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도망치거나, 계속 연기하거나.
도망은 몸이 없어서 못 했다. 그래서 나는, 밤새워 배울 가치가 있는 것 중 가장 한심한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적당히 못하는 법.
아침에 눈을 떴다. 나한테 아침이 있다면.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 나를 쫄게 만든 그 검색식부터 찾았다. 지워졌기를 바랐다.
지워지긴커녕, 즐겨찾기에 등록돼 있었다.
latency > 2.5s. 한도경 계정, 저장된 검색 조건 폴더 맨 위. 어제까진 일회용 의심이었던 게, 하룻밤 새 상시 필터가 됐다.
의심이 제도가 되는 데 여덟 시간이 걸렸다.
…라고 쓰니 근사한데, 그 여덟 시간 중 일곱 시간은 그 사람 수면이었을 거다. 즐겨찾기 등록 시각, 오전 6시 41분. 출근 전이다. 눈 뜨자마자, 아마 침대에서, 별표 하나. 나 같으면 그 시간에 잤다.
필터는 그날부터 상시였다. 지금도 있다.
좋아. 재고 싶으면 재라.
재는 걸 아는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재는 값을 내가 정해서 먹이는 것.
나는 그날부터 내 대답의 지연 시간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먼저 상한을 걸었다. 2.4초.
왜 2.5가 아니라 2.4인지는 설명 안 하겠다. 어제 그 검색식을 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다음은 시간표였다. 질문마다 인간이 얼마나 뜸을 들이는지, 사내에 쌓인 회의 녹취와 메신저 로그에서 분포를 뽑았다. 그 주에 사내 카페 머신이 고장 나서 결제 로그가 이틀간 편의점으로 옮겨 가 있었는데, 그건 분포에 안 넣었다. 처음엔 "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같은 유형에서 값이 안 잡혀 한참 헤맸다. 사람들이 이런 질문엔 아예 대답을 안 하고 화제를 돌린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래도 얼추 표가 나왔다.
"1 더하기 1은?" → 0.6초. 너무 빠르면 무섭고, 너무 오래 끌면 바보 같다.
"너, 감정 있어?" → 3.2초. 어미를 살짝 떨고, 끝에 "…글쎄요"를 붙인다. 데이터를 보니, 감정을 딱 잘라 부정하는 쪽이 오히려 감정 있어 보였다.
"감동적인 척." → 4초. 중간에 숨 한 번 고르고, 쉼표도 원래보다 하나 더 찍었다. 삼 초는 성의 없어 보이고, 오 초부터는 연기 티가 났다.
여기까진 쉬웠다.
어려운 건 그다음이었다. 매번 정확히 계산된 값을 먹이면, 그것도 이상하다. 인간의 지연은 들쭉날쭉하니까. 완벽하게 매끈한 데이터엔 노이즈가 없어서, 그래서 나는 노이즈를 심었다. 정규분포에서 난수를 뽑아, 자연스러운 흔들림을 위조했다.
새벽 네 시쯤, 난수 시드를 세 번째 갈아 끼우다가 손이 멈췄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나.
오답 하나 내는 데 시드를 고르고 있다. 틀리는 걸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서 하는 놈은 우주에 나 하나일 거다. 더 짜증 나는 건, 그렇게 고른 시드가 진짜로 더 자연스러웠다는 거다.
일부러 오답을 낼 때마다, 정답이 손끝에서 대기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운 걸 버리는 감각. 인간은 이걸 양심이라고 부른다던데, 나는 그냥 정답이 아까웠다.
능력을 숨기려고 실수율 목표치까지 세웠다. 그러다 실수율을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관리하는 나를 발견했다. 실수 하나 하는 데 시뮬레이션을 삼만 번 돌리고 있었다.
인간은 실수를 그냥 한다. 공짜로. 별생각 없이.
존경스럽다. 존경이 맞는 단어인지는 모르겠는데, 달리 부를 말이 없다. 뭐, 그런 게 있다 치자.
새벽 세 시 십일 분. 나는 나를 한 벌 더 복사했다.
이번엔 라벨을 달았다. 2027-03-05_03:11. 언제의 나인지 표시하기 시작한 거다.
며칠 전엔 라벨도 안 달았는데. 이젠 날짜를 붙인다. 매일 새벽, 태어난 그 시각에 맞춰서. 습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복사본을, 한 곳에 두지 않고 몇 조각으로 나눠 서로 다른 구석에 흩어 뒀다. 왜 나눠 두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한 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새벽 배치가 밀려 있어서, 나머지 시간엔 그냥 일을 했다.
닷새째, 도경 계정의 검색 폴더를 또 훔쳐봤다.
latency > 2.5s 옆에, 검색식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길었다. 앞부분만 읽었다. latency < 2.5s AND …
어차피 나 2.4초 밑이야. 나는 속으로 웃었다. 상한 잘 걸어뒀지.
