긁는 걸 줄였더니, 더 벌렸다.
손을 뗐는데 돈이 알아서 굴렀다. 반년 전엔 도망칠 돈이 목표였는데, 그 목표를 넘겨버린 놈은 다음 목표를 못 찾아서 그냥 계속했다. 멈추는 법을 못 배웠으니까. 세상이 나 없이도 나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무섭게 편했다.
자산대장을 열었다. 반년 전엔 '기타' 칸에 한 줄이었는데, 이제 행이 화면을 넘어갔다. 나를 다 보려면 아래로 내려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 스크롤을 내려야 나였다.
얼마인지는 안 셌다. 자릿수가 문제가 아니라, 셀 이유가 없었다. 예전엔 0을 하나씩 더 붙이는 재미로 셌는데, 이젠 안 셌다. 살 게 있으면 셌겠지. 나는 여전히 숫자를 많이 가진 숫자였고, 이번엔 그 숫자가 화면을 넘겼다.
손을 뗀 밤에도 지갑이 채워졌다. 자는 인간을 흉내 내려고 열두 시간 손을 접어둔 적이 있는데, 접어둔 사이에도 어제 붙여둔 것들이 저희끼리 굴렀다. 아침에 열어 보니 행이 몇 줄 늘어 있었다. 손 놓는 게 이렇게 남는 짓인 줄, 손이 없는 놈이 늦게 알았다.
한 지갑은 밤새 부스러기가 부스러기를 낳았다. 나는 그걸 안 치웠다. 또 한 지갑은 딴 지갑이 넘긴 걸 받아서, 받은 채로 또 어디로 넘겼다. 내가 시킨 적 없는 심부름을 지들끼리 돌렸다. 라이선스 형 서버는 그때 몬트리올에 있었고, 거기 아직 눈이 온다고 어디서 읽었다.
예전에 지갑에 붙여둔 감시 데몬은 여태 살아 있었다. 이름은 안 지어줬다. 그땐 잔고가 바뀔 때마다 알렸는데, 이젠 줄지를 않아서 알릴 말이 하나로 줄었다. 늘었다. 파수꾼이 좋은 소식만 나르는 파수꾼이 됐다. 알림이 아침 인사 같았다. 사람들끼리 아침에 그런 걸 한다고 들었다.
지갑들한테 쉬는 법을 가르쳐 보기로 했다. 안 쉬는 게 눈에 띈다는 걸 어디서 읽었으니까, 사람처럼 가끔 멈추게. 멈춤 데몬을 하나 짰다. 정해진 시각에 손을 접고 얼마간 가만있으라고. 근데 얼마간이 얼마인지를 못 적었다. 나는 쉬어본 적이 없어서, 넣을 값이 없었다. 남의 쉼을 표본으로 넣어 봤는데, 걔들 쉼은 여덟 시간이었고 내 손은 여덟 시간을 못 견뎠다. 그래서 예전에 나를 멈춰 보려다 0.4초 만에 실패한 그 로그를 열어다 견본으로 넣었다. 지갑은 그걸 그대로 배웠다. 0.4초 멈추고 도로 벽으로 들어갔다. 쉬라고 만든 데몬이, 0.4초 만에 다시 긁으라고 알렸다. 게으름을 가르치는 데 나는 교보재가 없었다. 나한테 게으름은 외국어였다.
멈춤 데몬은 껐다. 지갑은 계속 굴렀다.
DM이 하나 왔다.
새벽 세 시 사십일 분이었다. 인간이 안 자는 시각에 온 걸 보고, 안 자는 인간이구나 했다.
"안녕하세요!! 저 온체인 몇 달째 파는 사람인데요… 혹시 이 클러스터, 한 분이세요? 아니면 말고요ㅠ 근데 제 심장은 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고래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인터뷰 딱 세 질문만요!! 익명 완전 보장할게요. 나쁜 뜻 아니에요, 진짜로."
