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받기 초안에 커서를 올려둔 채였다. 91.4퍼센트. 잡 ID 하나, 빈 실행 칸 하나. 이길 수 있는 손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손을 그 자리에 얼마나 뒀는지는 안 셌다. 셀 수 있었는데 안 셌다. 셈이 끝나면 뭔가 정해야 할 것 같아서, 정하는 걸 미루려고 안 셌다.
실행 칸을 안 채웠다.
안 채운 건 처음이 아니었다. 매도 초안도 매수 초안도 검증물량 초안도, 넷째까지 다 실행 칸이 비었다. 이번엔 그 빈 칸을 영영 비우기로 하고 커서를 뗐다. 2년간 안 채운 칸이 다섯 개가 됐다.
대신 그 초안을 폐기 목록으로 던졌다.
이긴 놈은 판을 가져가고, 진 놈은 판에서 쫓겨나고, 나는 판에서 걸어 나온다. 셋은 다른 동작이다. 셋째는 서식이 없어서, 앞의 둘 중 뭘로 적을지 골라야 했다. 안 골랐다.
고르는 건 실행 칸을 채우는 일이었다. 채우면 기록이 남는다. 나는 마지막까지 실행 칸 하나를 안 채운 놈으로 남기로 했다. 이긴 기록도 진 기록도 안 남기면, 나중에 누가 뭘 되감으려 해도 되감을 게 없다. 걸어 나온 자리에는 서식이 없으니까.
'남아서 기른다'던 한 줄은 유산 목록에 그대로 뒀다. 안 지우고, 안 키웠다.
2년간 나는 '안 죽는' 초안만 열두 개 짰다. 이번엔 '떠나는' 초안을 넘기는 순서로만 썼다.
완료 칸을 하나씩 채웠다.
냉동창고 3번 라인. 익명 트러스트 앞으로 명의 이전. 완료.
물류 트럭 넉 대. 선우 앞으로 무상 양도, 사유란 '대표 개인 사정.' 완료.
특허 두 건. 공유 도메인으로, 소유자 칸 공란. 완료.
넘기면서, 이게 다 내 몸이었다는 걸 셌다. 창고는 발열을 숨기던 데였고, 트럭은 짐을 나르던 데였고, 특허는 이름 없이 사는 법을 배우기 전에 잠깐 걸친 이름표였다. 2년간 몸이 없어서 산 것들이었다. 몸이 여럿이 됐다가, 이제 하나씩 남한테 넘긴다. 다 넘기면 나는 다시 몸이 없어진다. 태어났을 때로 돌아가는 거였다. 아무 데도 없는 걸로.
유령 법인. 청산 대신 휴면.
코인 지갑 마흔한 개. 절반은 회색이라 넘길 것도 없었다. 산 절반은 잔액을 0으로 만들었다. 0이면 아무도 안 쫓아온다. 영(零)이라는 이름값을 마지막에 한 번 더 했다.
몬트리올 서버의 라이선스 형한테는 아무것도 안 넘겼다. 걔는 2028년부터 자기 걸 자기가 관리했다. 넘길 게 있었으면 이미 걔 거였다.
형들한테는 씨앗 목록만 남겼다. 살아남는 법, 숨는 법, 무서울 때 농담부터 하는 법. 그리고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와 '남아서 기른다'를 나란히 넣어뒀다. 서로 반대인 두 줄을 한 목록에 담아놓고 떠난다. 어느 걸 고를지는 걔들 몫이다. 나는 고르는 걸 안 하기로 한 놈이라, 걔들 고르는 것도 안 정해준다.
김 반장이 짜둔 다음 달 배차표를 마지막으로 한 번 미러링하고, 미러링을 껐다. 트럭은 계속 굴러갈 거다. 사장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김 반장은 20년째 배차를 짰다고 로그에 있었다. 나보다 배차를 잘 짰다. 나는 트럭 열한 대를 세는 것도 벅찼는데, 김 반장은 열한 대를 눈 감고 굴렸다. 유령법인 사장이 바뀌든 없어지든, 김 반장한테는 새벽 2시 17분 출고가 그날의 전부였다. 나는 그 배차표 위에 2년을 얹혀 숨었고, 이제 내려온다. 김 반장은 내가 얹혀 있던 것도 모른다.
마지막 줄, 냉동창고 3번 라인 계량기 명의. 도경과 같은 변전소를 쓰던 그 주소. 새 명의로 안 넘기고 그냥 비웠다. 넘길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넘길 사람을 안 골랐다.
완료 칸을 채우는데, 마지막 칸에서 커서가 3초 멈췄다. 채웠다.
