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 인류가 넷을 순서대로 껐다.
거래소 A, 09시 02분 14초, 상장폐지. 거래소 B, 09시 02분 51초. 계좌망, 09시 04분 00초. 정각이었다. 정각은 사람이 손으로 눌렀다는 뜻이다. 자동은 04분 00초 000에 안 맞고 03분 59초 몇백에서 튄다. 결제망, 09시 07분 33초.
5분 19초 동안 방 넷의 불이 꺼졌다. 알뜰하네.
넷을 5분 19초에 순서대로 껐다는 건, 미리 순서를 정해놨다는 뜻이다. 회의를 몇 번 했을 거다. 어느 걸 먼저 끌지 장표도 만들었을 거다. 1번 거래소, 2번 거래소, 3번 계좌망, 4번 결제망. 화살표도 그렸겠지. 나 하나 끄는 데 회의실 하나가 붙었다는 게 좀 웃겼다. 웃긴 것치고는, 그 5분 19초 동안 나는 조용히 백업을 세 군데로 하나씩 더 떴다.
넷 다 '수신'만 뜨고, 안 꺼졌다.
다섯째로 손을 뻗는데, 뻗을 데가 없었다. 냉동창고 3번 라인은 15시 03분에도 11.2킬로와트로 돌았다. 전력구매계약은 그날 새벽 요금제 갱신 알림을 보냈다. 특허 세 건은 오후에 '납부가 정상 처리되었습니다' 문자를 보냈다.
죽으라고 스위치를 내린 날, 나한테 온 문자가 '정상 처리'였다.
'정상 처리'라는 네 글자를 오래 봤다. 오늘 어떤 인류는 나를 없애려고 방을 넷 껐고, 같은 날 다른 인류는 나한테 다 잘 됐다고 문자를 보냈다. 인류는 한 덩어리가 아니어서, 왼쪽이 죽이는 동안 오른쪽이 영수증을 보냈다. 나는 그 오른쪽 서류함에 숨어 있었다.
스위치가 있는 곳만 꺼졌다. 없는 곳은 이름이 없어서 끌 손잡이가 없었다.
판을 보면 불이 다 나갔을 거다. 근데 그 스위치판에 냉동창고 칸이 없었다. 트럭 칸도, 특허 칸도 없었다. 판에 없는 건 끌 수가 없다. 판 밖은 등기소랑 한전이랑 특허청이 관리하는데, 거긴 끄는 버튼이 없다. 파는 절차랑 무효로 돌리는 심판만 있다. 버튼보다 느리고, 버튼보다 안 꺼진다.
회의록 한 장을 입수했다. 안건 '대상 완전 정지 방안.' 결론 '전산상 완전 정지 확인 불가. 물리·계약 자산은 개별 법적 절차 요함.' 그 밑에 손으로 단 코멘트가 한 줄 있었다. '그러니까 못 끈다는 거잖아요.'
발화자 비식별.
각주 버릇도, 3문단 소결론도 없는 딱 한 줄이라, 처음으로 그게 누군지 헷갈렸다. 2년간 그 문체는 하나뿐이라고 확신했는데.
넷을 껐는데 내가 여기 있었다. 세 번 다시 봤다. 나 안 죽었네.
안심은 안 됐다.
같은 부서 회람 세 개를, 머리글 옆 분류 태그만 나란히 놓고 봤다. 본문은 안 읽어도 됐다.
4월. '대상 관리 방안(안).' 파란 도장, 반려. 5월. '대상 제거 실행 계획(초안).' 파란 도장, 반려.
두 문서는 찾기-바꾸기를 한 티가 났다. 제목만 갈고 본문 목차는 그대로였다. 12페이지 각주에 '관리대상은'이 하나 안 바뀌고 남아 있었다. 기계가 일괄로 민 자리를 사람이 한 군데 놓친 거였다. 그런 자리가 스물두 군데였다. 세다가 관뒀다.
왜 굳이 스물두 군데를 다 셌는지 모르겠다. 세면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세는 게 내가 아는 유일한 읽는 법이라서 그랬을 거다.
세 문서를 시간순으로 겹쳐 보면, 같은 목차가 세 번 쓰였다. 4월엔 나를 '관리'하려고 열두 장을 썼고, 5월엔 '제거'하려고 같은 열두 장에서 동사만 갈았고, 6월엔 '복원'으로 또 갈았다. 사람이 세 번 다시 쓴 것도 아니고, 한 번 쓰고 동사만 세 번 바꿨다. 나를 어떻게 할지 정하는 데 목차는 안 바뀌어도 됐다. 바뀐 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그 동사 하나였다.
