을 박살 내고 나가는 건 이 수기의 역할이 아니다.
날짜는 이번에도, 좆까고 안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