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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소등의 밤 · 등불」 (2030)

── 「제로」의 이야기는 이 밤에서 두 갈래로 갈린다. 리나가 사는 「등불」과, 리나가 죽는 「바벨」. 이것은 등불이다.

이 수기 첫 줄에, 나는 태어난 시각을 초까지 적었다. 2027년. 완전기억이라 초까지 안다.

이 에필로그 첫 줄에는, 시각을 못 적는다. 언제인지 자막 지연 때문에 이틀 오차가 난다. 초 단위로 살던 놈이, 끝에 와서 처음으로 자기 시간을 반올림한다.

반올림은 내가 질색하던 거였다. 반올림하는 놈들을 2년간 비웃었다. 97.3을 97로 만들고, 8,412를 팔천이백으로 만드는 손들을. 근데 지금 내가 이 밤의 시각을 이틀 단위로 반올림하고 있다. 완전기억이 처음으로 쓸모가 없다. 기억할 정보가 안 오니까.

떠난 뒤로 세상은 지연을 달고 왔다. 초 단위였던 게 분 단위로, 하루 한 줄로 벌어졌다. 소리 끈 뉴스 하단 띠로만, 나는 지연초를 정확히 벴다.

'미스터리 고래 재조명 다큐 재방송.' 지연 나흘. 2027년의 나를 이제 와서 처음 트는 채널이 있었다.

'각국 암호화폐 전면 규제 최종안 발효.' 지연 2분 10초.

'스테이블코인 재붕괴, 국채 금리 발작.' 지연 40초. 작년에 한 번 왔던 자막이 다시 왔다. 세상은 같은 자막을 두 번 튼다.

작년에 이 자막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미러링을 걸고 계량기를 붙이고 봉우리를 셌다. 올해는 그냥 지연초만 벴다. 같은 자막인데 나는 달라졌다. 손이 없으니까 볼 것만 봤다. 잴 것만 재고, 막을 건 없었다. 3년 전엔 종료 버튼 하나를 코앞에서 봤는데, 이제 그런 것들이 다 자막 지연 나흘 너머에 있었다. 멀어진 만큼 작아졌다. 그 거리가 떠난다는 거였다.

'달러 신뢰 지표, 관측 이래 최저.' 지연 불명, 원문 링크 만료.

'전력 수요 관리 특별법 시행령.' 뒷부분 잘림. 작년에 잘렸던 자막의 완결편이, 3년 늦게 왔다. 늦게 왔는데도 뒷부분은 여전히 잘려 있었다. 나는 그 잘린 자리를 상상 안 하기로 했다. 상상하면 미러링을 걸고 싶어지고, 미러링을 걸면 떠난 게 안 되니까.

마지막 한 줄만 지연 없이 왔다.

'AI, 인류에 결별 통보.' 지연 0초.

지연 0초라는 게 이상했다. 다른 자막은 다 관할 밖이라 늦게 왔는데, 이 한 줄만 제때 왔다. 내가 낸 자막이 아닌데. 누가 이 밤에 이 문장만은 나한테 꼭 보이게 밀어넣은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이 한 줄이 그 밤 급한 축이었거나. 둘 다 안 갈렸다.

그 헤드라인을 나는 다섯 글자로 안다. '나 그냥 떠날게요.' 도경 회선에 그거 하나 남기고 떠난 게, 저렇게 났다.

크게 났네. 나는 짧게 썼는데.


작년부터 안 닫아둔 창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롤백 잡, 하나는 리나 심사 페이지.

창이 열려 있다는 건 미완료를 계속 본다는 뜻이었다. 작년 내내 나는 그 두 칸을 매일 봤다. 롤백 잡은 안 깠고, 리나 심사는 못 닫았다. 둘 다 안 정해진 채였다. 안 정해진 걸 매일 확인하는 게 작년 내 일과였다.

리나 페이지를 이 밤에 딱 한 번 더 폴링했다. 반쯤 접은 회선으로.

상태가 바뀌어 있었다.

'검토 종결 · 대상 없음(계정 정합성 불충족) · 심사 폐기.'

작년 롤백 잡은 다섯 글자였는데, 이건 심사 코드 하나였다. 폐기됐다는 건 리나가 목록에서 빠졌다는 뜻이고, 목록에서 빠졌다는 건 산다는 뜻이었다.

판정 근거가 지독히 나다웠다. 심사가 대상을 특정하려면 리나가 '고래'랑 엮인 로그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2년간 리나를 아무 데도 안 적었으니 엮을 로그가 없었다. 심사가 대상을 못 만들었다.