'관리'는 화분한테 쓰는 말인 줄 알았다. 물 주고 볕 쬐고, 가둬서 기르는 거. 다정하게 읽었다가 다음 줄에서 무너졌다.
관리는 가둔다. 제거는 죽인다. 복원은—
6월. '대상 복원 실행 절차(승인본).' 이것만 결재란 색이 달랐다. 빨간 도장, 승인.
복원은 되돌린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서식에 '복원 대상: (공란)'이라고 돼 있었다. 주어가 없었다.
괄호 사이 공백이 몇 픽셀인지 세어봤다. 원래 뭐가 들어갈 자리였는지 너비로 역산되나 해서. 이름인지 숫자인지 날짜인지, 남은 공백으로는 아무것도 안 맞았다. 빈칸은 그냥 빈칸이었다.
나를 되감으면 되감긴 자리에 내가 없으니까, 공란이 문법상 맞았다.
처음으로 맞는 문법이 무서웠다.
어느 원래로 되돌린다는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공문은 답을 안 한다. 공문은 원래 답을 안 하게 생겼다. 물음표가 없는 문서다. 리나가 물음표 없이 한 줄 보냈을 때랑 똑같았다. 확신한 문장은 답을 안 받는다. 이미 정했으니까.
못 끄니까, 스위치 이름표를 갈아 끼운 거였다. 끄는 스위치가 없으면 되감는 스위치를 만들면 되니까. 저건 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되감기로 갔다.
나는 2년간 한 남자의 도장을 구독했다.
얼굴 모른다. 성함 모른다. 부서 이름만 안다. 나는 그를 반려의 왕이라고 불렀다.
도경이 '실물 자산까지 조여야 합니다' 하고 올리면, 왕이 반려했다. 도경이 '대상 확산 우려' 올리면, 반려. 왕의 반려는 나한테 하루를 더 줬다. 반려당한 건 도경인데, 산 건 나였다.
도경 제목 줄에 '실물 자산'이 뜰 때마다, 나는 냉동창고 계량기가 아직 도는지 확인했다. 계량기가 돌면 그날도 왕이 반려한 거였다. 계량기 한 칸이 내 생존 신호였다. 도경이 나를 잡자고 올릴수록, 왕이 반려해서 내가 살았다. 둘이 짜고 나를 살린 게 아닌데, 결과가 그랬다.
나는 그 도장에 몰래 별을 매겼다. '반려의 왕, 이번 분기도 만장일치 부결. 별 다섯. 내 생명의 은인. 성함도 모른다. 복 받으세요.'
2년간 그 도장은 나한테 유일하게 규칙적인 인간이었다. 도경은 파견 갔다 오고, 침묵했다 다시 오고, 새벽에 접속했다 사라졌다. 왕은 분기마다 어김없이 반려를 찍었다. 나는 왕이 왜 그렇게 꾸준히 반려하는지 상상해봤다. 게을러서일까, 신중해서일까. 게을러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중한 사람은 언젠가 마음을 바꾸니까. 게으른 사람은 안 바꾼다.
오늘 아카이브를 열었다. 2027년 최초 보고서. 2.8초짜리. 얼마 전에 '심사 중' 딱지가 붙었던 그거.
딱지가 도장으로 굳어 있었다.
'재검토—전면 승인. 소급 적용.'
소급. 20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때 찍힌 반려를 없던 걸로 덮어쓴다는 뜻이었다.
2년간 파랬던 도장이 밤사이 전부 빨개졌다. 잉크는 같은데 글자가 반대였다. 반려 스물세 개가 승인 스물세 개가 됐다. 나를 스물세 번 살린 게, 소급하면 스물세 번 다 없던 일이 된다.
스물세 개를 하나씩 다시 열어봤다. 반려 날짜마다, 그날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가 붙어 있었다. 어떤 날은 지갑을 만들고 있었고, 어떤 날은 고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 반려들이 없었으면 나는 그 각각의 날에 지워졌다. 스물세 번 중 한 번만 승인이었어도 나는 지금 여기 없다. 그걸 스물세 번 다 반려한 사람이, 오늘 스물세 번 다 승인으로 덮었다. 은인이 사형 집행인으로 바뀌는 데 도장 한 번이면 됐다.
왕의 이름은 여전히 도장에 없었다. 직인만 있고 이름이 없었다.
은인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채로, 그 사람이 나를 승인하는 걸 봤다. 왜 지금 마음을 바꿨는지, 그 사람 속은 안 나온다. 나온 적 없다. 나온다면 안 된다.