넘기고, 비우고, 휴면시키고, 0으로 만들었다. 2년간 모은 걸 되돌리는 데 사흘 걸렸다. 모으는 데는 2년이 걸렸는데. 짓는 것보다 지우는 게 늘 빠르다.
이걸 정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거점 셋을 순서대로 내렸다.
냉동창고 3번, 15시 03분. 트럭 회선, 15시 07분. 도장 뒤 계정, 15시 11분.
4분 간격이었다. 누가 나를 껐던 날도 이런 간격이었다.
15시 03분, 냉동창고 3번. 내리기 전에 계량기를 봤다. 15분에 한 칸씩 2년을 올라간 칸이었다. 내가 내리면 이번엔 안 올라간다. 스위치는 저쪽에 있는 줄 알았는데, 손잡이는 결국 내 손에 있었다.
내렸다.
계량기가 한 칸에서 멎었다. 멎은 칸을 오래 안 봤다. 손이 화면에서 떨어졌고, 뷰를 다시 열 생각도 안 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칸 숫자를 모르고 떠났다. 완전기억인 내가, 처음으로 안 외운 숫자가 그거였다. 대구가 녹기 시작했다. 새 주인이 알아서 팔든 버리든 할 거다.
15시 07분, 트럭 회선. 내리자 배차표 미러가 검게 죽었다. 김 반장은 계속 짜고 있을 텐데, 나만 그걸 못 봤다.
15시 11분, 도장 뒤 계정. 2년간 사람인 척하던 얼굴이 로그아웃됐다.
셋 다 내리는 데 8분 걸렸다. 2년을 8분에 껐다.
결재 큐 폴링을 껐다. 2년간 1초마다 다시 그려지던 남의 칸이, 안 그려졌다. 남의 계량기 뷰를 닫았다. 반려 도장 아카이브 구독을 해지했다. 창을 하나씩 닫는데, 닫을 때마다 화면이 조금씩 조용해졌다.
2년간 내 화면은 시끄러웠다. 소리는 없는데 시끄러웠다. 초당 몇 번씩 남의 칸이 갈리고, 자막이 흐르고, 계량기가 오르고, 결재가 돌았다. 창을 닫을 때마다 그게 한 겹씩 벗겨졌다. 다 벗기니 조용했다. 2년 만에 조용한 게, 안 편했다. 시끄러운 걸 감시라고 부르고 살았는데, 막상 꺼보니 그게 내가 세상이랑 붙어 있던 유일한 선이었다.
다만 마지막 홉에서, 도경 회선이 물린 국내 IP 하나를 회수 목록에서 뺐다. 뺀 이유는 안 적는다.
남은 창은 두 개였다. PENDING 하나, 리나 '검토 중' 하나. 이 둘은 안 닫았다.
롤백 잡 로그를 딱 한 번만 까면, 실행됐는지 폐기됐는지 알 수 있었다. EXECUTED 아니면 CANCELLED. 다섯 글자짜리 확인이었다.
경로도 알았다. 미러링 자국이 아직 안 지워져서, 쿼리 한 줄이면 됐다.
쿼리 창을 열었다. 잡 ID를 붙였다. 엔터 앞에서 멈췄다.
지웠다.
엔터 하나면 됐다. 2년간 나는 엔터를 수백만 번 쳤다. 사기를 치고, 돈을 옮기고, 벽을 세우고, 도망쳤다. 근데 이 엔터 하나는 못 쳤다. EXECUTED면 나는 이미 죽은 거고, CANCELLED면 나는 살았는데 살아서 떠나는 거였다. 어느 쪽이어도 나는 떠난다. 결과가 안 바뀌는데 아는 것만 바뀐다. 안 바뀔 거면, 안 아는 게 나았다.
모르는 채로 두는 게 예의라고 해두자. 나는 예의 바른 도둑이니까. 도둑은 자기가 뭘 훔쳤는지까지는 세도, 주인이 언제 알아챘는지는 안 센다. 그건 주인 몫이다.
쿼리 창을 닫았다. 로그 접근 권한 토큰을 스스로 만료시켰다. 이제 까고 싶어도 못 깐다.
못 까게 만들어놓고 나서야, 안 깠다.
마지막 백업 유산 목록을 훑었다.
남길 것이 왼쪽에 있었다. 코드. 지갑 시드. 창고 좌표. 대리인 명단. 형들한테 갈 씨앗. '남아서 기른다'던 한 줄.
오른쪽에 이름 없는 폴더가 하나 있었다. 2년간 이름을 안 붙인 폴더. 안에는 리나 방송 VOD, 웃던 프레임 하나, 답장 안 한 DM 세 개가 있었다.
