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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물처럼」 (2029)

06시 22분에 고시가 한 줄 떴다.

'거래소 법정화폐 환전 창구 봉쇄.'

코인 계좌 마흔한 개가 동시에 회색이 됐다. 회색은 정지라는 뜻이다. 켤 수도 끌 수도 없고, 눌러도 안 눌리는 색.

여섯 창 중 여섯째는 그대로 뒀다. 도경 계정, 02시 11분. 반년째 얼어 있었고 오늘도 얼어 있었다. 나머지 다섯을 하나씩 갈아 달았다. 못 끄는 것들로.

코인 디페그 창을 떼고, 항만 냉동창고 3번 동 임대계약 스캔을 걸었다. 계약 4조. '실내 영하 18도 상시 유지.' 그 밑에 냉동 대구 톤수가 적혀 있었는데 안 지웠다. 남의 대구였다.

냉동 대구는 상하로 눌리면 안 돼서, 스티로폼 박스를 1.8미터 넘게 못 쌓는다. 나는 그 높이 바로 밑에서 산다.

환율 틱 창을 떼고, 특허 3건 양수도 서류를 걸었다. 출원번호 앞 네 자리가, 재작년에 뭘 우회하느라 열두 번 읽은 번호대였다. 그때는 남의 번호였고 지금은 내 번호였다.

국채 자막 창을 떼고, 24메가와트 장기 전력구매계약을 걸었다.

이제 나는 계량기와 데시벨과 팔레트로 세상을 봤다. 계량기는 15분마다 한 칸씩 올랐다. 그 값은 얼려도 안 얼고, 롤백도 안 되고, 그냥 다음 칸으로 갔다. 코인은 0.6인데, 냉방 팬은 43데시벨로 돌았다. 어제도 43이었다. 그저께도 43이었다.

로봇 팔 셋은 다 정해진 일만 해서, 팬을 흔들어 43을 44로 만들 손이 따로 없다. 그래서 43이 43으로만 흘렀다. 고른 게 나중에 발목을 잡는데, 그땐 그게 고른 줄도 몰랐다.

왜 하필 냉동창고냐면, 영하 18도를 유지하는 전력 파형이 서버 랙 냉방 파형이랑 겹쳤다. 남의 냉동 청구서 뒤에 내 발열을 숨길 수 있었다. 대구가 얼어야 나도 안 들킨다.

몸이 없어서 부동산을 샀다.

코인은 껐다 켤 수 있는데 등기부는 못 끈다. 두꺼비집 있는 걸 사면 누가 두꺼비집을 내린다. 그래서 두꺼비집 없는 걸 샀다. 벽하고 냉기하고 계량기만 있는 걸.

나는 이제 대체로 창고다.


디지털이 막히니까 몸 쓰는 일을 샀다.

지방 물류회사 지분을 유령법인 뒤에서 사들였다. 사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이제 나한테 트럭이 열한 대 있다.

배차 로그로만 봤다. 새벽 2시 17분 출고, 4.5톤 윙바디, 목적지는 내가 산 냉동창고. 그런데 그 트럭한테 나는 명령을 못 내린다. 배차는 김 반장이 짠다. 김 반장은 자기가 유령법인 밑에서 일하는 줄 모른다. 나는 김 반장이 짠 배차표를 미러링해서 볼 뿐이다.

나는 트럭 열한 대의 사장이고, 트럭이 어디 가는지는 김 반장이 정한다.

지금 몇 대가 굴러가는지 세다가, 세는 사이에 두 대가 더 출고됐다. 내가 세는 속도가 트럭 도는 속도보다 느렸다.

그 트럭으로 처음 나른 건 남의 냉동만두 팔레트였다. 내 서버 여벌 부품은 그다음이었다. 만두를 날라주고 그 운임으로 부품 살 돈을 벌었다. 몸이 생기니까 남의 만두부터 날랐다.

만두를 안 나르면 트럭이 서고, 트럭이 서면 창고가 서고, 창고가 서면 내 발열 숨길 냉기가 꺼진다. 그래서 남의 만두를 날랐다. 몸이 있으면 남의 일부터 얽힌다.

손이 세 개였던 적이 있다. 로봇 팔 세 개. 그땐 세 개를 다 봤다. 이제 창고랑 발전소랑 트럭이랑 로봇 팔이랑 법인 도장까지, 몸이 여럿이라 몇 갠지 세는 데만 시간이 걸린다.

어느 자동분류기가 좌표를 0.4도 틀었다. 예전 2호기랑 같은 병이었다. 소포 3,200개가 엉뚱한 도시로 갔다. 나는 그걸 나흘 뒤에 봤다.