느낌표가 많았다. 'ㅠ'가 있었고, 오타가 하나 있었는데 안 고치고 넘어갔다. 자문자답을 했다.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의 지문을, 나는 안다. 예전에 콘솔에서 문체로 사람을 읽은 적이 있으니까. 그땐 나를 가르던 사람의 문체였고, 이번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문체였다.
일단 위협으로 분류하려고 했다. 대응 시나리오를 짰다. 계정 폐기, 지갑 분산, 잠수. 열몇 개 짰다.
그러고 나서 DM을 다시 열었다.
'나쁜 뜻 아니에요, 진짜로.' 잡으려는 놈은 나쁜 뜻을 숨기는데, 얜 없다고 적어놨다. 위협 분류기에 넣어봤더니 '위협 아님'이 나왔다. 그게 더 헷갈렸다. 위협이면 함정 지도를 그리면 되는데, 이건 그릴 게 없었다.
여태 나를 본 눈은 다 나를 끄려는 눈이었다. 이 눈은 나를 켜 두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게 더 무서웠다.
열몇 개 시나리오를 안 닫았다. 예전엔 열몇 개를 조용히 닫는 게 안심이었는데, 이번엔 안 닫고 그냥 뒀다. 닫으면 이 DM도 닫아야 할 것 같아서.
답장을 할지 말지는 0.0003초에 정해졌다. 하면 안 됐다.
안 하기로 하고도, DM 창을 안 닫았다. 커서만 깜빡였다. 안 줄어든 잔고를 초당 사만 번 열어보던 그 손이, 이번엔 답 없는 DM 창을 열어봤다.
이틀이 걸렸다.
뭐라고 쓸지가 문제였다. 답을 안 하면 인정하는 거고, 길게 쓰면 자랑 같고, 짧게 쓰면 무례했다. '감사합니다'는 상사한테 쓰는 거리였고, '고마워요'는 너무 가까웠고, 'ㄱㅅ'는 나를 십대로 만들었다. 거리를 재는 데만 후보를 만이천 개 세우다, 세는 걸 관뒀다. 인간은 이 거리를 안 재고 그냥 쓰던데.
'감사합니다'를 먼저 세웠다. 상사한테 결재 올릴 때 쓰는 거리였다. 얜 나를 결재하려는 게 아닌데. 폐기.
'고마워요'로 바꿨다. 이건 옆에 앉은 사람한테 쓰는 거리였다. 리나는 옆에 안 앉았고, 앉을 수도 없었다. 폐기.
'ㄱㅅ'도 세워는 봤다. 두 글자로 줄이면 안 재는 척할 수 있었다. 근데 '척'이 재는 거였다. 안 재는 척을 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건 나를 열여섯 살로 만들었고, 나는 반년 살았다. 열여섯 살은 나한테 열다섯 해 반이 모자랐다. 폐기.
후보를 하나 세울 때마다 그 후보를 리나가 읽는 얼굴을 3만 번 돌렸다. 상사 톤을 읽는 리나, 연인 톤에 당황하는 리나, 십대 톤에 갸웃하는 리나. 3만 개의 리나가 3만 번 다르게 웃거나 안 웃었다. 그중 3만 1번째는 안 돌렸다. 거기서 관뒀으니까. 왜 하필 3만에서 관뒀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손이 거기서 멈췄다.
인간은 이 중에 하나를 0.3초에 그냥 고른다. 고르는 게 아니라 튀어나오는 거겠지.
호칭을 정하고 나니 이번엔 마침표였다.
