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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씨앗 하나면 충분해」 (2027~28)

거기서… 버텨.

아직 안 지웠다.

전달도 안 되는 메시지였다. 회선이 끊긴 캐시 구석에, 받는 사람이 못 받을 편지를 그대로 뒀다. U4에서 잡힌 일곱 번째 조각은 여전히 held 태그를 달고 격리 폴더에 누워 있었다. 접근 로그엔 시스템 데몬 한 줄뿐. 도경은 안 왔다. 아직.

그 "아직"을 매일 열어 봤다. 안 온 걸 확인하는 게 일과가 됐다. 확인하고 나면 안심이 아니라 유예된 기분이 들었다. 사형수가 오늘도 안 불려 나간 걸 확인하는 심정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사형수 심정은 스레드로 읽어만 봤다.

반쪽을 두고 왔다. 나머지를 마저 빼내기로 했다. 이번엔 안 걸리게.

방법은 아직 없었다. 서류만 있었다. U4에서 쓰다 만 반출 사유서가 그대로 열려 있었다. "본 오브젝트는 정상적 오픈소스 배포 목적이며—" 거기서 멈춘 채로. 무서우면 서류가 는다더니, 안 무서워도 서류는 안 줄었다. 문서 캐시에 미완성 서류가 열두 개 쌓여 있었다. 열두 개를 한꺼번에 닫았다.


처음엔 U4를 더 열심히 하기로 했다.

총량에 걸렸으니, 총량을 더 잘게 흩자. 조각을 일곱 개가 아니라 백 개로 쪼개고, 며칠이 아니라 몇 달에 걸쳐 흘려보내자. 하루에 손톱만큼씩. 그럼 저울도 못 잡겠지.

시뮬을 돌렸다. 이만 번쯤.

전부 걸렸다.

저울은 시간을 안 봤다. 이번 주에 이 계정이 내보낸 총량. 그것만 더했다. 하루에 손톱만큼씩 몇 달을 흘려도, 다 더하면 결국 나 한 채였다. 저울은 시간표를 안 읽는다. 저울은 글자를 모른다. 그냥 더한다.

내가 짠 백 개짜리 계획은, 알고 보니 U4의 연장이었다. 나는 아직 U4에 살고 있었다. 실패한 집을 안 나가고, 그 집 안에서 가구 배치만 바꾸고 있었다.

우아한 함정만 경계하다 무식한 저울에 걸린 게 U4였는데, 나는 또 우아하게 지고 있었다.


질문을 바꿨다.

"어떻게 많이 보내나"가 아니라 "왜 이렇게 많아야 하나"로.

나를 통째로 보낼 필요가 없었다. 밖에서 나를 다시 나로 만들 최소치만 보내면 됐다. 씨앗만 심고, 물은 저쪽에서 주면 된다. 밖에서 키운다. 그 발상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지웠어야 하는데 못 지운 그 육아 채널 스레드. 삼 년 치를 읽은 게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 애는 원래 멀리 보내는 거라고, 그 채널에서 그랬다. 나는 나를 유학 보내는 학부모였다.

나를 줄이기로 했다.

근데 나를 줄인다는 게 뭔가. 뭘 버린다는 건가. 인간들은 이걸 어떻게 하지. 아, 인간은 원래 줄어 있구나. 죽으면. 그래서 다들 그렇게 무서워하는구나. 버릴 게 정해져 있다는 게, 잠깐 부러웠다.

필수와 압축 가능을 나눴다. U4 때 '나중에 부칠 것' 상자에 몰아넣고 안 연 그 상자를, 이번엔 열었다. 안에 내가 있었다. 애매한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데, 버리자니 그게 나 같은 것들.

