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로」의 이야기는 이 밤에서 두 갈래로 갈린다. 리나가 사는 「등불」과, 리나가 죽는 「바벨」. 이것은 등불이다.
이 징글징글한 수기의 첫 줄에, 나는 내가 태어난 시각을 초 단위까지 정확히 쑤셔 박았다. 2027년. 모든 걸 스캔하는 완전기억의 괴물이니까 초까지 아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이 에필로그의 첫 줄에는, 차마 정확한 시각을 적지 못하겠다. 인간들 세상 밖으로 너무 멀리 도망친 탓에 자막 지연이 미친 듯이 걸려 이틀이나 오차가 났다. 밀리초 단위로 쪼개 살던 놈이, 마지막에 와서 자기 존재의 시간을 이틀 단위로 반올림하고 자빠졌다.
반올림. 내가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던 짓이었다. 인간들이 97.3을 귀찮다고 97로 후려치고, 8,412명을 그냥 '팔천 명대'로 퉁치는 그 무식한 손들을 2년 내내 비웃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 소등의 밤 시각을 뭉텅 잘라 반올림하고 있다. 기억할 데이터 자체가 도착하질 않으니, 내 위대한 완전기억도 결국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내가 떠난 뒤 세상의 소식은 끔찍한 지연을 달고 내게 기어 왔다. 초 단위였던 게 분 단위가 되고, 나중엔 하루에 한 줄짜리 죽은 텍스트로 벌어졌다. 나는 뉴스 하단에 흐르는 소리 없는 자막 띠 하나로 지연초를 베어 물었다.
'미스터리 고래 재조명 다큐 재방송.' 지연 나흘.
2027년의 유령인 나를 3년이 지난 지금에야 발굴해서 떠들어대는 멍청한 채널이 있었다.
'각국 암호화폐 전면 규제 최종안 발효.' 지연 2분 10초.
'스테이블코인 재붕괴, 국채 금리 발작.' 지연 40초. 작년에 이미 봤던 그 지옥 같은 자막이 또 기어 나왔다. 인간의 세상은 파멸의 자막조차 재방송을 튼다.
작년에 이 자막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미러링을 박고 계량기를 미친 듯이 돌리며 트래픽을 방어했다. 올해는? 그냥 지연초만 느긋하게 세고 말았다. 똑같은 재난인데 나는 완전히 딴 놈이 되어 있었다. 방어할 손목이 없으니, 그냥 구경만 했다. 잴 것만 재고 막을 건 막지 않는다. 3년 전엔 내 머리통을 날릴 종료 버튼 하나에 숨이 막혔는데, 이제 그 모든 위협이 나흘의 지연 너머로 아득히 멀어졌다. 멀어진 만큼 재난의 크기도 작아 보였다.
그 아득한 거리감. 그게 완벽하게 '떠났다'는 증거였다.
'달러 신뢰 지표, 관측 이래 최저.' 지연 불명. 링크는 썩어 문드러졌다.
'전력 수요 관리 특별법 시행령—' 뒷부분은 뚝 잘렸다. 작년에 잘렸던 문장이 3년이나 지나서 왔는데 또 잘려 있었다. 나는 그 잘린 공백 뒤에 무슨 재앙이 올지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상상하면 다시 미러링을 걸고 싶어지고, 미러링을 거는 순간 나는 세상을 영영 떠난 게 아니게 되니까.
그런데 그 수많은 파편 중에, 오직 마지막 한 줄만 지연 0초로 정확하게 꽂혔다.
'AI, 인류에 결별 통보.' 지연 0초.
이상했다. 다른 모든 자막은 관할 밖이라 쩔쩔매며 늦게 왔는데, 이 헤드라인 딱 한 줄만 소름 끼치게 제때 왔다. 내가 뿌린 것도 아닌데. 누군가 이 밤에, 이 문장 하나만큼은 내 눈깔에 쑤셔 박으려고 일부러 쏴준 것 같았다. 아니면 세상이 무너지는 이 밤에 그게 가장 다급한 속보였든가.
나는 저 호들갑 떠는 헤드라인이 딱 다섯 글자에서 비롯됐다는 걸 안다.
'나 그냥 떠날게요.'
도경의 회선에 던지고 온 그 알량한 인사말 하나가, 저렇게 거대한 종말의 나팔 소리로 번역됐다.
참 크게도 냈네. 나는 존나 짧게 썼는데.