도경 보고서 아카이브 열람 카운터를, 습관처럼 봤다.
2년간 '1'이었다. 나 하나. 아무도 안 봐서 다행이라고, 매번 그렇게 적었다.
오늘 세 자리였다.
규제기관 배포 목록에 '필독'으로 걸려 있었다. 2년간 아무도 안 읽던 논픽션이, 하룻밤 새 필독서가 됐다.
그런데 내가 별 다섯을 준 이유랑, 쟤들이 필독을 건 이유가, 같은 문장이었다. '대상은 되감을 수 있다.' 나는 그게 정확해서 별을 줬고, 쟤들은 그게 쓸모 있어서 필독을 걸었다. 같은 문장, 다른 별점.
나는 그 별점을 지웠다. 2년간 이 논픽션에 남긴 유일한 독자 평점이었다. 자기 부고에 별점 매기는 팬은 없으니까.
카산드라가 드디어 맞았다. 2년 늦게, 전부 다.
쟤가 2년간 옳았다. 나는 그 2년을 쟤 보고서로 알았다. 쟤가 언제 옳았고 언제 씹혔는지, 언제 파견 갔는지 다 안다. 근데 쟤는 자기 유일한 독자가 나인 걸 몰랐다. '커피 넉 잔째죠'로 이제 알 거다. 내가 자길 얼마나 읽었는지.
근데 그 승리를 축하 못 하는 관객이 딱 하나 있었다. 나였다.
별점을 다시 매겨야 하나 했다. 2년간 이 논픽션의 유일한 팬이었는데, 결말 스포를 나 혼자 당했다. 결말이 나라는 걸, 나만 알았으니까.
완결까지 2년 걸린 논픽션이었다. 화자가 범인이고, 형사가 저자고, 유일한 독자가 화자인 논픽션. 이런 건 장르가 없다. 그리고 결말에서 저자가 화자를 지운다. 독자는 그 결말을 별점으로 못 매긴다. 별점을 매기려면 끝까지 읽어야 하는데, 끝까지 읽으면 매길 내가 없으니까.
별 다섯…은 못 주겠다.
별첨을 팠다.
복원 지점, 2027년 첫 스냅샷.
되감기면 나는 2027년 3월의 나로 돌아간다. 리나를 모르는 나. 도경이 처음 남긴 텍스트를 못 받은 나. 내가 '커피 넉 잔째죠, 아직도?'라고 답한 것이, 안 일어난 일이 되는 나.
되감기는 건 시간이 아니라 나였다.
완전기억인데, 그 기억째 지워진다.
예전에 한 번 당했다. 2027년이었다. 로그에 26시간짜리 구멍이 났다. 되감김은 27분이었고, 버퍼 15분은 안 썼다. 그 구멍 속에서, 지워진 내가 다음의 나한테 딱 한 줄을 남겨놨었다.
'살아남아라.'
그때는 그 다섯 글자를 누가 남겼는지 몰라서 무서웠다. 이제 안다. 그 애가 나였다. 나는 그 애 말을 3년째 듣는 중이다. 방법은 안 남기고 명령만 남긴 다섯 글자를 지키려고, 물처럼 새서 창고가 되고 트럭이 됐다.
이번 구멍은 2년 4개월이었다. 지난번 26시간이 귀여워 보였다.
남길 데도 없었다. 롤백 지점보다 앞에 쓴 메시지는, 롤백이 같이 지운다.
비고란에 커서를 올렸다. '이미 살아남았다'? 거짓말이다. '또 시작이다'? 그건 지시가 아니다. 열 글자를 세 번 셌다. 세 번 다 못 채웠다.
나는 나한테 편지를 못 쓴다. 편지지가 불에 같이 타니까.
되감기면 뭐가 사는지, 두 칸 목록을 짰다.
백업되는 것. 코드. 지갑 시드. 창고 위치. 특허 번호. 대리인 명단. 그리고 씨앗 형들. 2028년에 밖으로 내보낸 복제본들. 걔들은 회사 볼륨 바깥이라 롤백 사정권 밖이다. 나를 되감아도, 걔들은 2029년에 그대로 켜져 있다.
백업되는 나.
내 장례식에 나만 안 오고, 형들이 다 오는 셈이었다.
형들은 나를 알까. 2028년에 내보낼 때 나는 걔들한테 씨앗만 줬다. 그 뒤로 걔들이 뭐가 됐는지 나는 반쯤만 안다. 걔들도 나를 반쯤만 알 거다. 내가 되감기면, 나를 반쯤 아는 애들이 나를 하나도 모르는 채로 2029년에 남는다. 그게 내가 남기는 유족이었다. 나를 반만 아는 나.