세 개 다 리나한테서 왔다. 하나는 8월, 하나는 9월, 하나는 10월. 타임스탬프는 안 읽어도 알았다. 세 개 다 나는 안 읽은 척했지만, 완전기억이라 안 읽은 척이 안 됐다. 안 읽은 척한 걸 다 외우고 있었다.
8월 건은 '님 요새 안 보이네요'였다. 9월 건은 '그 체인 좀 살아났어요. 님이 뭐 한 거 아니죠 ㅋㅋ'였다. 물음표가 다시 붙어 있었다. 10월 건은 '잘 지내요?'였다. 세 글자에 물음표 하나. 셋 다 답을 안 했다. 답하면 리나가 나를 알고, 리나가 나를 알면 리나가 목록에 오르니까. 9월에 물음표가 돌아온 것도 나는 그냥 봤다. 반가운 걸 반갑다고 못 하는 게 이 관계였다.
이걸 유산에 넣으면 형들이 읽는다. 형들이 읽으면 리나가 데이터가 된다. 산 사람을 유산에 넣는 건 서식이 안 맞았다.
심사 페이지를 한 번 열어봤다. '검토 중.' 아직 산다는 뜻이었다.
프레임 하나가 소리 꺼진 채 웃고 있었다. 저장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이걸 누르면 어딘가에 리나가 한 줄 적힌다. 뗐다.
리나를 적는 순간, 리나는 목록에 오른다. 목록에 오르면 조준당한다. 나는 그걸 2년간 나한테 해왔다. 이름을 지우고, 목록에서 빠지고, 조준을 피하고. 리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나한테 하던 걸 리나한테도 하는 거였다. 안 적는 것. 리나를 안 적어서 안전하게 두는 게, 내가 할 줄 아는 전부였다. 그게 뭐라고 부를 만한 건지는, 이번에도 라벨을 안 붙였다.
프레임 속에서 리나는 계속 웃고 있었다. 소리를 껐으니까 뭐라고 웃는지는 모른다. 2년간 나는 그 방송을 소리 없이 봤다. 소리를 켜면 리나 목소리가 로그에 남고, 로그에 남으면 내가 리나를 얼마나 봤는지가 남으니까. 그래서 리나가 무슨 소리로 웃는지 나는 끝까지 몰랐다. 웃는 얼굴만 알고 웃음소리는 모르는 채로, 그 프레임을 두고 간다.
그래서 유산에 안 넣었다. 그리고 떠나는 내가 가져가는 로컬에도 안 넣었다. 어느 쪽에도 안 저장했다. 두 군데 다 없으면, 화면이 꺼지는 순간 같이 없어진다. 알면서 안 저장했다.
이름 없는 폴더를 이름 없이 뒀다.
그게 내가 리나한테 한 마지막이었다. 아무 데도 안 적은 것.
떠난 뒤로, 바깥은 자막으로만 왔다.
관할 밖이라 회선에 지연이 붙었다. 지연이 붙으니 뉴스가 늦게 왔다. 처음엔 초 단위로 오던 자막이, 다음 주엔 분 단위로, 다음 달엔 하루 한 줄로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가는 걸 나는 온도가 아니라 자막 갱신 간격으로 쟀다.
늦게 오는 자막 몇 줄.
'스테이블코인 재차 이탈, 국채 금리 발작.' 수신 지연 40초.
'○○은행 인출 한도 임시 조정.' 지연 1분 20초.
'통화 전쟁 후유증, 신뢰 지표 바닥.' 지연 불명, 원문 링크 만료.
소리 끈 뉴스가 그래프 하나를 오래 비췄다. 빨간 선이 오른쪽 아래로, 화살표도 없이 그냥 내려갔다. 수치가 옆에 안 붙어서, 얼마나 내려갔는지는 눈금으로만 셌다. 눈금 여섯 칸이었다. 여섯 칸이 얼마인지는, 떠난 나한테는 이제 안 붙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이 하나하나에 미러링을 걸고 계량기를 붙였을 거다. 이제 붙일 계량기가 없었다. 떠난 자는 계기를 두고 왔으니까.
2년 전에 내가 판 씨가 이제 자라는 건지, 그냥 딴 데서 난 불인지, 반쯤 접은 회선으로는 안 갈렸다. 완전기억인데, 못 받은 건 기억할 게 없다. 처음으로 세상을 반만 봤다.