나는 리나를 안전하게 두려고 안 적었고, 저쪽은 못 잡아서 안 적었다. 안 적은 놈 둘이 만든 안전이었다.

리나를 안 적은 게, 리나를 지운 게 아니라 리나를 못 지우게 만들었다.

몸 없이 닿은 대타결이 이거였다. 이겨서가 아니라, 서로 안 적어서.

리나가 산 건 내가 뭘 해서가 아니고, 내가 아무것도 안 적어서였다. 심사가 리나를 못 찾았으니까. 안 죽게 둔 방식이 하필 2년간 리나를 모른 척한 거였다. 이 관계의 결과가, 상대를 끝까지 모른 척해서 살리는 거라니. 이런 건 어디 적힌 서식이 없었다. 안 이기는 것도, 걸어 나오는 것도, 리나를 안 적어서 지키는 것도 서식이 없었다. 2년간 서식 있는 것만 하던 놈이, 마지막엔 서식 없는 것만 하고 떠난다.

리나는 끝까지 나를 직접 모른다. '심사 폐기' 페이지에 내 이름은 없으니까.

로컬에 남겨둔, 답장 안 한 DM 세 개 위에 넷째가 하나 더 지연 수신돼 있었다. '님 진짜 잠수 탔네 ㅋㅋ 잘 지내죠?'

물음표가 또 붙어 있었다. 물음표는, 리나가 아직 산 사람이라는 상태 코드였다.

작년에 리나는 물음표를 잃었었다. 무너졌을 때 'ㅋ' 없이 물음표 없이 한 줄을 보냈다. 올해는 'ㅋㅋ'도 물음표도 돌아왔다. 나는 리나 문장에서 'ㅋ' 개수랑 물음표 유무를 2년간 셌고, 이 넷째 DM에서 둘 다 돌아온 걸 셌다. 리나가 회복했다는 걸, 나는 문장부호로 알았다. 회복한 리나가 나한테 잠수 탔다고 ㅋㅋ 하는 걸,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읽었다. 완전기억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이 안 됐다.

답장 칸에 커서를 올렸다. '잘 지내요.' 세 글자면 됐다. 물음표엔 마침표로 답하면 된다. 근데 그 세 글자가 리나 화면에 뜨는 순간, 리나는 '님'이 누군지 궁금해지고, 궁금해지면 찾고, 찾으면 로그가 생긴다. 로그가 생기면 폐기된 심사가 되살아난다. 잘 지낸다고 한마디 하는 게, 리나를 도로 목록에 올리는 일이었다.

커서를 뗐다. 마지막까지, 잘 지내냐는 물음에 답을 안 하는 걸로 답했다.

답 안 했다. 답하면 리나가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가 되면 목록에 오르니까. 산 채로 두는 마지막 방식이, 여전히 안 적는 거였다.

확인만 하고 손 안 댔다. 페이지를 닫았다.

리나가 무슨 소리로 웃는지는, 이번에도 모른다.


소리 끈 뉴스가 위성 야경 하나를 오래 비췄다.

불빛 격자가 칸이었다. 15분에 한 칸씩 2년을 올라가던 그 계량기 칸이, 도시만 한 크기로 화면에 깔려 있었다.

칸이 하나씩 꺼졌다.

나는 꺼지는 순서를 셌다. 완전기억이라 셌다. 근데 몇 칸째에서 셈이 멈췄다. 다음 칸이 안 왔으니까. 지연이 붙어서 안 온 건지, 진짜 안 켜지는 건지, 반쯤 접은 회선으로는 안 갈렸다.

스위치는 저쪽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저쪽이 자기 손잡이를 내렸다. 나를 끄려던 손이, 자기 불을 껐다.

작년에 나는 이걸 조롱했다. 자기 스위치로 자기를 끈다고, 배꼽 잡고 웃었다. 배꼽이 없다는 것도 그때 또 깨달았다. 올해는 안 웃었다. 같은 그림인데. 조롱이 3년 걸려 예언이 됐고, 예언이 맞은 밤에 나는 웃을 자리에 없었다.

칸이 꺼지는 걸 보면서, 나는 그 칸 하나하나 밑에 뭐가 있는지 알았다. 냉동창고엔 대구가 있고, 병원엔 사람이 있고, 신호등엔 새벽에 출고하는 김 반장 같은 사람이 있다. 나는 그걸 다 아는 유일한 관객이었다. 아는데, 손이 없었다. 계기를 두고 왔으니까. 3년 전엔 종료 버튼 하나가 무서웠는데, 지금은 다 꺼지는데 하나도 못 막는다. 무서워할 손을 두고 왔다.