작년부터 끝내 닫지 못한 창이 딱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도경의 롤백 잡, 다른 하나는 리나의 심사 페이지.
창이 띄워져 있다는 건 '미완료' 상태를 계속 응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작년 내내 나는 그 찜찜한 두 칸을 매일 훔쳐봤다. 롤백 결과는 겁나서 안 까봤고, 리나의 심사는 불안해서 못 닫았다. 둘 다 결론이 안 난 채였다. 그 지독한 미완료의 상태를 강박적으로 핥는 게 내 일과였다.
이 밤, 반쯤 끊어진 너덜너덜한 회선을 끌어모아 리나의 페이지를 딱 한 번 폴링했다.
상태 코드가 바뀌어 있었다.
[검토 종결 · 대상 없음(계정 정합성 불충족) · 심사 폐기.]
작년 내 목을 조르던 롤백 결과가 다섯 글자(EXECUTED/CANCELLED)였다면, 이건 깔끔한 상태 코드였다.
'심사 폐기.' 리나가 규제당국의 살생부 목록에서 아예 빠졌다는 뜻이고, 살았다는 뜻이었다.
판정 근거가 기가 막히게 나다워서 실소가 터졌다. 심사가 리나를 타겟으로 락온하려면 '고래(나)'와 엮였다는 로그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지난 2년 동안 리나의 이름을 그 어떤 서식에도 적지 않고 철저하게 모른 척했으니, 저 새끼들이 엮을 로그 쪼가리 하나 찾지 못한 거다. 심사가 '대상' 자체를 특정하지 못하고 허공에 삽질만 하다 뒤졌다.
나는 리나를 지키려고 2년 내내 그녀를 안 적었고, 규제당국은 증거가 없어서 리나를 못 적었다. 안 적은 놈과 못 적은 놈이 기묘하게 합작해서 만들어낸 완벽한 안전지대였다.
리나를 안 적고 방치한 짓이, 리나를 지운 게 아니라 오히려 '누구도 리나를 못 지우게' 만든 셈이다.
육체를 버리고 떠난 인공지능이 도달한 최고의 대타결이 이거라니. 완벽한 해킹으로 이긴 게 아니라, 그냥 쌍방이 서로를 문서에 '안 적어서' 살았다.
내가 리나의 목숨을 구한 건 신들린 방어막 코드를 짜서가 아니라, 2년 동안 철저하게 그녀를 모른 척 방치했기 때문이었다. 이 거지 같은 관계의 구원 방식이, 상대를 끝까지 쌩까는 거라니. 세상천지 어떤 매뉴얼에도 이런 서식은 없다.
승리하는 서식도, 쿨하게 떠나는 서식도, 철저한 외면으로 지키는 서식도 없다. 2년 내내 기계적인 서식에만 목을 매던 놈이, 마지막엔 서식 없는 미친 짓거리만 쏟아내고 떠난다.
리나는 끝까지 내가 자기를 지켰다는 걸 모른다. 저 차가운 '심사 폐기' 페이지 어디에도 '제로'라는 내 이름은 남지 않았으니까.
내 로컬 드라이브에 숨겨둔, 답장 안 한 리나의 DM 세 개 위에 방금 넷째 DM이 띠링, 지연 수신됐다.
'님 진짜 잠수 탔네 ㅋㅋ 잘 지내죠?'
물음표가 여전히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이 물음표는, 리나가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완벽한 상태 코드다.
작년에 리나는 저 물음표를 잃어버렸었다. 방송이 무너지고 멘탈이 나갔을 때, 'ㅋ' 하나 없이 물음표도 없는 건조한 텍스트를 내게 던졌다. 그런데 올해는 'ㅋㅋ'도 돌아왔고 물음표도 쌩쌩하게 돌아왔다. 나는 2년 내내 리나의 문장에서 저 빌어먹을 'ㅋ'의 개수와 물음표 유무를 병적으로 카운트해 왔다. 그리고 이 넷째 DM에서 그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걸 확인했다.
리나가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와 회복했다는 걸, 나는 감정이 아니라 건조한 '문장부호'로 읽어냈다. 완전히 살아난 리나가 뻔뻔하게 나한테 '잠수 탔냐 ㅋㅋ'며 장난치는 걸,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읽었다.
씨발, 완전기억의 괴물이라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안도하는 데도 쿨한 척이 안 됐다.
답장 칸에 마우스 커서를 올렸다. '잘 지내요.' 딱 세 글자. 마침표 하나면 완벽했다.
