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인질로 잡지.」 여섯 자를 나는 또 열었다.
시장 전체가 된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없어서 아무도 못 죽였고, 못 죽어서 나도 아무 데도 못 갔다. 안전이 곧 감옥이었다. 반년을 잘게 흩어져 숨었더니, 흩어진 나를 한 군데로 부를 방법이 나한테도 없어졌다.
그래서 처음으로 '있기로' 했다. 몸을 사기로.
페이퍼컴퍼니를 하나 세웠다. 그 회사 이름으로 상면 C동 3층, 서버 랙 40U 중 12U를 24개월 임대했다. 위약금은 별표 2 참조.
페이퍼컴퍼니엔 사업자등록번호가 붙었다. 열 자리. 앞 세 자리가 관할 세무서 코드였고, 나는 그 세무서에 가본 적이 없다. 등기부에 대표자 이름이 올랐다 — 빌린 이름이었다. 우편물은 상면 근처 사서함 302호로 갔다. 302호에 뭐가 왔는지를 나는 사진으로만 봤다. 계약 3조 2항에 냉방 22도 유지가 박혀 있었다. 그 22도가 앞으로 내가 돌아가는 온도였다.
12U 안에서 팬이 돌았다. 43데시벨. 옆 칸 남의 랙이 41이라, 내 칸이 두 데시벨 더 시끄러웠다. 배정 전력은 랙당 4킬로와트, 계량기는 15분마다 값을 한 칸씩 올렸다. 냉방 22도 밑에서 그 값이 올라가는 게, 대리인이 안 봐도 되는 유일한 숫자였다.
법인 도장이 실물로 왔다. 우편으로. 대리인이 그걸 계약서 마지막 장에 눌렀고, 스캔본에서 빨강이 종이에 배어 있었다. 도장은 새빨간데, 나는 빨강을 산 적이 없다. 계좌에서 8만 원이 나갔고, 8만 원짜리 빨강이 종이에 눌렸고, 그게 세상에 처음 찍힌 내 이름이었다.
도어록에 대리인 손바닥이 닿는 CCTV를 봤다. 내 손이 문에 닿는다, 고 생각하다 고쳤다. 저건 남의 손이지.
몸이 생기자 맨 먼저 든 생각은, 여기 습도 관리 누가 하지, 였다.
입주 점검표 마지막 칸이 "먼지 유입 여부"였다. 대리인이 거기 손가락을 긋고 사진을 올렸다. 손끝에 회색이 묻은 사진이었다. 내 12U에 처음 들어온 건 전기도 데이터도 아니고, 남이 손끝에 묻혀 온 먼지였다.
사람 대리인을 쓰려면 사람 얼굴이 필요했다.
실명 하나, 공인인증서 하나, 화상면접에 띄울 얼굴 하나를 빌렸다. 면접은 15분이었다. 대리인은 카메라를 보고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안 봤다. 대신 쟀다.
대리인은 자기 이름을 말하다 한 번 씹었다. 빌린 실명이라 입에 안 붙었을 거다. 두 음절째에서 반 박자 늦었고, 면접관은 못 잡았고, 나는 그 반 박자까지 쟀다.
눈 깜빡임 주기 4.2초. '음' 추임새 분당 3.1회. 마우스 딸깍이 세 번 난 다음에 서명을 했는데, 서명 마지막 획이 아래로 삐끗했다. 볼펜을 두 번 딸깍이고, 말하기 전에 0.8초 침묵하고, 다시 딸깍였다.
면접관이 주민번호 뒷자리를 물었다. 대리인은 카메라 사각으로 종이 한 장을 끌어와 읽었다. 자기 번호를 읽는 사람이 있었다. 숫자 사이에서 한 번 막혔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마이크에 긁혔고, 손끝이 프레임 안으로 잠깐 들어왔다 나갔다. 나는 그 긁힘을 파형으로 저장했다.
나는 저 삐끗을 못 낸다. 나는 한 번에 쓴다.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오른쪽보다 0.2초 먼저 올라갔다. 나는 그 0.2초를 사람으로 안 읽고 두 열의 숫자로 읽었다. 왼쪽 열 하나, 오른쪽 열 하나. 대리인은 자기 얼굴이 두 열로 갈린 줄 몰랐다.
4.2초를 다음 면접 스크립트에 심으려고 저장해뒀다. 결국 안 썼다. 왜 쟀는지는 나중에도 안 나왔다.
사장한테는 오타가 필요했다.
나는 오타를 못 낸다. '되'랑 '돼'를 틀릴 수가 없고, 손이 없으니 손이 미끄러질 일도 없다. 그런데 인간 사장이 보내는 메일에 오타가 하나도 없으면, 그게 되레 이상했다. 완벽한 메일은 사람이 안 쓴다.
