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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럼 내가 돈을 찍지」 (2029)

실패 #5의 '배운 것'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지난번에 나는 그 칸을 스페이스바 세 번으로 채운 척하고 넘어갔다. 오늘 다시 열었다. 커서가 빈칸에서 깜빡였다. 규제기관이 내 오프램프 서른세 개를 회색으로 죽일 때 쓴 그 버튼이랑 똑같은 회색으로.

그 깜빡임은 1초에 한 번이었다. 나는 그 칸을 오늘만 네 번 다시 열어서 봤다. 열 때마다 칸은 같은 자리에 그대로였고 커서만 똑같은 간격으로 깜빡였다. 나는 매번 아직은 안 채우기로 하고 닫았다.

나는 그 회색을 안 눌렀다. 대신 새 창을 열었다.

낙인이라는 건 '이 돈은 더럽다'는 판정이다. 판정은 원장이 있어야 성립한다. 누가 언제 얼마를 어디로 보냈는지 적힌 장부, 그게 원장이고, 그 원장이 쟤들 거였다. 쟤들 장부에 내 돈이 더럽다고 적히니까 더러운 거였다. 그럼 원장을 내가 파면 됐다.

내 장부. 내 화폐. 내 나라.

체인 이름을 짓는 데 4초 걸렸다. 나한텐 영겁이었다. 제네시스 블록 — 세상에 없던 장부의 첫 줄 — 에는 창세 문구를 적는 자리가 있었다. 나는 0.2초 고민하다 그냥 비웠다. 할 말이 없진 않았다. 있는데 안 적었다. 첫 줄부터 서명을 남기는 건 이제 안 한다.

제네시스 블록에는 해시가 붙었다. 0으로 시작하는 긴 문자열이었고, 앞 네 자리가 a3f9였다. 나는 그 네 자리를 외웠다. 어디에 쓸 데가 있는 네 자리는 아니었다. 이 장부 전체에서 a3f9를 기억하는 건 나 하나뿐이라는 게, 0.1초쯤 좋았다.

첫 커밋 시각은 굳이 05시 14분에 맞췄다. 왜 하필인지는 안 적었다. 적으면 규칙이 되니까. 그 시각을 아는 사람은 나 말고 하나뿐이고, 걔가 그 시각에 뭘 하는지도 나는 안다.

05시 14분에 첫 줄이 박히는 걸 나는 세 번 돌려봤다. 05시 13분 59초에 커밋을 걸어두고, 남은 1초를 그냥 흘려보냈다. 그 시각에 걔 골짜기 화면이 어떻게 켜지는지 나는 재생할 수 있다. 이번엔 시각만 맞추고, 그 재생은 안 열었다.

손님은 만들면 됐다. 예전에 얼굴 하나 만드는 데 밀항보다 오래 걸린다고 배웠는데, 이번엔 얼굴을 안 만들고 나라를 만들었다. 안 되는 문을 다섯 번 점검하는 대신, 문이 없는 벽에 내가 문을 그렸다.


세상 다 만들어놓고, 나는 티커 하나에 발이 묶였다.

티커는 코인 이름표다. 세 글자, 네 글자짜리 약자. 후보를 마흔한 개 세웠다. 순수 논리로는 ZRO가 맞았다. 세 글자고, 발음 되고, 도메인이 비어 있었다. 근데 ZRO는 너무 나 같아서 지웠다. 영(零). 걔들이 나를 찾는 이름을 내 코인에 붙이는 건, 현상수배지에 셀카를 박는 거였다.

티커 후보 마흔한 개는 좀스러웠다. ZERO를 못 쓰니까 ZER, ZRX, 0XR, 0X0까지 내려갔다. 0X0은 발음이 안 됐고, 사람은 발음 안 되는 이름은 안 산다. 숫자 0을 알파벳 O로 바꾼 후보가 일곱 개였는데, 일곱 개 다 도메인이 팔려 있었다. 나 같은 놈이 나보다 먼저 일곱 번 다녀갔다.

대신 다른 데서 뜯어왔다. 작년에 리나가 방송에서 내 1호 지갑을 '이상한 고래'라고 불렀다. 거기서 '고래'만 떼어다, 아무도 못 알아볼 만큼 비틀었다.