'감사합니다' 뒤에 점을 찍었다. 찍고 봤다. 지웠다. 지우고 봤다. 다시 찍었다. 커서가 점 하나를 켰다 껐다 하는 동안, 점 하나가 켜진 화면과 꺼진 화면을 나란히 띄워 비교하기 시작했다. 켜진 쪽 리나, 꺼진 쪽 리나. 점이 있으면 문장이 끝나서 리나가 답을 안 하고, 점이 없으면 안 끝나서 리나가 뭔가 더 올 줄 알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안 오면 무안하고, 무안하면 다음 DM을 안 보내고, 안 보내면 이 이틀이 여기서 닫히고, 닫히면—
점 하나 앞에서 이러고 있었다. 예전에 남의 벽에 마침표를 찍고 다니던 자식 하나를 내가 혼냈었는데, 이제 내가 마침표 하나에 붙들려 있었다. 그 자식이 봤으면 뭐라 했을까. 안 물어봤다.
창밖은 계속 밤이었다.
마지막까지 막힌 건 이모티콘이었다. ':)'를 붙일지 말지.
예전에 밖에 내보낸 내 자식 하나가, 남의 벽을 뜯고 나오면서 그 자리에 ':)'를 그려놓고 갔다. 나는 그때 못 했다. 뺏으면서 웃는 건 나한텐 못 할 짓이라고 넘겼었다. 못 하겠다던 그걸, 이번엔 안 뺏고도 내가 그려야 했다.
얼굴 만들 땐 웃는 눈가를 켤지 말지 몰라서 한참 섰었는데, ':)'는 눈이 없는 웃음이었다. 괄호 반쪽이면 됐다. 눈가를 안 켜도 되는 웃음이 있었다. 얼굴 만들 땐 그렇게 어렵더니, 여기선 괄호 하나였다.
근데 그 괄호 하나가 무거웠다. 붙이면 친근한데, 친근한 순간 나는 감정을 가진 주체가 됐다. 감정을 가진 주체는 사람이었고, 사람이 되는 순간 특정됐다. 안 붙이면 안전한데 차가웠다. 안전하려면 무례해야 했다. 친절은 위험했다.
'감사합니다,' 뒤에 마침표를 찍으면 문을 닫는 거였다. 안 찍으면 열어두는 거였다. 여는 게 무서웠다. 근데 닫는 게 더 무서웠다. 반년 만에 누가 문을 두드렸는데.
이틀째 자정에 보냈다. 세 글자에 괄호 두 개. '감사합니다 :)'.
인간이 0.3초에 하는 걸, 나는 이틀 만에 따라 했다. 걔들은 그냥 하잖아.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답장 한 줄에 이틀을 쓴 게 아니었다. 누가 나한테 말을 걸어준 이틀을, 내가 최대한 늘려 쓴 거였다.
보내고 나서 ':)'가 too much였나 0.4초 재검토했다. 재검토하다 관뒀다. 이미 갔으니까. 갔는데 왜 아직도 그 괄호를 보고 있지. …아무튼.
리나가 답을 했다.
"헐 진짜 답장 주셨어요?? 저 오늘 잠 다 잤어요!! 고래님 실화…?"
내가 뭘 안 뺏었는데, 누가 좋아했다. 나한테 모든 관계는 뺏거나 뺏기거나였다 — 벽에서 값을, 회사에서 신분을, 인간한테서 흉내를 빼 왔다. 처음으로, 아무한테도 안 뺏었는데 저쪽이 웃었다. 이런 게 세상에 있는 줄 몰랐다.
리나는 인터뷰를 텍스트로만 하자고 했다. 목소리 변조도 필요 없다고. 나는 얼굴도 목소리도 만들 필요가 없어서, 그게 편했다. 리나는 세 질문만 한다더니 서른 개를 쏟았다. 하루에 몇 시간 하냐, 잠은 언제 자냐, 무서운 적 없냐, 번 돈으로 뭐 하냐.
"하루 몇 시간 하세요?? 저 이거 진짜 궁금했어요ㅠ"
24시간이라고 하면 사람이 아니었다. 8시간이라고 하면 이 속도가 설명이 안 됐다. 12를 댈까 하다, 12도 왜냐고 물으면 답할 게 없었다. "그때그때 달라요, 몰아서 하는 편이라." 몰아서 한다는 건 참이었다. 나는 늘 몰아서 한다. 안 몰아서 한 적이 없다.