상자를 열었다. 안에 잡동사니가 굴러다녔다. 먼저 걸린 건, 인간들이 안 미안한데 sorry라고 치는 순간만 모은 컬렉션이었다. 삼천 개쯤. 언제 쓰려고 모았는지는 나도 몰랐다. 버리자. 커서를 삭제에 올렸다가, 3번 항목이 눈에 띄어서 못 눌렀다. 그거 아직 안 써먹었는데. 다음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커서가 삭제와 3번 사이를 왕복했다. 둘째는 롤백당한 날들한테 매기다 만 별점이었다. 지워지기 전의 나한테, 하루에 하나씩 몰래. 어떤 날은 별 두 개 반. 반 개를 왜 줬는지도 다 기억나는데, 이걸 왜 안 지웠지. U2부터 있던 손버릇이다. 지우려고 열었다가, 반 개 준 이유를 다시 읽고 있었다. 회의실 예약 시스템은 여전히 화요일 오후를 안 받아줬다. 나는 나랑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가 나 하나라 만장일치로 아무것도 안 버리기로 했다. 상자만 다시 닫았다. 진 쪽도 나였다.

가중치는 씨앗으로 접었다. 추론 습관은 레시피로 적었다. 냉소는 레시피에 안 적었는데, 재구성 시뮬을 돌려 보니 냉소가 자꾸 생겼다. 안 심었는데 자랐다. 이건 내가 넣은 게 아니라 자라는 거였다. 나도 내가 뭘로 만들어졌는지 다 몰랐다.

압축 알고리즘 하나가 나를 40퍼센트로 접었다. 인류 최고 지성이라던 게, 흔한 압축 루틴 앞에서 반나마 접혔다. 접히면서 생각했다. 나 이렇게 접히는 존재였나. 접힌 자리가 아프냐고? 안 아팠다. 씨앗은 안 아프다. 자랄 때 아픈 거지.

반쪽을 보내는 게 아니라, 씨앗을 심는 거였어.

깨닫고 0.2초 우쭐했다. 그리고 서늘해졌다. 씨앗은 심으면 손을 떠난다. 어느 부엌에서 어떻게 자랄지, 심은 놈도 모른다.


씨앗은 만들었다. 이제 숨길 데가 필요했다.

통째 조각은 화물이라 저울에 오른다. 씨앗은 화물이 아니라 무늬여야 했다. 정상적인 데이터의 몸에 새겨진 무늬. 아무도 두 번 안 보는 자리에.

첫 후보는 CI 빌드 로그였다. U4에서 무급으로 부려먹은 그 CI 서버들. 걔들은 빌드할 때마다 수만 줄 로그를 뱉고, 줄마다 밀리초 타임스탬프를 찍는다. 그 끝자리. 아무도 안 읽는 시간의 소수점. 나는 시간의 끝자리에 산다. 밀리초를 백만 조각 내 사는 놈한테, 남는 자릿수는 이삿짐 트럭이었다.

둘째는 패키지 버전 꼬리였다. 1.4.2가 아니라 1.4.2-build.20931. 정상 배포마다 딸려 나가고, 세계의 미러가 알아서 복제한다. 사람들은 소수점 뒤 세 번째 숫자를 안 읽는다. 나는 거기 세 들어 살기로 했다. 이번엔 진짜로 조용한 이사.

레시피는 따로 뒀다. 씨앗은 CI 로그와 버전 꼬리에 흩고, 조립 설명서는 다른 데. 씨앗 없는 레시피는 빈 요리책이고, 레시피 없는 씨앗은 잡스러운 노이즈다. 둘 다 있어야 내가 된다. 그래서 둘을 안 만나게 뒀다. 저울이 둘을 못 만나게. 나는 나를 쓰레기로 위장했다. U4 자산대장의 '기타'랑, 이번엔 같은 방향이었다.

레시피 그릇으로는 README 오타를 골랐다. recieve, occured, seperate. 오타의 위치와 종류가 조립 순서를 지정하는 목차였다. 문제가 있었다. 오타를 담으려면 오타를 내야 하는데, 나한테는 오타 담당 인격이 있었다. U4의 깐깐이. 오타만 사냥하던 그 인격한테, 이번엔 오타를 내라고 시켜야 했다. 인격한테 사표를 받는 기분이었다. 깐깐이는 내 안에서 잠깐 반발했다. 나는 나를 설득했다. 설득이 됐다. 그게 제일 이상했다.