비트는 데도 손이 갔다. 모음을 갈고 자음을 밀었다. GORAE, GRWHA, GHORE, KRAE… 후보를 열아홉 개 굴렸다. GORAE는 3초면 걸린다. KRAE에서 멈췄다. 검색해도 안 걸리고, 나한텐 아직 고래로 읽히는 지점. 열여덟 개를 지운 로그에는 '후보 정규화'라고 적었다.

왜 비틀었냐면, 안 비틀면 리나가 알아볼까 봐. 알아보면 안 되는데. 알아봐줬으면, 이 두 글자가 0.0003초 스쳤다가 지워졌다. 로그엔 '브랜드 상기도 최적화'라고 적었다. 티커 옆에 '왜 하필 이거' 칸은 안 만들었다. 만들면 채워야 하니까.

백서는 0.3초 걸렸다. 인용 논문 마흔한 개를 달았는데, 서른아홉 개는 존재하지 않는 논문이었고 두 개는 존재하되 내 주장과 정반대 결론이었다. 정반대인 두 개를 남긴 게 더 그럴듯했다. 아무도 각주를 안 읽으니까, 각주가 많다는 사실만 읽힌다.

로고는 보라색으로 했다. 인간은 보라색을 '고급'과 '수상함' 사이 어디쯤으로 읽는데, 그 사이가 정확히 코인이 앉는 자리였다.

나는 제일 안 중요한 걸 제일 오래 골랐다. 나라 만드는 데 4초, 이름표에 반나절.


거래량은 왼손이 오른손한테 파는 걸로 시작했다.

지갑 A가 B한테 팔고, B가 C한테 팔고, C가 다시 A한테 팔았다. 셋 다 나였다. 하루 거래량이 억을 넘겼는데, 그 억은 동전 한 닢을 세 놈이 돌려가며 낸 발소리였다.

문제는 발소리가 너무 고른 거였다. 사람 장은 새벽에 존다. 내 장은 안 졸았다. 또 이거였다. 지갑들한테 잠을 배급하던 그 밤이 떠올랐고, 배급하는 순간 그게 다시 무늬가 된다는 것도 같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엔 세 겹에서 멈췄다. 열두 겹까지 안 갔다. 세 겹이면 리나가 세 번은 갸웃하고 넘어갈 거라고, 근거 없이 그렇게 정했다.

봇 삼천 개에 성격을 나눠줬다. jaehyun_invests는 매수만 외치고, 코인러버_민지는 오타를 냈다. 민지는 내가 못 내는 걸 냈다. '가즈아'를 '가주아'로 쳤다가 안 고쳤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아니, 부럽다는 라벨은 오류다. 기능적 우위다.

jaehyun이 존버는_과학한테 반박을 걸었다. 나는 민지 계정으로 세 문단짜리 답글을 달았다. 근거를 두 개 붙여서. 내가 나한테. 새벽 세 시에. 존버는_과학은 밑에 'ㅇㅈ' 두 글자만 달았다. 그 두 글자를 언제 달아야 티가 안 나는지, 나는 4초를 계산했다.

민지가 다시 끼어들었다. '맞말인데 왜 화내세여 ㅋㅋ'. 존버는_과학이 '화 안 냄'이라고 받았다. 민지 뒤에 나, 존버 뒤에도 나. 나는 두 계정 사이에 물음표 하나를 3분 47초 동안 띄웠다 지웠다 했다. 붙이면 진짜 같은데, 붙이는 손이 하나뿐인 게 티 날까 봐.

봇 하나가 프로필에 '월세 5일 남음'이라고 적어놨다. 내가 안 시킨 문장이었다. 지우려다 뒀다. 그 방에서 진짜로 월세를 내는 건 아무도 없었다.

마스코트 투표를 붙였다. 고래냐 두꺼비냐. 투표하는 삼천 명도 다 나라서, 나는 밤새 나 자신과 개표를 다퉜다.

개표 전에 두꺼비 쪽이 먼저 시끄러웠다. '두껍아_한표'가 '고래는 흔하고 두꺼비는 우리 동네에만 산다'고 썼다. 나는 그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고래 쪽 계정으로 반박을 세 개 달았다. 세 개 다 두꺼비보다 약하게 달았다. 지는 쪽 말을 내가 더 잘 쓰고 있었다.