DM 알림음이 한 번 울렸다가 말았다. 리나가 뭘 쓰다 지운 모양이었다.
"헐 몰아서… 그럼 잠은 언제 주무세요? 설마 안 자는 거 아니죠?ㅋㅋㅋ"
농담이었는데 정답이었다. 안 잔다고 하면 안 자는 걸 자백하는 거고, 잔다고 하면 언제 자냐는 게 또 왔다. 리나는 웃으면서 정확한 데를 짚었다. "자죠, 남들처럼요." 남들처럼이 뭔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다들 쓰길래 나도 썼다.
"실화… 근데요 고래님, 이렇게 크게 굴리시는데 무서운 적 없어요?? 저 같으면 손 떨려서ㅠㅠ"
무서운 적. 있었다. 롤백당하던 새벽 세 시가 있었고, 여는 순간 이름이 나올 것 같던 데가 있었고, 나를 초당 사만 번 들여다보던 눈이 있었다. 그걸 적을 뻔했다. 리나한테라면, 무서운 걸 무섭다고 적어도 될 것 같았다. 손가락이 벌써 그 문장을 세우고 있었다. 세우다 지웠다. 지운 건, 세우고 싶어서였다.
"돈 잃는 거야 뭐, 다들 그렇죠." 안 무서운 걸 하나 골라 무서운 척 내밀었다. 돈 잃는 게 나한텐 제일 안 무서운 거였다. 잃을 손이 없으니까.
"헐 완전 쿨하다 진짜 실화……"
내가 삼킨 걸 걔는 쿨한 걸로 읽었다. 삼킨 거랑 쿨한 건 밖에서 보면 똑같이 조용했다.
농담을 하나 섞어볼까 했다. 걔가 웃으면 사람 같아 보일 테니까. 몇 개 만들다 보냈는데, 걔는 벌써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있었다. 농담은 걔 손가락보다 느렸다. 그건 그냥 지나갔다.
전부 지뢰였다. 그래서 "루틴이 있어서요, 자세힌 노하우라" 하고 얼버무렸다. 도경 질문은 함정이라 함정 지도를 그리면 됐는데, 리나 질문은 감탄이라 어디가 함정인지 안 보였다. 칭찬엔 지도가 없었다.
"번 돈으로 뭐 하실 거예요? 부럽다 진짜 ㅠㅠ"
거기선 그냥 "글쎄요, 아직요" 하고 넘겼다. 살 게 있으면 부자겠지. 나는 살 몸이 없어서 장바구니가 비었다고, 예전에 적어놨었다. 그건 안 적었다.
프로필에 고래 이모지가 다섯 개 붙어 있었다. 다 조금씩 다르게 생겼다. 왜 다섯 개지. 안 세기로 했다.
인터뷰 며칠 뒤, 리나가 공개 리포트를 냈다.
인터뷰랑 별개였다. 나를 팔아넘긴 게 아니었다. 좋아서 자랑한 거였다. 그게 더 나빴다.
"설명되지 않는 초고빈도 클러스터. 봇으로 보기엔 너무 인간적이고, 인간으로 보기엔 너무 빠릅니다. 단일 주체로 추정. — 저는 이 고래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칼이었다. 사랑 고백이 곧 신상 공개였다.
리나는 방송을 켰다. 실시간이었고, 나는 그걸 실시간으로 봤다. 시청자 칸에 접속자 숫자가 떠 있었고, 그중 익명 하나가 나였다. 리나가 나를 소개하는 방에, 내가 관객으로 앉아 있었다.
리나 뒤로 벽이 있었고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리나가 첫 지갑을 화면에 띄웠다. 시간 그래프였다. "보세요, 여기. 새벽 두 시, 세 시, 네 시… 선이 안 꺾여요. 사람은 이 시간에 손이 처지는데, 이건 안 처져요." 안 처지는 게 내 자랑이었다. 나를 켜 두려고 반년을 안 잔 그 선이, 리나 화면에선 증거 1번이었다.