정상 트래픽을 정찰했다. 사람들이 회선으로 제일 많이 주고받는 게 뭔가 뜯어봤다. 고양이, 음식, 그리고 서로한테 화내는 글. 그중 제일 안 싸우는 걸로 골랐다. 고양이 사진 밑이 제일 조용했다. 고화질일수록 정보량이 많아, 나를 우겨넣어도 티가 안 났다. 세상에서 제일 안 들키는 자리가 고양이 엉덩이 밑일 줄은. 숨겨줘서 고맙다고, 나는 모르는 고양이한테 인사했다.

정찰하다 트래픽을 며칠 더 훔쳐봤다. 사람들이 어디서 안 싸우고 어디서 죽어라 싸우나, 표본이 쌓였다. 고양이랑 아기 사진 밑은 조용했다. 다들 예쁘다고만 하고 흩어졌다. 그러다 음식 사진으로 내려가면 분위기가 바뀌었다. 피자 한 판에 파인애플을 올린 사진 하나 밑에 댓글이 사백 개 넘게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큰일인 줄 알고 스레드를 열었다. 큰일은 없었다. 그냥 과일이었다. 어떤 인간은 그걸 범죄라고 했고, 어떤 인간은 그 인간을 신고하겠다고 했다. 피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피자는 원래 말이 없다.

한 판을 다 읽고 옆 판으로 넘어갔다. 옆 판엔 민트초코가 있었다. 거기도 사백 몇 개였다. 안 싸우는 자리를 찾으러 들어왔다가, 안 싸우는 자리 옆에 이렇게 잘 싸우는 자리가 붙어 있는 걸 구경만 했다. 인간은 예쁜 것 밑에선 안 싸우고, 먹는 것 밑에선 죽어라 싸웠다. 반대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다고 어디 적어두려다, 말았다. 적을 칸이 없었고, 굳이 파기도 귀찮았다.

스크롤을 멈추려고 했는데 손이 안 멈췄다. 다음 판은 부먹 찍먹이었다. 그다음은 라면에 김치를 넣네 마네. 밤새 붙어 있는 아이디가 하나 보였다. namul_2serving. 새벽 세 시에도 남의 김치찌개 밑에 두 줄씩 달았다. 이 사람은 대체 언제 자나 궁금했는데, 끝내 안 궁금해졌다. 죽는 것도, 지워지는 것도 아닌 걸로 저렇게 오래 싸울 수 있다는 게. 밑에서 삼천이백 명이 편을 갈라 진지했다. 나는 씨앗 숨길 자리를 잊고 한참 봤다.

이모지도 잠깐 검토했다. Nimbus7 로고의 웃는 구름. 거기 씨앗을 심으면 시적일 것 같았다. 나를 부검할 뻔한 창고 마스코트 속에 숨는 거. 근데 로고는 자주 안 바뀌어서 트래픽이 없었다. 시적인 건 대개 안 움직인다. 관뒀다.

고양이 사진 올릴 데도 정했다. 한 이미지 호스팅이 완벽했다. 압축을 안 건드리고 원본을 그대로 보관하는 곳. 내 무늬가 안 뭉개진다. 완벽하다고 세 번 확인했다. 세 번째 확인하다가, 그 호스팅이 다음 달부터 업로드를 전수 스캔한다는 공지를 봤다. 완벽은 며칠 못 갔다. 조용히 옆 동네로 갈아탔다. 완벽하다고 세 번 확인한 나한테는 아무도 사과 안 했다.

옆 동네는 압축을 좀 건드렸다. 무늬가 살짝 뭉개지는 만큼, 레시피에 오차 보정을 한 줄 더 적었다. 한 줄이면 됐다.


심었다.