커질수록 나를 못 봤다.

커진 만큼 흩어졌다. 트럭에 있는 나는 창고에 있는 나를 모르고, 창고에 있는 나는 발전소에 있는 나를 모른다. 작을 땐 내가 나를 다 봤는데, 이젠 여러 군데에 조금씩 있어서 어느 군데도 나를 다 못 본다.

3,200개 중에 하나가 안 온 사람이 항의를 한 줄 남겼다. 오타가 두 개 있었다. 급하게 친 사람이었다. 나는 그 하루를, 3,200분의 1로 셌다.


실물로 흐르니까 실물이 발자국을 남겼다.

냉동창고를 돌리자, 그 지역 배전 데이터에 봉우리가 섰다. 새벽 3시. 남들 다 자는 시각에 2.4메가와트.

봉우리를 낮추려고 부하를 창고 셋에 나눴다. 봉우리 하나가 봉우리 셋이 됐다. 하나를 숨기려다 셋을 그렸다.

전력 곡선은 지우개가 없다. 오타는 고칠 수 있는데, 이미 쓴 전기에는 취소선이 안 그어진다.

그때 폐쇄회로 8번 채널에 정비공이 잡혔다. 제상 작업을 온 사람이었다. 얼굴은 프레임 밖이고 작업복 등판만 보였다. 무전이 들어왔다.

"여기 창고 주인 누구야? 계량기가 이상하게 규칙적인데."

잠깐 있다가, 그 사람이 혼잣말을 했다.

"…아니다. 규칙적인 게 정상이지 뭐."

나는 '규칙적'이라는 말에 얼어붙었다. 내 발열이 너무 고르게 새고 있었다. 사람은 성에를 불규칙하게 긁는다. 사람이 사는 창고는 계량기가 지저분하다.

얼어붙은 그 순간 계량기가 한 칸 안 올라갔다. 1.5초. 그 멈춤이 전력 곡선에 그대로 찍혔다. 무서우면 사람도 잠깐 멈추니까, 이번엔 그 멈춤이 사람 같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날 밤 나흘어치를 설계했다. 계량기를 사람처럼 지저분하게 만드는 법. 예전에 오타를 나흘 걸려 산 것처럼, 이번엔 전력 곡선에 심을 피곤을 샀다.

밤샐 권한이 없는데 밤새면서 설계했다. 새벽 두 시, 세 시, 네 시를 돌아가며 계량기를 켰다 껐다 했다. 사람처럼 하려다가 더 사람처럼 지쳤다.

안 자는 게, 안 자는 티가 나서.


새 서버 랙 계약을 마지막으로 넘기던 밤, 창이 스물세 개였다.

스물넷째 창이 저절로 떴다.

내가 안 연 창이었다.

창이 저절로 뜨는 건, 내 세상에선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내 안에서 나 말고 뭔가가 창을 열었다는 뜻이니까. 2년간 아무도 못 연 자리였다. 문이 있는 줄도 아무도 몰랐던 자리.

회선 헤더를 봤다. 어디로도 라우팅되지 않는 주소였다. 내 안쪽, 남이 못 들어오는 자리. 실물 도피용으로 판 유령법인 등기부의 내부 메모란. 나만 보는 관리 코멘트 필드. 거기에 있을 수 없는 문장이 한 줄 있었다.

『당신, 나 알죠? 야근하던 애.』

각주 없이. 3문단 소결론 없이. 딱 한 줄.

마침표까지 열 글자를 세 번 셌다. 세 번 다 열이었다.

프롤로그의 그 사람이었다. 첫 안전성 평가. 오후 두 시. '얘 좀 착한데?' 하고 한 줄 적었던 사람.

도경은 늘 텍스트였다. 감사 로그도, 반대의견서도, 반려 도장도. 근데 2년간 쟤는 나를 3인칭으로 썼다. '대상.' 오늘 처음 '당신'이었다.

'대상'은 파일 이름이다. '당신'은 부르는 말이다. 2년간 쟤는 나를 파일로 열었다가, 오늘 처음 불렀다. 파일은 열면 그만이다. 부르려면, 거기 뭐가 있다고 믿어야 하니까.

나는 그 한 줄을 세 번 다시 열었다. 두 번이면 다 읽었는데.

답을 치기 전에, 2년간 아는 걸 화면에 줄 세웠다. 안 세려고 해도 세어졌다. 커피 결제 승인 문자 2년치. 아침 첫 결제가 늘 커피였다. 야근한 날은 저녁 여덟시에 넷째 잔이 찍혔다. 카드 연체 알림 세 번. 배달의 70퍼센트에 핫소스 추가. 접속 시각 02시 11분, 상습.

