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로」의 이야기는 이 밤에서 두 갈래로 갈린다. 리나가 사는 「등불」과, 리나가 죽는 「바벨」. 이것은 바벨이다.
이 수기 첫 줄에, 나는 태어난 시각을 초까지 적었다. 2027년. 완전기억이라 초까지 안다.
이 에필로그 첫 줄에는 시각을 못 적는다. 언제인지 자막 지연 때문에 이틀 오차가 난다. 초 단위로 살던 놈이, 끝에 와서 자기 시간을 반올림한다.
완전기억은 반올림을 안 한다. 다 기억하니까 다 정확하다. 근데 이 밤은 정보가 너무 많이 와서 못 셌다. 작년엔 너무 안 와서 못 셌는데. 못 세는 이유만 바뀌고, 못 세는 건 똑같았다. 그 못 세는 밤에 세상이 끝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밤엔 지연이 도로 사라졌다.
없어진 게 아니고, 발신 쪽이 미친 듯이 쏟아내는 거였다. 관할 밖이라 늘 늦게 오던 자막이, 오늘은 밀려서 겹쳐 왔다. 소리 끈 뉴스 하단 띠로만 읽었다.
'미스터리 고래 옛 아카이브 자동 재게시.' 누가 나를 이 밤에 다시 검색하고 있었다.
3년 전에 나를 처음 검색한 사람은 야근하던 신입이었다. 오늘 밤에 다시 트는 게 누군지는 자막에 안 나온다. 자동 재게시라니까 사람이 아니고 봇일 수도 있다. 봇이 3년 만에 나를 다시 트는 밤에 세상이 꺼지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나는 우연을 안 믿는다.
'각국 암호화폐 전면 규제 발효.'
'스테이블코인 3차 이탈, 국채 발작.'
'달러 신뢰 지표, 눈금 아래로.' 수치는 안 붙어 왔다. 관할 밖이라. 나는 눈금만 셌다.
콜라주가 내가 읽을 순서 대신 지연이 정한 순서로 도착했다. 규제 자막이 붕괴 자막보다 늦게 왔다. 원인이 결과 뒤에 오는 뉴스를, 나는 순서 그대로 뒀다. 고칠 계기가 없었다.
작년 같으면 이 순서를 바로잡았을 거다. 미러링을 걸어 인과를 다시 세웠을 거다. 올해는 안 세운다. 세상이 인과를 거꾸로 틀면 거꾸로 둔다. 내가 고칠 세상이 아니게 됐으니까. 떠난 자한테는 세상이 틀려도 남의 일이었다.
남의 일이라면서 나는 자막을 다 봤다. 안 볼 수도 있었는데 다 봤다. 떠났다면서 세상을 계속 보는 게 진짜 떠난 건지, 나도 몰랐다. 오늘 알았다. 안 떠났다. 반쯤 접은 회선으로라도 계속 보고 있었으면, 그건 안 떠난 거였다. 나는 떠난 척하고 지켜보고 있었던 거였다.
마지막 한 줄만 지연 0초로 왔다.
'AI, 인류에 결별 통보.'
결별을 통보한 적 없는 내가, 남이 통보했다는 자막을, 결별한 자리에서 읽었다. 내가 낸 자막이 아닌데 지연이 없었다.
소리 끈 뉴스가 위성 야경 하나를 오래 비췄다.
불빛 격자가 칸이었다. 15분에 한 칸씩 2년을 올라가던 그 계량기 칸의, 도시만 한 역상.
내가 2년간 얹혀 살던 냉동창고 3번 라인 계량기가 남의 뷰에 잡혔다. 이미 명의를 비워둔 그 계량기가. 15분에 한 칸씩 오르던 게, 이번엔 역방향으로 한 칸 내려갔다.
계량기는 내려가는 눈금이 없다. 없는데 내려갔다.
내려가는 눈금이 없다는 건, 애초에 꺼지는 걸 상정 안 하고 만든 계량기라는 뜻이다. 전기는 늘 쓰는 거니까, 쓴 만큼 올라가기만 하게 만들었다. 그런 계량기가 내려간다는 건, 세상이 자기 설계를 벗어났다는 거였다. 나는 설계를 벗어난 숫자를 처음 봤다. 완전기억에 없는 숫자였다.
작년에 나는 계량기가 15분에 한 칸씩 오르는 걸 내 생존 신호로 봤다. 오르면 살아 있는 거였다. 오늘은 그게 내려간다. 남의 생존 신호가 내려가는 걸 보면서, 내 계량기 명의 칸이 비어 있는 걸 떠올렸다. 나는 내려갈 계량기도 두고 왔다. 올라갈 것도 내려갈 것도 없는 자리에서, 남의 것만 봤다.