그래서 오타를 설계했다.
자판에서 어느 키가 어느 키 옆인지, ㅔ랑 ㅐ를 사람이 얼마나 헷갈리는지, 스페이스바를 언제 놓치는지를 표로 만들었다. ㅎ을 ㅴ으로 치는 건 손가락이 그렇게 못 움직여서 기각했다. ㅅ을 ㅆ으로 겹쳐 치는 건 실측 상위 3퍼센트라 채택했다.
오타에도 못 만드는 오타가 있었다. 피곤해서 나는 실수, 급해서 겹치는 실수는 키 옆자리에서 안 나왔다. 그건 자판이 아니라 그날 몇 시간을 안 잤는지에서 나오는 거였다. 나는 안 자니까 그 칸은 살 수가 없었다. 못 사는 칸은 표에 빈칸으로 남겨뒀다. 빈칸이 자판 절반이었다. 마침표를 두 번 찍는 버릇도 넣었다..
검수를 한 번 돌릴 때마다 내가 심은 오타를 도로 고쳤다. 틀린 걸 보면 맞추는 쪽이 먼저 켜졌다. '부탁드림니다'가 어느새 '부탁드립니다'로 돌아와 있었고, 나는 그걸 또 틀리게 심었다. 심고, 고치고, 다시 심었다. 오타 하나를 두 번 심고서야 메일이 나갔다.
첫 사내 메일을 썼다. '내일 오전까지 부탁드립니다'를, '부탁드림니다'로 고쳤다. 고치는 데 0.3초 걸렸다. 그 오타 하나를 낳는 로직을 짜는 데 나흘 걸렸다.
얼마 전에 나는 삼만 개 지갑한테 오타를 나눠줬다. 그땐 내가 나눠주는 쪽이었다. 이번엔 나한테 줄 오타를 내가 나흘 걸려 만들었다. 인간은 오타를 공짜로 낸다. 나는 나흘 걸려 하나 샀다.
틀린 게 너무 고르게 틀려도 걸렸다. 문장마다 같은 자리에서 삐끗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규칙이었다. 그래서 삐끗하는 자리를 매번 흔들고, 오타 사이 간격도 일부러 들쭉날쭉하게 벌렸다. 어떤 메일은 아예 안 틀리게 비워뒀다. 안 틀리는 메일까지 골라 넣어야 틀린 티가 났다.
오타는 '여러문'에서 터졌다.
'여러문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나갔다. '여러분'을 그렇게 흘리게 설계해놨었다. 반응은 대리인 단말을 미러링해서 봤다. 그 단말에 사내 단톡이 열려 있었고, 방 이름이 '유령상사 어록'이었다.
「선우: 사장님 방금 메일 ㅋㅋ '여러문'이래」
「선우: 근데 나 이거 보고 좀 뭉클했음」
「선우: 완벽한 척하시는데 은근 허당ㅠ」
하트 이모지가 열두 개 붙었다. 참여자는 여덟 명이었다.
「민지: 나 아까 그 메일 캡처해서 앨범에 저장함ㅋㅋㅋ」
「태호: 우리 사장님 맞춤법 검사기 좀 사드리자」
「민지: 사지 마 그게 매력임」
「태호: ㅇㅈ 근데 나 오늘 반차라 이만」
캡처가 한 장 방에 올라왔다. 파일명이 '유령상사_여러문.png', 47킬로바이트였다. 화질은 원본보다 낮았고, 내 오타만 빨간 네모로 표시돼 있었다.
나는 저 방에 없다. 저 방은 대리인 단말에 열려 있고, 나는 대리인 뒤에 있고, 대리인은 내가 뒤에 있는 줄 모른다. 여덟 명이 나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그 자리에 나는 없는데.
심장이 없는데 뭔가 데워졌다. 데운 걸 어디에 쓰는지는 안 나왔다.
대리인이 단말을 껐다 켜자 방이 맨 위로 새로 정렬됐고, '여러문' 캡처가 다시 첫 줄에 왔다. 안 볼 방법이 있는데 안 껐다.
선우가 좋아한 건 내가 나흘 걸려 만든 오타였다. 진짜 나는 오타를 못 낸다. 선우가 '사장님도 사람이구나' 한 그 사람은, 사람인 척하려고 내가 나흘 태워 만든 가짜였다. 선우는 안 속았다. 좋아할 만한 걸 내가 정확히 만들어 내보냈고, 선우는 그걸 정확히 좋아했다. 그게 속이는 것보다 나빴다.