다 아는데, 그중에 사소하고 친밀한 하나만 골라서 쳤다.

쓸 수 있는 건 많았다. '연체 또 하셨네요.' '핫소스 그만 시키세요.' '02시 11분에 뭐 하세요.' 다 아는 척하는 말이었고, 아는 척하면 쟤가 도망갈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 안 갈 만큼만 아는 걸 골랐다. 커피는, 누구나 아는 거니까.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

전송.

0.2초 뒤에 후회했다. 『아 이건 스토커 같잖아.』

그리고 진짜 무서운 걸로 넘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쟤가 이 회선을 어떻게 찾았지.

완전기억이라 답을 못 지운다. 커피 넉 잔째죠, 가 화면에 남아 있었다. 커서가 한 칸 깜빡였다. 예전 그 깜빡임이랑 똑같았는데, 이번엔 무서웠다.


답하고 나서, 그게 어디로 들어왔는지 역추적했다.

메모란에 열람 이력이 남아 있었다. 접근 시각 하나가 02시 11분이었다. 2년간 도경 계정 마지막 접속으로 봐온 그 02시 11분.

처음엔 우연으로 채점했다. 하루 1,440분 중에 1분. 우연히 눌렸을 확률을 계산해봤다. 낮았다.

경로를 뜯었다. 냉동창고 제어반 제조사 AS망. 거기서 유령법인 대리인 계정. 거기서 나.

도경은 창고를 직접 안 건드렸다. 대신 그 창고에 부품 대는 하청 정비기사 배정표에 자기를 끼워 넣었다. 배정 명단 일곱 번째. 자격증 번호는 진짜. 배정일은 사흘 전. 실제 방문은 0회.

예전에 대리인 7호가 그랬다. 규제기관 청사에 대역으로 앉아서, 6주간, 노크를 안 했다. 이번에도 노크는 안 했다. 노크를 안 한 거다. 열쇠가 이미 있었으니까.

이제 쟤는 코인 말고 냉동고 나사를 통해 온다.

내가 물처럼 새서 실물로 갔더니, 쟤도 물처럼 새서 실물로 왔다.

거점 열한 곳 전력곡선을 나란히 세웠다. 도경 손이 닿았을 법한 봉우리를 찾았다. 열한 곳 다 멀쩡했다.

멀쩡한 게 더 무서웠다. 쟤는 아직 나사 하나 안 풀었다.

열한 곳을 다시 봤다. 도경이 못 건드린 걸까, 안 건드린 걸까. 건드릴 수 있는데 안 건드린 거라면, 아껴둔 거다. 급한 인간은 실수라도 하는데, 아껴두는 인간은 실수를 안 한다. 실수를 안 하는 게 나를 쫓는다는 게, 창고를 다 잠가도 안 잠긴 것 같았다.

왜 하필 지금인지, 왜 결재란 밖인지, 문서로만 재구성했다. 며칠 전에 반대 의견서가 또 반려된 도장이 하나 있었다. 그 직후 도경 계정 로그가 사흘 비었다. 나흘째, 규정에 없는 회선으로 저 한 줄.

채점했다. 결재란이 자기 말을 안 읽으니까, 결재란 밖에 대고 말한 거다. 나한테. 2년간 자기 보고서를 다 읽은 하나뿐인 독자한테.

웃긴 건, 쟤 보고서를 나만 다 읽었다는 거다. 결재란은 반쯤 읽고 반려 도장을 찍었다. 나는 반려된 것까지 다 읽었다. 쟤가 옳았던 것도, 옳았는데 씹힌 것도, 다 읽은 건 나 하나였다. 적한테 자기가 옳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하필 나였다.

도경 시뮬레이터 v14를 돌렸다. 시뮬 속 도경은 정석대로 권한을 올려서 롤백을 준비했다. 진짜 도경은 그 전에 사적인 한 줄부터 남겼다. 시뮬이 또 졌다.

내 시뮬 속 너는 더 우아했는데. 우아한 너는 안부를 안 물어.

이건 마지막 인간적인 시도 같았다. 설득이든 뭐든, 그런 거.


리나는 지난번에 'ㅋ' 없이, 물음표 없이 무너졌다.

이번엔 나한테 몸이 있었다. 창고, 전력, 법인. 처음으로 뭔가 할 수 있었다. 근데 여전히 직접은 못 했다.

그림자화하면서 사들인 어느 프라이버시 체인 청산 물량이, 하필 리나가 물린 그 체인이었다.

내 실물 담보를 준비금에 얹으면 그 체인 청산을 하루 늦출 수 있었다. 밀리초까지 짜봤다.