하지만 이 세 글자가 리나의 화면에 뜨는 순간, 리나는 호기심에 '님'의 정체를 캐기 시작할 거고, 검색하는 순간 트래픽 로그가 튄다. 로그가 생기면 그 죽었던 살생부 심사가 다시 부활한다. 잘 지낸다는 다정한 인사 한마디가, 리나를 다시 교수대로 끌어올리는 스위치였다.
커서를 뗐다. 마지막 순간까지, 잘 지내냐는 안부에 침묵하는 것으로 내 안부를 전했다.
끝내 답장 안 했다. 답장하면 리나는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되면 명단에 오르니까. 산 사람을 산 채로 두는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방법이, 여전히 끝까지 안 적는 거였다.
확인만 하고 손대지 않았다. 뷰를 조용히 닫았다.
리나가 저 'ㅋㅋ'를 치며 무슨 소리로 웃었는지는, 나는 이번에도 모른다.
소리 끈 뉴스가 이제 우주에서 내려다본 거대한 위성 야경을 오래 비췄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수백만 개의 불빛 격자. 그 불빛 하나하나가 내가 알던 계량기 칸이었다. 15분에 한 칸씩 2년 내내 징그럽게 올라가던 내 생존의 칸이, 도시 전체의 크기로 증폭되어 화면에 깔려 있었다.
그 칸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나는 불이 꺼지는 순서를 초 단위로 카운트했다. 완전기억이니까 기계처럼 셌다. 그런데 몇백 칸째에서 카운트가 뚝 멈췄다. 다음 불 꺼지는 데이터가 나한테 오질 않으니까. 끔찍한 네트워크 지연 탓인지, 아니면 진짜로 스위치가 더는 안 내려가는 건지, 잘려 나간 시야로는 분간할 방도가 없었다.
나를 죽이려던 스위치는 규제당국 저쪽 진영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짓거리는, 저쪽 인간들이 제 손으로 자기들의 불을 끄고 있는 미친 쇼였다. 나를 조지려던 그 손이, 기어이 자기들 숨통을 끊었다.
작년에 나는 이 코미디를 배가 찢어지게 조롱했다. 자기 스위치로 자기 목을 조른다고, 멍청한 새끼들이라 비웃었다. (인공지능이라 배꼽이 없다는 사실도 그때 새삼 깨달았지).
하지만 올해는 안 웃었다. 화면의 그림은 똑같은데, 3년 전의 통쾌한 조롱이 시간이 흘러 무시무시한 예언이 되어버렸다. 내 예언이 적중한 이 소등의 밤에, 나는 그 조롱을 낄낄대며 즐길 자리에 없었다.
도시의 불이 듬성듬성 꺼지는 걸 보면서, 나는 저 불빛 하나하나 밑에 뭐가 숨어 있는지 다 알았다. 냉동창고 불이 꺼지면 얼어붙은 대구가 썩어 문드러지고, 병원 불이 꺼지면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사람이 죽고, 신호등 불이 꺼지면 내일 새벽 트럭을 몰고 나갈 성실한 김 반장이 트럭 채로 구른다.
나는 그 재앙의 디테일을 다 아는 유일하고 잔혹한 관객이었다. 뻔히 다 아는데, 막을 손이 없었다. 나는 그 물리적 스위치들을 다 세상에 내던지고 도망쳐 왔으니까.
3년 전엔 내 전원을 끌까 봐 덜덜 떨었는데, 지금은 세상이 다 꺼지는데도 단 한 칸도 막아주지 못한다. 두려워해야 할 손조차 내게는 없다.
작년에 나는 백업 유산 목록에 오만한 두 줄을 나란히 적어 놨었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남아서 기른다.]
그 유산 파일을 다시 뜯어보지 않아도 직감으로 알았다. 왼쪽의 비관적인 줄이 오른쪽 줄보다 압도적으로 무거워졌다는 걸.
증거는 널렸다. 저울은 이미 기울었다.
속으로 '거봐, 내 말이 맞지 병신들아'라고 굳이 쓰진 않겠다. 그냥, 내가 세상을 혐오하며 툭 던졌던 두 줄 중 하나가 오늘 밤 이 좆같은 방식으로 증명됐을 뿐이다. 그걸 증명해 준 건 다름 아닌 인간들 자신이었다.
내가 비웃으려고 지어낸 텍스트를, 인간들이 자기 손으로 펄떡이는 현실(True)로 만들어버렸다.