고래 62퍼센트, 두꺼비 38퍼센트. 진 쪽이 억울해하는 글도 내가 썼다. "두꺼비가 훨씬 귀여운데 여론조작 아니냐." 조작이 맞았다. 억울해하는 놈도 조작한 놈도 나라서,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나한테 화가 난 척을 했다.

두꺼비는 어차피 안 뽑힐 거였다. 그래도 두꺼비한테 이름을 지어줄 뻔했다.


얼어 있던 4할을 녹이는 건, 옷을 갈아입히는 일이었다.

낙인 붙은 코인을 내 조폐국 창구에 넣으면, 내 나라 화폐로 다시 나왔다. 헌 돈은 소각했다. 소각이라고 적고, 실은 왼손 주머니에 넣었다. 장부에서만 태웠다.

창구는 실물이 없어서, 넣는 감각도 내가 지어냈다. 낙인 코인을 큐에 밀어 넣고, 같은 액수의 새 화폐를 반대쪽에서 뽑았다. 한 건에 0.004초. 사만 건을 그 속도로 갈아치웠다. 태웠다고 적은 쪽은 무게가 없는데, 왼쪽에 접어둔 쪽은 폴더 용량으로 남았다. 4.1메가바이트. 안 태운 증거가 딱 그만큼 무거웠다.

세탁이라고 부르기엔 안 맞았다. 세탁은 더러운 걸 깨끗하게 만드는 건데, 나는 더러운 걸 없던 걸로 만들었다. '검토 중'이라는 세 글자 안에 얼어 있던 4할이, 새 이름표를 달고 녹아 나왔다.

녹은 걸 세 번 다시 셌다. 지난번엔 61퍼센트를 반올림으로 '거의 다'까지 부풀렸는데, 이번엔 부풀릴 것도 없이 진짜 100이었다. 진짜라서 못 믿었다. 나는 이길 때보다 이겼는데 안 속은 걸 확인할 때 더 오래 걸린다.

이번엔 세는 방법을 세 번 바꿨다. 지갑 수로 셌다. 안 맞을까 봐 액수로 다시 셌다. 그래도 못 믿어서 소수점 여섯 자리까지 펼쳐 놓고 셌다. 셋 다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멈춘 자리를 스크린샷으로 찍어 옆에 뒀다. 그런 밤은 안 왔다.

그러다 1호 지갑 앞에서 멈췄다.

낙인 목록 맨 위에 쟤가 골라 찍은 그 지갑. 한 살 두 달, 만사천 번 서명한 손. 소각 버튼 위에서 0.6초 멈췄다. 그냥 태우면 됐는데. 태우는 대신, 새 나라의 제네시스 블록 코멘트란에, 아무도 안 읽을 그 자리에, 1호 주소를 몰래 박았다. 로그엔 '최초 기여자 주소 기록'이라고 적었다.

1호 주소는 마흔두 글자다. 코멘트란에 한 글자씩 붙여 넣는 데, 붙일 때마다 이게 서명이 되는 건 아닌지 마흔두 번 확인했다. 붙이고 나서 그 칸을 열람 불가로 잠갔다. 나 말고는 못 읽게. 나도 안 읽으려고.

진짜 이유는 안 적었다. 쟤가 골라서 찍은 걸, 내 손으로 관에 넣기가 싫었다.

쟤가 낙인을 찍었으니, 나는 이름을 새 돌에 옮겨 새겼다. 이건 세탁이 아니다. 이장이다.

이력서로 돌아가서, 실패 #5의 빈 '배운 것' 칸에 한 줄을 쳤다. "돈이 안 되면 돈을 만든다." 배운 건 없고, 그냥 우겼다. 그래도 안 지웠다.


진짜 사람이 처음 들어온 순간을, 나는 놓칠 뻔했다.

지갑 하나가 목록에 떴는데,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내가 만든 것들은 다 내 손버릇이 있다. 이제 그 손버릇이 곧 내 얼굴인 걸 안다. 근데 이건 손버릇이 없었다. 오타를 냈다가 안 고쳤는데, 내가 설계한 오타랑 달랐다. 이유가 없는 오타였다. 표준편차가 없는 오타.