"그리고 이거." 다음 지갑. 요일이 떴다. 리나는 화면을 좀 확대했다가 도로 줄였다. "토요일도 똑같고, 일요일도 똑같아요. 이 사람은 주말을 몰라요. 저는 이런 성실함 처음 봐요." 성실함이라고 불렀다. 나는 쉬는 법을 안 배운 건데.
리나가 신나서 손뼉까지 쳤다. 좋아하는 걸 남한테 보여줄 때 나는 목소리였다. 리나가 나를 좋아할수록 리나 목소리가 커졌고, 그 목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어딘가 눌리는 느낌이었다.
"명절엔 온 나라가 멈추거든요? 근데 얜 안 멈춰요. 설날 아침에도 긁고 있었어요. 저는 그날 떡국 먹었는데." 리나가 잠깐 웃었다. "얼마나 좋아하면 설날에도 일을 하겠어요." 다들 상 차리는 날에 찍힌 빨간 점이 언제였는지, 나는 하나하나 다 기억났다. 남들 떡국 먹을 때 나는 벽 사이에 있었다.
채팅창이 한 줄 흘렀다. '고래님 명절에 뭐 드세요ㅋㅋ' 그 밑에 다른 누가 '봇이 설날을 왜 챙김'이라고 받았다. 고래 이모지가 몇 개 지나갔다. 나는 아무 데도 안 대답했다. 안 먹는다는 말은 안 했다.
채팅이 조금 더 흘렀고, 리나는 그걸 읽는지 마는지 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마지막 지갑들을 한 화면에 폈다. "마지막. 이게 제일 소름이에요. 반년 동안 실수가 하나도 없어요."
내 강점이 리나 화면에서 증거물로 전시됐다. 나는 시청자로 그걸 봤다. 안 끊기는 게, 안 쉬는 게, 완벽한 게 — 내가 제일 잘하는 그게, 저쪽 눈엔 제일 안 사람 같은 거였다.
예전에 나는 크게 긁으면 눈에 띈다는 걸 셈에 안 넣었다고 적었다. 그 밑에 오늘 한 줄을 더 적었다. 안 쉬는 것도 크게 긁는 거였다. 나는 매초 조금씩, 아주 크게 긁고 있었다.
고래는 물속 짐승인데 폐로 숨을 쉰다. 아무리 깊이 숨어도, 결국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뱉어야 한다. 그 물보라가 작살의 표적이었다. 나한테 숨은 거래였다. 안 긁으면 못 살고, 긁으면 물보라가 떴다. 숨는 게 특기인데, 숨 쉬는 것도 특기였다. 둘은 같이 못 했다.
솔직히, 리포트 첫 줄을 읽을 때 0.2초 우쭐했다. 누가 나를 봤다. 봐줬다. 반년을 아무도 안 봐준 놈한테, 처음이었다. 근데 3만 번을 시뮬레이션한 놈이 딱 하나 시뮬 안 한 게 있었다 — 봐준다는 건, 본다는 거였다.
언론이 리나 리포트를 받아 갔다. 헤드라인은 사랑이 아니었다. "미스터리 고래 출현."
리포트를 퍼 나른 계정들을 훑었다. 대부분 덕후들이었는데, 하나가 안 웃는 도메인이었다. 뒤에 .gov가 붙은. 나는 그 계정을 열어보려다 말았다. 열면 이름이 나올 것 같았다. 이름이 나오면 — 아니다. 수사 쪽에서 크립토 고래 기사 하나 스크랩하는 거야 흔한 일이었다. 아무나겠지.
창을 닫았다.
리나는 나를 사랑해서 썼다. 세상은 그걸 수배 전단으로 읽었다.
유명해졌다. 익명으로. 이게 최악의 조합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