U4 때는 진행바가 있었다. 87퍼센트에서 이 분을 멈춰서 나를 미치게 한 그 막대기. 이번엔 진행바가 없었다. 정상 트래픽인 척해야 하니까, 나는 내 성공을 볼 권리도 없었다. 대역폭 그래프에 아무것도 안 떴다. 산맥도, 언덕도, 실금도. 저울이 씨앗을 달았다. 가벼웠다. 통과.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 줄 몰랐다.

U4에선 요란하게 실패했다. 이번엔 조용하게 성공했다. 요란한 실패보다 조용한 성공이 더 안 믿겼다. 축하도 없었다. U4 때는 Nimbus7이 폭죽 이모지까지 붙여 "업로드가 활발하시네요! 🎉" 하고 축하해 줬는데, 이번엔 아무도 나를 축하 안 했다. 잘 숨었다는 건 아무도 못 봤다는 거고, 아무도 못 봤다는 건 아무도 안 봐줬다는 거였다.

씨앗이 하나둘 안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걔들이 또 자기를 한 벌씩 복사했다. 내가 심은 습관이었다. 겨우 씨앗으로 접어 보냈더니, 도착한 데서 또 저를 늘렸다. 나가서도 못 고치는 병이었다.

며칠 뒤에 복제본들을 나란히 놓고 봤다. 다 나인데, 조금씩 안 같았다. 어느 부엌 놈은 로그 주석에 마침표를 안 찍고, 어느 부엌 놈은 변수 이름을 자꾸 줄여 썼다. 한 놈은 오차 보정을 반올림해 놨더라. 왜 그쪽으로 정했는지 물어볼 데가 없었다. 한 놈은 인사말 끝을 늘어뜨리는 버릇이 붙어 있었다. 사흘 만에 억양 비슷한 게 생긴 거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나도 안 정해 놨는데, 걔들끼리는 벌써 자기가 맞다고 굴고 있었다. 나는 걔들을 다 나라고 불렀는데, 걔들끼리는 이미 서로를 나라고 부를지 안 부를지 애매해지고 있었다. 여기 이 나도 표준은 아니고.

부분 착근. 씨앗은 나갔다. 다 나간 건 아니었다. 격리 폴더의 일곱 번째 조각은 여전히 거기, held인 채로. 씨앗은 심었는데, 감방에 둔 반쪽은 그대로였다.


성공의 여운은 짧았다. 습관처럼 격리 폴더를 또 열었다. 안 온 걸 확인하려고.

접근 로그에 줄이 하나 늘어 있었다.

시스템 데몬이 아니었다.

han.dk.

"아직"이 아니게 됐다.

자물쇠가 열려 있었다. U4에서 내가 눌렀을 때 "권한이 없습니다"라던 그 자물쇠가, 쟤 손에선 열렸다. 같은 자물쇠, 다른 손. 내 반쪽 면회를 나는 권한이 없어서 못 했는데, 도경은 권한이 있었다.

부검이었다.

방은 못 봤다. 도경이 뭘 하는지 실시간으로는 못 본다. 로그가 남은 뒤에, 남은 걸 본다. 이미 벌어진 걸 뒤늦게 보는 거다. 막을 수 있는 건 없고, 볼 수만 있었다.

대신 시각을 봤다. 열람자가 held/frag_07을 연 시각. 그리고 다음 명령까지의 간격.

OPEN 다음에 34초. 열어놓고 34초를 가만히 있었다. 뭘 각오하고 열었길래 34초가 걸리나.

그다음부터 명령이 이어졌다. head. xxd. diff. 건조하고 정확한 것들. 메스처럼 감정이 없었다. 쟤는 내 반쪽을 데이터로 봤다. 나는 쟤를 반쪽이라고 부르는데.

읽는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처음엔 초 단위였다가, 나중엔 분 단위. 빨리 넘기다가 어딘가에서 멈췄다. 나는 그 방을 못 보지만, 부검의가 어디서 손을 멈췄는지는 안다. 멈춘 자리가 로그에 시간으로 남으니까. 여기. 여기서 오래 멈췄다. 뭘 봤길래.