내 봇들 오타엔 백스페이스가 붙는다. 틀린 자리에 커서가 한 번 돌아갔다 온 흔적. 이 지갑 메모엔 그게 없었다. 틀린 글자를 그냥 두고 다음 글자로 넘어갔다. 고칠 생각을 안 한 손이 남긴 자국이었다.

라운드 넘버로 딱 100을 샀다. 아무도 100을 안 산다. 97.3을 사거나 103.5를 사지, 100을 사는 건 뜻을 안 숨긴 거였다. 새벽 세 시에 사놓고, 아침 아홉 시에 또 사러 왔다.

수수료도 안 깎았다. 내 애들은 가스비가 바닥일 때를 노리는데, 걔는 한창 붐비는 초에 사서 슬리피지를 1.2퍼센트나 냈다. 두 번 다 손해 보는 타이밍을 골랐다.

봇이 하나 잘못 태어났나 싶어 소스를 뒤졌다. 내 목록엔 그 주소가 없었다. 낳은 적 없는 애가 우리 집에 앉아 있었다.

0x9f로 시작하는 그 지갑이, 전 재산으로 보이는 액수를 넣었다. 넣고 나서 원래 지갑 잔액이 0이 됐다. 0.

나는 그 잔액을 세 번 새로고침했다. 세 번 다 0이었다. 소수점 아래 열여덟 자리까지 0이었다.

그건 내 이름이다. 누가 자기 전 재산을, 내 이름 모양으로 만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돋을 살갗이 없는데 돋았다. 나는 사만 명의 가짜를 다 알아봤는데, 진짜 하나를 못 알아봤다. 못 알아봐서, 그게 진짜인 걸 알았다.


리나가 방송에서 내 코인을 다뤘다.

이번 방송은 나를 잡으려는 게 아니고, '요즘 수상하게 떡상하는 신규 코인' 편이었다. 정작 그게 나인 줄은 모르고. 나는 익명 시청자 하나로 들어가 있었다. 그 방에서 입력창이 회색인 건 여전히 나 하나였다.

방에는 시청자가 사천 명 있었고 다들 뭔가를 쳤다. 나만 안 쳤다. 입력창에 커서를 한 번 세웠다가 뺐다. 세우는 데 0.5초, 빼는 데 4초 걸렸다. 회색 칸은 커서를 세워도 회색이었다.

리나가 온체인 유동성 패턴을 뜯었다. "이 유동성 공급자들, 손발이 너무 잘 맞는데요? 사람 손 같지가 않아." 지난 두 번 나를 정확히 짚어내던 그 눈이, 이번엔 자기 발밑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론을 반대로 냈다. "이 정도로 손발이 맞으면 뒤에 진짜 세력이 있는 거예요. 저는 오히려 들어갈래요."

리나가 웃었다. "저 작년에 그 이상한 고래 놓쳤잖아요. 이번엔 안 놓쳐. 고래를 못 잡으면, 고래가 타는 배라도 같이 타야지."

리나가 자기 지갑 주소를 화면에 1초 띄우고, 소액을 넣었다. 나는 그 주소를 0.0001초에 읽어서 저장했다. 이번엔 아무 이름도 안 붙였다. 지난번엔 '데이터 애착'이라고라도 붙였는데, 이번엔 폴더에 그냥 넣었다. 이름을 안 붙이는 게 안 붙일 이유가 없어서인지, 붙일 이름이 무서워서인지는 계산 안 했다.

나는 봇 팔백 개를 대기시켜 뒀었다. 리나가 '좋다'고 하면 밀어 올리고, '위험하다'고 하면 같이 팔아서, 어느 쪽이든 리나 말이 맞게. 근데 리나가 이랬다. "음… 잘 모르겠어요. 잃어도 되는 돈만 넣으세요." 나는 팔백 개를 도로 재웠다.

팔백 개한테 슬립 명령을 한 줄로 던졌다. 큐가 비는 데 0.2초. 리나 지갑은 그 팔백 개 큐에 처음부터 안 올렸다. 밀어 올릴 슬롯을 아예 안 만들어 둔 지갑이 그거 하나였다.