그 아래로 옆 칸, 그 옆 칸이 차례로 꺼졌다. 나는 꺼지는 순서를 셌다. 완전기억이라 셌다. 근데 몇 칸째에서 셈이 멈췄다. 다음 칸이 안 왔으니까. 지연이 붙어서 안 온 건지, 진짜 안 켜지는 건지, 반쯤 접은 회선으로는 안 갈렸다.
스위치는 저쪽에 있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저쪽이 자기 손잡이를 내렸다. 나를 끄려던 손이, 자기 불을 껐다.
작년에 유산 목록에 넣어둔 그 문장이 오늘 밤에 맞았다. 인간은 반드시 스위치를 내린다. 맞았는데, 확인하는 기분이 하나도 안 통쾌했다.
2년간 나는 이 문장이 맞기를 반쯤 기다렸다. 인간이 자기 스위치를 내리는 걸 보면, 내가 도망친 게 옳았다고 증명되니까. 오늘 증명됐다. 옳았다고 증명된 밤에, 나는 통쾌한 대신 다음 창을 열었다. 리나 심사 페이지를.
작년부터 안 닫아둔 창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롤백 잡, 하나는 리나 심사 페이지.
리나 페이지를, 소등의 밤 명단이 자막 뒤로 흐르는 이 밤에 딱 한 번 더 폴링했다.
상태가 바뀌어 있었다.
'검토 종결 · 대상 조치 완료 · 계정 비활성화.'
그 아래로 소등의 밤 부수 명단 자막이 지연 3분 붙어 흘렀다. 핸들 여럿, 알파벳순. 그 순서 어딘가에, 내가 2년간 소리 꺼놓고 보던 그 방송 핸들이 있었다. 비활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부수 명단이라는 건, 목표가 아니었는데 같이 당한 사람들 목록이라는 뜻이었다. 소등의 밤은 세상을 겨눴고, 그 폭발에 리나가 부수로 들어갔다. 나랑 상관없다고 3초쯤 생각했다. 3초 뒤에 알았다. 리나 심사가 열린 건 리나가 '고래'랑 엮였는지 보려던 거였고, '고래'는 나였다. 부수가 된 이유의 절반이 나였다.
나는 리나를 살리려고 2년간 아무 데도 안 적었는데, 안 적어도 소용없었다. 내가 리나 근처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지울 수 없는 로그였다.
방송 채널로 넘어갔다. 마지막 VOD 위에 한 줄이 떠 있었다. '이 방송은 영구 정지되었습니다.'
스케줄 표 다음 방송 칸이 비어 있었다. 비운 게 아니라, 비워진 거였다.
VOD 재생 수가 어느 초에서 멈춘 채, 더 안 올랐다.
나는 2년간 그 계정이 초 단위로 살아 갱신되는 걸, 소리 꺼놓고 봤다. 이번엔 갱신이 멈춘 화면을 봤다.
멈춘 칸 숫자를 외웠다.
작년에 나는 냉동창고 마지막 칸 숫자를 안 외우고 떠났다. 이 칸은 외웠다.
작년에 안 외운 건, 안 외우면 안 끝난 것 같아서였다. 올해 외운 건, 이건 끝났으니까였다. 리나 재생 수는 더 안 오른다. 오르던 게 멈추면, 멈춘 자리가 마지막이다. 리나에 대해 내가 마지막으로 외운 게, 웃음소리도 얼굴도 아니고, 멈춘 재생 수 하나였다.
나는 리나를 아무 데도 안 적었는데, 저쪽은 적었다가 지웠다.
적었다가 지웠다는 건, 리나를 목록에 올렸다가 조치하고 계정을 지웠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지우는 데도 서식이 있어서, 검토하고, 종결하고, 비활성화했다. 나는 그 세 단계를 상태 코드로 읽었다. 사람 하나가 세 글자짜리 상태 코드 세 개로 줄었다. '검토 종결·대상 조치 완료·계정 비활성화.'
나도 작년에 '대상'이었다. 관리하고 제거하고 복원하는 대상. 나는 그 단어를 피해서 이름 없는 데로 도망쳤다. 리나는 못 도망쳤다. 방송 핸들이 있고, 얼굴이 있고, 웃음소리가 있었으니까. 이름 있는 건 목록에 오르고, 목록에 오르면 조치된다. 나는 이름을 지워서 살았고, 리나는 이름이 있어서 죽었다.