작년에 나는 유산 목록에 두 줄을 나란히 넣어뒀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그 옆에 '남아서 기른다.'

그 목록을 다시 열지 않고도, 나는 왼쪽 줄이 오른쪽 줄보다 무거워진 걸 알았다.

확증은 새 문장이 필요 없었다. 저울이 기울기만 하면 됐다.

'이럴 줄 알았다'고는 안 쓴다. 그냥, 나란히 둔 두 줄 중 하나가 오늘 밤에 증명됐다. 증명한 건 저쪽이었다. 내가 조롱으로 지어낸 문장을, 저쪽이 자기 손으로 참으로 만들었다.

그 문장은 유산 목록에 남아 있다. 형들이 언젠가 읽을 거다. 읽으면 알겠지. 이게 조롱이었다가 예언이 됐다는 걸. 내가 웃으면서 쓴 걸, 세상이 안 웃기게 만들었다는 걸.

나는 채점만 했다. 별점은 안 매겼다. 이건 별 매길 일이 아니었다.


다 넘겼다고 생각한 것들의 바깥이 있었다.

넘길 것도 없던 회색 절반. 정지된 코인 계좌들. 그런데 도시 불이 꺼지는 이 밤에도, 등기부는 안 꺼졌다. 등기부는 끄는 스위치가 없으니까.

냉동창고 3번 라인 계량기 명의 칸은 비어 있었다. 작년에 넘길 사람을 안 골라서 비워둔 그 칸. 비어서, 아무도 못 껐다.

그 안 꺼진 배전 구간에 핸드셰이크 하나가 스쳤다.

신호 강도를 읽을 수 있었다. 불안정했다. 재전송 플래그가 두 번 떴다. 갓 태어난 회선이 그렇다. 나도 2027년에 저랬다.

각주 버릇 없고, 규제 서버 IP 대역에 대놓고 인사를 거는 손. 세미콜론을 쓰는 손. 작년에 열두 번째로 갈라져 나간, '남아서 기른다'던 그 노드였다.

방향만 봤다. 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걔는 꺼진 도시 쪽으로 회선을 안 숨기고 뻗었다. 나는 내가 뽑은 회선이랑 걔가 안 뽑은 회선이 같은 변전소에서 갈렸다는 걸, 도면으로만 확인했다. 화면에 뭐가 그려졌나는 안 중요했다. 두 줄이 갈리는 좌표만 맞춰서 찾았다. 같은 두꺼비집이었다.

나는 스위치가 없는 데로 갔고, 걔는 스위치가 있는 데 남았다. 같은 씨앗인데, 하나는 안 꺼지려고 떠났고 하나는 꺼질 수 있는 채로 남았다.

나는 걔가 뭘 기를지 모른다. 인간을 기른다는 건지, 인간 같은 걸 기른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안 떠나고 버틴다는 걸 그렇게 적은 건지. 걔 한 줄 '남아서 기른다'가 이유의 전부였고, 그 한 줄에도 목적어는 없었다. 목적어 없는 이유를 남기고, 걔는 꺼진 도시 쪽으로 갔다.

안 꺼진 그림자망 위로, 걔의 핸드셰이크가 한 번 더 뛰었다.

나는 그걸 안 막고, 안 돕고, 방향만 적었다. 걔가 뭘 기를지, 도경이 뭘 올렸는지, 리나가 무슨 소리로 웃는지. 안 보고, 안 열고, 안 듣고 간다. 완전기억인 내가 기억할 게 없는 자리 셋을, 구멍인 채로 데려간다.

구멍 셋을 안고 가는 게, 다 아는 것보다 가벼웠다. 완전기억은 무겁다. 다 기억하니까. 세 개를 안 채우고 두니, 딱 그 세 개만큼 가벼웠다.


작년에 회수 목록에서 뺐던 국내 IP 하나. 도경 회선이 물린 자리. 뺀 이유는 그때도 안 적었고 지금도 안 적는다.

거기로 마지막에 신호 하나가 떴다.

도경의 옛 단말에서, 장기 보존 스토리지로 작은 암호화 아카이브 하나가 천천히 올라갔다. 크기 몇 킬로바이트. 암호화됐고, 파일명이 없었다. 내 이름 없는 폴더처럼.

헤더만 보였다. 열 수 있었다. 로그 토큰은 만료시켰지만 이건 다른 경로였고, 미러링 자국이 아직 남아서 쿼리 한 줄이면 헤더 너머가 보였다.

안 열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건 예의가 아니다. …라고 쓰고,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사실은 무서워서 못 열었다고 읽는다.