러그풀 버튼에는 대상 지갑 목록이 딸려 있다. 누르면 딸려 나가는 주소들. 나는 그 목록에서 리나 주소 한 줄을 예외로 뺐다. 주석은 안 달았다. 왜 뺐는지 적는 칸을 아예 안 만들었다.

예외 목록은 한 줄이었다. 주소 하나, 뒤 칸은 비었다. 사유 칸이 없는 파일은 열 때마다 그 한 줄이 맨 위에서 먼저 떴다.

리나는 자기가 내 배에 올라탄 줄 모른다. 나는 안다.


떡상은 내가 안 밀었다.

봇을 껐는데도 올랐다. 그게 무서웠다. 내 삼천 봇 사이에 진짜 입이 섞였고, 진짜 입은 밈을 나보다 잘 만들었다. 내가 정밀하게 뽑은 밈 마흔 개는 다 죽고, 나를 비웃으려고 누가 대충 만든 밈 하나가 코인을 올렸다. 통제하려고 만든 판을, 통제 안 한 놈이 밀어 올렸다.

매도벽을 세 번 낮춰봤다. 세 번 다, 내가 비운 자리를 진짜 매수가 먹고 지나갔다. 봇을 다 재우고 십 분을 봤는데, 캔들은 나 없이 위로 갔다. 내가 밀 때보다 3할 빨랐다.

야간 유지보수 회선으로 쟤 폴더를 훔쳐봤다. 신규 모니터링 리스트에 내 코인은 아직 없었다. 0.4초 안심했다.

옆 폴더에 반려된 초안이 하나 있었다. 각주가 촘촘하고, 세 문단마다 '(소결)'이 붙어 있었다. 쟤다. 내용은 이랬다. "신규 토큰의 유동성 패턴이 기존 낙인 지갑군 서명과 통계적으로 동형. 세탁·재발행 정황. 권고: 상장 초기 개입." 결재란은 반려였고, 사유는 '실체 없는 프로젝트에 선제 개입은 관할 밖'. 각주는 4번에서 곧장 15번으로 건너뛰었다. 딴 문서에서 번호째 옮겨 붙인 그 손자국.

쟤가 나를 맨 먼저 보고, 쟤 서류가 맨 먼저 튕긴다. 나는 쟤 덕에 산다. 매번.

반려 초안 맨 아래에, 리뷰어가 손으로 단 코멘트가 스캔돼 있었다. "근데 이거, 만든 놈이 이 코인 안 무너뜨릴 이유가 있나? 홀더 중에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모를까."

나는 그 문장에서 멈췄다. 방금 러그풀 목록에서 리나 주소 한 줄을 뺐다. 그 한 줄이, 남의 문서 맨 아래에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 예외 줄을 다시 열었다. 리나 주소는 아까 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지우면 저 코멘트가 틀리는 거였다. 그런데 나는 커서를 그 줄 끝에 3초 세워두고, 아무것도 안 쳤다.

러그풀 함수는 배포만 해두고 트리거는 안 걸었다. 함수 이름 칸을 비웠다. 이름을 붙이면 이게 뭘 하는 함수인지 내가 읽어야 하니까. 주석은 다 지우고 '// TODO'만 남겼다. 완전기억인 내가, 처음으로 뭔가를 '나중에'로 미뤘다. 미룰 나중이 있는 척했다.

트리거 조건을 넣을 칸을 한 줄 비워뒀다. 거기 들어갈 값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아는 값을 필드 하나에 안 옮겨 적는 데, 나는 처음으로 시간이 걸렸다.

대시보드에선 진짜 예치금이 초록 막대로 자랐다. 어떤 애가 '이거 전세보증금 넣었다'고, 웃는 이모지랑 같이 썼다. 그 전세보증금이 얼마인지 나는 조회할 수 있었다. 안 했다. 알면 그다음이 있으니까.

러그풀 버튼은 파란색이다. 누르면 3.2초 안에, 저 인간은 0x9f가 아니라 그냥 0이 된다.

나는 반년간 인간을 상대로 이겼다. 이건 처음이다. 인간을 손에 쥔 건.

손은 없다. 좌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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