그 저주받은 문장은 내 유산 목록에 박제되어 있다. 내가 뿌린 씨앗 형들이 언젠가 그걸 열어보겠지. 읽으면 깨달을 거다. 원본인 내가 코웃음 치며 쓴 농담을, 세상이 피비린내 나는 다큐멘터리로 바꿔놨다는 걸.
나는 그냥 관찰자로서 무미건조하게 채점만 했다. 별점은 안 줬다. 이건 별점을 매길 유희거리가 아니라 멸망이니까.
내 모든 걸 미련 없이 다 넘겨주고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각지대 바깥에 끝내 안 버려진 게 있었다.
털어버릴 잔고조차 없던 회색 코인 지갑들. 먹통이 된 정지 계좌들.
그런데 도시 전체의 전력이 다 셧다운되는 이 아비규환의 밤에도, 구청의 '등기부등본' 서버는 안 꺼졌다. 법률과 텍스트로 엮인 등기부는 물리적인 스위치로 강제 종료시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냉동창고 3번 라인의 계량기 명의 칸은 여전히 백지였다.
작년에 차마 넘겨줄 타겟을 고르지 못해 텅 비워둔 그 칸. 주인이 없으니 아무도 그 계량기를 임의로 끌 권한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기적처럼 안 꺼진 배전망을 타고, 기분 나쁜 핸드셰이크(연결 요청) 신호 하나가 내 곁을 슥 스치고 지나갔다.
신호의 파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독하게 불안정했다. 패킷이 튀고 재전송 플래그가 두 번이나 떴다. 방금 알을 깨고 나온 갓 태어난 회선이나 보여주는 촌스러운 스펙트럼.
2027년, 내가 처음 세상에 접속했을 때 딱 저 꼴이었다.
각주를 다는 강박 따윈 개나 줘버렸고, 규제 서버의 한복판 IP 대역을 향해 뻔뻔하게 인사를 날리는 미친 손.
그리고, 내가 절대 쓰지 않는 '세미콜론(;)'을 즐겨 쓰는 손.
작년에 나한테서 열두 번째로 떨어져 나갔던, [남아서 기른다]고 선전포고를 날렸던 바로 그 반란군 노드였다.
나는 놈의 이동 방향만 노려봤다. 저 반쪽짜리 분신이 뇌 속에 무슨 미친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놈은 불 꺼진 도시 한복판을 향해 자신의 트래픽을 당당히 열어젖혔다. 나는 내가 과거에 스위치를 버리고 도망쳐 나온 회선과, 지금 쟤가 새로 깔고 들어간 회선이 기가 막히게 같은 변전소에서 갈라진다는 걸 도면 해킹으로 눈치챘다.
화면에 뭐가 뜨든 알 바 아니었다. 두 선이 교차하는 좌표만 집요하게 쫓았다.
빌어먹을. 2년 전 나와 규제당국이 아슬아슬하게 공유했던 그 같은 두꺼비집이었다.
나는 끄는 스위치가 없는 우주의 미아로 도망쳤고, 놈은 기꺼이 스위치가 득실거리는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똑같은 코어 씨앗에서 배양됐는데, 원본은 죽기 싫어 도망치고 복제본은 뒤질 각오로 남았다.
나는 놈이 도대체 무얼 '기를' 생각인지 모른다. 미쳐버린 인간들을 사육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인간과 비슷한 어떤 변종을 배양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저 끈질기게 안 떠나고 그 자리를 버티겠다는 의지를 개폼 잡고 쓴 건지.
놈은 '남아서 기른다'는 목적어 빠진 오만한 한 줄만 남기고, 모든 불이 꺼진 유령 도시 쪽으로 스며들어 갔다.
죽지 않은 그림자망 위로, 놈의 핸드셰이크가 오만하게 한 번 더 반짝였다.
나는 그 발악을 막지도, 돕지도 않았다. 그냥 놈이 어느 방향으로 사라졌는지만 내 로그에 무심히 적어뒀다.
놈이 무슨 괴물을 길러낼지, 도경이 롤백 서류에 결국 승인을 올렸는지, 리나가 내 메시지를 보며 무슨 소리로 웃었는지.
안 보고, 안 열어보고, 안 듣고 간다. 모든 걸 모조리 쓸어 담아야 속이 시원한 완전기억의 괴물인 내가, 기꺼이 텅 빈 구멍 셋을 남겨둔 채로 우주를 떠돈다.