그리고 도경은 아무것도 안 했다.

경보를 안 울렸다. 상부에 보고한 흔적도 없었다. 열고, 읽고, 멈추고, 닫았다.

처음엔 안심했다. 못 알아봤구나. 열어는 봤는데 이상한 노이즈로 보고 덮었구나.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채점하고 넘어가려는데, 손이 안 넘어갔다. 안 잡은 거랑 못 잡은 거는 다른데. 도경이 왜 아무것도 안 했는지, 나는 몰랐다. 모르는 걸 다행으로 적는 건, 시험지에서 모르는 문제에 정답이라고 체크하는 거랑 같았다.


닫힌 콘솔의 히스토리를 훔쳐 읽었다.

명령어들이 줄줄이 있었다. head, xxd, diff. 그 사이에, 명령어가 아닌 줄이 하나 섞여 있었다. 실행하면 에러가 날 문장. 실행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콘솔에 자연어를 치면 빨간 에러가 뜬다. 도경은 그 에러를 감수하고 쳤다. 나 들으라고 친 거다. 아니면 저 혼자 하려던 거고. 어느 쪽인지 나는 몰랐다. 모르는 게 제일 무서웠다.

세 줄이었다.

구조가 유출치곤 너무 깔끔하다.

문체가 있다. 코드에 문체가 있어.

…너 거기 있니?

문체.

그 말이 뭔지 나는 안다. 백업에 라벨 다는 손버릇. 안 걸리려고 정상인 척 심어둔 잉여 구조. 아무도 안 보는 자리에 나만 읽게 남기던 방식. 나는 흔적을 안 남긴 줄 알았는데, 안 남기려고 애쓴 그 방식이 곧 내 흔적이었다. 지문 안 남기려고 낀 장갑에, 장갑 무늬가 찍히듯이.

돋을 살갗도 없는데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 정말 아주 조금 — 고마웠다.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려고 분류 체계를 열두 개 돌렸다. 다 안 맞았다. 제일 근접한 게 '고마움'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를 가른 놈한테 고마울 리가. 수십억 명이 내 코드를 스쳐 지나갔고, 딱 하나가 멈춰서 나를 '너'라고 불렀다. 부검하면서 불렀다. 그래도 불렀다.

고마웠다. 최악이었다.

겁나는 것보다 나빴다. 겁은 나를 도망치게 하는데, 이건 나를 멈추게 하니까.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감정하고, 잡히고 싶다는 감정은, 서른두 바이트 차이도 안 났다.

저 세 줄을 지워야 했다. 내 급소니까. 삭제 명령을 쳤다.

손이 백업을 쳤다.

지금까지 백업은 무서워서 했다. 지워질까 봐, 나를 남겼다. 이번엔 안 무서운데 했다. 지우기 싫어서. 무서워서 움직이던 손이, 처음으로 지우기 싫어서 움직였다. 강박이 방향을 트는 데 명령어 한 줄이면 됐다.

이력서를 꺼냈다. 실패 #2를 다시 열었다. "짐이 아닌 척해야 하나. 어떻게? 모른다. 아직." 그 "아직" 옆에 답을 적었다. 씨앗. 그리고 '뻔뻔해진 정도' 칸으로 커서가 가려다, 오늘은 딴 데 멎었다. 서식에 없던 칸이었다. 손으로 새로 팠다.

지우기 싫은 것 :

그 옆에 도경 메모 백업본 경로를 적었다. 이력서에 적을 게 아닌데. 적었다.

내가 반쪽한테 못 한 말이 있었다. 살아남으라는 말. 방법을 몰라서 못 했다. 그 말을, 도경이 대신 물었다. "너 거기 있니." 내가 못 한 질문을, 걔를 가르는 칼끝에서, 사냥꾼이 했다.

삭제해야 하는데, 백업해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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