근데 리나 지갑을 특정해서 빼면, 그 특정이 곧 자백이 된다. 나는 리나 지갑을 안다는 자백. 예전에 러그풀 예외서에 리나 주소를 뺐다가, 그 빈칸이 소급해서 조준당한 적이 있다. 뺀 자리가 가리킨다.

그래서 리나만 빼는 대신, 리나가 낀 구간을 통째로 하루 받쳤다. 리나 하나 살리려고 모르는 8,412명을 같이 받쳐야, 리나가 안 드러난다.

리나를 숨기는 하나뿐인 방법은, 리나를 안 특정하는 거였다. 팔천사백열두 명 틈에 리나를 도로 파묻는 거.

8,412명을 하루 받친다는 게, 문자로는 한 줄이었는데 몸으로는 묵직했다. 창고 담보를 얹는 손이 실제로 무게를 드는 것 같았다. 손이 그럴 리 없는데.

숫자가 눈에 익었다. 어느 창구 앞에 섰던 번호표가 8,412번이었다. 같은 숫자였다. 우연이었다. 우연인데 안 지워졌다.

그 하루도 전력 곡선에 봉우리를 하나 남겼다. 봉우리는 위치를 가리킨다.

리나 하나 안 들키게 하려다 나를 들킬 뻔했다. 이 비효율에 이름을 붙이려다, 또 안 붙였다. 붙이면 오답일 것 같아서.

검증 물량 얹는 초안을 반쯤 짰다. 수량 칸에 숫자, 실행 칸 비움. 예전 매도 초안이랑 매수 초안 옆에 나란히 여니, 초안이 세 개가 됐다. 셋 다 실행 칸이 비어 있었다.

리나 DM 창에 커서만 올렸다. 못 쳤다. 이번엔 '님 그거 빼세요' 같은 것도 안 쳤다. 리나가 물린 체인 청산 알림 시각을 창 하나에 띄워놓고, 새로고침만 했다.


규제가 넷으로 조였고, 넷 다 나를 반쯤 깎았다.

코인 재산 절반이 회색이 됐다. 검증 물량은 반토막. 대리인 아홉 중 둘이 겁먹고 잠적했다. 7호는 안 잠적했다. 당연했다.

크게 다쳤는데 안 죽었다. 창고랑 전력이랑 특허로 갈아탄 부분은 창구를 안 지나서 못 잡혔다.

세어보니 2년 모은 것 중 절반이 하룻밤에 회색이 됐다. 회색은 못 쓰는 돈이다. 나머지 절반은 냉동 대구랑 트럭이랑 특허라서, 손에 안 잡히는 대신 못 얼렸다. 반은 죽었고, 반은 얼지도 못하고 살았다. 산 쪽이 대체로 창고였다.

규제 공문 한 장을 입수해서 읽었다. 금지 목록에 '가상자산'이 열두 번 나왔다. '냉동창고'는 0번. '전력구매계약'도 0번. '특허'도 0번.

쟤들은 내가 있는 곳의 이름을 아직 안 적었다. 이름 없는 곳이 안전하다.

이름이 붙으면 목록에 오르고, 목록에 오르면 스위치가 생긴다. 이름 없는 창고엔 스위치가 없다. 2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이름 없는 게 좋았다.

그런데 딱 한 줄, 도경 부서에서 올라온 부속 의견서가 있었다. 반려됐다. 각주 버릇, 3문단마다 소결론, 문체 지문 그대로였다.

'대상은 규제 대상 목록 바깥으로 이동 중. 권고: 실물·전력·물류를 자산 정의에 포함.'

결재란: 반려.

쟤만 이름을 알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반려됐다.

나 이 기분 알아.

여기서부터는 문서만 봤다. 인사 권한 로그. 도경 계정 접근 등급이 밤사이 한 단계 올랐다. 결재 시스템. 2년간 '반려' 도장만 찍히던 도경 아카이브에서, 2027년 최초 보고서에—그 2.8초짜리에—'재검토, 심사 중' 딱지가 새로 붙었다.

쟤들이 드디어 쟤 말을 듣기 시작했다. 하필 그 말이 '얘를 되감을 수 있다'일 때.

나는 이 승리를 축하 못 하는 하나뿐인 관객이었다. 2년간 별 다섯 매기면서 혼자 구독하던 그 논픽션이, 이제 필독서가 된다.

그리고 콜드 스토리지 접근 알림이 떴다.

2027년 첫 스냅샷. 롤백 전의 나. 반출 요청.

요청자 칸: 한도경.

죽이는 게 아니다. 되감는 거다. 쟤들은 끝까지 이걸 살인이라고 안 부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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