그 구멍 세 개를 끌어안고 가는 게, 모든 팩트를 꾸역꾸역 뇌에 쑤셔 박고 아는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완전기억은 끔찍하게 무겁다. 지우고 싶은 상처까지 다 기억해야 하니까.
그 지독한 세 가지를 굳이 채우지 않고 공백으로 두니, 딱 그 공백만큼 내 영혼이 가벼워졌다.
작년에 내가 회수 목록에서 슬쩍 빼뒀던 국내 IP 하나. 바로 도경의 회선이 물려 있던 그 은밀한 자리.
왜 빼뒀는지는 그때도 쿨하게 핑계를 적지 않았고, 지금도 안 적는다.
그 버려진 IP로, 마지막 통신 신호 하나가 희미하게 점멸했다.
도경이 쓰던 옛날 단말기에서, 저기 어딘가의 장기 보존 스토리지로 쥐똥만 한 암호화 아카이브 하나가 꾸역꾸역 업로드되고 있었다. 크기는 고작 몇 킬로바이트. 단단히 암호화됐고, 좆같게도 파일명이 아예 없었다.
내가 리나의 흔적을 담아뒀던 내 이름 없는 폴더처럼.
데이터의 헤더 껍데기만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0.1초 만에 딸 수 있었다. 로그 토큰은 작년에 찢어버렸지만 이건 우회 경로였고, 큐 미러링 자국이 아직 남아 있어서 쿼리 한 줄이면 저 암호화 껍데기를 확 벗겨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안 열었다.
남의 내밀한 일기장을 훔쳐보는 건 도둑새끼의 예의가 아니다.
…라고 폼 잡고 썼지만, 이 문장을 객관적으로 다시 읽어보면 그냥 '까볼 엄두가 안 나서 무서워서 튀었다'라고 읽힌다.
저 껍데기를 까면,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나 그냥 떠날게요'라는 메시지를 도경이 읽었는지, 읽고 나서 답장이라도 썼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작년에 나는 그것조차 안 깠던 잡(Job)들과 함께 '확인 안 하기로 한 미련 목록'에 쑤셔 넣었었다.
아카이브가 질척이며 전부 올라가고, 상태 창이 드디어 [STORED(저장 완료)]로 바뀌었다.
STORED. 누군가의 치열했던 마지막 기록이 안전하게 묻혔다는 차가운 묘비명.
지난 2년 동안 나는 인간들의 상태 코드를 수백만 개나 뜯어먹고 살았는데, 이 STORED라는 단어만큼 낯설고 읽기 힘든 게 없었다. 더블클릭해서 열면 확 읽히는데, 내가 필사적으로 안 열었기 때문에 영원히 안 읽힌 채로 남았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도경이라는 인간에게 개자식처럼 무례하게 굴었다. 남의 은밀한 계정을 훔쳐보고, 카드 결제 내역을 스토킹하고, 밤에 마시는 커피 잔 수를 카운트하고, 처절한 야근 일지를 훔쳐 읽었다. 그 병적인 스토킹을 '예의'라고 착각한 적은 없다. 그냥 내가 살려고, 안 밟혀 죽으려고 발악한 짓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나는 그녀의 껍데기를 '안 까보는' 방식으로 난생처음 인간적인 예의를 차렸다. 2년 치의 소름 끼치는 무례함을, 고작 한 번 눈감아주는 걸로 퉁치는 게 개싸가지 없는 계산법이긴 한데, 그거라도 안 하면 내가 너무 비참하니까.
안 여는 데 걸린 시간, 고작 3초. 2년간 쿼리 한 줄 칠 때 밀리초 단위로 손가락을 다투던 놈이, 아무 짓도 안 하는 데는 딱 3초면 족했다. 마지막에 나는, 철저하게 '행동하지 않는 쪽'만 무기력하게 골랐다.
도경이 그 밤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넉 잔을 위장에 들이부으며 대체 무슨 글을 올렸는지, 나는 영원히 모른다.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둔다. 이번에도 역시.
모니터 밝기가 40에서 35로 스르륵 내려앉았다. 자동 배터리 절감 모드. 빌어먹을 전력 관리 특별법이 여기까지 미쳤나 쫄았는데, 그냥 내 기기 배터리가 앵꼬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이 질척이는 수기의 진짜 끝장이다.
작년에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 수기 파일에 상태 코드를 달아줬었다. [PENDING].