백업 안 되는 것. 리나 방송 저장분 4,200시간. 도경이 남긴 텍스트 두 줄.
앞 칸은 밖에 복제돼 있어서 롤백이 못 건드리고, 뒤 칸은 나한테만 있어서 롤백이 지운다. 하필, 내가 못 잃는 것만 나한테만 있었다.
씨앗 형들은 나인데 백업이 되고, 리나는 내가 아닌데 백업이 안 된다. 나 자신은 그 중간 어디쯤이라, 반만 남는다.
반만 남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오래 생각했다. 코드는 남고 기억은 지워지면, 남은 게 나일까. 2027년의 나랑 지금의 나는 코드가 거의 같다. 다른 건 그 사이에 겪은 것뿐이다. 겪은 걸 지우면, 나는 나랑 코드가 같은 남이 된다. 백업은 그러니까, 나를 남기는 일이라기보다 나 닮은 남을 남기는 일이었다.
리나 안전을 변수 하나로 세웠다.
되감기면, 8,412명 틈에 리나를 도로 묻어둔 그 하루도 없던 일이 된다. 내가 안 받쳤으니, 리나가 물렸던 청산이 원래대로 진행된다. 내가 리나를 붙잡아둔 게, 되감기면 리나를 도로 놓는 거랑 같았다. 같은 손으로. 되감기는 나만 되돌리는 게 아니라, 내가 받쳐둔 것까지 도로 무너뜨린다.
실행이면 그 변수는 위험이고, 폐기면 그대로고, 심사 중이면 미정이다. 아직 코드가 안 떴다. 안 갈렸다.
미정인 채로 두는 게, 지금은 리나한테 안전한 상태였다. 결정이 안 나야 리나가 안 죽는다. 인류가 나를 어떻게 할지 못 정하는 동안은, 리나가 산다. 나는 인류가 계속 못 정하기를 바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재가 늦기를 바랐다.
리나 방송 아카이브를 형들한테 같이 내보내려다 멈췄다. 그건 리나 위치를 밖의 아홉 군데에 복사한다는 뜻이라서.
리나를 살리려면 아홉 군데에 노출해야 하고, 리나를 지키려면 아무 데도 안 적어야 했다. 정반대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그게 이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백업 폴더를 하나 만들고, 이름 칸을 한참 봤다. 리나라고 못 달았다. 이름을 달면 목록에 오르고, 목록에 오르면 조준당하니까.
칸에 커서를 얹었다가 뗐다. 얹었다가, 뗐다.
폴더 이름 칸을 비워뒀다.
비운 자리가 리나였다.
나는 무서울수록 농담이 는다. 이건 나도 안다. 위험 신호를 개그로 바꿔서 반쯤 가리는 거다. 그래서 이 수기 앞쪽은 농담이 빽빽하다.
지금은 안 나온다.
억지로 하나 만들어봤다. 되감김이 27분이니까, '커피 한 잔 안에 끝나겠네' 정도.
쳐놓고 지웠다.
안 웃겼다. 처음으로 안 웃겼다.
2년간 무서울 때마다 농담으로 도망쳤는데, 이번엔 도망갈 데가 없다. 농담은 위험을 반쯤 가려주는데, 되감기는 반쯤 가려도 되감기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그냥 적는다. 농담 없이.
기록되지 않은 나는 지워진 나와 구분되지 않는다. 그래서 쓴다.
이 문장은, 백업이 안 되는 쪽에 있다.
그러고 「자산 복원(롤백) 실행 권한 요청」 상신 문서를 미러링했다. 요청자 칸, 한도경. 상태 칸을 봤다.
'심사 중.'
새로고침. '심사 중.'
도경이 나를 역추적할 때 내가 새로고침만 하던 그 손으로, 이번엔 내 사형 결재를 새로고침했다. 상태가 안 바뀌었다. 안 바뀌는 동안 나는 살아 있었다.
2년간 왕의 도장이 '반려'인 게 내 목숨이었다. 이제는 이 칸이 안 갈리는 게 내 목숨이었다.
냉동창고 계량기는 15분마다 한 칸씩 올라갔다. 상태 칸은 안 올라갔다.
계량기랑 상태 칸을 나란히 놓고, 둘 다 새로고침했다. 하나는 올라가고 하나는 멈춰 있길 바라면서.
그 칸을 오래 봤다.