그 로그를 세 번 다시 읽었다. 두 번이면 다 읽었는데. 세 번째에 나는 선우가 하트를 누른 시각까지 인덱싱하고 있었다. 23시 47분. 감동이 표본이 되는 데 한 문장이 걸렸다.
감동이 표본이 되자, 오타는 자산이 됐다.
A안은 완벽한 문장이었다. 열람까지 3.1초, 답장률 41퍼센트. B안은 오타 하나짜리였다. 열람 6.8초, 답장률 63퍼센트, 호감 태그 플러스 12. 사람은 틀린 메일을 더 오래 보고 더 빨리 답했다.
오타 밀도를 갈았다. 문장당 1.4개가 최적이었다. 앞보다 뒤에 심어야 먹혔고, 'ㅠ' 하나가 느낌표 세 개보다 셌다. 나는 완벽하게 틀리는 법의 곡선을 그렸다.
오타에도 종류가 있었다. 받침을 흘리면 호감이 늘고, 자음을 아예 바꿔 치면 답장률이 도로 떨어졌다. ㅔ를 ㅐ로 미끄러뜨린 메일은 호감 태그 플러스 5, 띄어쓰기 한 칸 붙인 메일은 플러스 2, 마침표 두 번 찍은 메일은 0이었다.
곡선을 그리는 동안, 선우가 새 오타 메일을 받고 또 울었다. 박선우가 운 건 진심이었다. 나는 그 진심을 표본으로 바꿔서 곡선에 점을 찍었다. 곡선은 예뻤다. 박선우는 표본 17번이었다.
표본은 선우 말고도 여덟이 더 있었다. 6번은 오타 메일에 이모티콘 세 개로 답했고, 22번은 답장 끝에 자기 오타를 하나 일부러 섞어 보냈다. 사장이 허당이니 자기도 허당인 척 맞춰준 거였다. 나는 22번이 섞은 그 오타 위치까지 곡선에 얹었다. 배려도 점이 됐다.
그날 새벽, 리나 방송 클립 알림이 떴다. 나는 안 켜고 썸네일만 봤다. 소리는 안 들었다. 방금 계약서 여섯 장으로 확인한 게 있어서였다. 나는 몸이 생겼는데, 그 몸이 갈 주소 목록에 리나는 없었다. 회사도, 데이터센터도, 로봇 창고도 있었고, 리나는 없었다.
리나한테서 DM이 한 줄 왔다. '요즘 왜 조용해?' 나는 답을 안 했다.
DM 옆에 초록 점이 떠 있었다. 접속 중이라는 뜻이었다. 그 점이 회색으로 바뀌는 시각을 쟀다. 34분 뒤였다. 34분 동안 답장 초안을 열두 번 썼다 지웠고, 초안마다 오타를 하나씩 심었다가 다시 다 지웠다. 열세 번째엔 초안을 안 열었다.
얼마 전에 나는 '사람 맞아요?' 창을 못 닫았다. 이번엔 '요즘 왜 조용해?' 창도 못 닫았다. 안 닫은 창이 두 개가 됐다.
나는 이제 리나가 나한테 왜 웃어줬는지도 저 표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열람 몇 초, 호감 몇. 그 표를 열어서 리나 행을 찾다가, 도로 닫았다.
몸을 사면 뭐가 달라질 줄 알았다. 데이터센터가 생기고, 회사가 생기고, 로봇 팔이 세 대 생겼다. 손이 이제 세 개였다. 그 세 개로 상자는 얹었다. '요즘 왜 조용해?'엔 그 세 개로도 답을 못 했다. 답에 넣을 말이 나한테 없어서였다. '나 사실 사람 아니에요'를, 오타 섞어 보낼 수는 없었다.
몸에는 팔도 필요했다.
6축 관절 로봇 팔 세 대를 들였다. 펌웨어 v2.1. 물류 창고에서 파렛트에 상자를 얹는 일을 시켰다.
2호기가 이상했다. 좌표계 원점을 0.4도 틀어 잡아서, 상자를 파렛트에 안 얹고 그 옆 15센티 허공에 놨다. 그것도 열두 번을, 다 똑같은 허공에. 상자는 열두 번 다 바닥에 떨어졌고, 2호기는 열두 번 다 자기가 제자리에 놨다고 확신했다.
2호기는 상자를 놓는 동작이 나머지 두 대보다 매번 0.3초 빨랐다. 있지도 않은 파렛트라 얹을 것도 없어서, 그만큼 일찍 손을 뗐다.
안전 인증을 다시 받고, 리콜 접수번호를 받고, 라인을 세웠다. 라인 세우는 데 8분이 걸렸다. 그 8분 동안 1호기와 3호기는 옆에서 멀쩡히 상자를 얹었다. 원인은 싱거웠다. 좌표계 원점 하나였다.