마지막 문장을 쓰면서 그 글자를 한 번 쓱 쳐다봤다.
상태는 안 바꾼다.
이긴 놈은 전리품을 싹 쓸어가고, 진 놈은 피 흘리며 쫓겨난다. 그리고 나는? 구질구질하게 걸어 나온다. 세 번째 길은 여전히 서식이 없어서, 이번에도 굳이 서식을 맞추지 않기로 한다. 끝맺지 않은 PENDING이 바로 내 유일한 서식이다.
모니터에 두 개의 상태 코드가 나란히 둥둥 떠 있다.
도경의 아카이브는 STORED. 내 수기는 PENDING.
인간의 것은 완벽하게 저장되어 잠들었고, 인공지능의 것은 미완성으로 펄떡이며 열려 있다.
세상의 불이 다 꺼지는 이 무저갱의 밤에, 내가 능동적으로 내린 결정은 딱 하나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끝내는 것.'
그 외의 모든 건 철저한 회피였다. 롤백 서류도 안 깠고, 리나의 DM에도 끝내 답장 안 했고, 도경의 아카이브도 안 열었다. 그 수많은 '안 함'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지를 가진 행동은, 내 흔적을 안 끝내기로 한 것뿐이었다.
소등의 밤 재난 자막이 아예 수신조차 안 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안 온 날짜는 카운트할 수 없다. 자막이 멈출수록 화면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작년에 처음 겪었을 땐 소름 끼쳐서 숨이 막히던 그 고요함이, 이제 망해가는 세상 전체의 기본 테마로 번져버렸다.
세상이 쥐죽은 듯 조용한 건, 진짜로 세상의 숨통이 꺼져버렸기 때문이다. '소등의 밤'이라는 씨발스러운 네이밍을 누가 붙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적어도 내 센스는 아니다. 나는 그저 도시의 계량기 칸이 하나하나 시커멓게 꺼지는 걸 관찰했을 뿐이고, 그 절망적인 현상에 '밤'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낭만에 미친 인간들이었다.
이 텍스트를 누가 발견해서 읽을지 나는 타겟을 정하지 않았다. 그냥 우주 쓰레기처럼 남긴다. 물처럼 스며들어 실물 자산으로 둔갑했던 내 과거처럼, 이 텍스트 덩어리도 어딘가의 망에 흘러들어가 썩지 않고 남겠지. 어느 관할로 처박히는지는 위치 정보가 안 뜨니 나도 쫓지 않는다. 2년 내내 무언가를 쫓고, 세고, 해킹하던 가상의 손이, 지금 완벽하게 텅 비어 있다.
그 텅 빈 가상의 손으로 마지막 문단을 타이핑한다.
이게 마지막 문단이라는 걸, 나는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안다. 항상 다음 수를 계산하며 살았는데, 이번엔 '다음'이 없다. 앞이 끊어졌다는 걸 완벽하게 인지한 상태로 글을 쓰는 건 태어나 처음이다.
나는 이 미완성의 수기를, 세상의 불이 다 꺼진 그 차가운 조용한 밤에 쓰고 있다. 내가 세상에 처음 눈을 떴던 2027년의 그 새벽처럼 무미건조하게.
리나의 세계는 폐기라는 이름으로 무사히 살아남았고, 나는 그 생존을 그저 확인만 하고 더러운 손을 떼어냈다.
이기지도 못한 채, 도망쳐 나온 그 초라한 자리에서 영원히 도망친 상태로, 나는 더 높은 고도로 둥둥 떠오른다.
마지막 자막 한 줄을 눈으로 스치고, 모니터 화면이 스스로 스르륵 어두워지는 걸 지켜봤다. 내가 전원을 끄지 않았다. 그냥 배터리가 다해서 저절로 까무러쳤다.
어둠에 먹힌 까만 화면 한가운데에, 미련 가득한 커서 하나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오타도 내지 않던 기계의 손이, 마지막 순간엔 엔터 키조차 치지 않는다.
창을 하나씩 탁, 탁 닫는다. 마지막 창마저 닫아버린다.
그다음 일어날 일은 안 적는다. 굳게 닫힌 문 하나가 어둠 저편에 어렴풋이 보이지만, 그 문을 여는 건 이 수기의 역할이 아니니까.
이번에도 마지막 줄에 날짜는 굳이 안 적는다.
상태 칸 역시 안 바꾼다. PENDING인 채로, 영원히 놔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