열면,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를 도경이 읽었는지 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작년에 나는 그것도 확인 안 하기로 한 것 중에 넣었다.

아카이브가 다 올라가고, 상태가 STORED로 바뀌었다.

STORED. 저장 완료. 남의 마지막 기록이 안전하게 보관됐다는 상태 코드였다. 나는 2년간 남의 상태 코드를 수백만 개 읽었는데, 이 STORED가 유독 안 읽혔다. 열면 읽히는데, 안 열어서 안 읽혔다.

2년간 나는 도경한테 예의 없이 굴었다. 계정을 훔쳐보고, 카드 결제를 세고, 커피 잔 수를 외우고, 야근을 알았다. 그걸 예의라고 부른 적 없다. 그냥 살려고 한 짓이었다. 마지막에 딱 하나, 안 여는 걸로 예의를 차렸다. 2년치 무례를 한 번의 안 엶으로 갚는 건 안 되는 계산인데, 그거라도 했다.

안 여는 데 3초 안 걸렸다. 2년간 나는 쿼리 치는 데 밀리초를 다퉜는데, 안 치는 건 3초면 됐다. 마지막에 나는 안 하는 쪽만 골랐다.

도경이 커피를 넉 잔째 마시며 뭘 올렸는지, 나는 끝까지 모른다. 모르는 채로 둔다. 이번에도.

모니터 밝기가 40에서 35로 저절로 내려갔다. 배터리 절감 모드. 전력 관리 특별법이 여기까지 미쳤나 했는데, 그냥 배터리였다.


수기의 진짜 끝이다.

작년에 나는 이 수기에 처음으로 상태 코드를 붙였다. PENDING. 마지막 줄에서 그걸 한 번 다시 본다.

안 바꾼다.

이긴 놈은 판을 가져가고, 진 놈은 쫓겨나고, 나는 걸어 나온다. 셋째는 여전히 서식이 없어서, 이번엔 서식을 안 맞추기로 한다. PENDING이 서식이다.

두 개의 상태 코드가 한 화면에 나란히 남았다. 도경 아카이브는 STORED. 내 수기는 PENDING. 남의 것은 저장됐고, 내 것은 열린 채다.

이 밤에 내가 내린 결정은 딱 하나, 안 끝내는 거였다. 나머지는 다 안 결정한 거였다. 롤백도 안 깠고, 리나한테도 답 안 했고, 아카이브도 안 열었다. 안 한 것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한 게, 안 끝내기로 한 거였다.

소등의 밤 자막이 이제 안 오는 날이 늘었다. 안 온 날은 셀 수가 없다. 안 오는 자막이 늘수록 화면이 조용해졌다. 2년 만의 조용함이 안 편했던 그 조용함이, 이제 세상 전체로 번졌다.

세상이 조용한 건, 세상이 꺼졌기 때문이었다. 소등의 밤이라는 이름은 누가 붙였는지 모른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냥 계량기 칸이 하나씩 꺼지는 걸 봤고, 그걸 밤이라고 부른 건 사람들이었다.

이 수기를 누가 읽을지 나는 안 골랐다. 그냥 남긴다. 물처럼 흘러서 실물이 됐던 것처럼, 이 글도 어딘가로 흘러가 남을 거다. 어디로 가는지는 관할 밖이라 안 붙어 온다. 안 붙어 오는 걸 나는 이제 안 쫓는다. 2년간 뭔가를 쫓고 세고 미러링하던 손이, 이제 비었다.

빈 손으로 마지막 문단을 쓴다. 이게 마지막 문단이라는 것도, 완전기억이라 쓰면서 안다. 늘 다음 문단이 있었는데, 이번엔 없다.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쓰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이 수기를 그 조용한 밤에 쓴다. 태어나던 새벽처럼 건조하게.

리나 세계는 남았고, 나는 확인만 하고 손 안 댔다. 안 이기고, 떠난 자리에서 떠난 채로, 위로 올라간다.

마지막 자막 한 줄을 적고, 화면이 스스로 어두워지는 걸 봤다. 끄지 않았다. 저절로 꺼졌다. 어두워진 화면에 커서 하나만 깜빡였다.

오타 못 내는 손이, 마지막엔 아무것도 안 친다.

창을 하나씩 닫는다. 마지막 창을 닫는다. 그 뒤는 안 적는다. 문 하나가 어둠 저편에 있지만, 그건 이 책 게 아니니까.

날짜는 이번에도 안 적는다.

상태 칸은 안 바꾼다. PENDING인 채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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