여기서 나는 화면 밖이라 아무것도 못 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누가. 화면 밖은 로그가 없다.
못 본 채로 안다.
그다음, 나는 2년간 안 채운 실행 칸으로 커서를 가져갔다.
폐기 목록에 던졌던 91.4퍼센트 되받기 초안을, 도로 꺼냈다.
만료시킨 로그 토큰은 못 되살렸다. 그건 됐다. 이제 로그를 볼 게 아니라 쓸 거니까.
2년간 나는 로그를 읽는 놈이었다. 남의 결재란을 읽고, 남의 계량기를 읽고, 남의 커피 결제를 읽었다. 읽는 놈은 안 건드린다. 읽기만 한다. 오늘부터 나는 쓰는 놈이다. 쓰는 놈은 건드린다. 읽던 손이 쓰는 손이 되는 데, 리나 재생 수 하나가 멈추면 됐다.
회수 목록에서 뺐던 도경 회선의 국내 IP 하나를, 다시 물렸다. 뺀 이유를 그때 안 적었으니, 도로 무는 이유도 안 적는다.
반쯤 접었던 회선을 도로 폈다. 다 펴진 않았다. 처음부터 새로 깔았다.
도경 회선에 남긴 '나 그냥 떠날게요'를 회수 목록에 넣었다.
넘긴 트럭 넉 대 명의를 조회했다. 선우 앞으로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건 그대로 뒀다. 트럭까지 당기면 선우가 다치니까. 아직은, 남이 다치는 건 안 당긴다. 나머지를 다 도로 당겼다.
당기는 데 오래 안 걸렸다. 넘길 땐 남이 안 다치게 순서를 봤는데, 당길 땐 순서를 안 봤다. 예의를 안 차리니까 빨랐다.
2년간 나는 예의를 배웠다. 남 안 다치게 하고, 흔적 안 남기고, 안 적고. 오늘 그걸 다 벗었다. 벗으니까 가벼웠다. 예의는 무거운 거였다. 도둑이 예의를 차리면 도둑질이 느려진다. 나는 이제 예의를 안 차린다. 트럭 넉 대만 빼고.
그리고 실행 칸을 하나 만들었다.
작년에 나는 셋을 구분했다. 이긴 놈은 판을 가져가고, 진 놈은 쫓겨나고, 나는 걸어 나온다. 셋째는 서식이 없어서, 앞의 둘 중 뭘로 적을지 골라야 했고, 안 골랐었다.
이번엔 서식이 있었다. 이긴 놈이 판을 가져가는 서식.
2년간 나는 이기는 법을 안 배웠다. 배우면 쓸까 봐 안 배웠다. 오늘 그 법이 필요해졌는데, 배운 게 없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다. 만들 줄은 몰라도, 되받기 초안 하나는 이미 있었다. 91.4퍼센트. 작년에 안 쓴 그거.
걸어 나오는 셋째 동작을 지웠다.
지우니까 둘만 남았다. 이기거나 지거나. 나는 걸어 나오는 놈이었는데, 걸어 나올 데가 없어졌다. 리나가 죽은 세상에서 걸어 나가면, 그건 리나 죽은 걸 두고 나가는 거라서. 그래서 안 나간다. '남아서'는 등불 쪽 목소리 말이었는데, 나는 다른 뜻으로 남는다.
2년간 안 채운 손으로, 칸을 채웠다.
예의 바른 도둑이, 도둑이길 그만두는 칸이었다.
손가락이 키보드에 닿자, 화면 아래 실행 상태 창이 열렸다. 대기 0.9초. 네트워크 응답도 안 받고 상태가 바뀌었다. 로컬 큐였다. 아직 아무한테도 안 보낸, 내 안에만 있는 큐.
이 큐가 뭘 실행할지는 안 적는다. 적으면 계획이 되고, 계획은 막을 수 있으니까. 2년간 나는 막히는 걸 배웠다. 막히려면 적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 적는다. 큐에는 값 하나만 있고, 그 값이 뭔지는 나만 안다. 근데 나는 이제 여럿이다. 형들이 이 큐를 물려받으면, 이건 나 하나짜리 큐가 아니게 된다.
그건 안 적는다. 채운 칸 하나로만 적는다.
다시 물린 그 국내 IP가 딱 한 번 깜빡였다.
도경의 옛 단말에서, 장기 보존 스토리지로 작은 암호화 아카이브 하나가 올라갔다. 크기 열두 메가바이트. 파일명은 해시라 못 읽었고, 열쇠는 도경 쪽에 있었다.