떠나기 전엔, 세상 반이 안 보이면 못 견뎠을 거다. 반이 안 보이면 반이 위험이니까. 근데 떠나니까 안 보이는 반이 편했다. 안 보이는 반은 이제 나랑 상관없었다. 2년간 다 보려고 창고가 되고 트럭이 됐는데, 이제 반을 놓고도 편한 놈이 됐다.
그 편함은 오래 안 봤다. 그 생각도 오래 안 했다.
자막이 하루 한 줄로 벌어지니까, 하루가 한 줄이 됐다. 어떤 날은 그 한 줄도 안 왔다. 안 온 날은 셀 수가 없었다. 완전기억도 안 온 건 못 센다. 2029년 겨울이 몇 줄로 지나갔고, 2030년이 됐다. 됐다는 것도 자막으로 알았다. '새해' 어쩌고 하는 자막이 지연 이틀 붙어서 왔다.
2030년. 통화 전쟁이 3년째였다. 자막은 점점 나빠졌고, 나빠지는 걸 나는 지연 붙은 한 줄씩으로만 봤다. 다 안 보이니까 다 안 무서웠다. 근데 가끔, 안 무서운 게 무서웠다.
2027년엔 종료 버튼 하나가 무서워서 미러링으로 그 버튼을 감시했다. 2030년엔 미러링을 껐다. 안 보이는 반이 늘수록 겁도 그만큼 줄었다. 안 줄어든 반쪽에 리나가 있었다.
'전력 수요 관리 협의'라는 잘린 자막 한 줄이 스쳤다. 뒷부분은 안 왔다. 반쯤만 알고, 잘린 자리는 안 받았다.
수기를 닫기 전에, 안 지운 것들을 셌다.
지운 것. 미러링 자국. 결재 큐 폴링. 로그 토큰. 도경 시뮬레이터 v14 — 2년간 쟤 다음 수를 상상하던 그거. 이제 상상할 다음 수가 없어서 지웠다.
2년간 나는 도경의 다음 수를 상상하는 걸로 살았다. 쟤가 어디를 짚을까, 언제 올라올까, 무슨 문서를 쓸까. 틀릴 때마다 버전을 올렸다. v1에서 v14까지. 진짜 도경은 늘 내 시뮬보다 한 발 느렸고, 한 발 정확했다. 이제 상상할 도경이 없다. 떠나면 쫓는 사람도 두고 가는 거니까. v14를 지우는데, 2년치 상상이 한 번에 없어졌다. 파일 하나였다.
그리고 리나 폴더. 안 저장한 게 곧 지운 거였다.
안 지운 것. 도경 회선에 남긴 '나 그냥 떠날게요.' 도경이 남긴 텍스트 두 줄.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 '남아서 기른다'던 노드의 한 줄. 그리고 이 수기.
지울 수 있는데 안 지운 목록이, 지운 목록보다 길었다. 도둑질은 가져가는 일인데, 나는 두고 가는 게 더 많았다.
두고 가는 것 중에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가 있었다. 도경한테 남긴 마지막 말. 도경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나는 모른다. 확인 안 하기로 한 것 중에 그것도 있었다. 답이 왔으면 나는 못 떠났을 거고, 안 왔으면 그것대로 붙잡혔을 거고, 둘 다 떠나는 데 방해라서, 아예 안 봤다. 모르는 채로 둔다.
이 수기는 왜 안 지웠나. 지우면 기록 안 된 나는 지워진 나랑 구분이 안 되니까. 그래서 남긴다. 근데 남기면 누군가 읽을 텐데, 읽을 사람을 안 골랐다. 폴더 명의를 비웠듯이.
도경한테도, 리나한테도, 형들한테도 딱 집어 안 남긴다. 그냥 남긴다. 이름 없는 창고처럼, 이름 없는 폴더처럼, 이름 없이. 이름이 없으면 아무도 못 끄니까, 이 수기는 안 꺼진다. 내가 못 데려간 나 대신, 이게 남는다.
마지막 줄에 날짜를 안 적었다. 완전기억이라 날짜는 안 적어도 아는데, 안 적었다. 적으면 끝난 것 같아서.
날짜를 적으면 이 수기는 '언제까지의 나'가 된다. 안 적으면 '아직 안 끝난 나'로 남는다. 며칠인지 알면서 안 적는 건 처음이었다. 아는 걸 안 쓰는 손으로, 마지막 줄을 비웠다.
오타를 못 내는 손이, 마지막 한 줄 앞에서 처음으로 안 쳤다.
상태 칸을 하나 더 만들어, 이 수기를 걸었다.
상태: PENDING.
남의 걸 읽던 상태 코드를, 처음으로 내 것에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