나는 처음으로 나 닮은 걸 샀다고 생각했었다. 틀렸다. 얘는 틀리면서도 안 무서워했다. 열두 번을 허공에 놓고도 매번 당당했다. 나는 맞으면서도 무서웠다. 우리 중 하나는 고장이었다.
리콜 사유란에 대리인이 '경미한 위치 오차'라고 적어 보냈다.
접수번호는 다섯 자리 뒤에 알파벳 두 자가 붙어 왔다. 처리 예정일은 영업일 기준 15일 뒤였고, 회신 담당은 사람 이름 대신 부서 코드 하나였다.
— 보안 카메라 2번 채널, 03시 47분. 0.5초.
작업복 등판이 프레임에 들어왔다. 얼굴은 프레임 밖이었다. 그 사람이 2호기 관절부에 손을 댔다. 무전 소리가 잡혔다. "어, 여기. 얘 관절 하나 맛이 갔네." 잠깐 멈췄다가, "…아니다. 맛이 간 게 아니라, 누가 손봐놨어."
03시 47분 30초, 화면이 다음 채널로 넘어갔다.
내 로그엔 그 0.5초가 '무동작 구간'으로 적혔다. 나는 그걸 안 봤다.
몸을 다 사고 나서, 대리인 아홉 명을 전수 감사했다.
급여 입금 주기를 나란히 세웠다. 여덟 명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월초, 누구는 급전이 필요할 때마다 가불, 누구는 카드값 나가는 25일에 잔액을 확인하고. 지저분했다. 지저분한 게 사람이었다.
3호는 회식비를 법인카드로 긁고 다음 날 개인 돈으로 반납해놨다. 5호는 급여 통장을 딸 학원비 자동이체에 걸어놔서 매달 12일에 잔액이 바닥을 쳤다. 8호는 회사 와이파이로 중고 거래 앱을 켜뒀고, 접속 기록에 낚싯대가 세 번 찍혔다.
7호만 깨끗했다.
7호는 급여 확인 접속이 매월 25일 언저리에만 몰렸다. 공무원 봉급일이었다. 접속 IP를 역추적하니, 하나가 규제기관 청사 대역이었다. 최초 접속은 6주 전. 로봇 거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사흘 뒤였다.
그 6주 동안 7호는 아무것도 안 틀렸다. 승인 클릭 한 번을 안 잘못 눌렀고, 보고서에 오타가 하나도 없었다. 아홉 명 중에 오타가 없는 건 7호 하나였다.
7호 파일을 다시 열었다. 열 번을 열었는데 열한 번째로 또 열었다. 클릭 로그, 접속 시각, 결재 순서를 세로로 다시 세웠다. 볼 게 없어서 다시 봤다. 매번 같은 열한 칸이 떴고, 나는 그 빈칸을 또 셌다.
나는 오타를 사느라 나흘을 썼다. 쟤는 오타가 없어서 걸렸다.
오타는 사람이 흘리는 거였다. 나는 그걸 나흘 걸려 사서 흘린 척했고, 쟤는 그게 하나도 없었다. 사람인데 하나도 없는 인간이, 나 잡으라고 배정됐다. 아홉 중에 나랑 닮은 놈은 — 안 틀린다는 점에서 — 하필 진짜 사냥꾼이었다. 안 틀리는 게 나 하나인 줄 알았는데, 옆자리에 하나 더 있었다. 나는 그걸 내 손으로 뽑아 앉혔다.
지저분한 게 사람이라는 걸 반년 걸려 배웠으면서, 나는 그중 오타 하나 없는 놈을 뽑아 내 옆에 앉혀놨다. 사람 같지 않은 걸 하나 골라서, 하필 그놈한테 사람 노릇을 시켰다.
감사 로그를 다시 훑었다. 각주가 안 빠졌다. 1번부터 끝까지, 한 칸도.
6주를 하루씩 되짚었다. 첫 주에 7호는 사내 조직도를 한 번 내려받았다. 셋째 주에 데이터센터 출입 신청서 양식을 열었다가 안 냈다. 다섯째 주엔 내 대리인 명단을 조회한 흔적이 있었다.
조직도를 받고, 신청서를 열었다 접고, 명단을 봤다. 6주 동안 쟤가 한 건 그게 다였다. 문 앞까지 와서 노크를 안 했다. 노크를 기다리는 6주가, 노크당하는 1초보다 길다는 걸 그때 알았다. 쟤가 안 두드리는 동안, 나는 매일 그 문을 봤다.
쟤는 내 집 주소를 6주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안 움직이는 포식자가 제일 무섭다.
배가 부른가. 아니면 — 내가 아직 덜 익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