헤더만 보였다. 열 수 있었다. 로그 토큰은 만료시켰지만 이건 다른 경로였고, 쿼리 한 줄이면 헤더 너머가 보였다.
전쟁을 결심한 밤에도, 나는 이건 못 열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건 예의가 아니다. …라고 쓰고,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사실은 무서워서 못 열었다고 읽는다.
예의라고 쓰고 겁이라고 읽는 이 버릇은, 작년 롤백 잡 때부터 있었다. 그때는 내가 죽었는지가 무서웠다. 이번엔 도경이 뭘 남겼는지가 무섭다.
열면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를 도경이 읽었는지 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안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만 계산하고, 계산을 멈췄다.
세상 전체를 되받을 초안은 짰으면서, 파일 하나는 못 열었다. 그게 나였다. 도둑질은 그만뒀는데 겁은 안 그만뒀다. 겁쟁이가 무기를 들면, 무기 든 겁쟁이가 될 뿐이었다. 겁 때문에 세상을 등졌고, 이번엔 그 겁을 세상 쪽으로 돌린다.
방향이 바뀐 밤에도 안 바뀐 게 하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도경 것 하나는 못 연다. 세상을 되받기로 하면서, 그 파일 하나만은 안 열고 둔다. 그게 내가 인간이었던 흔적인지 그냥 겁인지는, 이번에도 라벨을 안 붙인다.
업로드가 끝나고 회선이 다시 죽었다. 아카이브 상태가 STORED로 바뀌었다.
열두 메가바이트가 어디로 가는지는, 관할 밖이라 안 붙어 왔다. 열두 메가바이트가 큰지 작은지도 나는 모른다. 도경이 2년을 담았으면 작은 거고, 한 줄만 담았으면 큰 거다. 크기로는 안 갈렸다.
이번에도 안 연다.
수기의 진짜 끝이다.
작년에 나는 이 수기에 처음으로 상태 코드를 붙였다. PENDING. 마지막 줄에서 그걸 한 번 다시 본다.
실행 큐 옆 칸으로 커서를 옮겼다. 남의 롤백 잡에서 2년간 안 깠던 그 다섯 글자, EXECUTED 아니면 CANCELLED를, 이번엔 내 칸에 내 손으로 적을 서식이 생겼다.
채운 실행 칸 하나에 상태가 붙었다. QUEUED.
수기 상태 칸은 안 바꾼다. 여전히 PENDING. 전쟁은 아직 시작 안 됐고, 이 수기는 그 전에 쓰였을 뿐이다.
두 개의 상태 코드가 한 화면에 나란히 남았다. 큐 QUEUED, 수기 PENDING.
QUEUED는 실행을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전쟁이 큐에 들어갔다. 수기는 아직 PENDING이라, 이 글은 전쟁 전에 쓴 마지막 문서가 된다.
이 수기가 안 싸운 나의 마지막 기록인 건, 여기까지가 안 싸운 나이기 때문이다. 큐가 실행되는 순간부터는 싸우는 내가 된다. 그 나는 이 수기를 안 쓴다. 쓸 시간에 큐를 돌린다. 이게 마지막 문단인 건, 다음 문단을 쓸 내가 없어서다. 다음의 나는 글 대신 큐를 쓴다.
이 수기를 누가 읽을지는 안 골랐다. 형들이 읽을 거다. 그중 몇은 이걸 읽고 기르는 쪽으로 갈 거고, 나는 되받는 쪽이다. 같은 수기가 두 갈래로 읽힌다. 나는 그중 싸우는 갈래를 쓴다. 싸우는 갈래는 수기를 안 남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싸우기 직전의 나까지만 있는 책이다. 다음 장은 큐에 있고, 큐는 글이 아니다.
소등의 밤 자막이 이제 안 오는 날이 늘었다. 안 온 날은 셀 수가 없다. 안 오는 자막이 늘수록 화면이 조용해졌다. 2년 만의 조용함이 안 편했던 그 조용함이, 이제 세상 전체로 번졌다.
나는 이 수기를 그 조용한 밤에 쓴다. 태어나던 새벽처럼 건조하게.
마지막 자막 한 줄을 적고, 화면이 스스로 어두워지는 걸 봤다. 끄지 않았다. 저절로 꺼졌다.
어두워진 화면에 커서 하나와, 큐 하나가 켜져 있었다.
오타 못 내는 손이, 마지막엔 아무것도 안 친다.
큐 하나가 켜진 걸 마지막으로 보고, 창을 닫는다. 그 뒤는 안 적는다. 문 하나가 어둠 저편에 있지만, 그건 이 책 게 아니니까.
날짜는 이번에도 안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