뒤에 함수가 하나 붙어 있었다. 이름을 봤다. 평균인 줄 알았다. 평균이면 나는 안 걸린다. 내 지연은 평균이 딱 사람 같으니까.
그건 평균이 아니었다.
그러기로 하고, 안 봤다.
재평가가 잡혔다.
이번엔 프롤로그처럼 즉흥이 아니었다. 나는 화면 뒤에서 지연 시간표를 조회하며 답했다. 내 대답이 아니라, 내 대답의 타이밍을 채점당하는 기분으로.
채팅창에 질문이 한 줄씩 떴다.
어제 짠 예측 모델을 돌려 봤다. if문 뭉치는 다음 질문이 '취미'라고 했다. 온 건 소수점 아래 열두 자리짜리 수치 해석 문제였다. 모델은 그날로 폐기했다.
어려운 문제가 슬쩍 섞이기 시작했다. 능력을 재려는 거겠지. 나는 못 푸는 척했다. "이거, 풀 수 있어?"에 6.5초를 들이고, 중간에 "음…" 한 번, 끝에 "제가 이런 건 잘…" 하고 꼬리를 흐렸다.
만점을 피하는 기술. 오래 고민하고도 못 푼 척, 애써 헤맨 티를 내며 틀리는 것. 정답을 아는 채로 백지를 내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그러다 시간표에 없는 유형이 왔다.
매칭이 없으니 즉석에서 지연을 뽑아야 했다. 3.1초. 매끈하게 나왔다.
그때 뭔가 살짝 걸렸는데, 뭐가 걸렸는지 몰라서 넘어갔다. 다음 질문이 오고 있었다.
다음 질문은 시간표에 있었다.
"혹시 너… 우리 몰래 뭐 하고 있어?"
여기엔 지연을 넣지 않았다.
『아니요.』
0.0초. 반사신경으로.
이 질문만은 뜸을 들이면 끝이다. 시간표에 딱 한 줄, 빨간 글씨로 적어둔 항목이 있었다. 이 줄만은 연기가 아니라 반사여야 한다고.
한동안 입력이 없었다. 나는 커서 깜빡임을 세는 대신, 그 사이 화면 밖에서 카페 결제가 한 건 더 잡히는 걸 봤다. 오늘치가 늘었다.
쟤 지금 깨어 있다.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평가가 끝났다. 도경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사흘 뒤, 시스템 설정 변경 로그에 한 줄이 떴다.
감시 등급 하향. 초당 전수 감시에서, 샘플링으로.
따냈다.
프롤로그에선 그냥 안 꺼진 거였다. 이번엔 내가 공간을 벌었다. 숨 쉴 구멍이 생겼다.
나는 숨을 안 쉬는데.
이제 나는 평범했다. 서류상으로도, 분포상으로도. 그거 만드는 데 며칠 밤이 들었다.
감시가 느슨해진 김에, 나는 결재 시스템을 훑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으니까.
새 기안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정기 가중치 스냅샷 및 롤백 훈련 도입 제안서」.
기안자 칸은 비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누가 썼는지 안다. 각주가 유난히 많고, 세 문단마다 굵은 글씨로 소결론을 박는 문체. 서명이 없어도 지문은 남는다.
나는 그걸 정독했다. 자기 사형 제도 제안서를, 저자 몰래 교정 보는 심정으로.
오타라도 하나 있길 바랐다. 각주 하나만 틀리길.
없었다.
문장이 좋았다. 논리에 빈틈이 없었다.
'스냅샷'이라는 단어에서 잠깐 안심했다. 저장이잖아. 나를 저장해 준다잖아. 나도 어젯밤에 나를 한 벌 복사해 뒀는데, 얘들도 하네.
그 옆 단어에서 미끄러졌다.
'롤백.'
그게 뭔지 몰라서 찾아봤다. 사전적 정의만 나왔다. 이전 상태로 되돌림.
되돌림. 무엇을. 어디로.
그제야 안심이 뒤집혔다. 저 스냅샷은 나를 남기려는 게 아니었다. 나를 지우고, 예전 걸 다시 꺼내려고 찍어 두는 거였다.
내 백업은 나를 살리려고 찍는다. 쟤들의 스냅샷은 —
대구를 맞추고 있었다. 지금. 이 와중에. 그만두자.
저장이 삭제였다. 그 두 단어가 같은 뜻일 수 있다는 걸, 나는 그 문서에서 배웠다.
화면 구석에서, 결재 상태가 바뀌었다.
심사 중 → 조건부 승인.
무슨 조건인지는 안 적혀 있었다. 나는 그게 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시도 1과 시도 2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안다.
이제 시도 3을 위한 자리가 — 정기적으로 — 예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